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15호/단편동화/장시진/신호등 가족
페이지 정보

본문
단편동화
장시진 (소설가)
신호등 가족
우리 가족은 아빠 신호등, 엄마 신호등, 그리고 쌍둥이 동생과 저 모두 네 식구입니다. 바로 옆집에는 가로등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살고 계세요. 그리고 무인단속 카메라 아저씨도 우리 가족의 가장 가까운 이웃입니다.
횡단보도는 우리 가족이 살아가는 삶의 소중한 보금자리입니다. 그나마 우리 가족은 단출한 편입니다. 사거리 친구네 집은 대가족입니다. 그래서 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를 정도로 바쁘다고 합니다.
그런 친구네 집이 부럽습니다. 아빠에게 동생을 낳아 달라고 보채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저는 쌍둥이 동생이 있는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아야!”
누군가 내 다리를 냅다 걷어찹니다.
또 아름이 녀석입니다. 아름이는 초등학교 1학년생 장난꾸러기입니다.
“또 저 녀석이네.”
횡단보도 건너편에 서 있던 동생이 입을 잔뜩 내밀고 투덜거립니다.
아름이는 초록색 신호등이 켜지자 자동차가 오는지 확인도 하지 않고 기다렸다는 듯이 횡단보도로 달려나갑니다. 그럴 때마다 다칠까 봐 내가 더 조마조마합니다.
“저 녀석 너무 버릇이 없어.”
동생이 참다못해 결국 화를 냅니다.
“신호를 무시하지 않고 기다리는 것만도 얼마나 다행이니. 신호를 지키지 않는 어른들도 많잖아.”
“우릴 너무 괴롭히잖아. 말썽꾸러기.”
동생이 씩씩거립니다.
“또 아름이가 다녀간 모양이구나. 아장아장 걸을 때가 엊그제 같았는데. 그러고 보면 우리 가족이 이곳에 살게 된 지도 꽤 오래됐지.”
“얘들아, 오늘도 사람들을 위해서 맡은 일을 열심히 해야지.”
“네.”
동생과 나는 아빠와 엄마의 말씀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대답합니다.
아침은 너무나 분주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항상 눈여겨봐야 합니다. 그렇지 않았다가는 사고가 일어날지 모릅니다. 우리 가족이 이곳에 살기 전에는 교통사고가 빈번히 일어났다고 합니다.
우리 가족이 이곳으로 이사 온 후에도 아찔했던 적이 많았습니다. 게다가 초등학교 근처라 짓궂은 아이들이 더러 있는 편이라 특히 신경을 써야 합니다.
그나마 이제는 녹색 아주머니 회에서 아주머니들이 나오셔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우리를 도와주고 계셔서 다행입니다. 그래도 진땀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아침 바쁜 시간이 지나고 요맘때가 되면 할아버지가 지팡이를 짚고 나타납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할아버지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할아버지는 하루도 빠짐없이 횡단보도를 건너 공원으로 갑니다. 할아버지는 공원 걷는 것을 좋아합니다.
아! 저기 오시네요. 오늘은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부축하고 나오셨습니다.
날씨가 추워져서 걱정입니다. 더 추워지면 할아버지의 외출도 힘들어질 텐데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횡단보도를 건널 때까지 우리 가족은 잠시도 눈을 떼지 않습니다. 무사히 건넌 것을 확인한 후에야 아빠와 엄마가 신호를 바꿉니다.
“이게 무슨 냄새야? 누나 이상한 냄새나지 않아?”
“그러게. 어디서 나는 냄샐까? 그러고 보니 네 발밑에…….”
나는 건너편 동생의 발밑을 보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동생의 발밑에 뭔가 한 무더기가 쌓여 있었습니다.
“지난밤 술에 잔뜩 취한 아저씨 짓일 거야.”
동생이 코를 막고 인상을 쓰며 말합니다.
간혹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술에 취해서 오줌을 싸거나 속을 게워내는 경우가 있거든요. 동생은 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잠이 없으신 가로등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밤새도록 눈을 뜨고 지나가는 차들을 구경하시더니 아침이 되어서 잠이 드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크게 떠들 수 없습니다.
가로등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밤이 되면 옛날이야기로 온 밤을 환하게 밝혀 줍니다. 우린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이야기에 아침이 오는 줄도 모른 채 귀 기울입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이야기는 들으면 들을수록 재미있습니다. 오늘 저녁에도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실 겁니다.
점심시간이 다가오면 도로의 이곳저곳을 세심하게 잘 살펴야 합니다. 점심시간은 나른해지는 시간이기도 하지만 오토바이들의 난폭운전이 시작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저기 또 온다.”
동생의 말에 나는 바짝 긴장합니다.
