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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호/특집/오늘의 시인/우대식/자선대표시/신작시/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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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029회 작성일 17-10-27 14:46

본문

특집


오늘의 시인




우대식





어린 순례자 외 2편




원주 어느 고등학교 밴드부였던 어린 외삼촌은 옥상에서 허벅지
를 터지게 맞고 집으로 돌아와 하모니카를 불었다. 멀고먼 앨라바
마 나의 고향은 그곳. 그러면 더 어린 나는 한낮의 쓸쓸함을 앓곤 하
였다. 외삼촌은 자전거 앞에 앉고 나는 뒤에 앉아 어린 낚시꾼이 되
어 낚시터로 줄달음질치기도 하였다. 쨍쨍한 여름 햇살 아래 어린
낚시꾼 둘은 붙어 앉아 흔들리는 수면을 바라보며 밴조우를 메고 떠
나는 앨라바마를 하염없이 그리워했다. 삼촌 앨라바마가 어디야.
응 멀어. 자전거를 타고 갈 수 있는 앨라바마는 없나. 해가 질 무렵
자전거를 끌고 기찻길 옆으로 걸어가면서 서로의 등짝에 찍힌 선연
한 주홍빛 놀을 보며 놀라곤 하였다. 엄마가 없던 나를 외삼촌은 토
닥였던 것 같고 아버지가 없던 그를 나는 불쌍하게 생각했던 것 같
다. 오! 수재너 이 노래 부르자. 하늘 높이 떠있던 기찻길을 쳐다보
며 그와 나의 어린 순례자의 날이 저물던 앨라바마로 가는 먼 길.


                                                                    (2016. 겨울.《 문학청춘》






객잔客棧 앞에서 비를 맞다



하루종일 비가 내리는 장가계 대협곡
할머니가 빨래를 한다
온통 물안개
천년 즈음 앉아 있었을 것이다
깎아지른 할머니
깎아지른 비 맞은 개
하루 종일 사람살이를 올려보다가 맞는
해거름의 저녁
산마루 객잔에
따궈大兄가 홀로 앉아 밥을 먹는다
당당하게 찬을 늘여놓고
웃통을 까재끼고
밥을 뜬다
숟가락에 얹힌 따뜻한 밥
어떤 혁명도 이것을 이길 수 없다
모든 혁명이 내세운 깃발도
바로 따뜻한 한 술 밥이었다
나누어 먹는 밥
나누어 먹는 혁명
객잔에 들어가
내 밥을 달라고 조르고 싶은
비가 내리는 장가계의 저녁


                                                                                                                      (2016.겨울《. 미네르바》)






정선 아라리, 당신



비가 오는 삼월의 마지막 날
마음의 회랑 안쪽에
정선 아라리 긴 휘장을 친다
다시 비가 내리고 또 다시 눈이 내린다
그 휘장 아래를 걸으면
밑도 없는 물길, 끝도 없는 산길이 나타나고
사라지고
내 슬픔이 무엔가 생각할 즈음
당신에 대해 명상을 한다
정선 아라리, 당신
왜 그렇게 천천히
또 다시 굽이굽이 적막강산에 서 있는가
비는 여전히 내리고
그 긴 휘장에 앉아 한 마리 짐승처럼
온몸을 웅크린 채
소금 사러 가던 먼 길과
석탄으로 몸을 씻던 내川와
그런 길과 그런 내에서
당신을 기다리던
배가 고팠던 저녁
정선 아라리
당신,


                                                                                                             (2015. 7《. 유심》)




신작시
결로結露 외 2편
─박용래를 추억함




물방울이 맺힐 때는
따뜻한 속
서늘한 겉
속이 따뜻해야 눈물이 난다는 사실
속과 겉의 온도 차이만큼 눈물을 간직하고 산다는 사실
소죽 끓이던 가마솥처럼 뜨거웠던 시인 박용래
그러나 꽝꽝 언 오류동의 결기서린 서늘함
그는 두만강만큼 울었으리
펑펑 쏟아지는 눈발을 바라보며 꺼이꺼이 울다가
만경강 물오리 되었어라
강경 시골 점방
깡깡 소리 내는 놋쇠 재떨이 되었어라
봄빛에 흘러내리는 처마 끝에 매달린 이슬
혹은 눈물,






