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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호/아라세계/신연수/해방 공간의 인천문학사 공백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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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호/아라세계/신연수/해방 공간의 인천문학사 공백 문제
신연수
해방 공간의 인천문학사 공백 문제
1. 서론
우리의 신문학은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가? 이런 질문에 대해서는 누구든 답변이 쉽지 않을 것이다. 다만 1968년 ‘신문학 6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있었는데 이는 1908년 육당 최남선이 《소년》지 창간호에 「해에게서 소년에게」라는 시를 발표한 것을 기점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후 연구자에 따라 다양한 학설을 제기, 현재 한 가지로 통일된 것은 없다. 인천문학의 경우도 이와 다르지 않아 언제를 출발점으로 보아야 하느냐하는 문제는 현재까지 특별히 정해진 것은 없다. 다만 몇 사람이 기술한 것을 보면 그 대부분이 1920년대를 기점으로 보는데 이는 1927년 2월 창간된 《습작시대》가 현재 확인되는 인천 최초의 종합문예지이기 때문이다.
인천은 1883년 개항과 더불어 급격하게 성장한 도시로, 신문화 신문물이 대부분 이곳으로 유입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신문학의 도입도 어느 곳보다 빨라야 하는데 오히려 다른 곳보다 늦은 편이다.
물론 1927년 이전에도 인천은 각종 계몽운동이나 문화활동이 활발하게 일어났지만 그 자료는 드문 편이다.
1900년대 초 인천 내리교회의 존스 목사는 교인들이 글을 몰라 책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한글을 깨우칠 수 있는 『국문독본』을 만들어 배포하는가 하면 종교잡지인 《신학월보神學月報》를 창간, 수년간 발간하기도 했다. 또 외국상사의 지배인인 장기빈張箕彬(장면 총리의 부친)도 1922년 8월 글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기 위해 『언문초보諺文初步』를 발간했으며, 또 인천성공회가 운영하던 성누가병원 원장 카덴 역시 환자들과의 대화를 위한 영어회화 책을 발간하는 등 인천의 계몽운동 및 도서발간은 일찍부터 시작됐다.
2. 문예지 성격을 띤 종교잡지 《개척》
이 같은 분위기에서 문학과 관련된 첫 결과물은 1920년 2월 15일 창간된 《개척開拓》이라는 잡지의 발간이다. 《개척》은 후에 문교부장관을 지낸 오천석吳天錫이 창간한 것으로, 발행소는 인천부 우각리 12-2 개척사로 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는 인천 내리교회 엡윗청년회懿法靑年會가 낸 것으로, 1900년대 초에 나온 《신학월보》를 잇는 것이다. 하지만 창간호를 보면 시와 수필, 번역소설, 논설 등 10인의 글 25편이 실려 있어 문예잡지라고 볼 수도 있다. 《개척》 창간호에서 밝힌 창간 취지를 보면 다음과 같다.
본지의 목적은 우리 조선사람- 특히 젊은이에게 종교의 의의를 명백히 하는 동시에 종교와 인생과는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을 알려주려는 종교사상보급에 있다
(중략)
둘째로 우리 가슴에서부터 복받쳐 올라오는 예술을 우리 개조문단에 건설하여 고전적이요 전제적이요, 모방적이든 고래의 반도예술을 타파하려 함이다. 예술은 실로 문명의 선조이다. 모든 문명의 발족점은 이 예술에 있다. 예술은 어디까지든지 볼드윈의 말과 같이 자아표현이다. 유희의 예술도 아니요. 흥락興樂의 예술도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편이냐 하면 후자의 경향이 많았다. 이 어찌 개혁의 필요가 긴급치 아니하랴. 이 외에도 여러 가지 방면으로 노력하려하나 지면의 관계로 더 쓰지는 못하나 제씨는 이러한 의미에서 강한 공명이 있을 줄 믿고 다대한 원조를 빌고 그친다.
