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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호/근작조명/김다솜/나를 두고 나를 찾다 외 4편/근작읽기/정미소/자기증식과 초월적 자아와의 힘겨운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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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작조명
김다솜
나를 두고 나를 찾다
턱을 내리고 다시 약간 위로 다시 옆으로 올리고 ok. 혼자 나가기 싫어 동반 가출한 나를 찾으러 갔지요 어딘가 있을 나를 찾아 지갑 속마다 주머니 달린 옷마다 털어봤지만 없었지요 서랍을 열어봐도 없었지요. 그동안 나는 나인 줄 알았으나 알고 보니 나는 없고 그가 나였다니요. 점프하듯 현기증이 나고 소리 없는 한숨이 나왔어요 그러나 그것이 있어야 살아있는 목숨, 어쩌다 나를 잊어버리고 찾아 헤매는데 어제 찍은 사진을 보여주니 법, 법이 바뀌었다며 여권사진처럼 귀와 눈썹 다 내놓고 아카시아 향기와 함께 다시 찍어오라합니다. 자격증, 수료증, 졸업장, 이력서…… 은행, 동사무소, 여권발행처…… 나는 내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하러 다녔지요 나는 여기에 있는데 수없이 나를 복사했지요 지금 세상에 나는 없고 나만 있지요 나를 찾지 못해 운전도 못하고 하루하루 기다렸지요 나는 어디로 갔을까요 분홍 루즈를 바르고 눈썹을 짙게 그리고 다시 찍은 사진 가지고 주민센터 갔다가 경찰서 갔다가 결국 나를 가출신고합니다 가출하고 싶어도 가출할 시간도 없이 살아온 나를 두고 가출한 나는.
싸인
그룹채팅 딸꾹질소리 무음으로 해놓고
허공에 맴도는 매미합창 감상하고 있는데
이름 없는 전화번호가 꼬박꼬박 답해 달라는 문자를 본다
유명이자 무명, 무명이자 유명한 나에게
항아리 적힌 시 좋다며 시집 있으면 싸인해서 보내 달란다
자장암의 금개구리, 길을 가며 길을 묻고 책처럼
싸인을 정말 멋있게 잘한다면 또 몰라도
아직 싸인 한두 번밖에 못한 나는
누구인지 모를 유령에게 보여주기 싫었다
몇 날 며칠 그 문자는 별밤을 은근히 괴롭혔다
잠 좀 잘 자려면 나타나는 불안과 칭찬의 문자
시집 없다 하니 ○○문학 책에 해서 보내달라는 집착
누군가 만나면 망설이지 않고 해주는 날 올까
싸인이 그 사람의 전부는 아니지만
훗날 시집이든 책이든 나올 것이고
신명조, 굴림체, 궁서체, 돋움체, 휴면 편지체
자장암의 금개구리, 길을 가며 길을 묻고 책의 싸인은
그 분들이 노력한 것일까, 타고난 것일까.
마주하고 있는 개하고 개
남산1길 골목에 순둥이 집 앞에서
썩은 몽둥이 든 아이가 씩씩거리고 있어요
-너, 오늘 학교 안 가고 뭐 하니?
-스승의 날이라서 내일 모레도 안 가요
-근데요, 개가 동생을 괴롭혀서 혼내주려고요
안개 낀 날은 유람선 같은 산책길을
한 바퀴 돌고 오니 개하고 서성이고 있는 개
-개가 자꾸 도망가요
-개도 살고 싶어 그러니 집에 가거라
그 순둥이 집 앞을
몇 년 째 지나도 짖지 않는 개
새끼 보려고 대문 앞에 서성이며 캉캉거리던 개
해마다 몇 번씩 새끼 낳아 입양 보내더니
증조할머니처럼 늙어버린 개
방이며 거실, 마당마다 개, 개, 개
들이며 산, 개와 개들이 산책을 하고
개들이 무슨 잘못 했다고 죽이고, 버리고, 때리고
개가 개를 사랑하고, 입양하고, 미워하고, 용서하고
개와 개들이 사는 고향에서.