책상을 닦으며




아이들 개학에 맞추어 책상을 닦는다
책상을 닦으며 생각한다
상床이란 참으로 아름다운 격식
늘 의젓하다
아이들이 상을 마주하고 앉아서 책을 읽고
묻고 답하는 일
부모가 여항의 욕을 마다 않는 이유이다
멀리 간 아이들의 상을 치우지 않는 것도
오지 않을 아이들 대신
상 위에 꽃을 올리는 것도
아이들의 상 위에
아이들의 꿈과
부모들의 다할 수 없는 그리움이
여전하기 때문이다






시론
패배 속에서 시의 잔해를 발견하고 싶은 욕망




1.육박
  내게 특별한 시론은 없다. 시에 대한 정조들이 하나의 관념으로 응
고되어 간다는 생각을 요즘 하고 있을 뿐이다. 관념으로의 응고, 그
러나 그것도 알고 보면 대타적인 인식의 결과에서 비롯된 것이 대부
분이다. 그것은 시에 대한 확고한 나의 정의가 없다는 말이다. 자랑
할 만한 것이 못되지만 감출 필요도 없다. 다만 시에 대한 정조로서
내 의식을 사로잡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는 육박이라는 말이다. 시
에서 내가 그리는 모든 것은 시 이전과는 다른 세계라는 것을 나도
안다.
  이택광이 해설한 철학자 알랭 바디우Alain Badiou에 관한 글을 읽
다가 내 생각과 일견 유사한 구절을 만났다. “바디우에게 진리는
심연을 드러내는 표현이다. 이 존재의 심연은 그 무엇도 아닌 무
nothingness이다. 무는 존재하지 않는 원인이고, 결국 이런 부재원인
absent cause의 흔적이 곧 시이다. 따라서 시는 언제나 선행하는 부재
원인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주체가 있기 전에 발생했던 사건을 드러
내는 것이 시의 텍스트인 셈이다.”
  물론 시가 진리생산을 증언하고 텍스트를 통해 진리를 고정시킨
다는 그의 정의에 선뜻 동의하기는 어렵다. 새삼 외국 이론을 들고
나오는 내 자신이 딱하기는 하지만 부재원인의 흔적이 시라는 말에
는 백 번, 천 번 동의하고 싶은 마음이다. 상상력이라는 것도 사실의
기억과는 전혀 다른 층위에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어떠한 예술적
재현도 나라는 주체와 일정한 거리가 있을 수밖에는 없다. 시를 밀
고 간다는 것은 바로 이 무nothingness 혹은 부재원인absent cause을 향
한 육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흔적은 소멸한다. 시는 소멸되어 가
는 흔적의 부스러기에서 시작한다. 그렇다고 허무에 대한 지향을 의
미하는 것은 아니다. 흔적의 부스러기들이 육화의 과정을 거쳐 전혀
새로운 총화로 거듭되었을 때 실재로부터 더 먼 지점에 나의 시는
도착한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모르스 부호로 타전을 한다. “살아 있
음. 이곳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음.” 이것이 내 시의 실체이다. 그러
니 한심하다.
육박은 그러한 점에서 어줍지 않은 내 시론의 한 축이다. 이러한
내용을 시로 쓴 적이 있다.


