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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호/계간평/백인덕/현대시와 양가성Ambivalence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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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평
백인덕 (시인)
1.
우리는 아직도 ‘현대Modern’를 살고 있는가? 현재를 주무하기에 바쁜 일상의 손아귀에서 잠시 벗어나 허위이데올로기가 제공하는 일탈에의 탐닉을 중지하고 깊은 생각에 빠져 본다. 정보사회, 4차 산업혁명, 빅 데이터, AI 등등 폭우 뒤 좁은 물길로 쏟아지는 급류처럼 순식간에 머릿속을 정렴해버리는 이런 용어들 때문에 생각에 갈피를 잡기 어렵다. 하지만 한 가지 가능성에 주목하기로 한다. ‘현대’는 그것이 ‘휴머니즘’이든 ‘반휴머니즘’이든 소위 ‘휴머니티’를 중심으로 전개된 시대였다는 점이다. 그럼 지금 우리의 삶의 중심 가치는 무엇일까? 모르긴 몰라도 ‘인간성의 회복’이라고 답할 수 있다면 우리는 아직 현대를 살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혹 AI가 더 진보, 진화해 인간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확장하거나 제한하는 시대가 온다면 그건 분명히 우리가 아는 ‘현대’가 아닐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현대의 정신 아래 쓰여 진 시를 통칭해서 ‘현대시’라고 부를 수 있다. ‘현대성’에 대한 시시콜콜한 논의는 이 글의 성격상 무의미할 것이고, 단지 기억을 상기하기 위해 스피어즈가 『디오니소스와 도시』에서 논한 현대시가 보여주는 ‘단절’의 양상을 소개하기로 한다. 그에 따르면, 현대시는 인간과 자연 사이에는 어떤 연속성도 없다는 인식을 중심으로 하는 형이상학적 단절과 예술과 인생 사이에는 어떤 연속성도 없다는 의미의 미적 단절, 현대시의 문제가 보여주는 특성으로 옛날의 시와 다른 특수한 언어형식을 말하는 수사학적 단절, 전통적 시간관인 시간의 계기성을 부정하고 상호 동시성을 주장하는 시간적 단절과 심리세계의 분열을 의미하는 심리학적 단절, 지금이 바로 최후라는 인식을 강조하는 반역사주의적 세계관을 중시하는 역사적 단절 등이 있다. 이 모든 단절이 어떤 형태로든 현대시의 시적 인식에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한국 현대시는 제국주의 식민지라는 특수한 정치상황 때문에 그 발전과정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지 않는다. 김소월이나 윤동주, 한용운 등은 지금도 국내에서 가장 사랑받는 시인들이지만, 사실 이들이 보이는 두 가지 특성. 식민지적 상황과 시작 기간이 짧다는 점이 큰 장점으로 작용하는 것 또한 간과할 수 없다. 반어나 역설로 형상화한 이들의 작품은 현 시점에서도 분명 중요한 가치를 함축하지만, 굳이 안타까운 점을 꼽으라면 ‘양가성’을 생의 전반적 사태로까지 확장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물론 그것이 후대의 시인들에게 또 하나의 가능성을 열어준 것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2.
양가성은 대체로 세 가지 양상으로 고찰된다. 1) 사랑과 증오의 갈등과 같은 정서적인 측면의 양가성 2) 행동을 결정하지 못하는 우유부단함을 나타내는 의지적인 측면의 양가성 3) 상호 모순되는 전제를 모두 받아들이는 지적인 측면에서의 양가성 등이 그것이다. 시가 종합적 인식의 산물이라는 점을 전제로 이해하면 이 세 측면은 하나의 작품에서 번갈아 등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머니 오실까 봐 불 켜고 잔다
어머니 못 오실까 봐 불 끄고 잔다
―장종권, 「어머니의 집·1」 전문
요즘은 초등학교만 입학해도 ‘죽음’의 사회적 의미를 이해한다는데, 시인이 그걸 모를리는 없다. 불을 ‘켜고/끄고’라는 상반된 행위는 일종의 우유부단으로 읽을 수 있지만, 이 작품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잔다’라는 화자의 행위인데 이것은 지난날의 어머니가 우리에게 다가 서던 때의 익숙한 행위의 반복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을 ‘켜고/끄고’라는, 나아가 어머니가 생전의 모습이든, 영혼의 속삭임이든 무관하게 작품은 ‘기대’를 최대한으로 증폭한다. 상호모순 되는 전제를 다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점에서 양가성의 한 측면을 잘 그려내고 있다.
