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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호/단편소설/유시연/낮고 쓸쓸하고 음울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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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069회 작성일 17-10-27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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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유시연 (소설가)





낮고 쓸쓸하고 음울한



색채의 경계를 구별할 수 없는 어둠이었다. 그 느낌은 무겁고 축축하게 여자를 덮쳐왔다. 서둘러 벽에 부착된 스위치를 누르고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급하게 거실, 부엌, 안방의 불을 켰다. 순식간에 집안은 빛의 꽃이 확 피어난 듯 눈이 부셨다. 이즈음 여자는 까마득한 낭떠러지에 서 있는 절망감에 싸여 있었다. 남자의 딸을 만난 후부터였다. 남자의 머리카락은 유난히 검었다. 가발인 것 같았으나 묻지 않았다. 남자는 딸 하나를 키우며 혼자 살아온 과거를 마치 훈장처럼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써먹었다. 부인과 사별하고 혼자 긴 시간 살아온 그의 이력을 이해하나 그것을 경력으로 자랑삼는 것은 피곤했다. 혼자 살아온 십 년의 시간이 그렇게 대단한 걸까. 그러면서도 의구심이 떠나지 않는 것은 그가 처음부터 독신을 고집한 게 아니라 계속 선을 보고 만난 여자가 서른 명도 넘는다고 말할 때 떨떠름한 기분이었다.
“주위에서는 제가 뭐 죽은 부인을 잊지 못해서 여직 혼자 산다고 말하지만 천만의 말씀이지요. 어떤 사람은 딸자식 땜에 재혼도 마다하고 혼자 산다고 하지만 그건 더더욱 아닙니다. 제 마음에 드는 짝을 못 만나서 그런 거죠. 한눈에 필이 오는 그런 여성을 기다렸다고나 할까요?”
그가 쉬지 않고 말을 한 뒤 유리컵의 물을 반이나 들이켤 때 여자는 서쪽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늘은 검붉은 노을이 지고, 구름이 흘러가고 있었고, 새 떼가 무리를 지어 날고 있었다. 여자는 새 떼와 붉게 물드는 하늘을 보며 지루한 남자의 말에 하품이 나오려는 것을 애써 참았다. 저녁햇살이 물결처럼 남자와 여자가 앉은 창을 들이비치고 있었다. 남자의 첫 인상은 괜찮은 편이었다. 중년의 기름기가 느껴지지 않았는데 여자가 관심을 표명한 것은 철인3종 경기를 즐긴다는 점이었다. 남자의 말대로 그는 아내가 죽은 후 운동에 빠져 지냈는지도 모를 일이고 아니면 그 반대로 무수한 여자들에게 차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오래 알고 지낸 이웃집 여자 식사 초대 자리에서 남자를 처음 보았는데 그는 여자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아는 눈치였다. 그렇다하더라도 이혼녀에 대한 사회적인 편견을 그도 갖고 있는지 여자에 대한 탐색의 시선을 놓지 않았다. 남편과는 어떻게 헤어졌느냐, 아들 양육비문제는 해결했느냐, 자기는 이혼녀라고 해서 뭇사람들처럼 상대적이라거나 뭔가 문제가 있어서 헤어졌다는 식의 편견은 갖지 않겠다, 하는 말을 두서없이 풀어놓았다. 오히려 남자의 그런 말에 여자는 심한 모욕을 느꼈다. 여자는 커피 리필을 부탁하거나 아이스크림을 추가로 주문해서 찻스푼으로 천천히 입에 떠넣으며 남자의 말을 건성으로 흘려들었다.
남자는 지난번 자신이 경솔하게 말이 많았다며 정중하게 사과를 하고는 여자에 관해 이것 저것 질문을 던졌다. 그 질문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 것으로보아 중요한 건 아니었던 것 같다. 첫 인상과 달리 두 번째에는 말이 없고 수줍음을 약간 타는 것 같아 여자는 대담하게 그의 여성이력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다. 남자는 딸자식 뒷바라지하느라 여자관계는 진지하게 깊어지지 못했다고 대답을 했고 그 대답이 우스워서 여자는 크게 소리내어 웃었고 여자의 웃음소리에 남자도 따라 웃었고, 동시에 그의 표정이 조금 환하게 펴지는 것을 보며 순진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다. 
“인간 수명이 지금 평균 나이보다 여덟 살은 더 늘어났고, 앞으로 백 살은 끄떡없다는데 혼자 산다는 건 잔인하죠. 청춘일 때에야 젊으니까 무엇이든지 맘먹은 대로 할 수 있고, 막말로 제 잘난 맛에 살 수 있죠. 하지만 늙어가면서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어림없죠. 늘그막에는 인생친구, 그렇죠, 인생친구가 필요한 법이죠.”
남자는 그럴듯한 논리로 여자의 반응을 유도했고 여자는 시선을 남자의 고개 너머로 멀리 두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제 말이 맞죠?”
“네? 아, 네.”
돌연 남자가 질문을 던져서 여자는 그만 어리둥절한 표정을 숨긴 채 대충 미소로 얼버무렸다.