자전거는 삼백여 개의 부속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가 누르는 중력의 힘은
서로에게 무수히 전달되며 지상의 길을
육박해간다
나는 그 실천을 사랑했다
몸의 동력을 몸살처럼 앓았다
나의 적이여
어느 날 빈 페달이 바람에 돌고 있을지라도
바람이란
내 육박의 흔적,
내 실천의 스침이라 여겨다오
오월의 나무 아래 잠자듯
그렇게 조용히 누웠을지라도
그것은 꽃 봉우리 다섯 개를 터트리며
너에게 가는 길,
갈대로 채찍질하며 적 앞에
다시 서는 길임을 명심해다오
내 죽음을 허락치 말아다오
적이여,


                                                            「 육박」





  명백한 적을 향한 열렬한 싸움이라면 나는 차라리 행복할 것이다.
그러나 어렴풋한 적이라는 실체를 향한 나의 싸움은 번번이 실패한
다. 허방을 짚은 결과이다. 시를 쓰고 행복감을 느낄 때는 무無라는
실체를 향한 나의,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내 시의 육박이 밀착되었을
때이다. 그러나 그 무엇도 논리 이전이다. 나에게는 그렇다는 말이
다. 내 시가 늘 비틀대는 이유이다.



2. 운명
모든 詩論은 이 죽음의 고개를 넘어가는 모습과 행방과 그 행방의 거리
에 대한 測定의 의견에 지나지 않는다.
                                                                                                      ―김수영




시인마다 시가 다르고 인생관이 다르고 문학관이 다르다. 나는 내
작품이 어떻게 남을 것인가에 대해 냉소에 가까운 태도를 가지고 있
다. 곱게 가꾸어서 포장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샤르트르의 말대로
인간이 아무 핑계 없이 홀로 내팽겨진 존재이듯 내 작품도 그러하
다. 다만 김수영의 저 시와 시론에 대한 정의는 뇌리에 오랫동안 남
아 있다. 죽음의 고개를 넘어가는 거리에 대한 측정. 개인적으로 시
라는 장르상의 특성을 초월이라고 생각한다. 시가 죽음을 말하는 이
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죽음을 꿈꿀 수 있
는 자유가 여기에 있다고 본다.
그러한 점에서 시란 패배의 운명을 타고 났다고 단언했던 적이 있
다. 그 생각에 변함이 없다. 어느 자리에서 패배할 것인가를 생각하
는 중이다. 내 시가 패배할 자리를 생각하는 것이다. 남은 잔설이 이
른 봄바람에 우수수 몰려가 모인 자리, 그래서 햇빛에 녹아 물기조
차 없어지는 그 언저리가 될 터이다. 내 시의 한 구절처럼 나는 오래
한 곳을 응시하며 살았다. 더러 그것은 대답 없는 것이어서 지랄의
병을 얻기도 하였다. 괜찮다. 운명은 예기치 못한 것이지만 이미 자
신의 운명에 대한 기미를 간파하지 못한다면 또 어찌 시인이겠는가?




가을이 오기 전
한 차례 폭풍우 지나가고
별이 수없이 뜨던 양푼 그릇
밭 모서리에 비 맞고 서 있다
나도 저처럼 찌그러져
오래 한 곳을 응시하며
살아왔다
그것은 더러 응답 없는 것이어서
지랄의 병을 얻기도 하였다
집을 나온 가을 날 개처럼
푸른 하늘 아래 걸으면
이곳이 집이 아니었음을 알겠다
비극의 신은
가을에 온통 불을 질러
집도 절도 없는 사람과 개들이
이방의 땅을 여행하도록 하신다
단 한 줄의 축복도 필요 없다
온 몸으로 가면 된다
괜찮다
                                                                                              ─「응시」



은산철벽을 향한 무모한 돌진, 그리고 파멸이 내 시의 운명이라면
어찌 피할 수 있겠는가? 괜찮다. 해륙풍의 혁명가 김산은 일찍이 말
했다. “죽음은 패배가 아니다.” 혼자 생각했다. 죽음이 무서운가? 패
배가 무서운가? 죽음을 선택할 것인가? 패배를 선택할 것인가? 죽음
을 선택하기로 한다. 그럴 때 체게바라의 푸른 발이 떠오른다. 들것
에 실린 시신. 청동의 조형물처럼 푸른 발. 남미의 정글을 뛴다. 숨
이 차다. 달린다. 평생을 천식에 시달리던 그가 총을 내려놓는다. 그
의 발은 이제 영원히 지상에 닿을 수 없다. 오오 그 푸른 발.
무한히 열려진 패배 속에서 내 시의 잔해를 발견하고 싶은 욕망이
시에 대한 내 욕망이다.


