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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호/신작시/지연/자정, 그대로 멈춰 녹다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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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지연
자정, 그대로 멈춰 녹다
뒤주 위에 나무로 만든 우주 토끼
벽에 기댄 저 나이테 눈동자
토끼는 나를 동공 안에 넣고
오래 바라보았을 거란 생각
시계가 또각또각 간다
열정적이진 않을지라도 꾸준히
그것이 미덕이 되어서 잠시 숨이 막히네
죽은 것 같은 나를 죽은 것 같은 그네들이 본 것처럼
귀퉁이부터 먹는 반의 과거와 반의 오늘
손에 잡힌 유통기한은 아직
우주 토끼를 만든 나무가 오동나무였던가
오동 오동 뜬금없이 부르다가
옆에 떨어진 동백꽃 뒤주 위에 올린다
살아 죽은 것 같은 날이니
죽어 살아있는 날이니
꾸준하게 닳아진 두 귀를 세워
우리 서로 적요하기로 해
달빛 나이테에 감긴 먼지가 내 눈에 눕는다
움푹 쏟지도 웃지도 않았던 날들
얼음인 척 어둠이
심심하게 녹는다
그대로 멈춰,
피에로와 꽃새
1. 웃음
강아지풀에서 태어났다고 믿었다. 열 살이 되었을 때 내 머리카락은 하얗게 셌다. 흔들리는 것에 익숙한 나는 간지럼을 흘리는 습성이 있다. 아버지는 합죽선에 글을 새긴다. 한 획이 비틀어지면 어김없이 나를 부른다. 나를 멀리 보내려는지 허리띠 휘두른다. 바람의 자국, 처음은 조금 어지럽다가 예의 비명을 질러야 할 때 키득키득 웃음이 흘러나온다.
2. 울음
절실함도 없이 키가 자란다. 비닐꽃이 든 배낭을 메고 공원에서 비눗방울을 분다. 끼루룩 날아오르는 비눗방울. 아이들이 몰려온다. 옷에 붙은 비눗방울 무늬를 쥐고 흔든다. 비눗방울 통이 흔들린다. 머리를 밀어 넣자 찌룩찌룩 비눗방울이 나를 가둔다. 갇혀 있는 것이 안전하다. 어느 조각에서 떼어오거나 붙어진 시간이 사라진다. 등에서 내뱉는 울음소리 들린다. 비눗방울이 두꺼워진다. 손톱을 물어뜯던 아이가 쿡쿡 찌른다. 소소한 듯, 못 견디겠다는 듯, 아이들이 나를 터트린다. 가슴에 비닐꽃이 부푼다. 아이 손에 비닐꽃을 건넨다.
이불 속에 묻어, 시들지 않고 우는 아버지가 태어날 거야.
3. 음음음 꽃새
철 지난 달력에 아버지 두꺼운 발톱을 잘라낸다. 하얀 획들이 숫자 위로 튕겨 나간다. 날아간 시간 부스러기들을 아버지는 정성껏 침을 발라 그러모은다. 잘린 발톱 같은 한 획의 아버지. 툭툭 나는 비닐꽃을 창밖으로 던진다. 붉은 꽃, 파란 꽃, 하얀 꽃, 웃지 않아도 간지럼을 타며 날리는 흰 머리카락. 여기서 어디로 흘러가야 하는지 모르는 꽃, 꽃새들
**약력:2013년 《시산맥》으로 등단. 2016년 〈무등일보〉신춘문예 당선. 2014년 시흥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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