“말이 없으시네요. 제가 그 점을 좋아합니다. 말 잘하는 사람들, 잘난 사람들, 피곤합니다.”
남자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낯을 찡그렸다. 남자는 어느 순간 은근슬쩍 말을 놓았다.
“뭐 하시나? 식사는 하셨고?”
“먹었어요.”
남자의 경어체도 아니고 반말도 어정쩡한 그런 질문에 여자는 꼬박꼬박 경어를 썼다. 며칠 후 남자의 딸이라며 전화가 왔다. 한 번 만나자는 거였다. 무슨 일로 그러죠, 전화로 하면 안되나요, 되물었으나 남자의 딸은 만나서 얘기할 게 있다고 했다. 얼떨결에 약속을 해놓고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남자의 딸은 약속 장소에 먼저 와 기다리며 시계를 보고 있었다. 십여 분 정도 늦은 것 같아 여자가 조금 늦었네요, 오래 기다렸죠, 라고 하자 남자의 딸은 조금 기다렸다고 말했다. 키가 작고 갸름한 얼굴에 약간 신경질적인 스타일이었다. 해수라고 자기 이름을 소개한 그녀는 물을 한 모금 마시더니 대뜸 나와 줘서 고맙다며 할 말이 있어서 나와 달라 부탁했노라고 말했다. 여자는 그녀를 물끄러미 건너다보았다.
  “우리 아빨, 사랑하세요?”
  그녀의 말에 여자는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그녀가 빤히 쳐다보며 여자의 표정을 살폈다.
  “왜 그런 질문을 하지?”
  여자는 기선 제압을 위해 말을 놓았고 그녀가 순간적으로 여자를 노려보는 듯했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빠 말에 의하면 친구분이 우리 아빨 많이 좋아하신다는데요?”
  “그런데, 뭐가 문제지? 좋아하면 안 되나?”
  여자는 반발심이 일어나 그렇게 대꾸했다. 그러자 그녀는 조금 흥분한 듯 본격적으로 하고 싶은 말을 풀어놓았다.
 “결론만 말 할게요. 전 아빠가 고른 여자면 무조건 찬성이에요. 하지만 아빤 일하는 사람이에요. 거느린 직원들 가족생계가 우리 아빠 손에 달렸어요. 그런데 지각이 있는 분이라면 일찍 좀 들여보내야 되지 않겠어요?"
  “들여보내다니 뭘 말이야?”
  “우리 아빠 말이에요. 매일 밤 자정이 넘어 들어오거나 새벽에 들어오시는데 그건 친구분이 잘못하고 있는 거라구요.”
  여자는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알았다. 고른 여자라고? 어린 것이 당돌하네. 왕비를 간택하는 것도 아니고 누가 누구를 골라, 표현방식이 왜 이리 직설적인 거야, 여자는 짧은 순간 온갖 잡다한 생각에 빠져들었고,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줄다리기를 하는 형국이 되어버린 상황에 모멸감을 느꼈고 괘씸했지만 어디까지 나오나 두고 보기로 했다. 그녀의 표정이 조금 상기되어 있었고, 스스로의 감정에 휘둘려서 우유를 쏟은 아이가 어찌할 줄 몰라 하는 것 같기도 했다. 
  모카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여자는 차근차근 그녀에게 우리는 어쩌다 한 번씩 만나 밥 먹고 차 마시고 그러고는 헤어진다, 그뿐이다, 설사 늦게 집으로 간다 해도 우리는 성인이다, 아무도 우리를 간섭할 수 없다… 그런 식으로 설명해주었지만 그녀는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러고는 할 말이 없는지 “당신이 잘못하고 있어요.” 라고 쏘아붙이고는 일어섰다. 여자는 황당해서 한동안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해수를 만난 며칠 후 남자를 만나 해물 칼국수를 먹었다. 국물을 떠넣으며 물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는 남자를 쳐다보며 당신 딸을 만났어요, 라는 소리가 목구멍에까지 올라왔으나 뜨거운 국물을 삼키며 그 얘기도 꿀꺽 삼켰다. 남자는 여자가 자기 딸을 만난 걸 모르는 듯했다. 굳이 여자가 말할 필요는 없었다. 칼국수를 먹고 카페로 가서 모카커피를 시켜마셨다. 남자는 부쩍 시계를 자주 들여다보았고, 밤 아홉 시 뉴스를 들으며 일어섰다. 처음에는 두 부녀가 오랫동안 의지하며 엄마 없는 자리를 대신해서 살아왔으니 서로에게 기대 산 세월을 무시하면 안 되겠다 싶어서 이해를 했다. 그런데 남자는 밤 아홉 시를 넘기면 몹시 불안해했다. 남자의 딸은 스물여덟 살, 알만한 나이였다. 남자는 딸자랑을 주로 했다. 일류대학에 들어가서 장학금을 받았으며 지금은 강남의 유명한 입시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데 연봉이 만만치 않노라고 자랑했다.
  남자의 딸을 만난 이후 여자는 일부러 전화기를 꺼놓거나 약속을 핑계로 남자를 만나지 않았다. 한동안 남자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여자가 좀 심했나 싶어 혼잣소리로 중얼거리는데 돌연 남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공연보러 안 갈래요? 표가 두 장 있길래 전화했어요.”
