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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호/신작시/이세영/묵언 수행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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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이세영
묵언 수행
선물 받은 시집들이 빽빽하다
한 번 읽고 책장에 꽂는 순간
시인이 울렁울렁 품었던 말도
세상에 뱉던 말도 다 가두려는지
면벽의 침묵에 든다
돌아앉은 시간을 되돌리지 않으려는 듯
잠깐 훑던 시선의 기억도 먼지에 다 묻힌 듯
제목은 묘비명처럼 서 있고
납골당 망자 같은 이름만 선명하다
환하게 웃던 얼굴이 벽에 숨고
하고 싶은 말을 삼킨 눈동자들
차마 치우지 못하고 모셔둔 낱말들이
기대고 비비며 비명을 삼킨 채
묵언 수행 중이다
베트남 여자네 홍시
그녀는 고추밭에서 허리 한 번 펴지 못했다
늙은 남편은 그저 담배만 물고 빈둥거릴 뿐
아버지뻘 남자에게 손자 같은 아들 안겨주고
죽도록 일해 받은 천만 원은 베트남 오라비가 삼켜버렸다
어쩌다 한 번 시동생 집을 찾은 친구는
딸 같은 동서의 손만 잡아주었을 뿐
퀭한 눈에 눈물만 가득 담고 웃었다는 베트남 여자
저러다 말라비틀어져 죽고 말지
그만 좀 쉬어라 쉬어라 해도
좀체 앉지 못한다는 베트남 여자
그녀가 삭신을 풀어놓을 때는
하루를 마감하고 깜박 정신을 놓는 시간뿐
가을비 추적추적 내리는데도
기어코 앞마당 감나무를 다 훑어
상자 가득 홍시를 담아주었단다
나는 친구가 보내 준 홍시를
베란다에 벌여 놓고 바라본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베트남 여자네 홍시가 진물을 흘리고 있다
**약력:2015년 《문예연구》로 등단. 전국계간지 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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