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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호/신작시/유순예/고시촌의 봄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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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유순예
고시촌의 봄
누가 또, 사법시험에 떨어졌나 보다
신림동 고시촌 초입
민들레 한 송이가 노란 똥을 싸 놓고 엄마를 부르고 있다, 그 옆
제비꽃 한 송이가 매니큐어를 하고
보라색 손톱을 치켜세우며 자랑하고 있다, 그 옆
이빨 자국이 선명하게 박힌
담배꽁초로 보이는 한 사람이 쓰러져 있다, 저이도
한때는 팍팍 솟아오르는 기운으로
땅땅 동료들에게 큰소리를 쳤을 것이다, 달달
법률서적들을 외웠을 것이다
수입농산물로 차려진 싼 밥집을 찾아, 고시촌
골목골목을 뒤졌을 것이다
담배꽁초로 보이는 한 사람의 봄은 가고
고시촌의 골목은 다시
봄꽃들이 땅땅거리고 있다
누가 이참에, 사법시험에 합격했나 보다
호박고구마
그놈의 농사 다 때려치우고 나한테 시집이나 오시오 잉, 건물 월세 나오는 놈으로 끼니는 식당에서 사 먹으면 되고, 자글자글한 등짝이나 서로 긁어주면서 뒹굴뒹굴 살면 되지 않겄어라우? 영감도 죽고 없는디 -만만의 콩떡
해마다 가을이면
엄마는 시집을 가십니다
삭신은 호박고구마를 캐고 있고
마음은 둥둥 시집을 가십니다
선친의 유산을 노리는
엄마의 통장을 노리는
영감태기의 틀니를 확 잡아 빼버릴
호박고구마를 캐십니다
까맣게 탄 등허리가
까르륵까르륵 웃는 줄도 모르고
불퉁불퉁 호미질만 하십니다
그놈의 영감태기가 엄마 돈 좀 있는 것 알고 그러는 것여, 고깟 읍내에서 건물 월세 받아봐야 얼마나 되겄어. 그나저나 엄마 시집가려면 까맣게 탄 그 등짝은 어쩔 것여, 그래갖고 어디 사랑이나 받겄어? -간만의 차이
이놈의 농사 다 때려치우고 시집이나 확 가버릴란다. 쌔가 빠지게 농사지은 돈 병원에 갖다 바치느라 구경도 못 하고, 느그들은 올 때마다 잔소리만 해쌌는디, 옴마 혼자 뭔 놈의 재미로 살겄냐? 영감도 죽고 없는디 -천만의 말씀
유순예 2007년 《시선》으로 등단. 시집 『나비, 다녀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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