  “무슨 공연인데요.”
  “캣츠.”
  “뮤지컬 캣츠요?”
  “그래요, 뮤지컬 캣츠.”
  여자는 뮤지컬캣츠라는 말에 그만 그동안 있었던 일을 잊어버리고 공연을 보러 가겠다고 얼른 말해버렸다. 꼭 한 번은 보고 싶은 공연이었다. 웨스트 앤드와 브로드웨이에서 장기공연을 했으며 쓰레기가 산더미처럼 쌓인 슬럼가를 배경으로 고양이 세계를 인간세계에 빗대어 풍자한 번안극이었다.
  햇볕은 눈이 부셨다. 봄볕은 풀이며 꽃, 나무들을 어루만지며 보듬어주고 있었다. 그 모양이 사랑을 나누는 행위 같았다. 온 천지에 사랑이 넘쳐나고 있었다. 사랑이라는 말을 떠올리다가 문득 쓸쓸해졌다. 여자의 인생에 사랑이 있기나 한 걸까. 그와 헤어지던 날은 봄볕이 유난히 눈이 부셨다. 붉은 영산홍은 터질 듯 꽃봉오리를 터뜨리며 만개했고, 라일락은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조용히 흔들렸다.
  몇 년 만에 영화관 앞에서 그를 만난 날은 헤어진 후 삼 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여자는 그와 함께 했던 날들을 새삼스럽게 떠올리게 되었다. 타인과도 못한 관계. 헤어진 남녀 사이란 그랬다. 자식을 둔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그렇게 까마득히 외면할 수 있는지, 세상 어디라도 함께할 것 같더니 인간의 감정이란 참으로 가볍고 자기중심적이고 편리한 존재였다. 싫으면 싫다거나 좋으면 좋다는 표현 없이 자신을 억누르고 살았던 그는 노인과의 관계나 여자와의 관계에서도 자신의 감정을 숨겼다. 화가 나면 침묵 속으로 깊이 침잠해버리고는 누가 꺼내주지 않으면 절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런 그가 여자와의 일을 들키는 순간 도망가버렸다. 사과를 한다거나 변명을 한다거나 다시 한 번 기회를 달라거나 그런 흔히 보아오던 장면과는 먼 그의 태도는 그와 함께 했던 시간이 딴 세상에서 일어난 일처럼 아득했다. 다시 만난 그는 살이 약간 찐 듯했다. 그의 얼굴에 흐르던 기름기는 안정된 중년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겉으로는 말이 없고 타인의 말을 수용하며 특히 여성동료에게 깍듯하게 경어를 쓰는 그는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외부의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에게 인생이니 열정이니 하는 것을 기대한다는 건 애초부터 무리였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그의 삶은 여자와의 관계에서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진정성이 결여된 부부관계. 속을 벌레에게 파먹힌 밤처럼 알맹이 빠진 관계란 건조했다. 삶 속에서 여자는 충만한 욕망을 채우기를 바랐으나 언제나 허기졌다. 그에게서 채우지 못한 허기는 체념을 불렀고, 인생이란 다 그런 거라고 허무주의자의 변명을 떠올렸다. 한때 여자는 자신의 삶이 썩 괜찮은 조건이라고 만족한 시절이 있었다. 아직 아이가 어렸을 때였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가 고사리 손으로 피아노건반을 짚어가며 클래식을 들려주거나 김밥을 싸서 공원으로 주말나들이를 나갈 때면 연신 노랫말이 여자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아이와 부르는 동요의 하모니와 어우러지던 맑은 웃음소리, 그가 타주던 커피 향내. 그런 시절이 여자에게도 있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집안에 키우던 식물이 자꾸 말라죽기 시작했다. 정성들여 키우던 화초는 이상하게도 뿌리가 썩거나 잎이 자꾸 말라갔다. 화분 식물이 죽어가면서 집안에는 메마른 공기만이 떠다녔다.
  집안에 식물을 길러본지도 까마득했다. 그와 헤어진 이후 모든 생명을 가진 개체는 집안에서 사라져버렸고 삶이라는 흔적을 지우려 애를 썼다. 벽에 걸었던 가족사진을 떼어내고 그림액자를 내렸으며 흰색으로 벽지를 다시 했다. 죽은 화분을 내다버리는 일도 일이라 화초를 키우지 않았다. 그런데 남자가 만난 지 백일 되었다며 사랑초를 선물했다. 짙은 자주색 이파리는 햇볕을 먹고 자라는 식물이었다. 태양이 뜨는 낮동안에만 잎을 활짝 벌리고 태양이 지는 밤에는 잎을 닫아버리는 아주 신비한 식물이었다. 가늘고 긴 꽃대궁 끝에는 연한 흰색 테두리에 분홍색이 섞인 꽃이 매달려 있었다. 거실에 두었더니 꽃들은 일제히 창쪽으로 고개를 틀어서 기다란 줄기가 거의 드러눕다시피 쓰러져 있었다. 해를 향한 집요한 욕망을 보는 것 같았다. 해지는 저녁이 오면 여자는 사랑초를 관찰하는 일에 열심이었다. 무의미하게 지내다가 새로운 분야에 취미를 붙인 사람처럼 물을 주고 진딧물 약을 뿌려주고 말을 걸어보고 클래식음악을 틀어주는 일에 열심이었다. 잎을 꼭 닫은 사랑초는 나비가 꽃에 앉아 깃을 접은 것처럼 보였다. 여자는 좀 더 자세히 식물을 관찰했다. 형광불빛이 가까운 곳의 이파리는 잎을 활짝 펼친 채 빛의 파장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태양빛이 아닌 밤의 형광빛에서도 잎은 자신을 펼쳐 보이고 있었다. 잘못된 사랑도 사랑임을 말해주는 걸까. 세상이 불륜이라 손가락질을 하거나 질타를 해도 당사자들은 진실하다고 믿는 것처럼 가짜 빛 아래에서도 반응을 보이는 식물의 생장이 불가사의 했다. 세상의 모든 사랑에 대해 아무도 쉽게 판단하거나 비난할 수 없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우울해졌다.