─《개척》 창간호 1면, 「본지本誌 창간創刊에 대하여」
《개척》은 기독교사상 보급이라는 종교적 목적을 가장 먼저 앞세웠지만 두 번째로 문단 건설의 필요성을 밝히고 있다. 고전적, 전제적, 모방적인 전래의 예술을 타파하고 새로운 문단의 개조를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볼드윈이 말하는 ‘자아표현’이야 말로 우리 예술이 이룩해야 할 개혁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개척》에 수록된 글을 보면 박영섭朴榮燮의 「반도예술의 각성覺醒을 촉促함」이라는 논설을 비롯하여 죽계竹溪의 한창수감寒窓隨感, 오천석의 고리키 평전인 「고리키에 대하여」, 이동원李東園의 시 「생일 아침」, 백야白野의 시 「그 울음 울고 싶어」, 동산의 시 「슬픔의 노래」와 오천원(吳天園, 오천석의 필명)이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을 번역한 소설 「우정友情」, 탄은주인灘隱舟人의 「개척을 사모하는 노래」, 흰뫼의 「창조創造에서 개척開拓에게」, 춘원 이광수와 추호 전영택의 창간 축하 글 등이다.
《개척》에 대해서는 1966년 4월, 국회도서관이 펴낸 『한국 신문·잡지 총목록 1883-1945』의 기록이 유일했는데 2012년 창간호가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그동안의 의문이 일부 해소되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까지 창간호 이외 다른 호수는 물론 기록조차 변변하게 남아 있는 것이 없어 창간호 이후 속간 여부조차 알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인천의 경우 1950년 6.25 이전의 잡지나 동인지는 대부분 전쟁으로 거의 멸실됨으로써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이로 인해 초기의 인천문학사는 자료부족으로 공백이 많으며, 설사 일부 남아 있다 하더라도 완전한 것이 드물어 많은 어려움이 뒤따른다.
3. 《습작시대》도 창간호와 3호 외는 실물 없어
이 같은 자료부족은 그 후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 1927년 2월 창간된 《습작시대》의 경우 4호까지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모 신문에 4호가 발간된 사실을 보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습작시대》 역시 창간호와 3호만 각각 한 권씩 남아 있을 뿐 2호와 4호는 현재까지 실물 소장처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인천 최초의 문예지로 알려진 《습작시대》는 인천문학사에서 상당히 중요한 자료인데 4호 이상은 발간되지 않은 것인지조차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총 4호 중에도 2호만이 남아 있어 인천문학사 초기 일부분은 공백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 1937년 10월 창간된 《월미月尾》와 1931년 4월 창간된 《농촌월보農村月報》도 창간호만 알려져 있는데, 《월미》의 경우 몇 호까지 나왔는지 알 수 없다. 또 《농촌월보》도 『한국 신문·잡지 총목록』에 1931년 4월, 인천 농촌월보사에서 발행한 조선농축기술잡지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아직까지 그 실물이 공개되지 않고 있다.
이 같은 상황은 일제강점기 시절뿐만 아니라 해방공간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다. 해방 이후 최초의 문학동인지는 1945년 11월 인천에서 발간된 《문예탑文藝塔》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 동안은 1946년 1월 서울에서 발행된 『백맥白脈』으로 알려져 있는데, 《문예탑文藝塔》이 그보다 2개월 앞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주장은 한국문학사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문예탑》의 실물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기록에 따르면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된 날 김차영金次榮 시인을 비롯하여 소설가 송종호宋宗鎬와 신영순申永淳, 시인 윤기홍尹基洪과 평론가 한재성韓載成, 아동문학가 우봉준禹奉俊 등이 인천 창영동에서 「신문화협회」라는 모임을 창립, 같은 해 11월 등사판 문예동인지 《문예탑》을 창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예탑》은 현재 실물이 남아 있지 않아 구체적인 출판사항과 어떤 작품이 실렸는지 등 발간사항이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김차영에 따르면 신문화협회 창립 후 인천에도 「문학가동맹」이라는 좌익계 문화단체가 결성되면서 신문화협회 소속 사람들을 흡수하는 바람에 《문예탑》은 계속 나오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또 김차영과 우봉준은 아동문학지인 《동화세계童話世界》를 펴냈다고 밝혔는데 이 역시 실물이 남아 있지 않아 이름 외에는 알려진 것이 전혀 없다.
4. 7집까지 낸 《시와 산문》 실물 안 보이고 기록도 제각각
그리고 다음해인 1946년 7월 민족문학적인 이론과 좌익에 대한 대결의식을 지닌 「시와 산문 동인회」가 결성된다. 뒷날 인천시장을 지내는 표양문表良文을 비롯 함효영咸孝英, 최태호崔台鎬, 한상억韓相億, 김차영, 강춘길姜春吉, 최병욱崔炳旭, 이진송李秦松 등이 참여한 이 동인회는 곧 같은 이름의 동인지 《시와 산문》 창간호를 낸 후 1950년까지 모두 7집을 발간한다.
