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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호/신작시/박영녀/모파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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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박영녀
모파
세브란스 vip병실
노란 털실의 손뜨개모자를 쓴 그녀
꽃병에 시든 장미꽃을 추리고 있다
오래전 하얀 장미부케를 던져주었던 그녀
웃음이 까맣게 여위어 가는 얼굴
젖은 눈빛이 쓸쓸하다
몇 차례의 위암수술이 잘됐다던 그녀
헐렁한 환자복의 끈을 더 조여맨다
제 빛을 잃어가는
깊게 패인 쇄골이 검게 흔들렸다
모과가 소쿠리에 담겨 베란다에 있다
몇 개는 하얗게 곰팡이가 슬어있고
몇 개는 검게 변했다
쓰레기통에 버리려고 봉지에 담았다 다시
소쿠리에 쏟아 붓기를 수차례
문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베란다를 꽉 채운 모과향
버리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마음
제 몸을 까맣게 물들인 상처
검게 변해가는 짙은 모과
돼지껍데기
식당일을 끝내고 자정에 가는
부천 남부역 뒷골목
돼지냄새가 진을 치고 있는 돼지 부속집
손마디가 굵어진 사내와
돼지껍데기에 소주를 마신다
서로 손의 체온을 나눈다
미안해
눈자위가 벌게진 사내가 말한다
슬플 때만 눈물을 흘리는 건 아니다
나의 첫사랑은 미스김 라일락을 닮았었어
물기 마른 수수꽃다리를 여자에게 주며
너는 내 마지막 사랑이야
뜬금없는 소리에 여자의 웃음이 손끝에 걸렸다
그래 그렇게 웃는 거야
돼지 껍닥을 콩고물 무쳐서 여자 입에 넣어준다
오늘이 고소하다
두 개의 연탄불 위에 지글거리는 돼지껍닥
불붙어 떨어지지 않아 칼끝으로 자르던
지난날이 오글거린다
흔들거리는 상 위에서 쫀득해진 하루가 지나간다
박영녀 2015년 《시에》 신인상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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