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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특선

전주호

나무 심기

금산 진악산 자락
석동지*가 환히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작은 농막을 지어놓고
요즘 울타리 수종으로 가장 핫하다는
에메랄드그린, 여든 여섯 그루를 심는다.

남자는 구덩이를 파고 여자는 돌을 골라낸다.
나무가 곧은 뿌리 내릴 수 있게
상토를 충분히 넣어주곤
흠뻑 준 물이 스며들기를 기다린다.

마사토는 언제 물을 먹었냐는 듯
시치미를 뚝 뗀다.
이리 척박해서야 뿌리 내리겠나 싶어
여자는
나무 밑에 상토를 수북하게 올려준다.

―구덩이 속에 넣어줘야 뿌릴 내리지.
상토는 뿌리가 잘 내릴 수 있도록 멸균 처리된 부드러운 흙이야.
나무 위에 뿌려봤자 양분은 없어.

남자가 무심히 말하는 순간

여자는 아찔한 허방다리를 짚었다.
메마른 마사토에서 태어난 건 바로 여자 자신
두 아이의 울타리로 심어졌지만,
그저 가식된 묘목일 뿐
땅속 깊이 뿌리 내리지 못했다.
평생 목이 말랐다.

이제 여자는
구덩이 가득 상토를 넣고 물을 흠뻑 준 다음,
물이 빠지기를 기다리다가
결혼한 지 30여 년이 지나도록 뿌리 못 내린
여자를 기꺼이 심기로 했다.
부드러운 흙에 빠진 맨발에서부터
긴 치맛자락 위까지
물이 찰박찰박 차오른다.

*금산군 남이면 석동리에 위치한 호수 .

목척교 화원에서

목척교 옆 골목 입구
아담한 꽃집 하나 있다

그녀의 신접살림집을 방문하던 날
그 집에서 군자란과 오채각을 샀었다

30여 년이 흐른 후
다시 찾은 그녀의 집

겨우 두 잎이던 군자란은
서너 뿌리나 거느린 가장이 되어
실한 꽃대궁 서너 송이 피워냈고

뿌리도 없이 작은 화분에 담겨 있던
오채각은
몇 번이나 가지를 쳐내야 할만큼 실하게 자랐다.
하지만, 푸른 잎을 보인 적은 없단다.
날카로운 가시만 세우고 있단다.

눈물로 축축한
그녀의 정원에서

군자란은 말없이 꽃송이를 달고
목척교 화원에서
오채각은 사정없이 제 몸을 찌르며
허연 눈물 뚝뚝 흘리는 것이다.
그러다 잎도 없는 맨몸에 화사한 꽃을 게워내는 것이다.

돌아가는 나를 배웅하러 현관에 선
그녀가 군자란으로 핀다.
그녀가 오채각으로 핀다.

방전
―대상포진

왼쪽 옆구리가 이상하다
뭔가 할 말이 있다는 듯
근질근질
불만 가득한 입 잔뜩 내미는 것이다

뿌연 물안개가 낀 것처럼 어지럽다
생의 중심 쪽에 박아놓은 말뚝들
움찔움찔 삐져나와 바람에 삐걱거린다
생각날 듯 말듯
길 잃은 언어들이 바닥으로 쏟아져 내린다

찌릿찌릿!
갈비뼈 신경을 타고 다니며
알 수 없는 모르스 부호를 타전한다
바늘다발을 꽂아놓은 것처럼 마구 쑤셔댄다

뭔가 잘 못 됐다 싶어
욱신거리는 부위를 달래듯 살짝 문질렀는데,
앗뿔싸! 기다렸다는 듯 반점들 시뻘건 날을 세우는 거다

늑골 속으로 파고드는 예리한 칼날들
밤새도록 왼쪽 옆구리를 훑고 다닐 때마다
뼛속까지 저미고 시리다.

앞만 보고 내달리던
그녀,
앞에 날아든 경고 문자 한 통!

―당신은 방전되었습니다.

뚝배기 비빔밥을 먹으며

음식점에 막 들어섰을 때, 창가에 놓여있던
들소는
도심 속으로 막, 돌진할 태세였다.

그녀와 난
뚝배기비빔밥을 시켜 놓고
식당 안을 둘러본다.

고풍스런 격자무늬 창호가 은근하다.
맞은편 벽에는
재즈 기타가 비스듬히 걸려있다.
순간, 메뉴 옆에 걸려있는
모딜리아니의 연인, 쟌느의 긴 목이
창밖으로 기울어진다.

