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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호/시時/안眼-미니소설/장종권/덕보네 不和萬事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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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호/시時/안眼-미니소설/장종권/덕보네 不和萬事成
장종권
덕보네 不和萬事成
덕보와 삼례는 올해 일흔을 마악 넘어선 동갑나기 부부이다. 그들은 스물도 되기 전에 결혼하여 반백년 이상을 살아오면서 자식을 여덟이나 보았다. 하지만 내놓고 다툰 적은 별로 없는 부부였다. 이들 사이가 언제부턴가 갑자기 달라지기 시작했다. 모르긴 해도 아이들이 혼인을 하여 하나둘 집을 떠나면서부터였을 것이다. 특히 막내가 따로 살림을 차리고 나간 다음부터는 이 불화가 아주 노골적이어서 자식들이 바라보기에도 차마 민망할 지경이었다.
두 사람의 다툼거리란 것이 좀 묘한 것이었다. 상대방에게 무슨 불만이 있다거나 무엇이 잘못 되었다거나 한 것이 아니고 다짜고짜 이혼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 늙은 판에 무슨 망령이라도 든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지라 처음에는 자식들도 아예 들은 척을 하지 않았다. 더 묘한 것은 두 사람이 이혼하자는 데에는 이의가 없는데 이상하게도 좀체 합의에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적어도 자식들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늘그막에 자식들 관심을 끌기 위해 투정을 부리는 것으로밖에 이해할 수가 없었다.
급기야 내외는 무슨 일에서든 의견 충돌이 잦아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상대방의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기 시작하면 싸움은 끝이 없었다. 아이들은 옹기종기 모여앉아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나누고, 손자손녀들은 온갖 놀이와 재롱에 여념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한켠에서 끊임없이 상대방을 향해 삿대질을 해댔다. 참다못한 큰아들 영욱이 화투패를 든 채 말했다. 그의 눈은 아예 덕보를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다.
“두 분이 이혼을 하고 싶으시면 말입니다. 하세요. 뭐가 그렇게 어려우세요? 저희가 도와드릴게요. 근데 말입니다. 그게 안 되시면 말예요. 당분간이라도 아버님께서는 제 집으로 가시고, 어머님께서는 영미네 집으로 가세요. 서로 안 보시면 싸우실 일도 없을 거 아녜요?”
덕보가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며 되물었다.
“별거를 허란 말이냐?”
“이혼이 안 되면 별거를 하셔야 하는 것 아녜요?”
“일 없다.”
“그러면 제가 도와드릴까요?”
영욱이 팔을 걷어부치고 화투판에서 돌아앉았다. 메모지 한 장과 볼펜을 챙기더니 덕보와 삼례 앞에 버티고 앉았다.
“아버님 조건은 무엇이고 어머님 조건은 무엇인지 말씀해 주세요. 저희가 조정을 해드릴게요.”
형제들이 탄성을 지르며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 이후 이들 부부에게는 합의조건에 관한 새로운 논쟁거리가 찾아왔다. 서로의 조건을 무모한 조건이라고 윽박지르기도 하고, 자신의 조건이 정당한 것이라 주장하기도 하면서, 집요하게 서로를 달래고 협박하고 강짜를 부리는 일을 반복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어느 정도 합의가 되어 합의서에 마악 도장을 찍으려고만 하면 꼭 다른 문제가 터져 일을 그르치고 말았다. 그것은 대개가 상대방이 내건조건이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평소 두 사람은 서로가 다른 합의서를 만들어 갖고 있었다. 대개는 서로가 잘 알지 못하는 내용들을 담고 있었는데, 거기에다가 그 합의조건이 자주 바뀌곤 하여서 서로에겐 최대의 궁금증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항상 상대방의 합의조건을 알아내고자 하는 데에 생활의 대부분을 소모시키면서 중요할 때마다 문제를 일으켰다.
덕보의 합의조건서는 주로 큰딸 영미와 아들들이 만들어 주었고 덕보가 원하는 대로 손질을 해주었으며, 삼례의 합의조건서는 주로 큰아들 영욱과 딸들이 뒷전에서 손을 보아주고 있었다. 덕보와 삼례에게는 각각 네 명씩의 자식들이 뒤에 버티고 앉아서 강력하게 후원을 해주고 있는 셈이었다.
언젠가는 간신히 두 사람이 합의를 끝내고 나서 아이들을 부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웬걸, 안타깝게도 큰아들 영욱이 해외 출장을 떠나는 날이었다. 영욱은 공항에서 덕보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합의를 보신 것이니 제가 다녀오면 도장 찍으시지요.”
영욱이 귀국할 즈음에는 삼례가 내세웠던 그놈의 조건이 어느 사이 바뀌어 있었다. 덕보는 기껏 마음을 정하고 도장을 찍으려 했는데 일이 틀어지고 말았다고 안타까워 했다. 영욱과 영미를 중심으로 자식들도 두 사람의 합의이혼을 성사시켜주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도대체가 도무지 더 이상은 참아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명절이고, 생일이고, 돌날이고, 제삿날이고를 가리지 않고 자식들만 모이면 두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웅다웅이었다.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었다. 자식들은 처음에는 두 사람의 다툼에 초연했다. 왜냐하면 자신들끼리만의 재미나는 일만으로도 얼마든지 즐거울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어느날부터 이들에게 두 사람의 다툼이 새로운 재미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설날이 지난 다음날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자식들은 모이기만 하면 우선 부모의 합의서 문제를 다루어야 했다. 덕보와 삼례가 목을 뽑고 앉아 기다리다가 아이들의 얼굴만 보이면 그 문제부터 하소연을 하기 때문이었다. 먼저 큰아들 영욱이 입을 열기 마련이었다.
