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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호/서평/정미소/다정한 폐허여, 그대를 안고 내가 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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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호/서평/정미소/다정한 폐허여, 그대를 안고 내가 웁니다
정미소
다정한 폐허여, 그대를 안고 내가 웁니다
―정석교 시집 『곡비哭婢』를 읽고
‘곡비哭婢’는 남의 슬픔을 대신하여 울어주는 사람을 가리킨다. 사료史料에 따르면 고려시대부터 국장을 치를 때 곡비가 등장하여, 조선조에 와서는 주요 대신들의 예를 갖추는 장례식에도 곡비哭婢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곡비哭婢는 장례행렬의 앞에서 홀로 저승길을 떠나는 망자의 맺힌 한을 달래며, 편안하게 저승길로 드시라고 위로를 하는 사람이다. 정석교 시인의 시집 『곡비哭婢』의 첫 장을 열며, 마지막장에 실린 ‘검은 전사’까지 단숨에 읽었다. 시집의 중추를 이루는 근간이 1960년대부터 1980년대, 들불처럼 번졌던 ‘참여시와 민중시’가 떠올라서 또박또박 읽었다. 시인의 눈은 사회구조상 소외되는 비정규직과 하층민, 일당노무자,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의 억울한 비닐봉투 2장 절도죄, 장애를 지닌 자녀의 부모가 겪는 슬픔에 닿아있다. 그는 이 시대의 곡비哭婢가 되어 울음이 순장된 거리에서, 눈 멀고 귀 먼 약속의 배반에 독 오른 민중의 한 사람이며 아픈 사람을 어루만지며 울기로 작정한 시인이다.
뱃구레 텅 빈 허기 조등처럼 내걸린 가로등 지나 골목 끝 가난한 이름의 다정한 폐허를 찾아가요 거친 하루 악다구니한 기억 편집하면 웅숭그린 눈물만 흐르지요 미라처럼 버석거리는 담요 안으로 육신이 동반하는 추위부터 햇빛의 관계가 그립다지요 탄력 있는 아침을 기대고 싶은 희망도 잠시 거적문을 힐난하는 음습한 안개가 감시자처럼 도열해있고요 발가벗긴 골목 안으로 슴슴한 소문만 몰고 다니는 방언이 두려워 몸이 굳어버리죠
부자와 가난은 뫼비우스 띠 같아 난청의 골목에서 움트는 소문 어떠한지 모르지요 새 봄날 기다리는 재개발단지 다정한 폐허에서 가난한 이름 김 씨 문패를 지켜낼 수 있을까요 훗날 누군가 살았던 흔적이 달갑지 않은 기억으로 남지 않을까 해요 귀가시간이 그리운 거리에서 익사체로 떠다니는 정체불명의 재개발이라는 단어 가난을 사찰하듯 송곳처럼 세워지는 타워크레인 저기, 저 지나가던 바람이 ‘공약空約’한 말씀 한 구절 꿰고만 있네요
‘결사생존’머리띠 묶은 골목 끝 김 씨 문패에 맞선 타워크레인 슴슴한 소문만 부추기고 농락당하는 공약空約만 가득하군요 행복한 시간은 선거전단지 뿌려지던 시간 뿐 송곳처럼 솟은 재개발단지 다정한 폐허를 봉합하는 내일은 기약할 수 없군요 가난한 김씨의 유품처럼 낡은 문패들 다 폐문으로 찢겨져요 가난한 거리에 흩뿌려진 공약空約같은 공약空約 패거리로 몰려다니는 바람이 다정한 폐허에 풀어놓은 치사량 이를 수 있는 약속, 공약空約
-「 다정한 폐허」 전문
시인은 재개발계획정비구역으로 지정된 뱃구레 텅 빈 골목을 찾아간다. 가난한 이름의 폐허가 웅숭그린 슬픔과 번지르르한 치사량의 공약空約이 자취를 감춘 채 탄력 있는 아침을 돌려달라고 ‘결사생존’ 머리띠 묶은 도시 하층민의 슬픔을 슬퍼한다. 한 때 희망을 주었던 대문 곁 다정한 문패가 삶의 터전이 되어, 국경일이면 태극기를 달고 봄이면 마음 놓고 채송화 씨앗을 뿌렸을 것이다. 낮은 지붕들끼리 인정을 나누며 따뜻하게 살던 골목 끝의 폐허가 타워크레인의 위력으로 미라처럼 등 떠밀려 추위를 무릅쓴다. 부자와 가난은 뫼비우스의 띠 같아서 어떻게 풀어도 결국 부자는 부자, 가난은 가난이라는 계층 간의 갈등을 시인은 절망한다. 귀가시간이 그리운 거리에서 익사체로 떠다니는 정체불명의 재개발이라는 단어. 가난을 사찰하듯 달갑지 않은 소문이 농락하듯 선거전단지는 뿌려지고 가난한 유품처럼 함부로 떨어져나가는 문패를 봉합하는 시인의 손이 울컥, 화를 치민다. 지켜지지 않은 화려한 공약한 줄 꿰고 있다.