혁명이라는 말 속에는
강물 소리가 난다
이역만리 걸어가는 발자국 소리가 난다
죽은 체게바라의 푸른 발은 혁명 이후의 혁명이다
젖은 군화 그리고 천식
정글을 달린다
숨이 차다
계속 달린다
달린다는 것은 생명을 이어가는 일
푸른 종이에 또박또박 쓰인
한 장의 편지가 막 떠오르는 중이다
사랑한다
나도 사랑한다 그래서 멈출 수 없다
개골창에 얼굴을 박는다
물을 마신다
별이 뜰 때
사랑이 혁명에게 말한다
멀리 왔다
더 가라
                                                             ─「혁명을 추억함-쓸쓸한 詩論」



3. 숨은 神
“시는 내게 숨은 신이다.” 첫 시집 서문에 썼던 글이다. 숨은 신을
찾아 가는 여정이 내게는 시라는 말일 것이다. 내 이야기를 하면서
도 이러한 추측에 기댈 수밖에 없는 현실을 무어라 설명할 길이 없
다. 신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대답할 수 없다는 것도 내 한계이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무한 욕망이 신의 개념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는 정도이다. 범신론적 세계 인식과는 다르다. 나만의 신이라
고 말을 고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지금 든다. 시는 내게 주관적
세계인식을 가르쳐 주었다. 내가 문학에 한없이 감사하는 이유다.
삶이 차안에서 피안으로 가는 여행이라면 내 배를 타고 갈 것이다.
시는 내게는 허름한 배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내가 가고 싶은 대로
간다는 것이다. 강 위에서 서로 배를 세우고 약간의 술을 나눠 마시
고 근황을 묻겠지만 잠시 뒤 안녕을 고할 것이다. 어디로 가느냐고
묻지 않겠다. 어디로 간다고 굳이 말하고 싶지 않다. 내가 정확히 어
디로 가는지 나도 모르기 때문이다.
오래 전 루시앙 골드만의 책『 숨은 神』을 대강 읽은 적이 있다. 아
마 이 책의 제목이 머리속에 깊이 박혀 있었나 보다. 골드만은 극단
적인 카톨릭 종파였던 장세니즘의 대표자였던 파스칼의 『팡세』를
비극적 세계관으로 분석한 바 있다. 장세니스트들은 지상의 모든 것
이 허무하다는 것을 간파하고 고독 속에서 구원을 갈망한다. 그들은
지상의 모든 가치를 부정하고 두려움 속에서 신을 숭배하고 추구할
뿐이다. 그들의 신은 ‘숨은 神’이기 때문이다.
명명백백한 그들의 신과 흐릿하기 짝이 없는 나의 신은 분명 다르
다. 그러나 어떤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 지상의 어떠한 가치로도 잴
수 없는 신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장세니스트와 나는 닮았다. 그리고
그들의 신이나 나의 신 모두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숨었다. 숨은
신이다. 머리를 조아리고 심연의 슬픔으로 자주 빠지는 이유다. 세
번째 시집을 내며 시인의 말에서 나는 또 신에 대해 언급했다.


주막에서 보내는 날들이 저물어간다
가물가물한 해가 완전히 지고 나면
다른 지옥으로 방랑을 떠날 것이다
나 아닌 다른 神을 만나고 싶다
반갑고 슬프고 지랄 같은 눈발 속에서
불온한 나의 생각은 용서 받을 수 있나
용서 받을 필요는 있나
용서하라, 용서하라, 용서하시라


신과의 만남은 어쩌면 내 시의 종착이 될지도 모른다. 완결체로서
의 종착이 아니라 미제의 사건으로서의 종결. 더러 둥글고 순한 짐
승이 되어 신 앞에 엎드리고 싶다. 겨울에는 더욱 그러하다. 조그마
한 목소리의 시를 쓰고 싶다. 무수한 혼란을 넘어 선험적 질서를 느
낄 수 있는 시.