맥사 몇 잔에
동인동 식당에서 이름이며 나이를 묻곤 했다 처음 만나도 오래 만난 사람처럼 손을 잡고 맥사* 받아 마셨다 맥사를 물마시듯 마셔도 말짱해 보이는 그녀와 안주로 상추와 깻잎에 양푼이 갈비찜을 싸서 먹었다
음식점 현관을 나올 때 문득 모기 떼 소리 같은 게 들렸다 고압선에 감전된 듯 나는 한순간 나를 잃어 버렸다 웅성거리는 소리에 정신이 든 내 앞에는 노랗게 붉게 펼쳐든 하늘이 보였다 내가 아닌 나를 보았다
물 한 잔이 나를 일어 서게 했다
종이컵의 생수 갖다 준 그는 누구였을까?
오줌 같은 것 마시고 만땅 취해보고 싶었다
파리 목숨 닮은 이 하루, 하루
남편, 아들, 딸들에게 동네 건달처럼
큰소리, 큰소리치며 살아온 나는
맥사* 몇 잔에 넘어가버렸다. 나는
술취해서 엉덩이 내 놓고 시원히 오줌 누고 싶었다
빈 의자 앉아 코를 골며 낮잠 자고 싶었던 나는
정 주고 정 먹고 살다가는 소설 같은 세상이라고
똥 주고 똥 먹다 살다가는 똥 같은 세상이라고
휘청거리며 큰 소리 지르고 싶었던 나는
별 것 아니라고, 별 것 아니라고
착각, 착각, 착각소리 듣다가
새벽을 맞이하고 밤을 맞이하는.
*맥주와 사이다를 섞은 것.
핵들
핵들이 만든 핵으로
으름장을 놓아도 핵들은 여유롭다
핵들은 핵을 숨긴 채
계단이며 산을 올라가고 길을 간다
영화 타짜 속에 카드 속임수처럼 쉽게 들키지 않는 핵들
천지에 뿌리 내리고 빛과 그늘이 되는 핵들
핵은 화산처럼 높이 솟는다
핵은 불이고 바람, 태풍이고 물거품이다
핵은 한줌의 가루를 만드는
빛이자 공기방울이다
불꽃놀이를 만드는 핵
단풍놀이를 만드는 핵
봄꽃놀이를 만드는 핵
핵이 만든 나는 오늘 하회탈춤 보러 간다.
김다솜 2015년 《리토피아》 로 등단. 시집 『나를 두고 나를 찾다』.
근작읽기
자기증식과 초월적 자아와의 힘겨운 투쟁
―김다솜 시인의 근작시
내 손으로 뽑은 대통령마저 가짜인 도깨비 같은 세상에 산다. 한파는 밀려오고 촛불은 도깨비를 몰아내려고 횃불이 되어 번진다. 종각역 근처에서 성난 횃불의 뒤통수 맞은 배신감을 따라 흐른다. 가짜는 하야하고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하여 한 판 갈아 업자는 피켓들이 난무한다. 진정한 민주주의, 진정한 대통령, 진정한 나. 우리가 꿈꾸는 진정한 것들은 어디에 있을까? 있기나 한 걸까? 김 다솜 시인의 근작 ‘ 나를 두고 나를 찾다’를 읽으며 종각역 근처에서 잃어버린 숄더백이 떠오른다.
