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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호/중편연재/손용상/土舞 원시의 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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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연재
손용상
土舞 원시의 춤
제2화 / 똥 밟은 개
1.
자카르타의 더위는 아라비아의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뭐라 할까? 중동지역의 더위가 건조하고 정염적이라면 그곳은 다소 축축한 느낌의 낭만의 냄새가 깔려있다고 할까. 하지만 아무려나, 그곳이건 저곳이건 비행기 트랩을 내려섰을 때 훅하니 끼쳐오는 뜨거운 열기는 서로 다를 바가 없었다.
마치 실내의 적당한 냉방에 물들어 보송보송하던 피부에 확 더운물을 끼얹는 듯한…. 칙칙하지도 상쾌하지도 않는 그런 경험이었다. 그러나 그런 건 외적인 느낌일 뿐 철민은 비행기가 랜딩 하여 이국적인 공항청사가 눈에 들어오자 가슴이 설레어 오기 시작했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랄까. 그가 해외를 나돌며 이곳저곳 출장을 다닐 때마다 앞으로 벌어질 모든 상황에 대해 혼자 꿈꾸고 계획하며 눈을 빛내고 침을 삼키던 그런 버릇이 또다시 살아나 그는 혼자 슬그머니 입술을 깨물었다.
“여어, 어서 와요. 사보 보니 우리 김 이사 축하할 일이 많더구먼….”
철민이 수속을 마치고 출구를 빠져나오자 마중 나온 황 이사가 손을 흔들며 그를 맞았다. 그는 이번에 그와 교대해 본국근무를 하게 될, 철민과는 대학 선후배 사이였고 임학林學을 전공한 산림기술자였다.
“하이고 형님, 건강은 좋으세요?”
“그저 그래… 그나저나 김 이사는 어쩌다 이 오지로 발령을 받았누? 이리안자야 현장엔 풍토병이 많아 직원들이 좀 고생을 하지…. 산판 기술자들도 픽픽 자빠지는데… 조심해야 할 거야.”
황 이사의 말 속에는 은근히 뼈가 들어 있었다. 일테면 ‘노가다’ 세계에선 산판 노가다도 손으로 꼽는 곳인데 너 같은 초짜가 여기 와서 잘 할 수 있을지 걱정된다는 그런 뜻이 담겨있었다. 안 그래도 철민은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이 산판 현장에 신참들이 오면 먼저 와있던 전입 고참들이 신입사원들을 골탕 먹이기 위해 현지인들과 함께 제일 먼저 밀림에 들여보내 현장 조사를 시킨다고 했다.
조사라는 것이 헥타ha 당 경제성 있는 나무가 몇 그루나 있으며 그것을 벌채하여 어디에 집재할 것이며 또 거기에 소요되는 장비 투입은 어떻게 해야 하고 등등…. 정밀 리포트를 요구하는 그런 작업이었다.
하지만 그런 따위의 조사는 기본적으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 문제는 파충류가 득시글거리는 밀림에서 몇 날 몇 밤을 모기들과 싸우며 야영을 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음을 체험하게 하고, 이곳 직원들이 얼마나 열악한 환경에서 고생을 하고 있는지 직접 당해보라는, 이르자면 본사 책상 서방님들도 알아두라는 뜻이 강하게 묻어있는 일종의 시위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철민은 황 이사의 말뜻을 일단은 모른 척 무시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그의 회사가 이 산림사업을 시작한지 3년이 넘어섰지만 아직도 적자를 못 면하고 있는 상태였고, 그러다 보니 본사에서는 뭔가 현지에 문제가 있지 않나 서둘러 챙기기 시작하는 와중에 그가 일선 책임자로 선임되었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상황에 따라서는 황 이사와의 개인적인 친분을 떠나 서로 얼굴을 붉히는 실무적인 일이 있을 수 있었기에 철민은 선뜻 그가 뱉어내는 말 속의 뼈다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는 그냥 벌쭉 웃었다. 그리곤 말머리를 돌렸다
“조심해야죠. 그나저나 듣기론 이쪽 하수도 시설이 별로라던데…형님은 괜찮아요?”
황 이사는 잠깐 눈을 굴리며 헷갈리는 표정을 짓다간 갑자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핫… 그려그려, 여기가 좀 그렇지, 그래. 파이프 관리 잘해야 될 것이야.”
“직원들은 어때요?”
황 이사의 너털웃음 끝에 철민이 물었다.
“사실은 말이야… 우리 직원들 관리에 그 부분이 좀 문제가 있어요. 자네가 있던 사우디 쪽엔 아예 알콜이고 여자고 없어 못하는 곳이니까 가는 사람들도 처음부터 그러려니 하겠지만, 여기는 좀 달라요. 여긴 다 있잖아. 손만 뻗으면 술이고 여자가 쉽게 닿거던. 그러니… 예전에 전통全統이 이곳에 왔을 때 모회사 회장이 우리 한국인들이 아무튼 해외로 나가 힘을 뻗치려면 여기저기 태극기를 많이 꽂아야 한다고 했다가 순자 여사한테 혼난 일도 있거덩.”
