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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호/중편분재④/손용상/土舞 원시의 춤 제3화/ 악몽惡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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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121회 작성일 17-10-27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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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분재④



손용상 (소설가)






土舞 원시의 춤 제3화/ 악몽惡夢





8
참 이파리도 무성했다.
시내 상가지역을 조금만 벗어나면 바로 밀림이 시작이라도 되는
듯 가로수들은 열대 특유의 무성함을 저마다 자랑하며 이파리를 너
울대고 있었다. 철민은 빌라로 향하는 차 속에 깊숙이 몸을 묻고 꿀
렁꿀렁 흘러가는 바깥풍경을 우울할 심정으로 내다보고 있었다. 누
군가 읊었던가. 꽃이나 열매는 그 잎이 있으므로 돋보이고 매력이
있는 것이라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꽃이나 열매가 발갛게 알몸
으로만 돋아나 있다면 사람들은 금방 싫증을 느낄 것이다. 모두가
더불어서 저마다의 역할을 함으로써 군생群生의 아름다움이 빛나고
그 향기가 누리에 퍼져가는 것이 아닐까?
사람들이 들끓는 도시의 밀림이나 억년의 전설을 간직한 자연의
밀림이나 그 철리哲理는 변함이 없을 터였다. 그리고 그 속에서 모든
살아있는 생물들은 명예나 권세나 부를 위해서, 때로는 종족의 번식
을 위해서 서로 피 튀는 경쟁을 벌이며 적자생존의 법칙에 물들어가는 것도 또한 다를 바가 없을 것이었다.
철민은 생각을 늦추지 않았다. 그 역시 이러한 자연의 섭리를 따라 이곳저곳 흘러 다니며 부와 명예를 쫒고 그것을 거머쥐기 위해 영일 없이 뛰어왔지 않은가. 하지만 이쪽이든 저쪽이든 밀림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복판으로 들어설수록 온갖 장애물이 가로 막았고 한고비를 넘으면 또 몇 개의 건너야 할 산과 강들이 그의 힘을 빼곤 했다. 그런데 그는 또 한 번의 고비에 서 있었다. 아직 밀림의 ㅁ자도 맛보기 전에 그는 누구에겐가 보이지 않는 손으로부터 틈입을 거부당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의 머릿속에 맴돌고 있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은 그저 철없는 학생의 캠퍼스적인 낭만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것이라는 회의와 두려움이 어느 때보다 강하게 그의 뇌리를 짓눌러왔다.
회장은 철민의 출국신고 시 이렇게 말했다.
―이번 자네가 가는 곳은 모래 한 톨 보기 힘든 천연의 밀림 속인 것을 내 잘 알고 있네. 그러나 우리가 풀한 포기 보기 힘든 중동의 메마른 사막에서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했듯이 그곳도 결국에는 인간의 발자국이 찍혀져야 하고 그럼으로써 세상 밖으로 그 속옷이 드러나고야 말 것이야. 김 이사는 그 전위대로써 인생의 보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 믿네. 가서 우리 네모 그룹의 깃발이 이리안자야의 밀림 속에서 펄럭이도록 최선을 다하게.
사람이란 참 이상도한 동물이었다. 최고 지휘자의 그런 말 한마디와 어깨 두드림 한 자락에 몇 밤을 뒤척이며 불안해하던 마음이 어쩌면 그렇게 한순간에 스러지는 것인지? 한때 월남 전선에서 몇 주간을 베트콩과 싸우다가 속에 악만 남은 병사들이 막사로 돌아오
면 별과 말똥 장교들이 군악대를 동원하여 팡파레를 울려주며 어깨
두드리고 손 한 번 꽉 잡아주는 것으로 모든 원망이 사그라졌다는
한 초급 장교의 얘기가 빈말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때 철민은 새삼
느꼈다.
철민은 문득 시간을 보며 담배를 빼물곤 차창을 조금 열었다. 늦
은 저녁이었지만 아직 열대의 온기는 수그러들지 않은 채 후덥지근
한 바람이 차창을 비집고 들어왔다. 정 부장이 백 밀러로 흘끔 그를
훔쳐보며 말을 걸었다.
“아까… 신 과장에게 들으니… 서울 사모님께 전화가 왔었다던
데…알고 계세요?”
“뭐라구요…?”
철민은 담배 불을 붙이다가 깜짝 정신을 돌리며 되물었다.
“사모님 전화… 서울서….”