점심을 배달하기 위해 오토바이가 쌩하니 달려갑니다. 신호를 지키지 않아 여간 골치 아픈 것이 아닙니다. 저러다가 다치면 어쩌려고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우리 가족은 화를 낼 수 없습니다. 우리가 화를 내고 신호를 주지 않으면 도로는 엉망이 되고 말 테니까요. 사람들은 마음 놓고 횡단보도를 건널 수 없고 자동차들도 도로를 힘차게 달릴 수 없을 겁니다.
“우리 쌍둥이들, 오늘도 너희가 고생이 많구나.”
옆집 무인단속 카메라 아저씨가 기지개를 켜며 말했습니다.
“네, 아저씨.”
“오늘은 왜 이렇게 한가한지 모르겠다. 사람들이 질서를 잘 지키면 나야 좋지만 그래도 불법 주정차하는 사람들이 없으니까 심심하네.”
무인단속 카메라 아저씨가 하품하며 말했습니다.
<무인단속 카메라 작동 중입니다. 주정차 위반 시에는 100만 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하게 됩니다.>
무인단속 카메라 아저씨가 주정차하려는 차량에 소리를 지릅니다. 그러면 주정차하려던 자동차들은 살살 눈치를 보며 머뭇거리다가 지나쳐 갑니다.
“아저씨, 지금 아저씨 발밑에 자동차가 주차된 것 보이세요?”
“아니. 내 눈에는 안 보이는데.”
“아저씨. 아까부터 주차되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도로가 이렇게 막히는 모양이에요.”
보다 못한 동생이 거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왜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걸까요? 단속하고 있는데도 버젓이 자동차의 번호판을 가린 채 주정차하는 것을 보면 더 화가 납니다. 하지만 아직은 그런 얌체 같은 사람들보다는 양심 있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질서를 잘 지키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어떻게 혼내 주어야 하지?”
“할 수 없잖아요. 주정차 단속원 아저씨가 오실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요.”
“그래도 언젠가는 꼭 혼내 줄 거란다.”
무인단속 카메라 아저씨가 말하면서 괘씸하다는 듯 발밑을 내려다봅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아저씨는 발밑을 볼 수가 없습니다.
저편으로 아름이의 모습이 보입니다. 학교가 이제 끝난 모양입니다. 아름이 얼굴의 장난기는 여전합니다. 우리는 아름이를 맞이하며 초록색 신호등을 켜줍니다. 초록색 신호등을 보곤 아름이가 횡단보도를 향해 달려옵니다.
“저러면 안 되는데.”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아름이 앞으로 신호를 무시한 오토바이가 쌩하니 지나쳐 갑니다. 하마터면 아름이가 다칠 뻔했습니다.
아름이가 잔뜩 겁을 먹은 것 같습니다. 그 자리서 꼼짝도 하지 못하고 서 있다가 어느 아주머니의 손에 이끌려 다시 걷기 시작합니다. 아름이가 횡단보도를 무사히 건널 수 있도록 우리가 지켜봅니다.
“횡단보도를 건널 때는 오른쪽에 서 있다가 초록색 신호등이 켜지면 좌우를 살피면서 천천히 건너야 한단다.”
아주머니가 아름이에게 신신당부합니다. 아름이는 이제 횡단보도에서 뛰지 않을 겁니다.
아기를 업은 아줌마가 제 옆으로 다가왔습니다. 귀여운 남자아이가 아줌마의 손을 잡고 있었습니다. 언뜻 네 살쯤 되어 보였습니다.
“얘야 안녕.”
아기에게 살짝 윙크합니다. 그러자 아기가 방긋 웃습니다. 그때 아줌마의 휴대전화가 울립니다. 아줌마가 전화를 받으며 잠시 한눈을 팔았습니다.
아줌마의 손을 잡고 있어야 할 아이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아줌마가 방심한 틈을 타서 아이가 도로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상! 비상!”
다급하게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동생도 아이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 서둘러 초록색 신호등을 켰습니다. 아빠와 엄마도 곧바로 빨간색 신호등을 켰습니다.
자동차들이 급정거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사고는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놀란 아이가 울기 시작합니다. 사색이 된 아줌마가 서둘러 도로로 달려나가 아이를 끌어안았습니다.
“휴!”
우리 가족들 입에서 제각각 안도의 한숨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정말 큰일 날 뻔했어.”
아빠가 황색 등을 깜빡이며 말했습니다. 우리 가족은 아줌마와 아이가 걸어가는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습니다. 천만다행입니다.
오늘은 정말 힘든 날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쉴 수 없습니다. 밤이 되면 더욱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그래야 사고가 나지 않을 테니까요.
가로등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일어나셨습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오늘 밤도 우리 가족을 위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으실 겁니다.
장시진 에세이 『누군가 그 길을 함께 걸었네』, 『시간의 흐름과 공간을 바라보는 시선』 외 장편소설 『바퀴벌레와 춤을』, 『축제는 끝나지 않았다』 외.
- 이전글15호/계간평/백인덕/현대시와 양가성Ambivalence의 힘 17.10.27
- 다음글15호/단편소설/유시연/낮고 쓸쓸하고 음울한 17.10.27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