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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호/초점에 선 시인/백인덕/서정의 깊이와 인식의 확장을 위하여-정치산 시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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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호/초점에 선 시인/백인덕/서정의 깊이와 인식의 확장을 위하여-정치산 시의 미래
백인덕
서정의 깊이와 인식의 확장을 위하여
-정치산 시의 미래
1.
정의定義는 길잡이일 뿐, 세세한 지표가 될 수 없다. 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엘리엇의 유명한 말, “모든 시적 정의는 오류의 역사다” 는 ‘오류’를 부정하지 않는다. 시적 정의(이게 맞는 번역인지 회의적이다) 는 어떤 본질을 온전히 내포한 것이 아니고, 정의하는 이, 즉 시인에 따라 변형되기 마련이라는 열린 결론이다. 그러면 문제는 ‘역사’가 남는데, 시는 결국 장르로써, 표현의 수단으로써 자기 제한, 양식상 의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바로 역사의 내용이다. 아침에 본 꽃이 저녁에도 그대로일리 만무하지만, 언어는 ‘꽃’만을 대상화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아침에’가 중요하고 ‘저녁에’가 단순한 시간의 변화가 아니라 대상인 ‘꽃’의 변화까지 함축한 것으로 읽어야 한다. 이 ‘함축성’이 시를 일상의 언어 사용에서 특정한 영역으로 바꾸는 어쩌면 최후의 보루라 할 수 있다. 사람도 같고, 표현하겠다는 의지 도 같고, 언어마저 같은데 어떻게 다른 서정과 인식의 경지를 펼칠 수 있는가, 그것은 함축의 농도와 결합하고 해체하는 시어들의 양태에서 유추될 뿐이다. 원래 그런 작품이 아니라, 그렇게 해석된 작품 이 있을 뿐이다.
정치산 시인의 첫 시집, 『바람난 치악산』의 해설을 쓰고, 만 삼 년 만에 다시 본격적인 평을 하게 되었다. 첫 시집에서 보여주었던 경쾌한 어휘 사용과 거침없는 상상력의 전개, 또는 페이소스라 해야 할 직관의 능력 등이 이제는 인식의 확장과 서정의 깊이를 겨냥하고 있음을 찾아 볼 수 있어 반가웠다.
그의 노래는 오래전 개치나루 섬강 끝자락에서 담담하게 흐르기 시작한다. 시인묵객을 부르던 자산의 절벽에서 부정한 관리들이 떠날 때마다 흠벅지
다.
표지석만 남아 떠날 곳 없는 산그림자도 노랫소리에 흔들렸다가 깊어진다. 담쟁이풀 절벽을 기어오르고 강변 담장에 능소화꽃이 경계를 없애며 긴다.
―「 부 론 富論, 부론浮論―자산 욕바위」 전문
이 작품을 앞세워 볼멘소리를 좀 해야겠다. 필자는 시인이 원주 에 거처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사전 정보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부론’이 원주시 부론면이라는 지명이 모티브가 되었을 것이라고 자 연스럽게 유추할 수 있다. 이렇게 부론면이라는 지역을 알게 되면, 태기산에서 발원해서 여주 근처에서 남한강과 합수하는 섬강蟾江과 개치開峙나루가 생뚱하지 않게 이해된다. 물론 인용 작품의 주 무대 인 ‘자산紫山’(정확하게는 ‘자산 절벽’)도 상상할 수 있게 된다. 시가 물론 현실을 그대로 모사하거나 재현하려는 의도에서 멀찍이 떨어진 장 르이기는 하지만 최소한의 정보를 제공하는 것도 시인의 도리 중 하 나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흔히 ‘앞동산’보다 ‘남산’이 시적으로 무슨 더 큰 효과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남산을 쓸려면 그것이 서울 남산인지, 경주 남산인지, 강원도 인제군 남면의 남산인지는 분간이 되도록 해줘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선경후사先景後事’의 본뜻일 것이다.
시인은 인용한 작품을 비롯해서 이번 신작 특집을 통해 ‘두두물 물頭頭物物’의 경지에 닿으려는 지향을 드러낸다. 두두물물과 지향이 서로 화합하는 용어는 아니지만, 사물과 상황을 ‘되어진 그대로 두 고 흐름과 변화의 맥만 짚어보겠다’는 것은 시적 지향이 아니라면 달 리 표현할 바를 모르겠다. 물론, ‘두두물물’에는 불교, 폭넓게는 동양 철학 일반의 심오한 뜻이 여러 갈래로 해석될 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이 세상의 일도 그 수가 한이 없고, 만물도 그 수가 한이 없음”이라 는 기본 뜻만 지칭한다.