턱을 내리고 다시 약간 위로 다시 옆으로 올리고 ok. 혼자 나가기 싫어 동반 가출한 나를 찾으러 갔지요 어딘가 있을 나를 찾아 지갑 속마다 주머니 달린 옷마다 털어봤지만 없었지요 서랍을 열어봐도 없었지요. 그동안 나는 나인 줄 알았으나 알고 보니 나는 없고 그가 나였다니요. 점프하듯 현기증이 나고 소리 없는 한숨이 나왔어요 그러나 그것이 있어야 살아있는 목숨, 어쩌다 나를 잊어버리고 찾아 헤매는데 어제 찍은 사진을 보여주니 법, 법이 바뀌었다며 여권사진처럼 귀와 눈썹 다 내놓고 아카시아 향기와 함께 다시 찍어오라 합니다. 자격증, 수료증, 졸업장, 이력서…… 은행, 동사무소, 여권발행처…… 나는 내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하러 다녔지요 나는 여기에 있는데 수없이 나를 복사했지요 지금 세상에 나는 없고 나만 있지요 나를 찾지 못해 운전도 못하고 하루하루 기다렸지요 나는 어디로 갔을까요 분홍 루즈를 바르고 눈썹을 짙게 그리고 다시 찍은 사진 가지고 주민센터 갔다가 경찰서 갔다가 결국 나를 가출신고합니다 가출하고 싶어도 가출할 시간도 없이 살아온 나를 두고 가출한 나는.
―「 나를 두고 나를 찾다」 전문
내가 잃어버린 숄더백 속에는 잡동사니 화장품과 장지갑이 들어있었다. 손때 묻은 까만 장지갑 속에는 주민등록증과 운전면허증 신용카드와 통장 그리고 몇 장의 지폐와 여권이 들어있었다. 번개같이 날치기 당한 나를 신고하려고 주머니에서 꺼낸 휴대폰의 아라비아 숫자가 버벅거렸다. 나를 증명하는 나 없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현실이 물음표를 던졌다. 나는 나였을까? 진정한 나를 향한 의구심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몸 따로, 마음 따로, 입 따로. 몸은 쉬라고 하는데 약속을 지켜야 해서 나를 거스르고, 입은 바른말을 하라고 하는데 나는 그럴 듯하게 포장하여 비위를 맞추고, 마음은 솔직하라고 하는데 아닌 척 얼버무린다. 유용한 처세술만이 살아남는 지혜가되었다. 나를 두고 나를 찾습니다. 스튜디오에 가서 턱을 내리고, 다시 약간 위로, 다시 옆으로. 바뀐 법절차에 따라 수수료를 납부하고 인지를 붙이고 확인서를 작성하고. 동분서주하며 기다렸던 긴 가출이 잃어버린 나를 사랑하라며 살라고 한다.
그룹채팅 딸꾹질소리 무음으로 해놓고
허공에 맴도는 매미합창 감상하고 있는데
이름 없는 전화번호가 꼬박꼬박 답 해달라는 문자를 본다
유명이자 무명, 무명이자 유명한 나에게
항아리 적힌 시 좋다며 시집 있으면 싸인해서 보내 달란다
자장암의 금개구리, 길을 가며 길을 묻고 책처럼
싸인을 정말 멋있게 잘 한다면 또 몰라도
아직 싸인 한두 번밖에 못한 나는
누구인지 모를 유령에게 보여주기 싫었다
몇 날 며칠 그 문자는 별밤을 은근히 괴롭혔다
잠 좀 잘 자려면 나타나는 불안과 칭찬의 문자
시집 없다하니 ○○문학 책에 해서 보내달라는 집착
누군가 만나면 망설이지 않고 해주는 날 올까
싸인이 그 사람의 전부는 아니지만
훗날 시집이든 책이든 나올 것이고
신명조, 굴림체, 궁서체, 돋움체, 휴면 편지체
자장암의 금개구리, 길을 가며 길을 묻고 책의 싸인은
그 분들이 노력한 것일까, 타고난 것일까.