“아, 예. 신 과장에게 들었어요. 근데… 여기 전화사정이 안 좋다
던데… 잘 걸려요?”
“씨름 좀 해야죠. 교환 통해 하니까… 그래도 그런대로 통화는 돼
요.”
철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깊이 들여 마신 담배연기를 천천히 내뿜
었다. 차창 속으로 아내 얼굴이 떠오르며 눈살을 찌푸렸다.
―아휴 그놈의 담배… 정 피고 싶으면 뻐끔 담배를 피던가… 그
렇게 헤비하게 안빨면 안돼요?
그녀는 철민이 뱉어낸 뭉클한 연기를 손으로 저어 날리며 제발!
하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철민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한때 그녀는
참견도 많이 했다. 철민이 근무하는 해외현장으로 보내는 그녀의 편
지 속엔 온통 그의 버릇에 대한 종알거림이 가득 찼고, 이럴 땐 이렇
게 하고 저럴 땐 저렇게 하라는 어머니와 같은 잔소리만 정이 뚝뚝
떨어지듯 빼곡히 채워져 있곤 했다.
이를테면, 당신… 샤워는 매일 하시나요? 당신은 건성피부라서 매일 샤워를 하면 안 좋아요. 꼭 해야 되면 비누 쓰지 말고 그냥 맹물로만 하셔요. 그러면 몸이 좀 덜 가려울 거예요… 라든가, 또는 당신은 세수할 때 요란한 편이니까 그럴 땐 세면기 앞에 꼭 수건을 깔고 해야만 물이 덜 튄다구요. 특히 세면 시 허리를 꾸부릴 땐 꼭 기마자세로 해야만 삐끗 하지 않으니까 조심하라든가… 귓전에 맴도는 아내의 속삭임들에 철민은 한결 기분이 좋아지며 얼른 빌라로 돌아가 그녀의 정감 있는 목소리가 듣고 싶어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졌다.


9
빌라 1층의 사무실엔 본사로부터 온 팩스가 수북이 쌓여있었다. 각종 장비 부품 등에 대한 가격 리스트, 제조업체들의 회사 소개와 아울러 회장의 지시와 해당 산림개발부의 공문이 부문별로 차례차례 정리되어 있었다. 부서에서 보낸 것은 예상했던 대로 모두가 “상황을 정확히 육하원칙에 의거 보고하라.”는 투의 내용이었고 다만 회장의 팩스엔 “직원들의 사기가 떨어지지 않도록 사후처리를 잘하라.”는 말과 이번 사태에 깊은 유감을 표한다는 위로의 내용이 함께 담겨있었다. 그리고 끝부분에는 비서실의 미스 리가 끼어 보냈음직한 영문 알파벳으로 쓴 암호 같은 문자가 찍혀있었다.
“ISANIM HIM NESEYO BOGOSIPNEYO.”
철민은 문득 서울의 모두가 보고 싶어 울컥 코가 막히며 전화기를 들어 교환을 불렀다.
만리 이국 저쪽에서 들려오는 아내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또렷했지만 뭔가가 안쓰러운 느낌이 바닥에 깔려있었다. 철민은 울컥 몸 속 깊은 곳으로부터 올라오는 그리움이 가슴에 하나 가득 고이며 송
중편분재131
수화기를 고쳐 잡았다. 아내가 먼저 물었다.
“사고가 났다면서요?”
“응.”
“괜찮아요? 당신?”
“좀… 힘들어. 엄마랑… 아이들은?”
“그냥… 잘 있어요….”
아내의 대답이 시원찮았다. 철민은 다시 한 번 송수화기를 바꿔
잡으며 떠나올 때 몸이 성치 않아 있던 아들 녀석 생각에 뭔가 석연
찮은 두려움 같은 것이 스물 스물 관자놀이에 올라붙음을 느꼈다.
“꼬마는… 어때?”
전화기 저 쪽에서 아내의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잠
시 말이 없었다.
“꼬마는… 괜찮아? 최 박사…뭐래?”
“수… 술해야 될지도 모른대요….”
그녀의 목소리가 젖어있었다. 철민은 공연히 열이 오름을 느끼며
소리치듯 다시 물었다.
“왜? 뭣땜에?”
“자세히는 모르지만… 심장에 무슨 구멍이 뚫려 문제가 있대
요….”