인용 작품의 ‘그의 노래’는 응당 ‘시인묵객’과 호응해 시라 읽어야 하고, 그것은 당연히 ‘발견’으로 번역되어야 한다. 자산 절벽 앞에서, 절벽은 곧 상징으로서의 거울이다. 다만 웅대하고 표면이 거칠다는 것 때문에 자의식 이전, 즉 무의식을 반추反芻하는 상징으로 사용된 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가 자연에 가장 근접한다는 것은 의식이 아 니라 본능에 충실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본능은 의식에 의해 그 표 면에 다른 이름이 새겨진다. ‘욕바위’란 한때의 공적비가 경멸의 대 상으로 변한 것으로 보이는데, 여기서 사람의 일이란 다 아침나절 안개와 같고 자연의 일은 저녁놀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안개처럼 다 뒤덮고 점령한 듯 보여도 자연은 스스로 물드는 시공을 통해 끝내 발현發顯한다. “담쟁이풀 절벽을 기어오르고 강변 담장에 능소화꽃 이 경계를 없애며 간다”가 보이는 것, 즉 인위人爲가 지워지고 드러 나는 자연의 유구悠久를 포착하는 눈, 이것이 정치산 시인이 첫 시집 과는 다른 어조와 호흡을 통해 표출하는 서정의 또 다른 면이다. 여 기서 ‘부론’은 ‘부유함에 관한富論’도 되고 ‘떠다님, 혹은 뿌리 없음에 관한浮f論’ 담론도 된다. 둘은 다르게 보이지만 같은 것일 수도 있다.
문을 밀고 들어서면 비에 젖지 않는 강물에 물결이 인다.
강물은 기억을 머금고 비에 얻어맞으면서 모두를 품는다.
돌던 바람 귓바퀴를 때리고 그녀가 있던 자리에 그가 있다.
반쯤 닫힌 문 사이로 기억을 훔치는 바람의 온기가 차갑다.
바람이 불고 펄럭이는 옷자락이 휘릭휘리릭 다리를 감는다.
금방 쏟아질 듯한 그의 눈 속에 숨겨둔 기억들이 일렁인다.
입술 끝에서 한숨이 튀어나오고 쏟아놓은 기억들이 운다.
시간을 적시고 기억을 적시고 흘러가 커다란 산을 적신다.
―「바람의 기억」 전문
제목의 위상과 기능에 대한 이해 여부를 떠니 대부분의 독자들 은 일단 제목에 주목하게 된다. 필자의 경우에도 1950~60년대 시인 들의 작품에서 ‘무제’라는 제목, 그것도 한 시집에서 서너 개씩 무제 를 발견하면 참 막막했다. 인용 작품에도 의례적으로 제목에 눈이 간다. ‘바람의 기억’이니 ‘바람’과 ‘기억’이라는 두 어휘에 집중하게 될 뿐 ‘~의’라는 소유격은 문제시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관행적 주목은 문제가 많다. 사실, 이 소유격에 주목하면 이 작품은 바람이 갖고 있 는 기억의 내용이거나 그 변화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 즉 기억이 바 람이 소유한 한 자질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작품은 오히려 바람과 기억의 관계(계기, 호응, 전환 등)가 주 내용이 된다. 말이 좀 복잡하지 만 소유격이나 관형형(‘찬란한 슬픔’)으로 손쉽게 다른 어법적 상황을 지시할 수 있다는 믿음은 이제 확실하게 지양해야 한다.
이 작품에서 중심적인 어휘는 바람이나 기억이 아니라 ‘문’이어야 한다. “문을 밀고 들어서면 비에 젖지 않는 강물에 물결이 인다”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문은 다른 차원에서 흐르던(“비에 젖지 않는”) 강물에 바람을 가져 온다(“물결이 인다”). 이렇게 각개였던 두 차원(바람과 강물) 이 섞이면서 “강물은 기억을 머금고 비에 얻어맞으면서 모두를 품는 다.” 바람과 강물이 혼융하면서 여러 기억의 양상들이 그녀에게서 그에게 흐른다. 하지만 이마저도 완전하게 소통하는 것은 아니다. ‘반쯤 닫힌 문(반쯤 열린 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람’은 일종의 존재의 전환, 혹은 존재적 결단을 함의하는데 그 결과는 “시간을 적시 고 기억을 적시고 흘러가 산을 적”시게 되기 때문이다.
앞에 잠깐 언급했지만, 감정이입도 아니고 확연하게 나뉘어 선 자세에서의 관찰도 아니고 ‘바람’을 불러 ‘문’을 만들고 그 문을 다시 무화無化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시적 인식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렇 지 않은가.
2.
필자는 가끔 깊은 의문에 빠진다. 분명 어떤 깊은 인식, 특히 뼈 저린 반성을 동반한 인식에 도달했다고 믿었는데, 그 인식의 내용과 가치는 어느새 휘발해버리고 표면 위에서 다시 꼭두각시 춤을 추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머릿속 기억도 눈앞 자연도 다 허상임을 알지만 천지세간의 변화를 만나면 만날 때마다 아름다 움과 슬픔과 긍지와 허망에 다시 빠져들곤 한다.
정치산 시인이 특집에서 보여 준 두 편의 작품, 「초하初夏」와 「 상 강 무렵」은 바로 이런 깊은 의문에서 비롯한다고 보인다.
뜨거웠던 날은 차갑게 식고 차가웠던 날은 뜨겁게 달아올랐지.
열아홉에는 가슴이 두근거렸고 스무 살엔 가슴이 불처럼 탔어.
