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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호/신작특선/김용균/잡초에 대한 군말 외 4편/시작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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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특선
김용균
잡초에 대한 군말
높은 데 보란 듯이 요염하거나
양지쪽의 여염한 풀꽃들에만
요란스레 환호하지 말고
아무데고 오그르르 뭉쳐나서
서로들 푸른빛만 닮아가는
저 잡초들을 가만 바라볼 일이다.
착하고 어진 땅이 그저 좋아서
그늘지고 외진 곳도 꺼리지 않고
온 산하에 지천至賤으로 살고 있는,
그래서 천하디천하다고 너흴 얕보고
이름도 모르는 대수롭지 않은 풀로써
다 싸잡아 정의定義 내리고,
어디 그뿐이랴,
멀쩡한 제 이름 놓아두고
무명초無名草라고 마음대로 불러왔다만,
이제 대수롭지 않은 것들에게
먼저 경건해야 할 일이다.
너희를 빗대어 민초民草라고 일컫는
무지렁이 같은 뭇사람들이
모질게도 질긴 목숨 하나로 태어나고도
그 목숨을 초개草芥처럼 던져
정작 이 나라를 굳게 지켜냈듯이,
어느 손길에도 기대지 않고
운명 따위라곤 탓할 것 없이
오히려 때로 짓밟히고 꺾이더라도
끝내 일어서 더욱 실팍해지는,
그런 제힘으로만 살아내면서
시방 메마른 바람의 언덕을 지키는 너희가
더없이 거룩한 지고지순至高至純이려니,
이 또한 예의 없는 군말이겠다만
행여 기죽지 말고
잡초여, 무명無名을 떨쳐라.
삶은 계란
닭의 해 무병무탈을 빌면서,
삼천만 마리의 닭들이 한꺼번에 사라져
삼천리 고요한 아침의 나라,
그 둔박한 땅의 한 벌판을 가로지르며
수서발 초고속열차가 달린다.
물안개 피어오르는 금강변 어느 마을에선가
겁 없는 장닭이 요란하게 홰를 잦치면
오늘도 내나 다를 것 없는 고단한 삶들이
기지개를 켜고 일어날 것이다.
사내는 앞마당 닭장 속에 들어가
계란 서너 개의 온기를 만지며 희색이 되고,
곧장 아침밥상에 오른 누런 알찌개의 첫술을
늙은 아내에게 양보할 것이다.
참 별 것도 없는 저들 삶이란 무엇이랴?
이젠 머언 기적소리처럼
아스라한 기억의 저편에서는
목포행 완행열차가 간이역을 떠나고,
차안을 오가는 홍익회 직원은
분주히 외쳐댈 것이다.
삶은 계란이요.
점 뺀 날
멀쩡히 늙어가는 얼굴에
거뭇거뭇 앉은 얼룩점들을
말짱하게 벗겨준다기에
머뭇머뭇 찾아간 병원은
깜짝 북새통이다.
시술대에 불이 켜진 뒤,
기나긴 암흑 속을 기어 나온
애벌레 한 마리가 누워
안간힘으로 허물을 벗고,
교교한 달빛에게서
은빛 날개를 점지 받은
매미는 어디로 훨훨 날아가는가.
갑자기 뽀얘진 얼굴을
아무리 거울에 비춰보아도
한 점 해탈은커녕
마음의 청정이란 감감할 뿐,
여전히 흔들리며 지나치는
저승꽃 가득 핀 손길 하나도
다습게 붙잡지 못한다.
허망한 상념들만 빼곡해져
집으로 돌아오는 길가에는,
늘어선 고목들마다
가쁜 숨 고르는 새소리에 젖어
참 향긋하다.
옹이투성이인 채로,
마음 시린 것들
봄나들이 가재는 친구를 따라
보슬비까지 추적대는 들녘을 걸으며
뜬금없는 추억담을 듣고 있자니
옛날 고향마을 어느 농장에서
주인과 맛있게 먹던 사슴고기가
젊은 사슴놈에게 사랑을 빼앗기고
시름시름 앓다가 죽은 놈것이란 말에
당장 젓갈을 놓았대나 어쨌다나
수사슴이 숫제 살맛을 잃은 것도
친구가 당장 입맛을 잃은 것도
내나 마음이 시렸던 탓일 테지
듣는 둥 마는 둥 저걸 어떡한다냐
망연히 걸어가는 한적한 들길에
가녀린 봄꽃들은 어찌 그리 많은지
예전엔 그저 곱기만 하고 좋았는데
저것들이 금세 져버리면 어쩌나
지고 난 꽃자리에 바람 불면 어쩌나
나는 왜 또 공연히 마음 시린다냐
새봄을 맞으며
내 안의 허튼 분별이
병통인 걸 애써 감추고,
허구한 날 아프다 했지.
사랑하는 것들이
더 긴 겨울밤을 지새우는 줄 알고도,
기다림에 지친다 했지.
만나면 금세 헤어질까 두렵거니
세상에 모진 것이 인연이라서
기어이 또 눈물 터트렸지만,
이별은 영영 아니라 했지.
한달음으로 내달아온 세월의 들녘에
마음 부풀던 오랜 꿈들마저
소소리바람처럼 다 스러지고
아지랑인 듯 아련할 뿐인데,
그저 창창한 하늘만 보고 살랬지.
그래 그랬지.
사는 게 참 별것도 아니라 했지.
바짝 마를대로 마른
조마조마한 나무초리 끝마다
새봄을 맞으며
푸릇푸릇이 곰틀거리는
저 경이로움 속에
내가 다시 운좋게 깃들면서도,
김용균 2014년 시집『 낙타의 눈』으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능수벚꽃 아래서』 외.
시작메모
이름 모를 풀잎들의 힘
유난히 길고 길었던 겨울이 가고
새봄을 맞는가 했더니,
어느새 산과 들에 초록이 무성하다.
요동쳤던 역사의 소용돌이를 보면서
새삼 기억에 떠올랐던 일,
몽골난, 임진·병자란, 일제침략 …
위태로운 난리 때마다 나라를 지킨 것은
바로 힘없고 못 가진 민초들이었다.
봄날이 가는 언덕에 서서,
꼿꼿이 한데 바람을 맞고 있는
별 대수롭지 않은, 이름 모를 풀잎들에게
경건한 마음의 눈길을 건네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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