누군가는 더 서두르라고 하지만
개미 기어가는 소리며 사각거리는 나뭇잎 소리
작은 소리들이 기지개를 켜듯이
지반을 흔드는 소리로 들리는 것을
누가 알겠어요
머지않아 가버리고 말 것들
어쩌면 삶 아래로 누락된 것일지도 몰라
인정하고 싶지 않은 선언에 대한 반항인지도 몰라
더 이상 잃어버릴 것도 없는 길목에서
허공에 매달린 붉은 감의 속사정은
속절없이 익어간 깊은 정인지도 몰라
―김계영, 「껍데기의 영상」 부분
시인은 “더 이상 잃어버릴 것도 없는 길목”이라고 오늘을 진단한다. 이 진단은 다시 서두르라는 누군가의 충고를 무시하게 하고 대신 “개미 기어가는 소리며 사각거리는 나뭇잎 소리”를 듣게 한다. 정확하게는 ‘들리게’ 한다. 예전에도 개미는 무수히 기어갔을 테고 나뭇잎은 끊임없이 사각댔겠지만 “쉬지 않고 걸었”던 그때는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현재에 대한 진단은 나아가 “어딘가로 호젓이 탈주하고 말/껍데기의 영상”에 무심하게 만드는데, 생과 사처럼 결정적인 계기 앞에서 ‘선언에 대한 반항’을 선택하게 하는 힘도 결국은 일종의 양가적 사유에서 비롯한다. 그렇지 않은가? 모든 존재론은 필멸의 존재가 작성한다는 점에서 결국 모순적일 수밖에 없다.
그 때, 나는 잠시 나비였을까?
우거진 사념의 풀 더미 속에서 우화하고
숨 막히는 혼돈의 굴뚝을 빠져나와
바이칼 호수의 파란 눈동자에 물들었다가
나르시시즘에 빠진 어느 젊은이의 낚시대에 앉았다가
허락도 없이
당신의 말간 꿈속을 어지럽히다
줄줄이 지나가는 낯선 이름들의 숲에서 길을 잃고
황망히 서럽고 낯선 꿈을 접는다
―조은설, 「도돌이표」 부분
인용한 작품은 확연하게 ‘꿈과 현실’ 두 개의 차원으로 빗금 나 있다. 시인은 “아, 오늘도 늦어버린 약속시간/서둘러 도돌이표를 밟아가면서/어떤 추상에 골몰하다가”라고 내려야 할 역을 지나친 이유를 말하지만, 현실에서 하는 ‘추상’은 구체적으로 아무 것도 지시하거나 남기지 못한다. 1연에서 “화들짝 정신이 들면” “나비 한 마리 벗어둔 겉옷 한 벌/내 눈썹 끝에 매달려 있다”고 했다. 졸면서 꾼 꿈(나비가 된 꿈)이 실제적으로 ‘겉옷 한 벌’(물론, ‘졸음’이겠지만)을 남긴다. 사실 프로이트가 후기에 주목했던 것도 우리가 숙면을 취하면서 꾸게 되는 꿈이 아니라 ‘백일몽Daydream’처럼 불현 듯 겪게 되는 상황이었다. 여기서 우리의 무의식이 살아나 결국은 우리 내면의 어떤 상황을 암시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이 작품은 “내려야 할 역을 훌쩍 지나치는 버릇”에 관한 것이 아니라 ‘우화羽化하고 싶은 욕망’을 실수처럼 그려냈다는 점에서 일종의 양가적 사유의 결과로 볼 수 있다.
구름이 내말을 하는 건지
내가 구름의 말을 알아듣는 건지
서편 하늘을 보는 마음이 먹먹하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오는 길목이
멀었던 것 같기도 하고
너무 짧았던 것 같기도 한데
오늘 서편의 하늘은 헤아릴 길 없다
나를 먼저 보낼 것인지 너를 먼저 보낼 것인지
선택되어지지도 선택할 수도 없는
기로의 영역에서
노을은 잠시 발갛게 망설인다.