철민은 손에 힘이 빠졌다. 호사다마라 했나. 삐죽삐죽 남의 질시
까지 받아가며 나름대로 직장과 사회에서 승승장구하면서 장가가고
돈 벌고 재산 밑천이라는 첫딸 낳고 토끼 같은 둘째까지 보았다. 그
리곤 5년이란 터울 끝에 겨우 얻은 아들 녀석이 뭐라고? 신체에 문
제가 있다고? 그것도 심장이라니… 철민은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
으로 억지 쓰듯 새삼 아내를 불렀다.
“여보세요, 뭐라고? 심장이 어떻다고? 최 박사 그 새끼 전화번호
좀 대봐.”
“…….”
“그 새끼 전화번호 달래니까!”
철민은 악을 썼다. 그는 공연히 억울하고 화가 났다. 애매한 최 박사에게 왜 욕지거리가 나가는지 그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아내가 달래듯 말했다.
“알았어요… 그보다 어머님 바꿔 드릴께요.”
그녀는 철민은 대답도 듣지 않고 송수화기를 어머니에게 넘겼다.
“애비냐?”
“엄마?”
“오냐….”
어머니는 전화를 받자마자 잘있냐, 몸은 어떠냐, 먹는 건 챙기냐, 잠자리는 괜찮냐… 등등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듬뿍 늘어놓은 다음, 애 어미가 너 떠난 후 얼마나 마음고생이 많은지도 빠뜨리지 않고 철민에게 일러주었다.
그러나 철민은 어머니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눈앞에 꼭 애비와 빼다 박았다는 이목구비가 반듯한 아들 녀석의 앙증스러운 모습만이 어른거리며, 그가 술이라도 한잔 걸친 후 자는 놈을 억지로 깨워 일부러 울리곤 하던 정경이 떠올라 미칠 지경이었다. 녀석은 벌써 돌이 가까워오고 있었다. 백일이 지나 뽈뽈거리며 기어 다닐 때, 그리고 옹알이를 시작했을 때 그는 얼마나 세상이 살맛이 나는지 몰랐다. 술좌석에 앉았다가도 문득 녀석이 보고 싶어지면 친구들의 욕을 등허리로 바가지를 먹어 가면서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곤 했다. 그리곤 아무 소용도 없는(아내의 말에 의하면) 장난감을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사 한 차 가득 싣곤 집으로 들이닥치면 아내는 눈살을 찌푸리며 어머니 몰래 온갖 인상을 다 쓰곤 했다.
그런데 녀석이 심상치가 않단다. 그것도 이제 호두알만이나 하려나, 조그만 녀석의 조그만 심장에 무슨 구명이 뚫렸다니…철민은 기
가 막혀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그는 대충대충 어머니와 통화를 끝낸
후 송수화기를 던져버렸다. 그리곤 담배를 꺼내 물었다. 하루 종일
애꿎은 담배만 태워 죽인 탓인지 목구멍에서 가르륵 가르륵 가래가
끓었다. 그는 붙힌 담배를 두어 모금도 빨지 못하고 그냥 재떨이에
처박아 버렸다.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 일어섰다 앉았다하며 사무실
안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무엇부터 손을 대야할지… 마치 신참 사
원처럼 마음에 두서가 생기지 않았다.
“좀 주무셔야 되지 않아요?”
바깥 사무실에서 잔무를 보고 있던 신 과장이 빠끔하게 문을 열
곤 그의 눈치를 보았다. 철민은 시간을 보았다. 밤 12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새벽에 일어나 자카르타를 떠났다. 그리곤 비행기를 세 번
이나 갈아타며 현지 빌라에 도착 하자마자 곧바로 사고소식을 들었
고 그 후속조치를 하느라 하루를 보낸 것이 마치 까마득한 옛날 일
처럼 느껴지며, 그날 하루에 일어난 온갖 일들이 도무지 실감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몸이 축 쳐지며 눈짓으로 신
과장을 불렀다.
“술 있냐? 독주로….”
신 과장이 눈을 뒤룩뒤룩했다. 아까 함께 마실 땐 사양을 하더니
가로 늦게 뭔 일이냐는 표정이었다.
“있긴 하지만… 괜찮겠어요?”
“뭐가?”
철민은 괜스레 눈을 치떴다.
“아, 아니요. 그냥… 너무 피곤해 보이셔서.”
“그래… 아주 피곤하네. 그래서 한 잔 마시고 골아 떨어졌으면 싶
네… 맥주잔에다 가득 한 잔 부어서 일루다 좀 갖다 줄래?”