  지난 번 짧게 만나 헤어진 후로 여자는 아직 그에게 할 말이 남았음을 알았다. 당신이 여자가 생겼다고 솔직하게 말하고 나와 관계단절을 요구했으면 보내주었을 거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누군가를 만나면서 여자를 기만한 건 참을 수 없는 모욕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여자 안에 깊이 웅크린 바윗덩이는 무게를 점점 더 불려갔다. 저물녘 검은 새 떼가 하늘을 날아가는 풍경을 보거나 어둔 밤 야생고양이가 담장을 소리없이 기어가는 장면을 보면서 여자는 쓸쓸했다.
  아들에게서 전화가 온 것은 샤워를 하고 마지막 머리카락을 헹구던 참이었다.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큰 수건으로 알몸을 가리고는 수화기를 들었다.
 “나 안 죽었다.”
 "하하.”
 “웬일이냐, 평소에 연락없다가.”
 “에이, 어머니, 삐치셨죠, 뭐 그런 걸 가지고 비치시긴, 어버이날 축하드려요.”
 “말로만?”
 “다음에 안마해드릴게요. 옆에 친구가 바꿔달래요. 거 아시죠, 작년에 세 놈이서 우리집에 쳐들어와 어머니 놀래킨 녀석들 말이에요.”
  얼떨결에 아들은 수화기를 친구에게 넘겼고 넉살좋은 목소리가 귀에 경쾌하게 들어와 박혔다. 요즘 남친과 행복한 시간 보내신다고 들었다느니, 잘 지내고 계시냐, 한 번 쳐들어오겠다, 등등 두 녀석이 번갈아 휴대폰을 바꿔가며 안부를 전하는 통에 솔직히 조금 어안이 벙벙했다. 여자에게 남자친구가 생긴 일을 아들이 친구들에게 자랑했다니, 그게 자랑거리가 되는 세상인가. 머리에 둘렀던 수건을 풀어 몸을 닦으며 여자는 쳐진 가슴과 뱃살을 손바닥으로 어루만졌다. 배가 조금 나오기는 했지만 옷으로 몸을 가리면 아직은 실루엣이 드러나는 몸매였다. 남자친구를 아들에게 소개하기 전 여자는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들은 여자의 말이 떨어지기가 바쁘게 엄마 인생 찾으세요, 한 마디 하고는 덧붙여서 아빠에 대한 희망은 접으라고, 미련두지 말라고, 그렇게 하고 나간 사람이 다시 오겠어요, 라고 말하고는 자기 방으로 건너가더니 피아노 뚜껑 열리는 소리가 나고 이어서 베토벤 곡 월광이 흘러나왔다. 아들아이의 피아노소리는 낮고 쓸쓸하게 들렸다. 아들의 피아노소리는 쓸데없이 감상에 젖게 해서 여자의 가슴을 먹먹하게 하더니 그만 눈물이 주르르 흘러나오고 목이 메었다. 이혼 후 생활이 어려울 때마다 피아노를 몇 번인가 팔아치우려고 하다가 아들을 생각해서 참았다. 재수시절 아들은 그 힘겨운 시간을 피아노로 자신을 위무했다. 남편이 가방을 싸서 집을 나간 후 아들은 자기 방에 틀어박혀 피아노 연주로 집안을 침묵과 고요로부터 구출해내었다. 대학기숙사에 배정이 되었던 아들은 걱정이 되는지 자주 전화를 했다. 이제 아들은 어느 정도 여자가 땅바닥에 발을 딛고 선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입대통지서를 받아놓고 곧 군대에 갈 아들은 남친 앞에서 어머니를 부탁한다고 말했다.