― 「싸인」전문
스마트폰이 생필품이 된 요즘은 밴드나 그룹채팅으로 의사소통을 한다. 미래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인공지능을 겸비한 기계화가 인간과 인간의 소통이 아닌 인간과 기계와의 소통이 일반화되는 시기가 도래했다고 한다. 인간이 기계와 살아도 전혀 외롭지 않다는 것이다. 필요한 소통은 1:1채팅을 선택하거나 그룹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룹 속의 어느 독자가 딸꾹질하며 싸인 해 달라는 문자가 따뜻하기도 하고 피곤하기도 하다. 독자들 중에는 파파라치처럼 끈질기게 멧세지를 보내어 협박까지 한다. 신상을 털어 퍼트리기도 한다. 그러나 시인이 항아리에 적어 놓은 작품이 좋다고 하니 자장암의 금개구리가 암벽을 타고 오르내리는 일필휘지로 보내드릴 법도 하다. 자장암의 금개구리는 양산 통도사에서 전해 내려오는 설화이다. 어느 날 자장율사가 공양미를 씻으러 법당 뒤의 큰 암벽에 있는 샘으로 갔다. 샘물 속에 몸은 청색이며, 입과 눈가는 금색인 개구리 한 쌍이 놀고 있었다. 개구리들은 벌과 나비, 거미로 둔갑하기도 하며 여름철 불볕더위에 가열된 암벽을 자유롭게 오르내렸다고 한다. 이를 신통하게 여긴 자장율사가 바위에 구멍을 뚫어 개구리들을 살게 하였다고 한다. 설화 속의 개구리는 다산성을 상징한다. 시인의 시집이 발간되면 싸인이 번창하기를 바란다.
남산1길 골목에 순둥이 집 앞에서
썩은 몽둥이 든 아이가 씩씩거리고 있어요
-너, 오늘 학교 안가고 뭐하니?
-스승의 날이라서 내일 모레도 안가요
-근데요, 개가 동생을 괴롭혀서 혼내주려고요
안개 낀 날은 유람선 같은 산책길을
한 바퀴 돌고 오니 개하고 서성이고 있는 개
-개가 자꾸 도망가요
-개도 살고 싶어 그러니 집에 가거라
그 순둥이 집 앞을
몇 년 째 지나도 짖지 않는 개
새끼 보려고 대문 앞에 서성이며 캉캉거리던 개
해마다 몇 번씩 새끼 낳아 입양 보내더니
증조할머니처럼 늙어버린 개
방이며 거실, 마당마다 개, 개, 개
들이며 산, 개와 개들이 산책을 하고
개들이 무슨 잘못 했다고 죽이고, 버리고, 때리고
개가 개를 사랑하고, 입양하고, 미워하고, 용서하고
개와 개들이 사는 고향에서.
―「마주하고 있는 개하고 개」 전문
시인은 산책길에서 개를 괴롭히는 아이와 마주한다. 몽둥이를 들고 씩씩거리는 아이의 화를 보며 사람도 개와 다름없다고 진술한다. 개를 죽이고, 개를 버리고, 개를 때린다. 새끼를 낳아 제 의사와 상관없이 뿔뿔이 입양보내고, 주인이 팔아넘긴 순둥이의 처연함이 안쓰럽다. 어미로서의 개, 삶으로서의 개를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는 시인이다. 사람이 개보다 나은 것이 뭐가 있다고. 개는 사람과 가장 오래 살아온 동물이다. 그럼에도 우리들의 정서에는 ‘천하다’거나‘개와 같은 놈’으로 비하하여 사용되는 말이기도 하다. 동양과 달리 서양에서의 개는 다르다. 스웨덴의 영화 “개 같은 내 인생”에서의 개는 사람과 동일시 된다. 어머니가 폐병을 앓고 있는 12세 소년은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친척집으로 보내진다. 친척집에서 홀로 남겨 진 외로움을 느낄 쯤 ‘사칸’이라는 개와 동고동락한다. 어느 날 ‘사칸’이 보이지 않아 친척 아저씨에게 물었더니 ‘사칸’이 죽었다고 한다. 어머니의 죽음과 개의 죽음. 사랑하는 것들을 하나둘 떠나보내면서 나 때문이라고 자책하는 소년의 성장통이 아팠다. 소년은 1957년 소비에트연방에서 쏘아올린 무인인공위성, 2호에 실려 가는 ‘라이카’라는 개를 보게 된다.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인공위성에 실려 홀로 우주를 유영하는 개. 친척집에 맡겨지고, 홀로 놓여진 자기의 신세가 개와 같다고 여긴다. 인생이란 누구나 홀로 감당해야 하는 무게가 있단다. 모성을 쏟아 부을 사이도 없이 비정하게 떼어버린 새끼들이 시인의 눈에 밟힌다. 그 순한 것이 무슨 죄가 있다고. 꽃으로도 때리지 마라.
