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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호/신작특선/천선자/파놉티콘·21 외 4편/시작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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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특선
천선자
파놉티콘·21 외 4편
―장모님의 지위
장모님의 턱에는 수염이 자란다.
장모님의 목소리가 커지는 것은 수염과 비례한다.
모기 소리만 한 장인의 목소리도 수염과 비례한다.
청년에서 유아기로 접어든 장인의 키가 점점 작아진다.
쥐꼬리 월급의 잔고는 통장 속에서 꼬리를 감춘다.
장인은 없는 호랑이의 꼬리를 찾아 하루 내내 땀을 흘린다.
아들딸이 출세하면 장모님의 수염은 널을 뛴다.
아파트 평수가 넓어지면 수염은 하늘 높은지 모른다.
뼈대 단단하고 콧대 높은 수염은 장인 앞에서는
고속으로 자라고 콧방귀를 뀌면 더 빨리 자란다.
장모님의 수염은 함부로 만질 수가 없다.
아들딸, 사위며느리, 가장인 장인도 만질 수가 없다.
우정승, 좌정승, 검사, 판사도 울고 가는 수염이다.
장모님은 갓을 쓰고 헛기침을 하며 수염을 어루만진다.
파놉티콘·27
―초코릿, 과다섭취
온몸에 매달린 눈을 열고 나를 본다.
눈은 동공을 열고, 나를 바라보는 달이 된다.
낮에도 떠있는 달은 가슴에 물주머니를 만든다.
달은 물주머니에 내려앉아 물살을 헤친다.
살여울 숨결이 물주머니의 가슴까지 기어오른다.
숨구멍을 열자 은비늘 꽃가루가 날린다.
버드나무 허리에 기대 선 햇살 부스러기,
후리진 곳에 희미한 등꽃을 남기고 사라진다.
은비늘 꽃가루가 떨어진 곳의 물이 얼어붙는다.
달그림자 껴입고 살얼음판에서 춤을 춘다.
달은 물주머니 한가운데 격자무늬를 새기고,
물주머니는 반달을 만들고 보름달을 빚는다.
만월의 빛으로 첼로의 선율을 빚는다.
온몸에 떠 있는 격자무늬, 창살을 만든다.
파놉티콘·29
―외로운 존재
냉장고에서 꺼낸 가슴을 주머니 속에 넣는다.
그늘에 앉아서 너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햇빛 아래서 얼굴을 태우는 너, 너,
너를 만지면 가슴이 벽화처럼 딱딱해진다.
메시지를 기다리는 밤,
시간은 딱딱하게 굳어서 땅 위에 박힌다.
혼자 걷는 별, 뒤돌아 와서 별을 보며,
수상한 메시지를 보낸다.
야구장, 축구장, 백화점, 지하철,
거리로 쏟아져 나온 별, 별, 사람들,
하늘을 향해 손을 든 별, 별, 사람들,
서로 다른 곳을 향해서 같은 내용의 메시지를 보낸다.
파놉티콘·30
―광기의 역사
잠을 자던 태풍의 눈이 눈썹달을 올리고 눈을 뜬다.
미열이 나던 바람의 머리에서 고열이 나고 열꽃이 핀다.
조용한 집의 입간판이 뭉그러져 얼굴을 찌푸리고,
고두쇠가 헐거워진 문짝이 이리저리 날아다닌다.
벽 속 뼈대를 얽은 때 세로 엮어댄 나무에 가로댄 가시새,
바람날개를 달고 날아다니며 하늘에 그물을 던진다.
밀기둥이 넘어지고 디딤돌이 구르고 박힌 돌이 구르고,
물기둥이 서고 사물의 그물코가 태풍의 눈에 걸린다.
울렁증이 온 바다가 갯바위에 널린 모시적삼 위에 수를 놓는다.
마른하늘에 번개가 번쩍이고 폭우가 내리며 비바람을 부른다.
영혼과 몸이 만나는 지점, 순간의 미학이 꽃핀다. 열정이다.
치열하고 뜨거운 그 곳에 마그마가 부글부글 끓어 넘친다.
* 미셸 푸코의「광기의 역사」를 읽고.
파놉티콘·34
―무인텔
그녀가 로비 청소를 하다 말고 컴퓨터 화면을 본다.
승용차에서 두 남녀가 팔짱을 끼고 내린다.
여자가 선글라스를 벗고 거울을 보며 립스틱을 바른다.
그들을 따라 그녀의 시선도 덩달아 엘리베이터를 탄다.
불타는 눈빛은 엘리베이터를 숨가쁘게 끌고 오른다.
그녀는 청소도구를 들고 서서 키득거린다.
덜커덕 문이 열리고 매니저가 들어온다, 뭐 하는 거요.
컴퓨터에 개판이 열려서 개를 쫓아내려고요, 쳐다보며 웃는다.