  아들 전화를 받고나서야 여자는 시골에 홀로 계신 아버지를 떠올렸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아버지는 전화를 금방 받았다. 그것은 수화기 옆에서 전화오기만을 기다리는 것처럼 느껴졌는데 한동안 연락을 드리지 못해 아버지는 내심 여자의 안부가 궁금했던 것이다. 어버이날인데 가뵙지 못해 죄송하다고 말하는데 아버지는 노인의 안부를 묻는다. 잘 계시죠 뭐. 대충 얼버무리고는 건강한지 식사는 잘하고 있는지, 도우미 아줌마는 맘에 드는지와 같은 일을 물어보고, 마지막으로 건강하시라고 인사를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아버지는 여자가 이혼한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다. 가족법이 개정된 게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 것도 협의이혼을 하고 나서였다. 전화를 할 때마다 아버지는 꼬박꼬박 노인의 안부를 묻고는 잘 모시라고 당부를 한다. 알았다고, 염려마시라고, 매 번 대답을 하면서 여자는 알 수 없는 허전함과 쓸쓸함이 가슴을 치고 지나감을 느껴야 했다. 홀시어머니에 외아들. 아버지는 그 점을 걱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홀아비로 딸자식을 키워온 당신이 홀로 외아들을 키운 안사돈에 대한 연민과 동병상련을 느꼈던 것 같다.
  결혼한 첫 해, 아버지는 직접 농사 지은 벼를 찧어 햅쌀을 한 가마 부쳐주었다. 그러고는 얼마 후 대추를 털었다며 직접 자루에 담아 시댁을 방문했다. 노인은 급작스러운 바깥사돈의 출현에 몹시 당황하는 것 같았다. 여자는 몸 둘 바를 몰라 허둥거렸고, 그러면서도 거실 소파에 앉은 아버지 얼굴을 연신 훔쳐보았다. 가슴 안에 오롯한 기쁨이 넘치고 비로소 내 편이 가까이 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몰려왔다.
  아버지가 세 번째 방문하였던 여름은 더위가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새로 분양받은 아파트로 이사를 해서 조금은 어수선했고, 주문한 어린 아들의 그림동화세트가 하필이면 바쁜 그날 배달이 와서 정신이 없었다. 택배기사에게 사인을 해주고 돌아서서 그림동화책을 옮기는데 노인의 빈정거림이 들려왔다.
  “너는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뭐가 있냐, 어미없이 자라서 배운 게 그 모양인 게지.”        그때 열어놓은 현관문 앞에 얼어붙은 듯 서 있던 아버지를 발견한 건 남편이었다. 남편이 허둥거리며 아버지 앞으로 가더니 베란다 쪽을 바라보며 장인어른 오셨다고 나와 보시라고 소리치는가 하면, 여자를 보고는 뭐하냐고 아버지를 모시라고 채근했다. 아버지는 들고 있던 커다란 고무나무화분을 바닥에 내려놓고는 말없이 계단을 밟으며 가버렸다. 멀어지는 아버지의 구둣발 소리가 여자의 가슴을 두드리며 울리고 있었다.
  영화관 앞에서 마주친 전 남편은 약간 살이 쪄보였다. 마른 북어포같이 비쩍 말라 서 있으면 휘청거릴 것 같던 그가 살찐 사실이 낯설어 여자는 알아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칠 뻔했다. 그는 여자를 보더니 환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잘지내냐는 의례적인 안부를 묻고는 약속이 있다며 바쁘게 걸어갔다. 마음의 여유가 생겼는지 짐을 싸서 급하게 집을 나가던 예전의 모습과 달라져 있어서 시간의 무게를 실감했다. 그가 아버지 안부를 물어서 생소했다. 아버지에게 한 번이라도 따뜻한 시선,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넨 적 없는 그가 아버지의 건강을 묻는 의도가 의심스러웠다. 어쩌면 아버지의 죽음을 확인하고 싶은 속내는 아니었을까. 여자는 지레짐작 했고 헤어진 그에 대한 불신의 벽을 아직도 허물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와 헤어질 무렵 아버지는 건강이 좋지 않아 병원 응급실에 두 번인가 실려 갔었다. 당신 스스로 병원비를 챙겨 양복안주머니에 넣은 채 119차를 불러 도시에 있는 병원으로 실려 갔다니, 그 외로움은 어떠했을까. 아버지는 매 번 메모지를 현금다발과 함께 안주머니에 넣어두고는 누군가 쓰러진 자신을 병원에 데려다줄 것을 바랐다. 메모지에는 택시를 불러달라거나 병원차 혹은 119를 불러달라고 씌어 있었다. 아버지의 메모를 본 날 여자는 뒤뜰에 나가 소리없이 울었다.
  그날 여자는 오래 전 아버지가 이사 간 시댁을 방문하며 고무나무 화분을 사 온 것을 기억해냈고 그 일은 오래오래 여자의 가슴에서 고무나무가 자라는 결과를 낳았다. 여자의 가슴 안에서 크는 고무나무의 덩치가 커질수록 그에 대한 감정도 딱딱해지고 건조해져갔다. 아버지를 떠나 살면서 여자는 아버지에게 너무 많은 상처를 안겨준 딸이 되었다. 어미없이 자란 외동딸에 대한 아버지의 기대는 착한 남자 만나 온전한 가정을 꾸리며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이었다. 아이 백일 때 아버지는 안사돈만 있는 시댁에 오는 것을 몹시 겸연쩍어하면서도 외손자 선물을 사갖고 왔었다. 부엌에서 노인을 도와 이것저것 음식 장만을 하면서 무수한 타박을 들었다. 물 한 잔 마시고 싶어 부엌에 나오던 아버지와 여자의 눈이 마주쳤고 여자는 씩 웃어주었는데도 아버지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있는 것을 감출 수 없었다. 식탁에서 밥을 뜨는 둥 마는 둥 하고는 서둘러 일어나 가는 아버지를 배웅하는데 아버지는 미안하다, 라고 한 마디 했다. 택시를 타고 떠난 아버지의 뒷모습을 여자는 한참 지켜보았다.