동인동 식당에서 이름이며 나이를 묻곤 했다 처음 만나도 오래 만난 사람처럼 손을 잡고 맥사* 받아 마셨다 맥사를 물마시듯 마셔도 말짱해 보이는 그녀와 안주로 상추와 깻잎에 양푼이 갈비찜을 싸서 먹었다
음식점 현관을 나올 때 문득 모기 떼 소리 같은 게 들렸다 고압선에 감전된 듯 나는 한순간 나를 잃어 버렸다 웅성거리는 소리에 정신이 든 내 앞에는 노랗게 붉게 펼쳐든 하늘이 보였다 내가 아닌 나를 보았다
물 한 잔이 나를 일어 서게 했다
종이컵의 생수 갖다 준 그는 누구였을까?
오줌 같은 것 마시고 만땅 취해보고 싶었다
파리 목숨 닮은 이 하루, 하루
남편, 아들, 딸들에게 동네 건달처럼
큰소리, 큰소리치며 살아온 나는
맥사*몇 잔에 넘어가버렸다. 나는
술취해서 엉덩이 내 놓고 시원히 오줌 누고 싶었다
빈 의자 앉아 코를 골며 낮잠 자고 싶었던 나는
정 주고 정 먹고 살다가는 소설 같은 세상이라고
똥 주고 똥 먹다 살다가는 똥 같은 세상이라고
휘청거리며 큰 소리 지르고 싶었던 나는
별것 아니라고, 별것 아니라고
착각, 착각, 착각소리 듣다가
새벽을 맞이하고 밤을 맞이하는.
*맥주와 사이다를 섞은 것.
―「맥사 몇 잔에」전문
술을 거론하려면 중국 당나라의 시인 이태백이 으뜸이다. 이태백은 술 1두에 시 100편을 썼다고 한다. 어렸을 적 기억인데, 아버지께서 술을 마시고 인사불성되어 집에 들어오시면 어머니가 “주태백이 되시겠소.” 비유하던 말이 떠오른다. 이태백은 백 살까지 살면서 하루 3백잔의 술을 마셨다고 한다. 술을 마시다가 물에 비치는 달을 잡으려고 강 속에 들어 갔다가 물에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는 우리가 익히 아는 이야기다. 이태백의 시 ‘독작’이다. 하늘이 만약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주성이란 별이 하늘에 있지 않았을 것이오/땅이 만약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주천이란 곳이 마땅히 없었어야 할 것이다/하늘과 땅이 이미 술을 사랑하였으니/술을 사랑함은 하늘에 부끄러운 일이 아닌 것/이미 들은 바로는 청주는 성인에 비유되고/또한 이르되 탁주는 현인과 같다 하였다/성현이 이미 술을 다 마셨으니/어찌 반드시 신선을 구할 것인가/석잔을 마시면 노자의 대도에 통할 것이며/한 말을 마시면 자연의 도리에 합할 수 있다/다만 취중위 아취를 얻으면 그만인 것/깨어있는 이에게는 이 말을 전하지 말라. 시인은 대구에 있는 동인동, 저 유명한 찜갈비골목에서 기분 좋게 술을 마셨다. 대구 특유의 매운맛이 감도는 양푼이에 담긴 갈비살을 야채에 곁들여 건배! 했을 것이다. 시인은 술이 매우 약한 모양이다. 맥주의 알콜농도는 4,5도. 거기에 사이다를 섞었으니 음료 정도였을텐데, 달팽이관에서 나는 모기 울음소리를 듣는다. 하늘이 노랗게 변한다. 오줌 같은 술을 마시고 고래고래 토하고 싶은 말들은 무엇이었을까? 술은 간덩이를 부어오르게 하는 효력이 있다. 술의 힘을 빌어 똥 같은 세상과 한 판 붙어보려고 했을까? 남편과 딸들에게 제왕처럼 군림하던 시인이 고작 맥사 몇 잔에 항복했다. 술이 시인의 술주정을 받아내는 동인동 찜갈비골목이 술렁거린다.