문단이 형성되는 전초로서 1946년 7월 민족문학의 수립과 연구를 목적으로 하는 「시와 산문 동인회」가 발족을 보게 된 것이 인천 최초의 문학써클이 생겨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당시 『시와 산문』 동인이었던 현 예총藝總 경기도지부장이신 시인 한상억韓相億씨의 증언에 의하면 해방 후 인천에서 최초로 묶여진 동인인데다 최초로 발간된 동인지였던 까닭에 《시와 산문》 동인지가 출판되자마자 불티가 나듯이 팔려나갔다고 한다. 은행이나 각 기관으로 들고 다니면 그것이 적지 않은 부수임에도 불구하고 한 부도 남기지 않고 매진됐다는 것이다.
하여튼 해방 후의 첫 동인지는 이렇게 해서 제7집까지 부정기로 간행을 보다가 6.25동란으로 하여 동인들이 이산하는 바람에 자동적으로 중단이 된 셈이라고 한다.
- 1973.5 《해안海岸》 제1집. 44~45면. 김양수의 「인천문단이면사」 (1)
김양수에 따르면 《시와 산문》은 큰 인기를 끌어 많은 책이 팔려 나간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현재 《시와 산문》은 단 한 권도 발견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창간일, 발간호수 등에 대한 기록도 연구자에 따라 각각 달라 보는 이들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김양수는 1946년 7월 동인회가 결성되었다고 밝힌 반면 《시와 산문》 창간일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해방 후 첫 동인지로 6.25까지 7집이 나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같은 해 나온 『인천시사』에서는 1946년 3월 《시와 산문》이 창간, 7집까지 나왔으며 7집은 크기가 46배판으로 서울 영창서관을 통해 전국으로 배포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1946년 1월부터 한상억, 김차영 등이 문학동인회 결성준비에 착수하여 표양문, 최태호, 함효영 등과 제휴하게 되었고, 뒤이어 강춘길, 이진송 등이 가입하였으며 또한 동인회 명칭을 시와 산문 동인회로 결정하고 그해 3월부터 동인지 《시와 산문》을 발간하기 시작했다. 시와 산문 동인회는 해방 후 인천에서는 최초로 문학동인지를 발간한 문학동인회로서 이보다 뒤에 조직된 좌익계의 문학동맹이나 또 역시 같은 좌익계의 「전진동인회前進同人會」와는 근본적으로 상반되는 이론과 대결의식을 가지고 활동하였다.
「시와 산문 동인회」의 회원 중에는 어느 정도 사회적 지위도 있는 회원이 많았기 때문에 운영면에 큰 애로가 없는 상황 속에서 발전시킬 수 있었다. 매월 1회씩 또는 필요할 때는 수시로 모여서 작품낭독과 합평회를 갖는 한편 작품의 수준과 사상성 등을 토론하고 검토한 다음 동인지를 발간하였다.
동인지 《시와 산문》은 7집을 마지막으로 더 계속되지 못했는데, 7집은 46배판으로 인쇄되어 총판매점인 서울 영창서관을 통하여 전국 주요 도시에 반포되었다.
- 1973.9 『인천시사』 하권. 598~599면
그리고 26년 후인 1999년에 나온 한상렬의 『인천문학사』에는 또 다른 내용이 나온다.
지금은 정확한 기록을 찾을 수가 없으나 『시와 산문』이 1946년 7월 창간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는 6.25까지 겨우 2집을 내고 중단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 또한 명확한 것은 아니다. (중략)
1946년 1월부터 한상억, 김차영 등이 문학동인지 결성 준비에 착수하여 표양문, 최태호, 함효영 등과 제휴하게 되었고, 뒤이어 강춘길, 이태송, 최병욱 등이 가입하여 이른바 「시와 산문 동인회」가 결성되었고 그해 3월부터 동인지를 펴내기 시작하였다. 이보다 앞서 《문예탑》이 있었지만, 그동안은 이 동인지가 잘 알려지지 않아 이 《시와 산문》이 본격적인 인천의 최초 문학동인지로 알려져 왔다.