고속질주의 길 어깨에서
다리 잘린 개를 위해 자리 뜨지 못한
어미개의 눈을 보았다
짐승도 눈물로 사랑을 덮는 구나
때론 사람이면서도 사람이 아닌
동물보다 못나기를 부추기는 일들이 있다
장애라는 말, 말처럼 말문을 막아서는
절해고도의 벽이 서있다
삵의 발톱같이 매서운 혓바닥을 세워
비틀어진 칡과 등나무의 매듭처럼
처음부터 애원 같은 건 발원도 못하는
너무 간절해서 메마르게 터지는 울음
장애를 키운다는 그 이유
어머니, 어머니가 어머니에게
매몰찬 세상을 향해 그녀는 꿇었다
차별 받는 마음끼리 부딪쳐야 어디가 아픈지 아는
누군가를 위해 내 미는 손, 잡은 손
따스하다, 제 살 옮겨 나누는 온기를 위해
교문이 설 때까지 꿇을 어머니의 무릎
-「누가 무릎을 꿇어야 되는가」 전문
서울 강서구 특수학교 설립 토론장에서 무릎을 꿇은 장애인 부모의 이야기다. 지역사회에 장애인 시설이 들어오면 집값이 떨어진다는 지역 이기주의가 ‘결사반대’로 시 행정부에 맞불을 놓던 일이 생생하다. 시인은 장애는 죄가 아니며 다만 불편할 따름이고, 누구나 장애에 노출되어 있다고 항변한다. 정상적인 네 다리를 움직이며 자유롭게 활보하던 개가 고속 질주하는 자동차의 속도에 눌려 신음하는 곁에서, 눈물로 도움을 호소하는 어미 개를 보고 운다. 때로는 사람이면서 사람이 아닌 동물보다 못한 일들도 있다고 ‘장애’라는 말의 절해고도를 막막해 한다. 너무 간절해서 메마르게 터지는 울음, 장애를 키운다는 그 이유로 왜 그녀가 무릎을 꿇어야 하는지 시인은 이해하지 못한다. 사회적 차별의 벽을 허물고 장애라는 인식을 개선시키고자 정부차원의 다양한 프로젝트가 실시되고 있는 즈음이다. 장애를 보듬어 키우는 부모가 감사해서 우리가 무릎을 꿇어야 할 일 아닌가?
1987년 1월14일 서울대생 박종철 불법 체포되다.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 분실에서 구타와 물고문으로 숨지다. 공안당국 “조사관이 책상을 탁치니 ‘억’ 하고…” 조직적 은폐 시도에도 진상이 폭로되다. ‘고 박종철군 범국민추도회’가 전국에서 열리다. 추도회가 열린 8개 도시에서 798명이 경찰에 연행되다. 그해 6월 9일 연세대학교 정문 앞 대 정부시위를 벌이던 이한열. 경찰이 조준 사격한 최루탄에 맞아 쓰러지다.1987, 그해 6월 민주항쟁의 불꽃이 피었다.
눈먼 귀먼 마음마저 닫은 서른 해
울었다, 눈물이 스크린에 가득했다
“영화‘1987’안보세요?”
“그런 영화도 있나? 시간나면 그것도 나중에 보고”**
“저는 의과대학 대학원생이었습니다.”***
비어있는 그릇일수록 소리가 크다
망발의 목소리가 사위에 가득했다
─「1987, 그해 6월」 전문
시인은 2년 전 겨울에 개봉된 장준환 감독의 영화 ‘1987’을 보고 스크린이 넘치도록 울었다. 일상생활을 꾸리느라 눈멀고 귀멀고, 마음마저 닫아 까맣게 잊었던 세월 저 편의 사건이 스크린에 펼쳐지며 서른 해 전의 민주항쟁이 심장을 뛰게 했다. 영화는 723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당시 은폐 조작된 남영동 대공분실의 고 박종철군 물고문사건을 재조명했다. 작품 속의 대화는 홍준표 대표와 안철수 대표의 답변이며, 시인은 한 젊은이의 억울하고 안타까운 죽음 앞에 진실규명을 위하여 발 벗고 나서야 할 사회 지도층이 무관심하게 툭 던지는 망발을 못 견딘다. 필자의 기억에서 ‘1987’은 유신정권 독재타도의 시위를 너머, 광주사태로 희생된 망월동 5.18국립묘지의 억울한 죽음을 너머, 힘 없는 민중들이 거리로 몰려나와 최루탄가스에 저항하며 민주화의 꽃을 피운 해이다. 그 때, 산동네 단칸방에서 어린 아가의 옹알이를 들으며 ‘혼란한 세상에 태어나게 해서 미안해.’ 눈과 귀를 마비시켰던 시위대의 뉴스를 밥처럼 먹었다. 연일 시위대의 행렬이 목숨 걸고 피운 민주화의 물결에 편승하는 마음이 내내 미안하다. 그들의 희생으로 독재는 사라졌고 우리나라는 세계 10대 강대국이 되었다.
정석교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매미는 허물을 버리고 견고한 울음 하나를 얻는다. 허물 벗은 울음은 거짓 울음이 아니다. 공허를 채우는 울음 지켜만 보았다. 사랑하는 이들의 눈물을 읽으며, 푸른 창공을 향한 삼보일배의 울음. 가슴에 와 닿기까지 나, 두려워한 적 있었던가’라고 진술한다. 전 세계가 개방화되어 물질문명이 풍족한 지금도 산업화시대의 전유물처럼 계층 간 갈등은 심각하며, 새로운 위기들이 몰려온다. 실업대란과 저 출산 고령화, 인권을 져버린 갑 질, 빈익빈 부익부, 지역이기주의, 산업화의 민낯을 드러내는 쓰레기 섬의 등장과 다문화가족의 갈등구조는 그들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몫이며, 문학의 소임은 소외된 계층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어야 한다. 광속으로 내 달리는 빠름 떠 빠름의 사회에서 시인은 인간 이하의 처우에도 제대로 숨도 못 쉬고 사는 도시 하층민의 어쩔 수 없는 삶을 져버리지 않고 함께 아파한다. 시인의 울음에 온기가 느껴진다.
*정미소 2011년 《문학과 창작》으로 등단. 시집 『구상나무 광배』, 『벼락의 꼬리』. 리토피아 문학상 수상. 《아라문학》 부주간. 막비시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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