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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호/신작시/이명/허술한 왕국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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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892회 작성일 17-10-27 12:28

본문

신작시



이    명






허술한 왕국



산중턱 외딴 집은
수평선에서 해가 떠오르는 광경을 볼 수 있어서 좋다
발 아래로 초목들이 엎드려 있고
우듬지가 나지막하게
자욱이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좋다
고라니의 발자국을 살피며 둘러보는 땅의 경사가
자유스러워서 좋다
이러한 풍광을 보며 새벽마다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은
나는 내가 어느 중세 유럽의 황제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산천초목들은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을 때
이슬에 하나둘 빛이 들어오기 시작할 무렵,
여명 속에서 나는 밤새 초목들의 안위를 살피는 황제가 된다
왕국의 영원함을 위해 팔다리를 흔들며 몸을 만들고
제국의 영토를 순찰하고
서기 어린 기운으로 온몸을 샤워하고
그제서야 갓 올라오는 태양을 맞이하는 것이다
내가 잠시라도 이러한 착각 속에 살고 싶어 하는 것은
사실 나는 내가 이 외딴 산중에서
그냥 그렇게 살아갈 몸이 아니라는 것을,
전생에 황제였다는 것을
마치 내가 당연히 여기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기 때문이다
날이 밝으면 그래서
나는 또 어둠 속으로 허물어져 내리는 것이다
나의 나라는 밤에 세워졌다 무너지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결단




간밤, 세찬 바람 견디지 못하고
뒷산 아름드리 금강소나무, 가지가 꺾어졌다


어둠 속 바람과 맞선 흔적, 바늘처럼 돋아 있다


드러난 하얀 속살
물관 지나가는 자리가
수없이 많은 바늘로 돋아있는 것을 보고서
밤새 혼자 독하게 버티었다 생각하다가


생채기 끝마다 맺혀 있는 물기를 보고서
생각이 깊다는 것을 알았다


버릴 것은 버리고
자를 것은 잘라내는 단호함이 돋보였다


아침 햇살에 일렁이는 저 의연함,
꺾인 속살 부위가 눈부시게 환했다






이명  2011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집 『분천동 본가입납』,『앵무새 학당』,『벌레문법』,『벽암과 놀다』. 목포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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