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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호/신작특선/박철웅/안녕, 아줌마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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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특선
박철웅
안녕, 아줌마
화장실 변기가 하얗게 빛이 나고 있는데, 철없는 아이는 허옇게 안부를 묻고 있는데, 변기 위에는 두루마리 휴지가 펄럭이는데, 아줌마는 하얗게 웃고 있는 데, 평화의 비둘기는 구구 바닥을 쪼아 먹고 있는데, 서울역 지하도에는 낭만시인들이 구구 바닥을 핥아 먹고 있는데, 아이는 창문을 열고 창문을 닫고 있는데, 오줌은 숨이 막히도록 쏟아지고 있는데, 아줌마는 여전히 빛이 나도록 하얗게 웃고 있는데, 여봐 아줌마, 반말은 무성하게 자라나고 있는데, 지하철은 헤드라이트를 켜고 고속으로 달려가고 있는데, 청춘은 콩나물시루처럼 실려 가고 있는데, 네온사인은 오늘 밤도 춤을 추고 있는데, 아이는 자꾸만 창문을 열고 창문을 닫고 있는데, 의자는 빤히 바라보고 있는데, 모래시계는 줄줄 흘러내리고 있는데, 아줌마도 한때는 눈부시게 춤을 추었지. 강가의 능수버들이 춤 출 때마다 청춘도 꽃이 피어난다고 팝콘 튀듯 웃곤 했지. 추수가 끝난 들판의 허수아비, 찬바람만 슝슝 들어차는데, 아줌마는 안부를 묻고 있는데, 오늘도 하루는 잘 흘러가고 있느냐고, 변기가 하얗게 빛이 나도록 안부를 묻고 있는데,
거울을 굴비를 비굴이라 읽는다
너를 볼 때마다 결코 굴하지 않겠다는 이자겸이 생각이 난다. 해마다 굴비를 보내면서도 이것은 결코 아부가 아니다, 는 선비가 생각이 난다. 굴비를 바라보며 나는 정말 굴하지 않고 있는가, 굴비처럼 가슴에 소금을 뿌리며 햇살과 바닷바람에 잘 말라 가고 있는가, 생각한다. 굴비는 결코 비굴이 아니다. 그저 고품격 조기일 뿐이다. 몸에 기를 살려주는, 그대도 나도 기 좀 살아보자는 마음의 선물일 뿐이다. 내 비록 하루 세끼도 간당간당 하지만 굴비를 보낼 때마다 동아줄 하나 잡은 것처럼 안심이다. 이건 그저, 그대 입맛에 쏙 들기를 바라는 진심일 뿐이다. (한 번 맛을 보면 쑤욱 빠져들어 갈 것이다.) 거울을 본다. 굴비가 눈을 끔벅끔벅 거리면서 웃고 있다. 거울에 비치는 굴비, 눈 없는 거울이 굴비 꾸러미를 읽기 시작한다. 비굴비굴비굴비굴..., (읽히는 굴비가 민망스럽다.) 나는 그럴 때마다 다시 거꾸로 읽는다. 무항산무항심, 입안의 혀를 돌돌 말아가며 나 스스로를 변호한다. 굴비여, 가슴에 소금을 뿌리며 너는 오늘도 햇살에, 해풍에 잘 말라 가고 있는가.