―유정임, 「저녁노을」 부분
동양의 오래된 상징(이를테면 ‘오방색五方色’ 같은)에 따르면, 동쪽은 말 그대로 탄생, 신비. 시작으로 읽을 수 있고 서쪽은 진실, 삶, 순결 등의 상징으로 쓰였는데 불교적 의미가 덧대지면서 시에서 서쪽은 해탈이나 해원(‘서방정토西方淨土’처럼)의 상징으로 주요 쓰이게 되었다. 시인은 여기서 “동쪽에서 서쪽으로 오는 길목” 즉 해의 하루 걸이를 화자의 생과 유비하면서 “멀었던 것 같기도 하고/너무 짧았던 것 같기도”하다는 양가적 감정을 드러낸다. 이 감정이 비로소 ‘해와 화자’를 연결하는데, 그 전에 시인은 ‘구름과 나’의 소통을 말한다. 이 때의 ‘나’는 시인과 해 둘 다로 읽히기도 한다. 어쨌든 시인은 “환청처럼 들리는/너의 말/나의 말(문제는 ‘나의 말’을 뒤이은 ”차마 내뱉지 못하고“에만 걸어서 해석할 수도 있다)”을 한 자리에 서서 동시적으로 볼 수 있게 된다. 이 또한 양가적 감정이 빚어낸 효과라 할 수 있다.
3.
시에서 ‘양가성’이 일종의 시적 태도로 이해된다면, ‘반어나 역설’은 이를 구체화하는 시적 수법으로 폭넓게 사용되고 있다. 다시 말해 ‘양가성’이란 관계 맺음을 위한 전제적 조건에 대한 인식이고, 그 형상화는 ‘반어나 역설’을 통해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 관계맺음에 주목하면 현대인은 결국 ‘주체-객체(대상)’이라는 이성 중심적인 편협한 사고를 버렸을 때, 관계의 근간에는 ‘나-나’, ‘너-너’, ‘나-너’라는 형식만 남는데, ‘너-너’란 환원하면 ‘나-나’와 같은 특성을 보이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형식은 ‘나-너(나)’가 된다. 이것은 시에서 현대화된 서정(자기 정조를 적절한 사물을 통해 외화外化한 효과)을 풀어내는 강력한 수법이 된다.
너는 꽃 이름으로 새 이름으로 바람의 이
름으로 바다를 떠돌고 있는데, 내리는 비소
리는 부풀어진 머릿결을 잠재우는데, 너를
아가는 길 밖으로 비가 오는데, 갯냄새는
안개 낀 바위섬을 건너가는데, 진달래 아리
게 피는 산허리 벼랑길은 파도에 부딪치는
데, 내가 건네는 안녕도 알아듣지 못 하는데,
또 다른 나에게 들키고 말았는데, 끌고 다닌
외투에는 빠져 나오지 못한 물비린내만 스며
들고 있었는데, 진달래 붉어 달아오른 술잔
은 비스듬히 기울어지는데, 휘몰아치는 바람
의 넋들이 너를 마구 흔들기도 하는데, 피고
지는 봄마다 넘어지는 내 물렁뼈는 반쯤인
데, 적막한 세상을 쓰다듬는 법을 가르쳐 주
기도 하는데, 허기로 채워지는 저녁 한나절
바다가 보이는 그네에 앉아 있는데, 미처 빠
져 나가지 못한 수많은 짐승들이 내 속에서
이렇게 뜨겁게 울부짖는데 나도 함께 목울대
가 아리도록 울었는데.
―하두자, 「간절함에 바치다」 전문
인용 작품에서 ‘너’는 시작부분에서 단 한 번 등장한다. 그 이후의 시상의 전개는 “너는 꽃 이름으로 새 이름으로 바람의 이름으로” 떠돈다는 것과 그것이 유보(∼는데) 된다는 일정한 형식으로 진행된다. 마찬가지로 ‘나’는 작품의 말미에 “나도 함께 목울대가 아리도록 울었는데”에서 딱 한 번 드러난다. 이 ‘너-나’의 관계는 주체를 역전시키거나 대상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는데’로 유보 또는 지연되는 모든 정조가 결국은 ‘너-나’의 관계를 통해 완성된다는 의미를 숨겨 가지고 있다. 이는 “피고 지는 봄마다 넘어지는 내 물렁뼈는 반쯤인데”에서 곧바로 증명된다. 나머지 반은 아마도 서있는 ‘너’에게 있을 것이다. 라는 유추를 가능케 한다. 이러한 사유가 바로 현대시가 더 정련해야 할 서정의 한 뿌리가 될 것이다.
백인덕 199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끝을 찾아서』, 『한밤의 못질』, 『오래된 약』, 『나는 내 삶을 사랑하는가』, 『단단斷斷함에 대하여』, 저서 『사이버 시대의 시적 상상력』 등. 본지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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