“그러죠….”
신 과장이 머리를 갸웃 흔들며 부엌으로 사라지자 그는 그제야
생각난 듯 책상머리로 다가가 백지를 펼쳐놓았다.
편지를 쓰고 싶었다. 아들에게, 그리고 아내에게 뭔가를 끼적여 보내야만 마음이 좀 가라앉을 것 같았다. 신 과장이 시킨 대로 맥주잔 하나 가득 양주를 채워 졸인 무말랭이 한 접시를 그의 책상 위에 가져다 놓고는 꾸벅 인사를 하고 나갔다.
―여보!
철민은 첫줄 한 줄을 써놓곤 또 문득 꼬마가 눈에 밟혀 가슴이 아려왔다. 언젠가 녀석은 애비가 바둑을 두는 옆에서 알찐거리다 순식간에 바둑알을 삼킨 적이 있었다. 그리곤 순간적으로 기도가 막힌 듯 울지도 못한 채 얼굴이 새파랗게 변한 적이 있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를 밀치고 같이 바둑을 두던 친구가 무지막지하게 아이를 거꾸로 들고 등을 두드리자 바둑알이 튀어나와 위기를 넘긴 적이 있었는데, 고맙고 놀라워하는 철민에게 그때 그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누구든 지새끼는 거꾸로 들 생각은 못한다. 남의 새끼니까 가능한 거지… 꼬마 저 녀석 때문에 오늘 십년감수했네. 술이나 한 잔 사라.”
―그래 이넘아. 내 서울가거덩 한잔 걸지게 사마.
철민은 혼자서 중얼거리며 술잔을 반이나 비워버렸다.


10
바닷가엔 바람이 불고 있었다. 철민은 옷자락을 여미며 바다 쪽에 얼기설기 꿰맞추듯 지어진 통나무집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주변을 돌아보니 그곳은 그들의 제2캠프인 뎀타 하버라 했다. 멀리 보이는 수평선 안쪽으로 파도가 허연 포말을 갈기처럼 흩날리며 성난 모습으로 밀려오고 있었다. 파도는 뉘엿뉘엿한 낙조를 뒤로한 채 점
점 피빛으로 채색되고 있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갑자기 통나무 집
현관에서 아내가 꼬마를 안고 손을 흔들고 있었다.
―어? 언제 왔어?
철민은 참 이상도 하다고 고개를 갸웃하며 걸음을 빨리했지만 답
답하게도 속도가 붙지 않았다.
―언제 왔냐구?
철민은 아내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말없이 웃기만 하며
꼬마의 손을 들어 함께 흔들어주었다. 꼬마가 칭얼대는 것 같았다.
머리를 제 어미의 가슴에 박았다 들었다 하며 칭얼칭얼 보채고 있었
다. 철민은 어느새 꼬마 곁으로 다가가 녀석의 얼굴을 들여다보았
다.
―아, 아빠.
꼬마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오오, 우리 새끼.
철민은 녀석의 볼을 감싸 쥐었다. 하지만 꼬마는 심하게 도리질
을 치며 제 어미의 젖가슴을 더욱 세차게 파고들었다. 그러는 녀석
을 아내가 매정하게 떼어내며 던지듯 철민에게 떠맡기곤 불쑥 말을
뱉었다.
―얼른 수술실에 숨기세요.
―왜?
―권 대리 오기 전에 빨리 꿰매야 해요.
―권 대리가? 왜?
아내가 눈을 치뜨며 한심하다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못 들었어요? 우리 집에 우리 꼬마 보러 온다고 한 거?
―무슨 개소리야?
철민은 문득 관자놀이에 쭉 소름이 돋으며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바삐 아이를 안고 돌아서다가는 갑자기 몸의 중심을
잃고 자빠지고 말았다. 저만치 튕겨져 나간 꼬마가 자지러지게 울었다.
―아가야….
사무실의 불이 휘황하니 그의 눈을 찔러왔다. 철민은 고꾸라져 자던 의자에서 튕기듯 일어나며 꿈속에서처럼 중심을 잡을 수가 없었다. 셔츠 속으로 흥건한 땀이 손바닥을 적실 정도로 흐르고 있었다. 그는 엉금엉금 기듯이 화장실로 다가가 욕조에 머리를 통째로 들이밀곤 수도꼭지를 틀었다. 뜨듯 미지근한 물이 순간적으로 그의 머리칼을 적시며 등골을 타고 옷 속까지 흘러들어왔다. 그는 가쁘게 숨을 들이쉬며 한동안을 꼼짝없이 그렇게 있었다. 머릿속에는 엉뚱하게도 자기가 지금 마치 꼬마를 대신하여 화장실일망정 권 대리를 피해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는 머리를 그대로 물속에 박은 채 어금니를 주근주근 씹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권 대리 너… 그러면 안돼! 우리 애 건드리면 안 돼.