핵들이 만든 핵으로
으름장을 놓아도 핵들은 여유롭다
핵들은 핵을 숨긴 채
계단이며 산을 올라가고 길을 간다
영화 타짜속에 카드 속임수처럼 쉽게 들키지 않는 핵들
천지에 뿌리 내리고 빛과 그늘이 되는 핵들
핵은 화산처럼 높이 솟는다
핵은 불이고 바람, 태풍이고 물거품이다
핵은 한줌의 가루를 만드는
빛이자 공기방울이다
불꽃놀이를 만드는 핵
단풍놀이를 만드는 핵
봄꽃놀이를 만드는 핵
핵이 만든 나는 오늘 하회탈춤 보러 간다.
―「핵들」 전문
핵은 모든 생물체의 첫 번째 조건이다. 생물체는 육안으로는 식별이 어려운 미세한 핵 세포로 이루어져있다. 하나의 세포는 하나의 핵을 포함한다. 핵 내의 물질인 염색체는 유전정보를 전달하는 DNA가있고, 핵의 내부는 두 개의 작은 막으로 싸여있다. 핵막은 주변의 세포질과 분리되며 소포체와 연결된 구멍이 있어 물질의 교환이 가능하다. 하나의 수정란인 핵이 세포분열을 하여 위대한 생명체가 되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그러나 필자의 귀에 익숙한 핵은 생명체의 신비가 탄생하는 핵이 아니라 북한의 핵실험이다. 오늘도 북한은 미국의 트럼프행정부가 펼치는 대북정책의 진행과정에 따라 ICBM(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를 한다고 한다. 그것이 관심끌기용이든 내부결속력을 다지는 일이든 우리로서는 불안한 일이다. 핵은 대량살상무기이다. 북한이 말로는 미국을 겨냥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남한의 초토화이다. 핵이 가진 위력은 대단하다. 대기 및 지표에 쏟아지는 방사능 오염이 심각하여 국제적으로 금지된 사항이다. 시인은 북한의 핵 도발 위협을 으름장 놓는 뉴스를 접하며, 인간의 최초구성 물질인 핵의 원자를 분석한다. 핵이 폭발하면 불바다가 되는 가루며, 빛이며, 한줌의 빛이자 공기방울인, 위대하면서도 무기력한 핵과, 핵들. 시인은 미립자인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어 하회탈춤이나 보러 간다. 생명체에게는 살아 숨쉬는 지금만이 존재한다.
위대하면서도 한줌 가루로 남는 인간의 본질을 고민한다. 조각가 배 형경의 작품에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의 인간 군상들을 목격한다. 고통과 절망과 분노와 갈등과 두려움과 소외된 감정들이 한 덩어리의 형상으로 묻는다. 인간은 사는가? 묘사를 배제한 거친 표면과 스스로를 유폐시킨 비좁은 공간을 천형처럼 바라본다. 윤회의 사슬로부터 초탈해버린 인간의 자기증식과 초월적 명상이 꿈꾸는 창조의 자유를 엿본다.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창조의 기쁨, 창조의 오만, 창조의 고통, 창조의 도취. 시인은 오늘에 머물지 않는다. 끊임없는 자기세계와의 투쟁을 벌인다. 나를 두고 나를 찾는다. 안개가 길을 덮은, 길 없는 길을 두려움 없이 나선다. 늙어버린 어미개의 슬픔을 어루만지며, 술을 빙자 해 만 땅으로 취해 술주정도 한다. 시인은 꼭두각시와 헛 도깨비가 난무하는 현기증나는 오늘을 건너며 그의 내면을 진술 한다. 새 봄에 그의 근작에 주목하는 이유다.
정미소 2011년 《문학과 창작》으로 등단. 시집 『구상나무 광배』, 『벼락의 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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