  아버지는 가끔 전화를 걸어 외손자 안부를 물었다. 물론 당신의 딸자식에 대한 애정표현을 외손자를 통해 에둘러 표현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여자로서는 자주 찾아뵙지 못하는 죄스러운 마음을 항상 가슴에 안고 살았다. 그러다 마침 어버이날도 다가오고 아버지 생신도 가까워서 기회를 보아 아버지 집에 갔다. 아들이 여섯 살 무렵이었다. 남편은 바쁜 일을 핑계로 빠지고 해서 어린 아들과 갔다. 아버지 성격대로 집안팎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깔끔한 집안을 보자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저녁을 지어 밥을 먹는데 아버지가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는 거였다.
  “안 봐도 알겠다. 너무 힘들면 보따리 싸서 집으로 오너라. 사람을 들였으면 제 식구처럼 감싸고 아껴줘서 제 가족을 만들어야지, 몰골이 그게 뭐냐, 해골바가지를 해가지고.”
  아버지가 혀를 차며 하는 말에 여자는 젓가락으로 반찬을 헤집다가 눈물방울을 떨어뜨렸다. 영문을 모르는 어린 아들은 여자를 쳐다보며 울음을 터트렸고 아버지는 밥을 남긴 채 수저를 놓고는 일어서더니 마루에 나가 담배를 피웠다. 아버지의 그 말 한 마디는 더욱 독하게 마음을 다잡고 현실에 적응하게 만들었다. 여자는 지금도 남편이 왜 아버지에게 곁을 안주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추측으로는 어쩌면 혼자 된 아버지에 대한 부양의무 때문이 아니었나 짐작할 뿐이다. 아버지는 입버릇처럼 남은 재산은 사회에 내놓고 갈 거라 말했으므로 그가 아버지를 떠맡을 확률은 적다고 볼 수 있었다. 농사를 지으면서 시골면장으로 명예퇴직한 아버지는 나라 덕분에 이만큼 먹고 살았다며 죽을 때는 그 돈을 환원할 거라 누누이 강조했다. 그 점을 그는 늘 불만스러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어려울 때마다 아버지에게 돈을 빌려 썼다. 이자는 없었지만 꼬박꼬박 갚았다. 그는 아버지를 지독하다고 비아냥거렸다. 한 번이라도 따뜻한 기억이 있다면 그 힘으로 평생을 살아갈 수 있었다. 오래오래 울궈먹을 변변한 기억 한 편조차 없는 삶이란 메마르고 거칠 뿐이었다.
  여자는 사랑초를 키우며 몇 개 더 사다놓은 화분에 물을 준다. 새삼스럽게 남자를 떠올려본다. 남자의 딸을 만나 이상한 소리를 들었어도 하나도 섭섭하거나 상처가 되지 않았던 것은 남자의 비중이 여자 안에 미미한 채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애초부터 기대를 갖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로부터는 더 이상 연락이 없다. 서른이 가깝도록 애인 하나 만들지 못하고 아버지를 감시하며 살아가는 그녀의 인생이 황량한 고원 같다는 생각을 하다가 여자는 소스라쳐 놀란다. 자신의 내면을 보는 듯해서다. 남자는 매너가 좋은 편이었다. 남자는 개인생활에 대해서는 딸 얘기 외에는 일절 말이 없었다. 어떤 친구가 있는지, 직장일은 힘든지, 아니면 할 만한지 도무지 틈을 보이지 않았다. 남자와는 담백한 거리를 유지했다. 남자가 선물한 사랑초를 보며 진지하게 그와의 관계를 모색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사랑초에 물을 주고 있을 때 휴대폰이 울려 받으니 다급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아버지가, 아버지가, 저 좀 도와주세요.”
  놀라 누구냐고 물었더니 해수라고 말해서 처음에는 누구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으나 곧 그녀가 지난 번에는 미안했다고 울먹이며 말하는 바람에 기억할 수 있었다. 남자가 쓰러졌다는 것이다. 여자는 먼저 침착하게 전화로 119에 신고하라고 말하고는 외출준비를 서둘렀다.