망막 속에서 권 대리의 모습이 흐릿하게 나타났다.
―야, 내가 너한테 잘못한 게 없잖냐?
철민은 힐난하듯 그에게 물었다. 녀석이 희부죽이 웃었다.
―그냥…꼬마가 예쁘다면서요? 그래… 서울 가면 인사차 한 번 찾아볼까 해서요.
―아냐, 아냐. 그럴 필요없다. 야, 권대리… 너… 서울까지 내 동행할 테니까… 우리집에 갈 것 없다. 내가… 같이 가마.
철민은 마치 또 한 번의 꿈속에 빠진 듯 허황한 생각을 하다가 불쑥 욕조에서 머리를 빼들었다. 이번엔 머리가 빠개지듯 아프며 목구멍에서 가래가 끓어올랐다. 그는 바튼 기침을 하며 사무실로 돌아와 퍼지듯 소파에 몸을 던졌다.
황당한 꿈이며 망상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림처럼 선명하게 다
시 그의 머릿속으로 되감겨왔다. 그는 입 속에 쓴 침이 고였지만 억
지로 삼키며 담배 한대를 붙여 물었다. 그리곤 끼적이다 팽개쳐둔
편지지를 앞으로 당겨 새로이 펜을 들었다. 하지만 하고 싶은 말들
은 한마디도 글로 이어지지 않았고 방금 꾸었던 꿈속의 장면들만이
백지 위에 너울대듯 오버랩 되며 알 수 없는 불안감만이 그의 가슴
을 하나 가득 채워오고 있었다.
철민은 아주 옛날, 그의 형과 누이가 한꺼번에 홍역을 앓다가 형
만 회복하지 못하고 죽었다는 할머니의 얘기가 떠올라 부르르 몸이
떨렸다. 그가 어릴 적 할머니가 들려준 그 괴담 같은 스토리는 이러
했다.
남매가 한꺼번에 홍역을 앓았는데, 형은 어머니가, 누이는 할머
니가 보살피고 있었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꿈속에서 과거 데
리고 있다 죽은 노비 중의 한 여인이 문득 나타나 사랑채로 왔다고
했다. 네가 웬일이냐고 할머니가 호령을 하자 그럼 안채로 가서 도
련님이나 찾아뵙고 가지요 하면서 사라졌는데, 그래서 그런지 그 며
칠 후 어머니가 돌보던 형의 병세가 악화되었고 형은 그만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고 하면서 할머니는 눈물을 글썽였다.
철민은 그때 어린 소견에도 그런 말 같지도 않는 일이 어디 있냐
고 할머니를 윽박지르며 병원에 갔으면 될 텐데 사람들이 무지해서
형은 죽은 것이라고 콧방귀를 뀌고 말았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그
때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함이 있을 수 없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앞으로 결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오늘 같은 날,
어쩌면 옛날 할머니의 미신 같은 꿈 얘기들이 마치 생시처럼 내 꿈
속에서 재현될 수 있는 건지? 철민은 다시 한 번 몸이 부르르 떨리
며 손바닥에 배어 난 땀을 닦았다. 하지만… 그는 벌떡 일어나 사무
실을 서성거리며 결코 이대로는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 철민은 머리가 돌아버릴 것 같은 와중에도 문득 한줄기 반짝이는 지푸라기 같은 것이 떠올라 얼른 책상으로 돌아와 백지를 펼쳐 단정하게 놓았다. 그리곤 사인펜을 들어 죽은 권 대리의 영혼에게 바칠 제문을 쓰기 시작했다. 내일 아침 그는 해가 뜨는 대로 바닷가로 나가 권 대리를 위한 위령제를 지내기로 마음을 돌렸다.