그녀는 뒤통수에 눈을 남기고 복도 저 편으로 사라진다.
천선자 2010년 《리토피아》로 등단. 시집 『도시의 원숭이』. 전국계간지작품상 수상. 리토피아문학상 수상. 막비시 동인.
시작메모
교통벌칙금이 나와서 농협에 내고 돌아오는 길에 아무리 생각을 해도 이해가 가지 않아서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인터넷 검색을 했다. 도로법이 변경되고 시행되는 것을 모르고 평소 습관대로 운전을 한 것이 잘못이고, 뉴스를 보지 못한 죄, 바뀐 법을 흡수하지 못한 죄,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의 이치를 터득하지 못한 내가 귀가 멀고 까막눈으로 산 탓이다. 실없는 항변이 모기 소리로 앵앵거리며 도로 위에 미세 먼지로 겉돌았다.
‘파놉티콘’이라는 제목으로 시집을 준비하면서 원형감옥, 위성, 인터넷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과 그 결과, 그리고 시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다가 죄 없는 감시카메라를 눈 빠지게 바라보다가 가자미눈으로 나도 너 다 보고 있거든, 요것들이 나의 이십사 시간을 통째로 지 맘대로 업어치고 메치고 둘러치고, 이리저리 굴리며 가지고 놀아, 입을 삐죽거리며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를 쓰고, 차를 몰고 테크노마트 지하 주차장 입구에서 주차권을 받아들고 주차를 했다.
삼층에 있는 내과에 가서 독감 치료를 받고 지하 일층으로 내려와 녹색 향기가 솔솔 풍기는 한의원을 지나 봄꽃이 활짝 핀 미리내꽃가게를 지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교통카드로 전철 요금을 내고 구의역에 내려 피아노 레슨을 받고 동대문역사공원을 한 바퀴 돌아 종합시장에서 광목천을 사고 두타의 계단을 오르내리며 구경하다가 하늘정원 카페에서 에스프레스 잔에다가 흰구름 한 스푼을 넣고 휘휘 저어 먹은 뒤 마트에서 장을 보며 눈을 크게 뜨고 진열장을 살폈다.
포인트 점수를 많이 올리려고 있는 것을 또 사고, 일정 금액이 넘으면 한 시간 주차권을 무료로 준다고 또 사고 원 플러스 원은 웬 떡인가 싶어 필요 없는 물건을 한 트렁크 사가지고 주차카드를 넣고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어디에나 거의 설치되어 있는 감시카메라, 어두운 곳이나 낯선 곳에 서 감시카메라가 없으면 오히려 불안하고 초초하고 등 뒤에서 누가 나타날 것만 같다. 도처에 깔린 카메라를 보면 벽 속에 숨은 도둑고양이의 동그란 눈이 반짝였다.
사방팔방에서 죽순처럼 자라는 눈, 반짝반짝 빛나는 수많은 눈, 그 눈에 스스로 길들여진 광대는 위성이라는 원형감옥 속에 또 다른 광대를 가두게 되었다. 따스한 시선을 잃어버린 감옥 속에서는 슬프고 외롭고 모두가 바쁜 사람들, 노령사회로 가는 길목에 서 있는 나는 궁중 속에 홀로 떠 있는 섬이다.
요즈음 사람은 저마다 홀로 지내는 법을 터득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한다. 어떤 사람은 미친 듯이 일을 하며 시계추처럼 똑딱거리고, 시간의 기타줄이 늘어진 사람들은 공원이나 전동차를 타고 다람쥐 쳇바퀴를 돌고, 그렇지 않는 사람들은 빠르게 반응하는 기계를 잡고 정을 쏟으며 사랑을 꿈꾼다.
무엇인가에 미치지 않으면 외로워 죽을 것만 같아 일탈을 꿈꾸는 사람들, 이렇게 머리가 멍해질 때는 혹시 머릿속이 기계 부품으로 꽉 채워진 것이 아닐까, 까마귀 고기를 수시로 먹는 것은 건전지가 소모됐겠지, 청계천 기계 상가로 가 대형 건전지를 사 교체하고 전원을 켜야 하는 건 아닐까,
어느 날 나도 모르게 머릿속의 기억을 모두 지워버리고 필요 없는 주민등록 번호를 없애고 뇌 속에 침을 넣고 바코드를 찍은 로봇이 되는 건 아닐까. 영영 기억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사람이 한순간에 무생물이 되는 건 아닐까, 모호한 현실 속에 모호한 머릿속에 자꾸만 물음표가 꾸물거린다. 좀 더 인간적이야 해, 스스로 생각하고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추우면 춥다고 더우면 덥다고 울고 싶으면 울고 웃고 싶으면 웃고 그래, 난 따스한 가슴이 있고 슬픔과 기쁨을 아는 사람이야, 오늘은 실컷 웃고 떠들고 눈물을 펑펑 흘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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