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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호/신작시/윤병주/대관령의 봄, 不立文字*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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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윤병주
대관령의 봄, 不立文字*
대관령 아래 방금 피어난 구름이 봄의 둥치를
휘감으며 낮은 마을 행방을 살핀다
겨우내 메말랐던 저작나무 목피가 반지르르
물기가 스며들고
사막 같던 산골마을 안부들이 조금씩 깨어나기 시작한다
새들의 잊혀졌던 오솔길이 오류보다 부드럽게 깨어나고
지난 겨울 산맥을 바람의 무게를 가늠해 보며
누군가의 발길들이 푸른 상처로 되살아난다
물길의 이동이 시작된 것이다
나무 안의 수액들 어둠의 내부가 봉창 깨지듯 울리고
산 아래 금기에 빠진 빗장들이
젖기 시작한 안부 속으로 조금씩 풀려 나온다
낮은 회상을 넘어 봄의 입구를 기웃거리던
큼큼한 겨울의 아랫도리가
구름을 동동구르며 한낮의 첩자들처럼 문틈을 뚫는
아, 그러나 아직은 금단의 기운을 몸에 둘리고
욕망을 꿔서는 안 될
비 내리는 고개마루 집 한 켠
자작나무 둠치 속 메말랐던 계절을
다시금 푸른 이동을 피워 올리고 있다
*불립문자, 진리 안에 문자는 자유롭다.
풋사과를 먹는 저녁
지상의 날짜들을 잘못 짚고 떨어진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서둘러 잎을 떨군 나무들의 일정 때문일 것이다
기온을 잘못 읽은 어떤 충동들이
제 몸 안의 자각없는 고행을 바라겠는가
고행의 날을 단맛으로 숙성되고 싶지 않았을까
그러나 지금은 풋내 나는 불온한 계절을 건너가고 있는 저녁
태양의 궤도를 착각한 사과를 먹고 있다
나는 가끔 단맛을 채우지 못하고 빛을 투과해
명중할 수 없는 빛의 자각을 채우지 못한 것들이
궁금해지는 저녁이 있다
나무와 햇살과 바람이 단맛을 채우며 뒤척이던 밤을
시큼한 맛이 고이는 궤도의 시간으로 걸아가보고 싶기도 했다
양분을 놓칠 수 없는 안간힘을 다했던 꼭지를 터
붙잡았던 힘을 열매는 수 차례 들어가 보기도 했을 터
허나, 떨어진 것들의 궁핍한 맛들은
어느 계절의 바람에 단맛이 말소되었던
경계 지점일까
사과 껍질을 벗기면 고스란히 들러날 것 같은
빛이, 빗나간 각도의 맛이
시큼한 저녁 지불이 끝난 맛을 별빛 속에
끌어들인다
윤병주 2014년《 시와 정신》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바람의 상처를 당기다』.
수원문학상 신인상 수상. 강원작가회의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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