솎다
텃밭에서 배추 상추 고추 잎들을 솎아내다가솎아낼 일이 어디 이것 뿐이겠는가 생각하다가세상에서 솎아줄 것들이 도처에 널려있음을 본다
차마, 그 대상을 일일이 다 말은 못하겠지만우리가 가던 길목에도 솎아줄 것이 많고내 삶의 주변도 솎아줄 것이 많고내 마음 속의 기억들도 솎아줄 것이 많지만그중의 나, 내 마음부터 솎아주어야겠다는 생각불현듯 들어쇠주 한 잔 붙들고서 지나온 내 삶의 자취를비추어 본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내 삶의 풍경들때론 비바람이 불고 꽃도 피었지만초라한 내 생각의 몰골을 바라보면서이제 하나 둘 정리할 시각이 가깝다는 생각에
술잔을 조용히 내려놓으며 석양이 빚어놓은 수채화 속으로 물들어 간다
버그네
아이스크림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싶어요. 달콤한 속삭임말이예요. 이것은 눈 녹듯이 사르르 녹는 거짓말에 관한 얘기이기도 하지만 황홀한 외도이기도 해요. 요즘 유행하는 유체이탈화법처럼, 왜 요? 저물어가는 오후의 석양이 밀물처럼 몰려와요 N포의 아이들이 분수처럼 춤을 추어요. 누군가 손짓을 해요. 그때마다 나는 자꾸만 작아져요. 더 더 더 추락해요. 물안개 가득한 눈빛이 무서워요. 곧 사라질 것 같아요. 사탕을 줘요. 먹어요. 입안에서 이빨이 썩고, 지방이 썩고, 유통기한이 지난 소시지가 몸통을 살살 저어요. 그래도 입은 동동 떠서 흘러가요. 가벼운 탓이예요. 속이 비고 오장육부가 비틀린 탓이예요. 그래도 어쩐데 유? 뒤지는 줄 알았어요. 일어나면 새벽이고요. 누우면 밤이예요. 나는 온종일 일하는 쇠붙이 였어요. 감정도 없구 먹구 싸구 구멍만 생각했어요. 입구멍 말예요. 풀칠 할, 할매 뼈해장국 생각이 나요. 어쩌지 유? 뭘 말이예유 그냥 소신 것 찍는 거예유. 간장을 찍든, 고추장을 찍든 그저 소신 것 찍어 발라 드세유. 힘이 불끈불끈 솟을 거예유. 그러다가 뻥! 터지면 아이. 엠. 에프, 라고 하세유. 그도 빵! 터질거예유. 얼쑤 얼쑤 지화자 조타. 벌써 타불어쓰 유?
마포대교
바람이 분다 물결이 출렁인다
내 생도 안개처럼 흐릿하구나
돌아보면 눈물도 흔들리지만 물안개처럼
포근하구나 안아보고 싶구나
마포대교 난간에 서서
달빛 흔들리는 캄캄한 하늘과
질주하는 강변의 차량들과 한강 둔치를 배회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적셔본다
강물은 출렁이고 강물은 흘러가고
또 한 계절이 오고 가겠지
꽃이 지고 눈이 내리듯이
소풍도 끝나가겠지
바람이 젖는다
풍경은 허공에 편지를 쓰며
마지막 한 소절까지 아플수록 사랑은 깊었다며
무지개처럼 제 몸을 길어 올린다
<시작메모>
몽롱주점에 가고 싶다.
파도 소리 들으며 저물어가는 주모 한 사람
거기, 있을 터이니,
산전수전 안주 한 접시 시켜놓고
탁주 한 사발 따라 주고 따라 마시며,
탁주 안의 파리처럼 철없이 빠져들고 싶다.
몽롱한 하루를 건너고 또 건너서
하루라는 숙명처럼, 숙명이라는 너처럼,
날마다 하루를 잉태하고 하루를 출산하는 저무는 주모
뱃고동 소리 같은 입담에다 탁주 한 사발이면
또 하루가 질펀하게 취하겠다.
거기, 사람과 사람 사이에 꽃이 피고 꽃이 지는데
다정한 탁주 한 사발 석양처럼 엎어지고 넘어지는데
탁주 한 사발 자작하며 편지를 쓰고 싶다.
그립고도 외로운 말들이 탱탱하게 입력되어 있는 빗방울을 바라보며,
몽환의 안개 벗 삼아 한 잔 또 한 잔 마시다 보면
기다리던 사람도 봄비처럼 스며들 것 같은데,
떠나지 못한 편지들이 우수수 몰려올 것만 같은데,
오늘은 비에 젖고 술에 젖고 내 안의 통점에서 젖는다.
나도 빗방울이 된다.
몽롱주점에 다녀오고 싶다.
더 저물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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