원주 성당 앞
눈이 내리고
온 데 간 데 없는 사람들
성모를 향해
성 예수를 향해 쏟아 붓던 기원들은
흩어져
또 흩어져
눈은 내리고
무딘 뿔을 단 사내가 공손히 뿔을 바닥에 내려놓고
모자를 벗는다
먼 죽음이 이곳에 도달했을 때의 자세처럼
기울어진 각도
그 기울어진 각도에서 쏟아져 나오는
사람과 생각들
텅 빈 몸에 눈이 내린다
쌓인다
등신의 좌대처럼
미동도 없이 앉아서 고백하겠다
아무 것도 없습니다
무딘 뿔이 점점 청동의 오래된 무기가 되어
마음 사방을 가두는
겨울날의 원주 성당


                                                                           「 원주 성당」 전문


아직 아무것에도 도달하지 못했다. 아마 끝까지 이 지경으로 마치
리라. 신과 시적 대상은 언제나 푸르다. 늘 내 자신이 문제일 뿐이
다. 답답하다. 등신의 좌대를 털고 일어나고 싶다. 좌대에 대고 일갈
하고 철퇴로 앉았던 자리를 부수고 새로운 길을 가고 싶다. 그 곳에
는 숨은 신이 기다리고 있을 터이다. 신은 늘 숨은 까닭에 내가 찾은
신이 나의 신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내 교활한 속내로 인해 끝없이 의
심하고 배척하여 숨은 신은 내 앞에 나타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
나 어떻게 하겠는가? 끝없이 갈구하며 의심하는 것, 이율배반의 경
계를 걸어가는 시를 쓰다가 지상의 세계로부터 추방되는 것이 내 시
의 운명일 것이다.



4. 술
술 앞에서 내 마음은 ‘오오’ 하면 ‘우우’ 하고 부풀어 오른다. 마음
의 모서리들이 갈고리가 된다. 멀리 던진다. 망망한 바다에 갈고리
를 던지며 마치 산이라 착각을 한다. 어느 턱이 진 암반에 갈고리가
“철컥” 걸리기를 간절히 바란다. 끈을 서서히 당긴다. 어떤 저항이
느껴진다. 그러나 암반이 아니다. 바닷물의 저항 일 뿐. 던진 밧줄을
거두는 시간은 술에 깬 다음날 오후. 이 미친 짓이 윤회처럼 반복된
다는 사실에 나도 놀란다. 술을 깬 어느 날 다시는 시의 나라로 돌아
갈 수 없다는 절망에 빠진다. 그 동안 한심하기 짝이 없는 시에 조차
다시는 미칠 수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혼돈이다.
천상병의 시 「주막에서」를 읽으며 어린 시절을 보낸 적이 있다.
“할머니 한 잔 더 주세요/ 저녁 어스름은 가난한 시인의 보람인 것
을….” 어느 눈이 쏟아지던 날 인천 배다리 부근 이층 다락방에서 막
걸리를 파먹던 시절이었다. 선배 천의경, 시인 박공배 등 군대를 막
제대한 선배와 이제 군대를 막 가려는 후배가 저 박용래의 시 구절
인 줄도 주절대며 퍼마시던 술. “오오 눈이 내린다. 눈이 내린다.” 그
리고 다시 천상병을 지꺼렸던 것이다. “할머니 한 잔 더 주세요.”
어린 날 이런 기분으로 시와 조우하였다. 지금 생각해보아도 잘못
되었다. 잘못했다, 잘못했다. 빌다가도 나는 다시 주막에서 멈춘다.
할머니 한 잔 더 주세요. 잘못했다.(그 동안 여기저기 썼던 시론을 모아 정
리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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