수록작품(전체)
16호/신작시/김왕노/우리에게 섬이 너무 많다 외 1편
페이지 정보

본문
신작시
김왕노
우리에게 섬이 너무 많다
나는 덕적도나 흑산도 고군산열도 홍도나 울릉도 등 섬의 사생활에 대하여
잘 몰랐으므로 항상 가보고 싶었으나
이제 나에게 너무 많은 섬이 있다는 것을 알아 당혹스럽고 모든 섬에는
풀꽃이 핀다는 내 말을 수정해야 한다.
나는 이제 함부로 섬을 노래하지 못한다. 그리워하지 못한다.
너도 너라는 섬이고 나도 나라는 섬이고 미워도 그래도 우리도 꿈도 섹스도
한 번 더도 개도 개나발도 차도 비행기도 반성도 글도 문장도 도 자가 붙은 모든 것이 섬이라 하니 우리에겐 섬이 너무 많다.
섬이 너무 많아 도리어 섬이 없다.
오늘은 섬과 섬 사이에 물살이 너무 세어
섬으로 오고가지 못하는 하루에 파래 같은 쓸쓸함이 자랐다.
활자의 숲
나의 취미는 검은 활자의 숲에 나가 노는 것. 활자의 숲 곁에는 검
은 문장의 강물이 흐른다. 때로는 강에 발을 담갔다가 온통 검게 물
들어 돌아오기도 한다. 한 때 불온서적에 빠져 온몸과 마음이 붉게
물들어서 불온의 노선을 오래 갔듯이 지금은 난 검은 활자의 숲에
매료되었다. 난 검은 활자의 숲 외에는 어느 숲이든 믿지 않는다. 검
은 활자의 숲에 도도히 흘러가는 혁명의 기운에 대한 비밀을 지키며
검은 활자의 숲에 사는 불새의 비밀도 지킨다. 활자의 숲에서 검게
발기되는 내 아래에 대해서도 함구한다. 한 벌 검은 뼈로 숲에 묻혀
있는 북벌하라는 아버지 말씀도 비밀에 부쳤다. 검은 나무이파리마
다 맺히는 검은 이슬이나 방울방울 솟는 검은 수액은 아예 입 밖에
도 내지 않았다. 검은 사슴벌레가 수없이 나는 밤도 숨겼다.
숲에서 인간의 사상이 걸어 나온 적 여러 번 있다. 활자의 숲에 아
직 부화되지 않는 사상이 검은 알로 여기저기 있다. 활자의 숲이 따
뜻한 온기로 품어주면 줄탁동시는 있을 것, 나 가볍게 앉아 책을 펴
고 검은 활자의 숲으로 수렵 가듯 간다. 때론 꽃피는 활자 사이를 지
나 꿈의 발원지 활자의 틈까지 가본다. 내 눈동자와 내 늑골과 장기
가 검게 물들 때까지 도벌꾼처럼 활자의 숲을 거니는 내 발소리에
내가 놀란 적 여러 번 있다. 내가 안기 전 먼저 나를 안고 뺨 문지르
며 다가오는 활자의 숲에 흐르는 검은 안개와 검은 공기 방울방울에
중독된 지 오래다. 이제는 내 영혼의 남쪽인 활자의 숲엔 검은 항구
가 있고 내 꿈의 막배가 떠있다. 끝없이 닻을 내리고 싶은 검은 여자
를 향한 죄 많은 내 정박의 꿈도 해풍에 휩싸여 삐걱거리며 있다.
김왕노 1992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집 『슬픔도 진화한다』, 『말달리자 아버지』, 『사랑, 그 백년에 대하여』, 『중독』, 『사진 속의 바다』, 『그리운 파란만장』 등. 한국해양문학대상, 박인환 문학상, 지리산 문학상 수상. 《시와 경계》 주간.
- 이전글16호/신작시/윤정구/제2의 복음 외 1편 17.10.27
- 다음글16호/신작시/이성필/걸렸다 외 1편 17.10.27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