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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호/신작시/최향란/후박나무 아래 허공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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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최향란
후박나무 아래 허공
횡간도, 삼백 년 훌쩍 넘긴 후박나무 숲 그늘
한 노파 허공 움켜 쥔 채 꼬부라져 있다
고작 백 년도 안 돼 바닥인데
여기 후박나무 곁에서
한 톨 생을 마저 내려놓고 싶다는 말 차마 다 듣지 못 하겠다
걸음을 멈춰 서서 저 후박나무가
삼백 년을 풀어 꽃으로 당당히 가는 천 년의 길 바라보는데
참, 뜨겁고 뜨겁다
정오 햇빛으로 반짝이는 후박나무 숲 십 년쯤은 흔적도 아닐 테니
몰래 한 삽 훔쳐내었다
잠깐 피었다가 더 이상 꽃 피지 않는 칠흑의 허공에게
한 삽 거름 주는 밤,
한 줄기 눈물 핑 도는 청춘을 후박나무가 보고 있다
의지를 배우는 저녁
텅 비어 오래도록 잠들어 있던 여자가
나진 어느 식당 그릇에 담긴 채 잎이 나있는 옥수수 이야기를 보네
깡탱이에 알알이 뿌리 내리어 소복하게 돋아난 새싹
이게 도대체 뭐지?
만져보고 옆으로 뒤로 살펴보네
분명, 살아 자라고 있다!
감자 고구마 움튼 것은 흔히 봐왔지만
줄 맞춰 촘촘히 움튼 옥수수 푸른 싹이라니
뒷마당에 옥수수를 말리다가 급히 비설거지 했는데
놓친 하나가 저 녀석이라 말하는 밥집 주인장 이야기 설레였네
마당가에 홀로 버려져
비 맞고 밤새우고
햇살 받고 또 밤새우고 그랬을 거라네
생명은 와, 이토록 간절한 것이네
살고자 하는 열망과 고통의 밤들
나 살아있어요, 하는 의지 한 됫박 된서리에
떨어져나간 삶 붙잡고 눈 퉁퉁 붓던 허술했던 저녁은 가야 하네
꽁꽁 얼은 저녁을 훌훌 털어내고 있네
최향란 2008년 《리토피아》로 등단. 시집 『밖엔 비, 안엔 달』 여수 해양문학상 수상. 갈무리 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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