“그런 일이 있었어요?”
철민의 물음에 황 이사가 다시 킬킬거렸다.
“대통령 온다고 업체 대표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 영감 흰소리 한번 했다가 되게 혼났다고 그러더라구. 암튼… 김 이사 현장에 가보면 알 거야”
황 이사가 담배를 피워 물며 공연히 한숨을 푹 쉬었다. 철민 역시 덩달아 담배에 불을 붙이며 차창 밖으로 눈을 돌렸다. 그리 깨끗해 보이지 않는 도시였다. 도로 옆의 열대 수들이 너울거리며 빠르게 그들의 눈을 벗어나고 있었다.
-태극기를 많이 꽂아야 한다고?
철민은 황 이사의 말을 곰씹으며 대통령 앞에서 그 말을 했다는 K그룹의 C회장을 떠올리곤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이에 비해 백발이 성성한 그 영감님은 정력이 좋아 각 지역에 현지처를 몇 사람씩 두고 있다고 하던가. 배포도 크고 사업수완도 좋아 정치권에서도 괄시를 못하는 사람 중의 하나라고 했는데, 그런데 그 영감님이 순자 여사한테 시쳇말로 쫑코를 먹었다니 그 표정이 어땠을까 궁금했다.
하긴 많은 얘기들을 들어보면, 해외에 나가 언필칭 조국의 ‘경제역군’으로 일을 하는 우리 동포들의 경우 왠지 항상 일본 사람들에게 뒤떨어진다고 하는데, 그 원인인즉 일본인들은 일단 해외근무를 하면 본사의 묵인 하에 현지처를 두는 것을 장려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물론 모두가 그렇진 않겠지만, 장기적 안목으로 현지 말을 배우고 외국인이 타국에 와서 현지인을 수족처럼 다루려면 이 방법보다 좋은 선택은 없다고 하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라고 했다. 철민이 황 이사 쪽으로 얼굴을 돌리며 쿡 찔렀다.
“성님두… 현지처 하나 두셨수?”
“응? 으으… 현지처라기 보다는….”
황 이사가 당황스럽게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며 말을 더듬었다.
2.
철민은 황 이사가 현지처를 두고 있음을 몰라서 물어본 것이 아니었다. 그저 농 반 진 반 쿡 찔러 확인해본 것뿐이었다. 왜냐면 그들의 본사 조직은 이쪽 지사뿐만 아니라 세계 각 지역에 퍼져있는 모든 지점의 근무요원들에 대한 신상정보를 웬만한 정보기관 못지않게 파일관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철민의 경우는 오너의 비서실장을 거쳐 회사의 중추부서라 할 수 있는 기획감사실 부서장을 역임했었기에 회사의 모든 사람들이 그의 눈치를 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황 이사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흘끔 철민의 눈치를 살피다가 아예 직설적으로 물어왔다.
“본사도… 대충 그런 정도는… 알고 있는 거 아냐?”
“글쎄요. 요즘엔 하도 소문들이 빠르니까… 그나저나.”
철민은 공연히 황 이사가 딱한 마음이 들어 일부러 너스레를 떨며 말머리를 돌렸다.
“나 배고파 죽겠시다. 어디 개운한 김치찌개 잘하는 데 없어요? 그러구… 한 꼬뿌 해얍지요?”
“그려그려. 내 안 그래도 아우님 시장할 것 같아 한식당 한군데 미리 잡아놨네. 관리 박 과장이랑 경리 이 대리도 함께 나올거구만.”
황 이사가 갑자기 자네에서 아우님으로 호칭을 바꾸는 바람에 철민은 자칫 웃음이 나올 번 한 것을 참으며 그냥 황 이사를 향해 고개만 꾸벅 숙여보였다. 철민이 물었다.
“박 과장이랑 이대린… 어때요?”
“으응. 걔들이야… 맨날 책상에 앉아 본사 보고서나 만들고…. 현장에 비하면 도시에서 호강하는 거지 뭐 식모 두고 로칼 여비서 두고…. 오늘은 인계인수서 작성하라고 내가 아우님 마중 나오지 말라했네….”
황 이사는 뭔가가 마음에 안 든다는 어투로 말끝을 얼버무렸다.
-이 양반 뭔가 되게 삐졌나보네.
철민은 뭐라 대꾸하기도 껄끄러워 가만히 고개만 끄덕이며 잠시 생각을 모아보았다. 황 이사의 말투로 보면, 그는 출장소 직원들이 본사와 짝짜꿍이 되어 현장 지원보다는 마치 음해나 일삼는 첩자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누구의 잘잘못을 파헤치는 차원이라기보다는 구성원 개개인이 정해진 룰 안에서 얼마만큼 조직의 이익을 위해 뛰느냐는 척도를 가늠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강약에 따라 자연히 불평그룹이 생기기 마련이고 심하면 이른바 ‘총대를 거꾸로 메는 일’도 심심찮게 일어나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리고 그런 일은 누군가가 악역을 해야 만이 가능한 일이었고 그러기에 어떤 기업을 막론하고 오너에 충성하는 주류그룹과 그 충성파를 간신으로 몰아 부치는 비주류 그룹은 항상 갈라져 있는 것이 꼭 정치판을 닮아 있었다.