  남자는 수면제를 과다복용했다. 남자가 응급실에서 병실로 옮겨진 후 해수는 울기만 했다. 뜨거운 캔커피를 두 개 사서 해수와 나누어 먹고 그녀를 위로했다. 남자는 몇 시간 후 의식이 돌아왔고 얼굴은 창백했다. 해수는 지쳐서 보호자 대기석에서 잠들었다. 남자의 손등에 주삿바늘이 꽂혀 있고 링거 줄이 달려 있었으며 푸른 힘줄이 보였다. 남자의 손은 의외로 작았다. 남자가 아무런 표정없이 초점을 천장에 둔 채 미이라처럼 누워 있었다. 해수가 많이 놀란 것 같다고 작은 소리로 말하자 남자가 탁한 저음으로 고맙다고 대답했다. 밤이 깊어서 해수를 깨워 집으로 보내려 했으나 그녀는 말을 듣지 않았다. 인사를 하고 일어서려는데 해수가 가지 말라고 붙잡았다. 무섭다고, 같이 있어 달라고 말하는 해수의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남자가 잠이 들었는지 약하게 코고는 소리가 났다. 해수는 열여덟 살 나이에 혼자 어머니 병실을 지키다가 임종을 맞은 일을 담담히 말해줬다. 그때 너무 무서웠다고, 남자가 출장 중이라 아무도 없었다고 그래서 흰색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고 고백했고 여자는 해수의 어깨를 감싸안아주었다. 병실에서 여자는 해수와 함께 꼬박 밤을 새다시피 했다. 해수의 겁먹은 눈을 보면서 여자는 그녀가 많이 외로웠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줌마라고 부르던 해수는 어느새 여자를 언니라고 불렀다. 새벽하늘이 밝아올 무렵 남자는 의식을 완전히 되찾았다. 담당의사는 며칠 병실에 더 있으면서 지켜봐야겠다고 했고, 해수 역시 휴가 받은 셈치라고 말했다. 평상으로 돌아온 것 같아 여자는 집으로 돌아왔다.
  며칠 후 남자가 고맙다며 점심밥을 같이 먹자고 해서 마침 아점을 먹은 터라 차나 마시자고 나갔더니 해수도 함께였다. 남자는 여전히 낯빛이 어둡고 창백했다. 그 자리에서 남자는 해수가 찾아왔던 일을 정식으로 사과했다. 오해가 있었다며, 그런 줄도 모르고 자기를 피하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남자는 여성들에 대한 선입견이 있노라고 고백했다. 해수 앞이라 말하기가 조심스럽지만 이제 알만한 나이에 이른 딸이라 솔직하게 말하는 거라며 그동안 만난 여성들과의 일을 조심스럽게 털어놓았다.
  “아, 이 사람이다 싶어서 결혼을 결심한 여자가 있었는데 알고 보니 의도적으로 접근했더라구요. 금전적 정신적 손해를 입히고 여자가 외국으로 달아나버리는 바람에 힘들었어요. 돈 보다도 마음을 다친 게 힘들었는데 공교롭게도 그런 일을 두 번인가 겪었어요. 겉으로는 얌전하고 이미지가 맑고 깨끗해서 정말 믿었거든요. 그 후 사람을 믿을 수가 없어서 그게 더 고통스럽습니다.”
  남자가 고백을 하자 해수 낯빛이 창백해졌다. 손가락 끝을 떠는 것 같았다. 남자가 눈치채지 못하게 해수어깨에 얇은 스카프를 둘러주고 남자의 말에 네에 네에 대응을 해주었다. 남자는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여자를 바래다주고 늦은 밤 혼자 바에서 양주를 마시다 새벽에 대리운전을 불러 들어가곤 했다고, 여자와는 밤늦은 시각까지 술을 마시지 않는 것도 피해의식 때문이라고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그동안 남자는 여자를 계속 탐색하고 있었고, 믿음이 갈 때까지 지켜보았노라고 말했다. 여자는 떨떠름한 기색으로 남자의 고백을 들었다. 지켜보고 있었다니, 누군가에게 자신의 사생활을 감시당했다는 고백을 듣는 기분은 묘했다. 화를 내고 싶은데 상황이 상황인 만큼 화를 낸다는 것도 우스운 꼴이 되어버릴 것 같았다. 옆에서 듣고 있던 해수가 그때 나섰다.
  “아빠가 언니에게 큰 실수한 거예요. 사과하세요.”
  그러자 남자는 당황해하며 긍정도 부정도 아닌 표정으로 다음에 술 한 번 과하게 사겠다고 그 일은 미안하게 됐다고 말하며 넘어갔다. 비로소 모든 의문이 풀렸다. 해수는 여자의 손을 잡으며 지난 번 일에 대해 자기가 오해했다고, 미안하다고 말했다. 갑자기 두 부녀로부터 사과를 받으며 이번에는 여자 입장이 묘하게 난처해졌다.
  “두 사람이 사과하는 의미로 다음에 함께 밥 사세요.”
  그러고는 일어섰다. 이상한 날이었다.
  “이번 주 토요일 오후 7시 30분 잊지 마세요.”
  “네?”
  “캣츠 공연 보러 가기로 했잖아요.”
  “아, 네.”
  돌아서는 등 뒤에 남자의 확인하는 목소리가 부딪쳐왔다. 지하주차장에서 건물을 빠져나오는데 햇살이 환하게 부서졌다.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세상이 온통 연초록 색깔로 넘쳐나고 있었다. 선글라스를 꺼내 쓰고 엑셀러레이터를 지그시 밟았다. 검은 선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연초록 나무들이 시야에 와 박혔다. 요란하지도, 그렇다고 차분하지도 않은 풍경이었다.