11
갑자기 마른하늘에서 천둥번개가 치며 비가 억수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철민은 차 앞좌석에서 반 가수 상태로 흔들리다가 느닷없이 퍼붓는 빗소리에 깜짝 잠이 깨었다. 엊저녁 거의 눈을 붙이지도 못하고 죽은 권 대리를 위한 제문을 쓰다가 깜박 존 듯 만 듯한 것이 두어 시간이나 될까. 그는 깨어질 듯 아픈 머리를 찬물에 식히고 아침식사도 하는 둥 마는 둥 새벽같이 직원들을 일깨워 사고현장으로 차를 몰고 가던 중이었다.
차체를 두드리는 빗소리는 마치 다발총소리 같았다. 곧 차 지붕을 뚫고 총알이라도 쏟아질 것 같이 빗줄기는 거세고 요란했다.
“뭐야? 왜 이래?”
철민의 겁먹은 듯 한 목소리에 운전을 하던 정 부장이 풀썩 웃었다.
“스콜입니다. 곧 우기가 시작될 모양인데… 시즌엔 하루에도 몇 차례씩 이래요. 그나저나… 임도가 걱정이네요.”
정 부장이 입맛을 쩍 다시며 차를 세웠다. 도저히 차가 진행할 수 없을 정도로 유리창이 온통 물줄기로 덮이고 윈도 브러시도 소용이 없었다.
“임도…?”
“예에.”
“왜?”
정 부장이 피곤하고 충혈 된 눈으로 흘깃 그를 쳐다보았다. 그리
고는 뚜벅 입을 열었다.
“못 들으셨어요?”
“뭘?”
철민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뒷 자석에 있던 박 기사가 불쑥 말허
리를 자르며 끼어들었다.
“여긴… 산이 움직여요!”
“뭐라구? 산이… 움직인다고?”
“예에.”
―야네들 봐라. 이거 신참 겁주려고 그러나? 산이 움직인다니?
철민은 꿀꺽 침을 삼키며 순간 마음이 꼬부랑해졌지만 우선은 일
단 그들의 얘기를 들어보자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자세히 말해 봐요. 뭔 얘기야?”
그들 네모그룹은 당초 이곳에서 산림개발사업을 시작하면서 주
도州都인 자야뿌라 출장소를 거점으로 3개 장소의 베이스캠프 부지
를 선정해 건축공사를 시작했다.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중장비 등
이 들어와야 할 하버의 구축이었고 동시에 개발 임지林地 가까운 곳
에 장비 집하 및 정비소 설치가 급선무였다. 그 다음 본 임지 내에
벌채를 위한 캠프를 개설하면 바로 벌채된 나무를 선적장까지 실어
날라야 할 코리도-즉 임도林道 건설이 필연적이었다.
산 넘어 산의 지형에 빽빽한 밀림을 뚫고 폭 5m 이상의 임도를
거의 80여km 남짓을 닦는다는 것은 말이 쉽지 장난이 아니었다. 물
론 군데군데 지방도가 끼어있어 연결 연결을 한다 하더라도 도로 개
설은 본업인 산림개발을 위해 기본적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될 또 한
개의 토목 프로젝트라 할 수 있었다. 때문에 산림기술자 외에도 토
목 전문기사와 수십 명의 중장비 기사가 밤낮으로 붙어서 산허리를 자르고 돌과 흙을 메우고 다지고 하면서 2년여의 세월 동안 길을 닦고 있지만 아직까지 공정의 70%도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연유가 그러하니 당연히 본 임지 속의 질 좋은 나무는 아직도 한그루도 베어내지 못하고 길을 닦는 도로 양옆에 널린 나무들만 마치 도둑질하듯 잘라내어 그것을 팔아 경비 일부를 충당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런데 이 도로개설에 문제가 있다는 얘기였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건기동안 열나게 길을 닦아놓으면 그런대로 버티다가도 우기에 접어들어 비가 쏟아지면 도로 자체가 하룻밤 새 끊어지거나 아니면 위쪽 산이 ‘통째로 움직여’ 도로가 아예 없어져버린다는 얘기였다. 원인은 토질 탓이라고 했다. 그것 외에는 특별히 꼬집어 ‘이것 때문이다’ 라고 할 것이 없다고 하면서 정 부장은 푹 한숨을 내쉬었다.
“토질이 왜? 어떤데?”
철민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아 고개를 갸웃했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어떤 곳엔 산 전체가 진흙인지 찰흙인지로 형성되어있어 물만 먹으면 그냥 무너져버려요.”
“작업 전에 지질조사를 안 해요?”
철민은 힐난하듯 다시 묻자 정 부장이 그냥 씨익 웃었다.
