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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호/신작특선/김영진/십일월 초승달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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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호/신작특선/김영진/십일월 초승달 외 4편
김영진
십일월 초승달
천사들이 베어 문 노란 접시가 초승에 동쪽으로 푹 빠진다.
긴 꼬리 양진이 울음에 눈이 찔려 정사의 능구렁이 떨어진다.
살짝 벌린 혀는 서리 맞아 떨어지는 노란 국화꽃 이파리다.
그래, 검은 허공에 박힌 십일월 초승달 노란 국화 꽃잎이다.
울컥, 쏟아내면 차오르는 당신의 잃어버린 금빛 귀고리다.
당단풍나무의 기억
억울해진 주름살이 궁금해진 당단풍나무와 대화를 한다.
후박해진 성품으로 받아들이는 자세는 아름답게 붉었다.
어머니는 당단풍나무 그늘 아래에서 옛날얘기 해주셨다.
엄마 찾아 삼만 리를 저녁별이 졸고 있을 때까지 했다.
서로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치는 장면에서는 눈물 흘린다.
인연은 바람보다 물 모이는 곳에서 만나는 자연 풍수다.
당단풍나무에 편지 한 장 써 붙이고 풀밭에서 기다린다.
노을 무렵 편지 읽으러 당단풍나무에서 어머니 나오신다.
종소리는 언어다
종소리는 아름답고 슬퍼서 동물들이 종소리를 따라 부르다가 언어가 됐다고 한다. 에밀레종은 쇳물을 끓일 때 어린아이를 함께 넣었다고 한다. 종소리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서라 한다.
가을밤의 별들도 아름답고 구슬픈 단풍에서 나왔다. 반짝이는 것은 수 천 년 전에 울린 종소리가 지금도 날아오고 있기 때문이다. 종소리는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아지는 것이라 한다. 지구를 정복하는 것은 종소리뿐이다.
새들은 종소리가 울리면 하늘로 날아오른다. 다시 지상으로 내려앉는다. 새는 새들을 끌고 허공에 심장의 박동소리를 뿌리고 온다. 종은 함부로 울릴 일이 아니다. 종소리가 귀에서 걸어나온다. 종소리는 언어다.
풀꽃이 흔들릴 때
풀꽃이 흔들리면 산과 바다와 강, 새와 동물, 바람까지도 미소를 지었다. 여름날 오후에 우거진 잡초 사이로 무릎 높이 풀꽃은 고개 내밀어 자세히 쳐다보라 몸을 흔든다. 막내아들 성장판 닫힌 무릎 연골 바라보는 어머니 한숨처럼, 바람은 풀꽃을 흔들기 위해 숲의 순수함을 연금술사의 저울에 올려놓는다. 수평을 맞추며 숲이 감싼 산을 밀어 올리고 있다. 풀꽃 자세히 들여다보면 너무 예뻐 어떤 때는 마음의 한 평짜리 텃밭에 심어두고 매일 보고 싶은 것이다. 저 은은한 색감으로 물들어 풀꽃이 흔들릴 때 우주가 미소 지으면 지구가 환해진다.
겨울
이보시게나, 달과 별과 산 바다 얼마나 추운가. 모두 내 문장으로 들어오시게나 방 하나씩 주겠네. 내 문장의 방에 사는 달은 문장의 등이 되고, 별은 문장의 조명이 되고, 산은 문장의 종이가 되고, 바다는 문장으로 이어진 행이 될 것이네.
그대에게 황금 초가집 따뜻한 방을 주었으니 상상의 꿈을 꾸도록 하시게나. 봄부터 가을까지 생산하느라 얼마나 많은 비지땀을 흘리셨는가. 이제 흘러내린 등 뒤 땀 식히라 겨울이 찾아왔으니 고맙지 않은가.
이보시게나, 겨울은 봄을 맞이하기 위해 제 몸을 여기저기 돌보는 시간이라네. 보시게나, 달은 동백꽃이 되고, 별은 선인장이 되고, 산은 군자란이 되고, 바다는 수선화로 피고 있지 않은가. 겨울은 잠자면서도 꽃을 피운다네.
하얀 눈꽃이라도 내려 봐라. 이보시게나, 겨울이 참 아름답지 않은가. 누가 겨울을 먹먹함이라 말하는가. 자, 겨울은 봄이네. 마음껏 춤을 추시게나.
■시작메모
시, 착란을 감춘 회랑과 출구를 위하여 상상의 구름 뚫고 하늘 끝까지 올라갔다가 떨어질 때 감정을 즐기면서 이색 시인으로 살기로 했다. 해와 달을 삼켜 상상하고 시를 쓰기 위해서 ‘나는 사랑할 줄 아는 사람과 사랑하세요’라는 문장이 전두엽에서 겨자씨만큼의 붉은 풀처럼 자라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래야 행여 익숙지 못한 사랑으로 당신을 떠나보내는 일이 없을 테니까 말이다. 시도 사랑도 무덤에 들기 전까지 쓰여질 듯 말 듯, 사랑이 잡힐 듯 말 듯, 벌은 연꽃 앞에서 천 번의 날갯짓으로 당신의 속살 만져도 되냐고 묻는다. 연꽃은 미소를 지으며 마지못해 부처님 실눈 뜨듯 문 열어 준다.
나는 시와 사랑과 벌과 연꽃이 동행하는 장면 바라보는 상상의 지팡이. 지팡이는 누군가 대지 찍으며 걸어갈 때 콧노래 한다. 푸르른 나무로 산이나 들판에 서있을 때 어떤 나무는 나도 저 지팡이처럼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구경 좀 실컷 했으면 하고 부러워했을 것이다. 누군가의 손에 들린 지팡이는 삼각 각도 조정하며 산과 들로 안내를 하는 것이다. 때로는 뱀을 만나도 무섭지 않고, 나무의 열매를 따기 위해서 가지를 걸어 휘게 해서 따먹고 손에서 흐르는 땀이 손금을 타고 신천지에 하얀 여백의 공간을 메꾸어 가는 어디쯤에서 잔인한 무도처럼 시 구절의 언어가 마술사처럼 피리를 불고 있었다.
매일 시를 쓰는데도 이제 겨자씨 만큼 채웠으니 말이다.
이색적인 시인으로 독자들에게 나의 피맛 보라 하는,
잔인한 무도를 죽을 때까지 꿈꾸는 상상의 詩業이다.
*김영진 2017년 《리토피아》로 등단. 시집 『달보드레 나르샤』. 막비시동인.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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