  차를 주차하고 좁은 골목을 걸어오는데 어디선가 베토벤의 월광이 들려왔다. 그 자리에 서서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낮고 조용히 흐르는 멜로디는 아들이 연주하던 그 분위기와 닮아 있다. 아들의 밝은 웃음소리가 피아노 음률에 섞여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았다. 긴 머리를 싹둑 잘라내고 스포츠 머리스타일을 한 아들은 일찌감치 군대에 적응할 태세로 친구들을 만나러 다녔다. 병무청에 볼 일이 있어 잠깐 내려왔던 아들은 여전히 명랑했으나 예전의 티없이 밝은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얼굴은 어두웠다. 부모에게 일어난 일련의 일들을 겪으며 아들은 부쩍 성장한 것 같았다.
  “너, 엄마 성격 잘 알지?”
  “…….”
  “내가 독신으로 늙어가면 너에게도 부담이고 무엇보다도 고부간에도 문제될 소질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니?”
  “엄마 성격이야 정의롭고 칼칼하죠.”
 농담으로 주고 받는 대화였지만 아들의 얼굴은 어두웠다.
  “이제 너도 성인인데 엄마로부터 자유로워져라. 엄마 인생에 대해 부담 가질 것 없다. 장가가서 니 색시와 잘 살아. 나도 내 인생 살 거다.”
  “울 엄마 왜 이러시나. 갑자기 멜랑콜리하게 유언이라도 남길 분위기네.”
  “농담 아니야. 나 죽으면 성당 묘지에 묻어줘. 일 년에 한두 번 신부님이 영혼을 위한 미사 드리잖니. 그리고 제사도 필요없다. 기일에는 연미사 바치면 돼.”
  “…….”
  지나가는 소리처럼 말했지만 진심이었다. 외아들을 키우며 여자는 오래전부터 유언 비슷한 말을 해왔다.
  “혹시라도 내가 늙어 치매에 걸리면 고민하지 말고 요양원으로 보내라. 괜히 남의 시선 의식하거나 효도한답시고 집에 두지 말고. 알았지?”
  “하하하.”
  아들은 웃음으로 넘겼지만 여자는 진심이었다. 치매 환자가 한 명 집에 있으면 온 가족이 고통받는 것을 많이 봐오기도 했지만 자식앞에서도 인간적인 품위를 유지하고 싶기도 했다. 
 피아노 소리가 그쳤다. 천천히 담벼락을 끼고 돌며 걸었다. 혼자 된 후 인생은 별거 아니라는 조금은 퇴폐적인 생각을 할 때마다 까마득한 세월 저쪽으로 간 그와의 기억을 떠올렸다. 여자는 평범한 인생을 살고 싶었다.
  “중년의 위기를 이해해. 덮어줄게, 돌아와.”
  아주 오래 전 어떤 여자는 바람난 남편을 붙잡으며 그런 말을 했다지. 어쩌면 그 남편이란 작자는 마음을 고쳐먹고 돌아오려다가 여자가 던진 그 말에 마음을 닫은 건지도 모른다. 여자가 던진 그 말 속에는 오만이 있다. 다 용서해줄게. 그 말 속에는 너그러움을 가장한 오만함이 숨겨져 있음을 그는 알아챘을 지도 모른다. 아주 오래 전 어떤 남자는 여자 앞에서 끝까지 품위를 유지하고 싶어 달아났다지. 긴 시간 함께 한 여자를 두고 멀리 달아나며 남자는 마지막 자존심의 단추를 굳게 잠갔다지. 망망한 바다에서 폭풍우를 만났을 때 나침반이 있다면…… 생기 넘치고 열정 끓어오르던 생의 의지가 한꺼번에 무너진 여자에게 세상은 빠르게 지나갔다.
  현관문을 열고 커튼을 젖히자 저녁 해가 느슨하게 넘어가고 있다. 월광의 음률이 들리는 것 같아 고개를 빼고 내다본다. 새 한 마리가 앞 건물을 가로지르며 사선으로 날아간다. 이십층 높이에 있는 건물. 새는 높게도 날아간다. 인간이 새를 모방해서 쇳덩이가 하늘을 날아가게 했다면 새는 원초적 본능으로 살기 위해 날아야만 했을 것이다. 얼마 전 이십층 높이 옥상에서 오십 대 남자가 날았다. 가끔 그런 일이 벌어진다. 경비아저씨와 경찰이 몇 마디 이야기를 주고받고 앰블런스가 왔다가고, 그리고 곧 잠잠해졌다. 아주 잠깐, 순간적으로 그 일은 지나가버렸다.
  휴대폰이 울려 받으니 해수 전화번호다. 받을까 하다가 소리를 죽이고는 창 밖 풍경을 내다본다. 시간의 경계가 차츰 모호해진다. 쓸쓸하고 음울한 저녁이다.





유시연 2003년《동서문학》신인상 당선. 단편소설집 『알래스카에는 눈이 내리지 않는다』, 『오후 4시의 기억』, 『달의 호수』. 장편소설 『부용꽃 여름』, 『바우덕이전』, 『공녀 난아』. 정선아리랑문학상, 현진건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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