“물론 하지요. 그런데… 그런 곳을 피해가려면 연장되는 만큼 길 닦는 추가 경비가 곱빼기로 들지요. 그러니까… 가능하면 물이 흐르던 하상河床을 치든가 산 아래 쪽으로 길을 돌리든가… 머리를 싸매고 연구는 합니다만….”
그러면서 그는 정색을 하고는 오히려 철민이 답답한 듯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런 거 다… 벌써 본사에 보고됐을 텐데요….”
철민은 입을 다물고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 이러한 현
지보고가 올라온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당시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새끼들 일하기 싫으니까 흰소리 하는 것’이라고
회의석상에서 그냥 일축함으로써 윗선에 제대로 보고도 하지 않았
던 일이 생각나 가슴이 뜨끔했다. 그런데 현지에 와서, 이제 확인을
하면 금방 알 수 있겠지만, 지금 정 부장이나 박 기사의 표정으로 봐
서는 그 말이 공정 늦은 것에 대한 변명이나 거짓은 아닌 것 같아 철
민은 또다시 가슴이 답답해왔다.
민은 정 부장의 흉내라도 내듯 똑같이 한숨과 더불어 입맛을 다
시며 무심코 담배를 빼어 물다간 다시 넣어버렸다. 바깥 빗줄기는
다소 잦아들었지만 담배연기를 빼기 위해 창문을 내리기엔 아직 일
렀다.
철민은 시계를 보았다. 아직 아침 9시가 채 안되어 있었다. 자야
푸라 사무실에서 출발한 것이 7시 반 정도였으니 반쯤이나 왔을까?
현장에서 10시에 지내기로 한 위령제가 한 시간 이상 지연될 것 같
아 그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왜냐하면 오후 2시까진 다시 돌아와 병
원을 거쳐 비행장으로 나가 권 대리의 시신을 우선 떠나보내야만 우
선 한시름 놓을 것 같았기에 그는 정 부장을 재촉했다.
“그 얘긴… 다시 검토하기로 하고… 슬슬 출발해봅시다. 현장 식
구들 기다릴 텐데… 그리고 박 기사?”
“예에.”
“현장에 제사 준비는 다 됐겠지요?”
“예, 신 과장더러 SSB 치라고 했는데… 아마 잘 됐을 겁니다. 술
이나 오징어 같은 건 제가 갖고 가니까… 과일이야 그곳에 있을 거
고….”
박 기사는 공연히 말을 더듬거렸다. 그리고는 무슨 생각을 했는
지 말끝에 갑자기 목소리가 젖으며 “권 대리 그 씨발놈”하고 중얼거렸다.


12
하오의 태양이 작열하는 비행장 활주로 아스팔트 위에서 그들은 2열로 도열해 있었다. 타향에서 비명횡사로 원귀가 되어 떠돌지도 모를 권 대리의 육신을 떠나보내기 위해 그들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넥타이 차림으로 예의를 갖추고 공항에서 병원 앰뷸런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아침부터 서둘러 현장으로 내려가 위령제를 지내고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양지 바른 언덕에 권 대리의 이름을 새긴 십자 팻말까지 하나 꽂았다. 그리고 그들은 곧바로 다시 비행장으로 차를 몰아 이제 마지막으로 그를 떠나보내기 위해 자리를 함께 한 것이었다.
철민은 모여 있는 사람들의 면면을 하나하나 챙겨보았다. 한국인 직원이 18명, 현지 채용 로칼까지 합치면 약 서른 명이 되었다. 적은 숫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침통한 표정으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저만치서 정 부장이 캠프 경비 책임자인 아탱 영감과 무언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바MR 아탱는 흰색의 마도로스 모자를 트레이드마크처럼 쓰고 다니는 현지인 마을의 지킴이였다. 그는 왕년에 배를 타고 인도네시아 전역을 다녔다는 전력을 푯말처럼 내세우며 동네에서 말발께나 날리는 50대 중반의 사내였다. 듣기로는 그들 네모그룹 멤버들이 이 지역에 둥지를 틀 때부터 터 닦기, 집 짓기 등의 작업 시 로칼 인부들을 동원해주거나 부식을 조달하는 등 이른바 ‘한 구찌’잡은 사람이었다.
