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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호/신작시/이강길/해거름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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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이강길
해거름
어스름이 노을 한쪽
귀퉁이를 무는 해거름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몇 발 떨어져 있던 산 그림자,
햇살의 눈꺼풀이 풀릴 무렵
저수지 위에 자리를 편다
웽웽거리며 산으로 들어간 전봇대,
슬글슬금 마을로 내려와
낮에 들은 소문을
아직도 확인하는지 수근수근
몇 년째 저수지로 출근하는
정장차림의 40대 남자,
휴대전화 액정화면을
천천히 밀치더니
물가를 몇 바퀴째 돌며
저수지의 허리싸이즈를 재고 있다
컴퓨터를 나온 거인, 사람에게 길을 묻다
얼굴 푸석푸석한 사내가 들어선다, 그간 반상盤床의 크고 작은 성을 거침없이 무너트린 전사戰士, 이젠 더 오를 곳이 없는 전설傳說이 되었다. 거인巨人 ; 최근엔 수백만의 기사棋士를 단숨에 쓰러트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지구 몇 바퀴를 꿰뚫는 지능, 지치지 않는 체력의 소유자.
초침이 침묵을 깨고 퍼뜩거리기 시작한다
소목小目에 이은 삼련성三連星이 날렵하다
귀에서 변邊으로, 변에서 중앙으로 흐르는 더딘 전개
때로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이 흐름
戰士, 중앙의 두터움이 부담스러운지
손끝으로 가볍게 돌을 두드린다
머리를 뒤로 몇 번 젖힌다
4시간 쯤 흘렀을 시간,
어두운 표정의 전사가
시간에 쫓겨 내려놓는 한 수,
집요히 빈틈을 파고들었지만
가볍게 신음을 토한다
돌이 반상盤上에 힘없이 미끌렸다
플래시가 전설傳說의 고단한 얼굴에 스쳐가고, 한동안 흐르는 침묵, 그 남자는 지나간 흐름을 되짚더니 애써 웃음을 짓는다, 창가를 향해 걸어간다. 순간, 대국장 뒤편의 노트북컴퓨터가 더 빠른 속도로 숫자를 생성하고 있다.
이강길 2010년 《문학광장》 신인상 수상, 전북작가회의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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