그녀와 난
뚝배기비빔밥과 우동국물을 마주 놓고 앉아
날 것과 익은 것들을,
고추장에 쓱쓱 버무린다.

싱싱했던 상추, 당근,
콩나물, 버섯, 계란 프라이,
오랜 친구처럼 엉겨붙는다.

삶을
이토록 얼큰하게 껴안아 본 적 있었던가?

벚꽃이 무더기로 피어난
늦은 봄밤,

봄밤과 전혀 어울리지 않게
벌겋게 버무려진 비빔밥을 내려다보며
숟갈을 든 채 잠시 생각한다.

휴가

여름
파라솔 밑에 여유롭게 누워 있는
건전지들….

지구의 태양광 전지판 아래

에너지,
충전 완료!

전주호 1999년 《심상》 신인상. 2002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슬픔과 눈 맞추다

시작메모
여자가 자기 집을 가진다는 것
―시「 나무 심기」에 붙여

나는 어려서부터 민들레 홀씨처럼 뿌리내리지 못하고 많은 날을
떠돌았던 것 같다. 남자 형제들이 부모님의 전적인 도움을 받아 정
원에서 큰 나무로 자라나는 동안, 우리집 딸들은 임시로 가식된 묘
목일 뿐이었다. 언제든 집을 떠나 다른 집 정원에 심어질 포트 묘에
불과했기에, 딸들에겐 사방으로 가지를 뻗으며 잎을 틔울 자리가 주
어지지 않았다.
성장하여 서울에 직장을 잡고, 인연을 만나 결혼도 했다. 하지만
결혼하고도 크게 달라진 게 없는 듯했다. 타인의 정원에 두 아이의
엄마로 심겨졌지만, 여기에서도 온전한 내 자리를 발견하기가 힘들
었다. 어쩌면 나 스스로가 어렸을 때의 트라우마 때문에 내가 가진
것을 편안히 누리지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남편은 늘 같은 모습으
로 자기 자리에 서 있었지만, 나는 여전히 허기지고 목말랐다.
그럴 때 시를 발견했다. 시를 쓰고부터 내 길을 찾은 것 같았다.
한동안 신들린 듯 시만 썼다. 철없는 시들이 자라나려고 양 어깨가
근질근질했고, 슬픔의 헛가지들이 무성하게 자라났다.
그러는 사이 큰 아이가 자라 자기 짝을 만나고, 아이를 낳고, 우
리가 할머니·할아버지가 되었다. 둘째 아이도 어렵게 찾은 자기 일
에서 성취를 거듭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작은 어려운 일들은 계속
있었지만 남부러울 것 없는 세월이었다. 이제 경제적인 안정도 얻었
고 크게 이루어야 할 일들은 다 이루었다. 그런데도 가슴은 마냥 바
람처럼 가벼운 것이어서, 결혼한 지 30여년이 지나도록 뿌리 내리지
못하고 허방을 짚어댔다.
올해 처음으로 가족의 집이 아닌, 내 이름으로 된 집을 가지게 되
었다.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진악산 자락에 작은 농막을 지었다. 남편은 몇 달 동안 주말을 반납하고 농막에 와서 터를 닦고 잔디를 심고 울타리를 치느라, 그러지 않아도 검은 편인 얼굴이 반들반들해졌다. 그는 원래 서울 사람이다. 평생 연구소 일만 했지 시골 일은 아무것도 모른다. 까다로운 마누라 취향에 맞도록 땅을 가꾸느라 고생 중이다.
식물을 심는 일은 시골에서 자란 내 몫이다. 언덕엔 내한성이 강할 뿐 아니라 토양의 성질에 따라 꽃 색깔을 바꿀 수 있다는 엔들레스 썸머와 니코블루, 유 엔 미, 미스 사오리 등등, 청보라빛과 흰꽃을 피우는 수국을 무더기로 심었다. 곧은 뿌리 내릴 수 있도록 수국이 들어갈 구덩이마다 상토를 한가득 넣고 물을 듬뿍 뿌려주었다.
언덕 가득 청보라빛 수국꽃이 흐드러지는 보랏빛 정원을 꿈꾸며, 반백년이 지나도록 뿌리 못 내린 여자를 기꺼이 심기로 했다. 정원이 완성되는 날, 드디어 내 마음에도 봄물이 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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