험악한 손들에 핸드백이 쏟아지고 터지는 최루에 눈물 흘렸지.
그렇게 감추면서 안개 속에 숨기도 하고 헤쳐 나가기도 했지.
별들이 뜰 때는 부산거리고 별이 질 때는 소문도 없이 사라졌어. 절기를 건너는 사이 몇몇은 떠오르고 몇몇은 묻혀서 사라졌네.
바람에 절하는 억새의 몸피 얼어가는 겨울 강 속으로 스며들고,
그리하여 긴 겨울의 꿈은 꿈틀거리다 꿈틀거리다가 눈을 뜨지.
―「상강 무렵」 전문
일반적으로 ‘~무렵’은 시간이나 정황상 차이 두 개가 맞물리는 시기를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인용 작품 ‘상강 무렵’은 두 개의 특징 을 갖는데 하나는 ‘초하’라는 작품과의 변별성이다. 초하는 24절기가 아니고 단지 여름의 기세를 구분하는 관례적 용어일 뿐이다. 따라서 초하는 맹하孟夏, 성하盛夏 등과 관련할 뿐 뒤따르는 계절과는 무관 하다. 작품에서도 “권커니 잣거니 주고받는 늦바람에 이 산 저 산 뻐 꾹새 운다/샘물보다 깊은 한숨소리에 화들짝 놀란 감꽃이 후드득 진 다.”(「초하」)는 그 순간의 형상에 주목할 뿐이다.
반면에 ‘상강 무렵’은 상강이 24절기 중에서 가을의 끝을 알리고 이는 곧바로 겨울이 목도했음을 고지告知한다는 데서 일종의 변화를 내포하고 있다. 게다가 ‘~무렵’을 통해 겹침과 기울어짐의 뉘앙스마 저 짙게 배어들게 한다. 작품은 “뜨거웠던 날은 차갑게 식고 차가웠 던 날은 뜨겁게 달아올랐지”라는 일반 명제로 시작된다. 이것은 세 월의 변화, 즉 지나간 시간에 대한 축약적 표현이기에 그 자체로 모 순이 되지 않는다. 상강 무렵을 술회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시 간은 또한 “감추면서 안개 속에 숨기도 하고 헤쳐 나가기도 했”던 기 억의 일이기도 하고 그 결과는 “절기를 건너는 사이 몇몇은 떠오르 고 몇몇은 묻혀서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다시 ‘상강 무 렵’에 섰음을 깨닫는데, 이제 닥쳐 올 계절에는 “긴 겨울의 꿈은 꿈틀 거리다 꿈틀거리다가 눈을” 뜬다는 것을 안다. ‘겨울의 꿈’이 무엇일 까. 아니 그 ‘꿈’ “꿈틀거리다 꿈틀거리다 눈”을 뜬다는 사실만이 중 요하다. 꿈틀거린다는 것은 살아 있음을, 아니 잠들지조차 않았음을 증명하는 최소한의 표시이기 때문이다.
사랑해 사랑한다구 너만 사랑해 간지러운 말을 예쁘게도 쏟아낸다.
그녀의 코가 길어진다 너만 사랑해 다른 사람은 내 눈에 차지 않아.
입에 발린 간지러운 말에 그녀의 코가 석자나 더 쑤욱쑤욱 자란다.
그녀의 코에 나무가 자라고 애벌레들이 숨어들고 새들이 모여든다.
그녀의 입에서 익은 과일이 떨어지고 달콤한 말이 잼으로 졸여진다.
입에 발린 끈적한 향기에 강물이 흐르고 물고기 떼 튀어 나간다.
억새꽃 은빛 물결로 살랑거리고 부서지는 햇살 강물에 잘랑거린다.
―「코가 긴 그녀」 전문
정치산 시인은 특유의 쾌활함에 자연과 인생의 이면을 깊이 들여 다보고자 하는 열망을 덧대 비로소 시인만의 ‘우화(allegory)’를 만든 다. 피노키오 동화에 의하면 ’코가 긴 그녀‘는 어지간히 거짓말을 여 러 차례 한 존재인데, 시인은 인용 시의 2연, “그녀의 코에 나무가 자 라고 애벌레들이 숨어들고 새들이 모여든다./그녀의 입에서 익은 과 일이 떨어지고 달콤한 말이 잼으로 졸여진다./입에 발린 끈적한 향 기에 강물이 흐르고 물고기 떼 튀어 나”가는 현상을 본다. 그게 보 이고, 이렇게 정의正義를 따지지 않고 일단 형상화할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한다. 바로 이 지점이 어쩌면 시인이 앞으로 힘써 밀고 나갈 새 로운 시의 형상의 맹아萌芽일 것이다. 좀 더 재밌고 따끔하고 요즘말 로 ’웃픈‘ 세계가 열렸으면 하고 바라본다.
*백인덕 199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끝을 찾아서』, 『한밤의 못질』, 『오래된 약』, 『나
는 내 삶을 사랑하는가』, 『단단斷斷함에 대하여』, 『짐작의 우주』. 저서 『사이버 시대의 시적 상 상력』 등. 본지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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