그러다보니 안 그래도 동네 건달 노릇을 하며 현지 주민들의 골목대장 노릇을 하던 그는 어깨에 힘이 더 들어가게 되고 그 덕분에 이제는 자기 동네는 물론 인근 타 지역 주민들도 괄시 못하는 인물
중편분재143
로 성장해있었다. 그런가 하면 머리가 잘 돌아가고 잔꾀가 많아 가
끔 그들 네모그룹 사람들이 풀지 못하는 관공서 일까지도 그를 내세
우면 잘 해결을 해오곤 했기 때문에 한국인 직원들도 그를 대접해주
고 있다고 했다.
“물론 잔돈푼깨나 들어가지요. 영감이 노회해서 무슨 일이든 맨
입에 하려 하지 않아요. 가끔 골치 깨나 썩히곤 하지요….”
위령제를 지낼 때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일을 거드는 그를 보고
철민이 물었을 때 정 부장이 귀띔해 준 말이었다.
생각해보면 어딜 가나 그런 부류의 감초는 있기 마련이었다. 다
만 나설 때 안 나설 때를 잘 판단하며 적당히 뒷배만 챙기는 부류가
있나하면, 그야말로 천방지축 아무 곳에서 입질을 하여 주변의 눈살
을 찌푸리게 하는 어이없는 사람들도 살펴보면 적지 않은 것이 현실
이었다. 그러나 어쩌랴, 크든 작든 조직이 움직이는 곳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인걸… 철민은 이것저것 생각에 머리를 흔들며 시간을 보
았다. 2시 반이 조금 넘어있었다. 그는 아탱과 얘기하고 있는 정 부
장을 손으로 불렀다. 그가 아탱과 함께 철민에게로 다가왔다. 아탱
이 건달 특유의 삐딱한 거수경례를 올려붙이며 손을 내밀었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답니다. 말씀 들었다고… 아깐 행사 때문에
인사 못드렸다고….”
정 부장이 아탱을 소개하며 빙그레 웃었다.
“반갑소. 우리 회사 많이 도와준다고… 고맙습니다.”
“별 말씀을… 이번 미스터 권 일은 정말 가슴 아픈 일입니다.”
정 부장의 통역으로 잠깐 서로 얘기를 나누다 철민은 얼핏 이 영
감이 아주 날탕은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오히려 경계심이 일었
다. 그는 잠시 말을 끊고는 정 부장을 향했다.
“왜 안 오죠? 신 과장…?”
“별… 문제없는 것으로 압니다만… 곧 오겠지요. 비행기 시간이
3시 반이니까… 아마 곧 도착할겁니다. 아, 저어기….”
정 부장이 갑자기 말끝을 바꾸며 손가락으로 활주로 한 편을 가리켰다. 마침 기다렸던 앰뷸런스가 천천히 비행기 뒤쪽 화물칸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그들은 우르르 그쪽으로 자리를 옮기기 시작했다. 신 과장과 닥터 콤보이, 두어 명의 병원 관계자가 흰 가운을 입은 채 앰뷸런스에서 영구를 내리는 모습이 비쳤다.
철민이 맨 앞줄에 서고 이어서 그들은 다시 정렬해 섰다.
“일동 차려.”
정부장이 군대식으로 구령을 외쳤다.
“묵념!”
철민은 눈을 감았다. 악몽 같은 만 이틀이었지만, 그는 얼굴도 못 본 채 어이없이 떠나보낸 권 대리를 향해 마음으로 깊이 조문하며 잠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잘 가요! 당신과 내가 악연인지 뭔지 분간이 안 됩니다만, 어쨌건 우리가 서로 인연이 있었던 거는 사실인 것 같소. 회자정리會者定離라고 하지만, 그래도 가기엔 너무 일러 아쉽네요. 저승에서 극락에 머물기를 진심으로 바라오! 편히 가시오!





손용상 손남우孫南牛 경남 밀양 출생. 1973년 〈조선일보〉신춘문예 소설 당선. 소설집 『베니스 갈매기』, 『똥 묻은 개 되기』. 장편소설 『그대속의 타인』, 『꿈꾸는 목련』. 전작장편掌篇 『코메리칸의 뒤안길』. 중편소설 『꼬레비안 순애보』, 『이브의 능금은 임자가 없다』. 콩트·수필집 『다시 일어나겠습니다, 어머니!』. 에세이집 『우리가 사는 이유』. 에세이·칼럼집 『인생역전, 그 한 방을 꿈꾼다』. 시·시조집 『꿈을 담은 사진첩』. 경희해외동포문학상, 미주문학상, 고원문학상 수상. 한국, 미주문인(소설가)협회, 달라스 문학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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