이 동인지는 7집까지 발행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46배판으로 인쇄하여 총판매점인 영창서관을 통해 전국으로 인기리에 배포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명확한 것은 아니며 실물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 동인지에 발표되었던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시) 오직 진정뿐, 한창연(경기도병사구사령부 병무과장, 육군 대위)
(시) 만종, 고영성
(시) 나도 가리라, 이창덕(경기도병사구사령부)
(시) 설야, 최창섭
(시) 불의에는 굴치 않는다, 최병구
(수상) 승리의, 백창순(경기도병사구사령부 참과장)
(논설) 지인난, 전성환(경기지구 합동헌병대장)
(수필) 정열, 문현성
(수필) 비 나리는 밤, 박해암
(수필) 욕설, 방인수
(문화인 순방기) 조수일 선생, 고영
(진중여록) 제552부대 종군기
일선에서 보낸 아우의 편지, 최병옥(육군 하사)
(논설) 나의 전쟁관- 전쟁은 죄악인가, 김원홍(해중 교사)
책을 엮으며, 고영
김차영은 1947년 한상억, 최태호, 표양문 등과 함께 《시와 산문》이란 동인지를 발간하였다. 이 동인지는 이후 6년 동안 발행하였으니, 당시의 인천문단에서는 가장 장수한 동인지가 되는 편이다.
─『인천문학사』 60~63면, 한상렬, 1999.7, 도서출판 서해.
하지만 이 기록은 여러가지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앞부분에서는 《시와 산문》이 1946년 7월 창간, 6,25까지 2집을 내고 중단했다고 한 반면에 뒤에서는 1946년 3월부터 동인지를 펴내기 시작해 7집까지 발행했다고 서로 다른 기술을 했다. 그리고 뒷부분의 김차영에 대한 설명에서는 1947년 《시와 산문》 동인지를 발간한 이후 6년 동안 발행, 당시 인천에서는 가장 장수한 동인지라고 밝히고 있는데 이 역시 잘못된 것이다. 또 《시와 산문》에 발표된 작품내용도 밝히고 있는데, 실물이 확인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실물이 아니면 알 수 없는 발표작품 내용이 실린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발표된 작품내용은 《시와 산문》이 아닌 다른 책에 실린 것을 저자가 착오로 잘못 기재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실물이 없기는 하지만 여러 가지 증언이나 기록에 비춰 볼 때 해방공간 인천에서 《문예탑》과 《시와 산문》이 발간되었다는 것은 확실해 보이며, 이들 두 문학동인지를 발간하는데 주된 역할을 한 인물이 강화출신의 시인 김차영인 것도 분명한 사실인 것 같다.
김차영은 1922년 강화도에서 비교적 부유한 집안의 둘째로 출생했다, 하지만 편모슬하에서 외롭게 자라 일찍부터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1942년 일본 동경의 리쓰메이칸대학立命館大學에서 수학한 후 인천에서 사무원 생활을 하며 《조광》과 《신세대》 등의 잡지에 시를 발표하는가 하면 임인수林仁洙 등과 회람지 등을 내다가 옥고를 치루기도 했다. 그리고 해방 후에는 인천의 <대중일보> 등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문예탑》, 《시와 산문》 등을 만들었다. 하지만 6.25 후 직장을 서울로 옮기면서 인천을 떠났으며, 1969년 시집 『상아환상』, 1984년 『부릅 뜬 태풍의 눈』, 1989년 『얼굴 그 얼굴들의 여울』 등 모두 3권의 시집을 펴내고 1997년 충남 조치원에서 별세했다.
김차영은 1991년 《학산문학》 창간시 가진 좌담에서 해방 당시를 소상하게 밝히기도 했다.
광복되던 날 밤에 저는 쇠뿔고개(牛角洞, 현재 창영동) 조금 못 미쳐 영화학교에서 철로 변으로 가는 쪽에 있던 송종호의 집으로 갔어요. … 아마 그날에는 8~9명 정도 모였을 텐데, 거기서 동인지 발간이 발기되었고, 약 일주일 뒤에 지금 기독교병원 아래에 허름한 사무실을 마련하고 ‘신문화협회’라는 걸 결성했습니다. 그러면서 거기서 약 한 달간이나 고생한 끝에 골필로 써가지고 《문예탑》, 《동화세계》 등을 낸 것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모두 미쳤던 거지요.
*신연수 시인. 근대서지학회 회원. 법률신문사 이사 겸 총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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