“아니, 아직까지도 합의를 못보셨다는 말씀이세요? 그게 무어 어려운 일이라고 질질 끌어요?”
큰딸 영미도 한마디 거들었다.
“겁이 나시는 모양이지요? 그러려면 아예 싸우지나 마시든가요?”
가만히 듣고 있던 덕보가 얼굴을 붉히며 내뱉었다.
“걱정 말그라. 내 죽기 전에 반드시 하고야 말 거다.”
삼례도 한마디 쏘아부쳤다.
“죽기 전까지는 왜 간다는 것여? 올해는 절대로 안 넘길 것이구만.”
그날 저녁상을 물리고 난 덕보가 웬일인지 얼굴색이 좋지 않았다. 먹은 것이 소화가 잘 안되어서였는지, 아니면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서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덕보는 삼례와 자식들에게 불편한 표정을 지어보이기 싫어서 건넌방으로 건너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드러누웠다. 좀 쉬면 괜찮을 것 같다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점점 더 배가 아파오고 온몸에 식은땀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덕보는 갑자기 눈앞이 아찔했다. 이러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버린 친구의 얼굴이 떠올랐다.
거실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영욱이 잠깐 건넌방 문을 열고 덕보의 기색을 살피다가 기절초풍 했다.
“어머님! 큰일 났네요. 아버님이 이상해요.”
삼례를 비롯하여 자식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왔다. 아니나 다를까 덕보의 얼굴은 백짓장이 되어 있었으며 숨이 넘어가기 일보직전이었다. 고통을 견디지 못해 말도 못하고 입만 벙긋거리고 있었다. 삼례가 정신없이 뛰쳐나가 청심환을 찾아와 물에 타 덕보의 입 속에 부어 넣었다. 덕보가 청심환을 삼키고 난 뒤 숨이 넘어갈 듯한 속에서도 겨우 입을 열었다.
“그거…… 가지고 와…….”
“무얼요?”
“합의…… 서…….”
삼례가 얼굴을 찡그리며 안방으로 가 자신이 작성한 합의서를 들고 왔다. 덕보가 힘들게 그 합의서를 받아 들었다.
“죽기 전에…… 도장을 찍어야 해…….”
합의서를 찬찬히 읽어나가던 덕보의 얼굴이 갑자가 붉으락푸르락해지기 시작했다. 합의서는 어느 사이 다시 조건이 달라져 있었던 것이다.
“무어라구? 안 돼! 절대로 안 돼! 저 할망구가 저승까지 따라온단 말여? 이건 말도 안 돼!”
덕보는 소리를 지르고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영미가 그 사이에 덕보의 손톱 끝에 바늘 끝을 집어넣었다. 잠시 후 덕보의 얼굴에 천천히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분이 나서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자식들을 제끼고 큰딸 영미의 손을 잡아당겼다. 영미가 가까이로 다가앉자 덕보가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얘야, 느 어머니한테 무슨 조건이든 다 들어줄 테니 죽기 전에 합의를 보자고 해 보거라.”
덕보의 체기가 가라앉는 듯 보이자 삼례는 코웃음을 치면서 이미 거실로 나가 티브이의 단추를 눌러대고 있었다. 그러면서 남몰래 가슴을 쓸어 내렸다. 하마터면 ‘아이고 영감! 나를 두고 죽으면 안되요’ 하고 울음을 터뜨릴 뻔했던 것이다. 따라 나온 영미가 삼례의 무릎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아버지가 어머니더러 제정신이 아니라네요. 이거 원!”
삼례가 쏘아부쳤다.
“느이 아버지가 제 정신이 아니지.”
영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일어섰다.
“나야 모르지요 뭐…….”
다시 덕보에게로 다가간 영미가 지나가는 말처럼 입을 열었다.
“어머님께선 절대로 안 된다 하시네요.”
덕보의 손에서 합의서가 툭하고 방바닥에 떨어졌다.
“막걸리나 한 잔 다오.”
저녁 무렵 아이들이 모두 자기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준비를 끝내고 마당으로 나섰다. 큰아들인 영욱이 인사를 마친 다음 한마디 했다.
“두 분 합의가 되시면 전화를 주세요. 그때는 저희도 두 분께 받아낼 게 있거든요. 아버님께선 갖고 계신 재산도 많잖아요?”
덕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신 나간 놈이군……. 니 놈한테 가는 것은 죄다 니 에미 꺼 아녀? 니 놈에겐 한 푼도 줄 수 없다.”
영욱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되받았다.
“그러시니 합의가 안 되는 거 아녜요? 좀 양보를 하셔야죠.”
“일 없다.”
“일 없으니 저희는 돌아가겠습니다.”
“가든 말든…… 미친 놈…….”
덕보의 혀 차는 소리를 들으며 까르르 웃음소리가 마당에 가득했다. 삼례는 바쁘게 부엌을 드나들며 남은 음식들을 챙겨 트렁크에 넣어 주고 있었다. 영미가 핸들을 잡고 앉아 차창을 내리고 덕보를 향해 소리쳤다.
“저승에 가셔서 이혼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네요.”
잠시 뜸을 들이던 덕보가 머리를 심하게 흔들었다.
“그래도 그건 안 돼……. 내가 먼저 가면 니 어머니 날 안 찾아온다.”
*장종권 1985년 《현대시학》 추천 완료. 시집 『전설은 주문이다』 외. 장편소설 『순애』. 창작집 『자장암의 금개구리』. 성균문학상, 미네르바문학상 수상. 계간 《리토피아》 주간. 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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