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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호/신작특선/윤인자/쓰레기에 꽃이 피다 외 4편/시작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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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특선
윤인자
쓰레기에 꽃이 피다
옥상에 마을이 생겼다
쓰레기장에서 주워온 유효기간이 지난
비닐포대, 피트병, 스티로폼, 깨진 화분
이 나간 그릇 모두가 야채들의 집이 되었다
토마토, 가지, 오이, 상추, 치커리, 고추, 블루베리
뿌리 깊은 푸른 족속들이
낮에는 해와 바람 나비와 벌들이 놀다가 가고
밤에는 별과 달이 침묵으로 지켜준다
찢기고 상처 받고 천대 받고 버림 받은
이런 저런 이유로 쓸모없어진 쓰레기들이
하나둘 모여 뿌리 깊은 가문의 자제들을 받들며
새싹을 키우고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어
옥상 아래 백성들의 식탁을 풍성하게 한다.
폐교
학교 운동장에 자전거 배우러 가는 날
교문의 팔뚝 굵은 쇠사슬이
길게 누워 길을 막고 있다
교실 앞에서 긴 칼 찬 이순신 장군이
버티고 서서 검문을 하고 있다
아이들이 떠난 넓은 운동장엔
온몸이 푸른 부족들이
세력을 넓히고 있다
살아 움직이던 시계탑은
오래전에 심장이 멎어 있고
구렁대를 지나 교실로 들어서니
깨진 유리창 사이로
도레미파솔 풍금소리
시 읽는 소리 들릴 것만 같은데,
아이들이 번쩍 손을 들고
저요저요 하는 소리 환청으로 들리고,
아이들에게 글자를 가르치던 칠판은
얼굴에 하얀 분을 바른 채 입을 다물고 있다
화단엔 늙은 국화 몇 줄기
꽃망울을 피울 듯 말 듯
자리를 지켜내느라 힘에 겨워
하루하루를 버티느라 빼빼한데
운동장 구석의 철봉, 그네, 시이소
삐딱하게 허공에 등을 기대고 있고
제멋대로 자란 측백나무 울타리 사이
들고양이들만 분주하다.
해당화꽃이 피었습니다
6월 장마 스무사흘 조금
밀물이 빠져 나가자
개펄은 맨몸으로 드러눕는데
그 속의 장뚱어, 보리밥, 농게, 칠게들이
하품하며 문을 열고 밖으로 얼굴을 내민다
그때, 굶주린 바닷새 한 마리 잽싸게 날아들자
갯것들이 서로서로 위기상황을 타전하며
긴급 상황을 외치며 방공호 속으로 숨는다
해당화가 피었습니다!
꼭꼭 숨어라 꼬리가 보일라.
첫사랑
시계태엽 감듯 가슴 깊이 쟁여둔
오래된 앨범 속의 흑백사진
일시 정지된 애틋하고 수줍은
추억 한 장
내밀한 비밀을
폭로라도 할 듯 힐끗 웃는다
먼지 낀 시간 속에서 뚜벅뚜벅 걸어 나올 듯
세월을 빠져나간 사연들만 무수히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며
내 가슴 속으로 유성처럼 떨어진다.
향기로운 부고
작년 봄에도 재작년에도
환하게, 눈부시게 곱던
향기로운 마음 천 리를 가더니
어찌된 일인지 시름시름 앓다가
봄이 되어도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이별을 알리는 천리향
그 사람의 일생은 향기로웠다.
윤인자 2011년 《리토피아》로 등단. 시집 『에덴의꿈』, 『스토리가 있는 섬 신안島』
시작메모
시는 생을 풍요롭게 하는 안내자
나의 시는 널브러진 일상에서 포착한다. 그러므로 평범한 나의
삶은 언제든지 시적 화두가 될 수 있다. 이는 무슨 대단한 것들만 예
술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친숙한 것들이 나의 시가 될 수 있음
을 말한다.
또한 나의 시는 평범한 소재인 만큼 독자들과 쉽게 소통할 수 있
는 통로가 마련되어 있다. 그렇지만 평범한 소재이지만 새롭게 말하
려고 노력한다. 말하는 방식의 새로움이 호기심을 자극하고 흥미롭
게 읽히기 때문이다.
「쓰레기에 꽃이 피다」는 사람들이 사용하다가 버린 폐품들에게
새로운 생명의 호흡을 불어 넣었다. ‘비닐포대’, ‘페트병’, ‘깨진 화분’,
‘이 나간 그릇’은 쓸모없는 물건들이지만 이것들을 재활용하여 각종
야채들을 키우게 되자 쓸모없는 쓰레기들이 야채들을 키워 “식탁을
풍성하게 한다.” 그러므로 “쓰레기에 꽃이” 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쓰레기는 아니지만 폐교 역시 그 기능을 상실한 것으로 사람들의
관심 밖에 놓인 공간이다. 나는 그곳에서 자전거를 배우는 동안 많
은 생각들이 떠올랐다. 아이들이 떠난 폐교에는 온갖 잡초들이 무성
하고 한때 아이들이 우러러 보았을 이순신 장군 동상이 내버려져 있
어 안타까웠다. 어디선가 아이들의 노랫소리와 글 읽는 소리가 들
려올 것 같았다. 뿐만 아니라 주인 잃은 철봉이, 시이소 가 방치되어
있는 것에서 생명의 호흡이 멈춘 듯했다. 소리를 지르며 달려가는
들 고양이들에게서 버려진 폐교가 더욱 안타깝게 여겨졌다.
「해당화 꽃이 피었습니다」에서는 개펄에서 노는 장뚱어, 보리밥,
농게, 칠게 가 꿈틀거리고 그것들을 잡아먹기 위해 날아드는 바닷새
의 먹이활동에서 강한 생명의 기운을 느끼기도 하였다.
「향기로운 부고」에서는 집에서 키우던 천리향이 겨울을 지내는 동안 깨어나지 못함을 보고 내 마음 속의 누군가가 떠올랐다. 죽었지만 생전에 향기롭게 인생을 살았던 사람의 인품 역시 천리향처럼 향기롭다고 느끼기도 하였다.
「첫사랑」은 오래된 흑백사진을 바라보며 오래된 추억을 떠올렸다. 사진 한 장을 통해 많은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음도 생각해 보았다.
내가 생각하는 시는 대단한 사상이 깃든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을 향기롭게 하며 기도처럼 나를 이끌고 가는 안내자이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나의 시는 나의 생을 정서적으로 풍요롭게 하고 견인하는 길동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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