그렇다고 기업의 오너들이 그 비주류들을 타도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티격 거리는 ‘아랫것’들의 싸움을 말리기보다는 오히려 뱃속에 서 너 마리 씩 똬리 튼 구렁이를 감추고 앉아 두 그룹을 적당히 부추기며 오직 기업의 이익에만 몰두하는 것이 현실이었기에 당시 철민은 문득문득 도무지 뭐가 옳고 그른 것인지 분간 할 수가 없어 나름대로 적잖이 고민도 하곤 했다. 그러다가 그가 잡은 한 가지 기준이 ‘상식’이었다. 뭐 새로울 것도 없는 생각이었지만 그가 나름대로 자신의 푯대를 세운 것은 누구나 ‘상식의 도’에서만 벗어나지 않는다면 더 이상 시비를 가리지 않을 것이라고 직장생활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하지만 황 선배는 좀 심했어.
철민은 앞으로 인계인수과정에서 불가피하게 그와 신경전을 벌일 일이 적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자 골치가 아파왔다. 그는 머리를 흔들며 담배를 찾아 불을 붙였다.
황 이사는 일테면 비주류 그룹이었다. 굳이 파워 라인을 따지자면 오너 회장의 처남이며 이 산림사업을 신규프로젝트로 밀어붙인 부회장의 줄을 잡고 있었다. 특히 그는 당시로서는 값나가는 산림 기술자로서 현지 타 회사에서 비싼 임금으로 스카우트된 인물이었기에 본사의 기본 룰이나 지침에는 아예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매사 본인 뜻대로 처리해 버리는 말하자면 ‘계륵’과 같은 존재였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본사 오리지널 공채 출신들에게 씹히는 일도 많았고 견제를 당할 수밖에 없었기에 그는 항상 불만이 가득 찬 표정이었다.
“씨발넘들. 산판에 대해 쥐뿔도 모르는 것들이 맨날 불알보고 탱자탱자하고 있어.”
본사에서 무엇 무엇에 대해 이러저러한 보고를 보내라고 공문을 보내면 그가 늘상 내뱉는 18번이 이것이었다. 그리고 공문을 책상 고무방 밑에 깔아버리곤 부회장에게 전화를 해서는 전화통 하나 가득 불평을 털어 놓곤 했다.
말하자면 임지 현장 환경이 열악해 그라운드 서베이를 아무 때나 할 수 없는데 어찌 헥타당 축적을 정기적으로 보내느냐, 현지인들이 사나워 그들을 구슬리자면 돈이 필요하다, 달라는 돈은 안주고 맨날 푸시만 해대니 못해먹겠다, 똘똘한 놈 있으면 보내봐라…등등 기세가 등등했기에 부회장인들 어쩔 도리가 없이 달래고 구슬리다 보니 3년이란 세월이 휘딱 지나버렸고, 그사이 회사가 부담한 수백만 달러의 지원자금은 연기처럼 사라져버린 상황이었다. 당연히 본사에서는 가로 늦게나마 이 프로젝트에 대한 전면 재검토가 시작되었고 자연히 운영과정에서의 문제점이 하나 둘씩 불거지기 시작했다.
원인 분석을 위한 회의에 회의가 거듭되고 오너 회장은 보고서류를 부회장 앞으로 밀어 던지곤 얼굴이 벌겋게 화를 내며 회의장으로 박차고 떠나버리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었다. 회사가 비상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문책인사가 거론되고, 그 와중에 어느 날 갑자기 철민은 회장의 호출을 받았다. 회장은 단도직입적으로 명령하듯 말했다.
“자네… 중동에서 고생한 것은 아네만… 이번엔 인도네시아에서 수고 좀 해줘야겠어!”
“회장님… 저는 저… 산판의 ㅅ자도 모르는 문외한입니다.”
철민은 하도 창졸간이라 말을 더듬었다. 회장은 뭘 생각했는지 잠깐 웃음을 흘리다 똑바로 철민에게 눈길을 꽂으며 엉뚱한 말을 했다.
“자네 고스톱이나 카드 하나?”
“네에? 네… 조금은… 초봅니다.”
“그런 노름은 빠꼼한 놈들보다는 신참들이 오히려 돈을 따는 법이야. 현지에 가거든 사심 없이 순수하게 들여다보고 파악하라구… 그만 나가봐.”
철민이 뭐라고 찍소리 한 마디도 못한 채 회장실 문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뭘 그리 생각하고 있누?”
황 이사가 어느새 낯선 주차장으로 차를 몰고 들어서며 철민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아, 네… 그냥 좀….”
“더구나 이번에 상주까지 얻었다며? 한 번 더 축하하이.”
“아, 네… 고마워요.”
철민은 그의 일깨움에 비로소 아내와 아들을 떠올리곤, 지금까지 쓸데없이 회장실에서의 해프닝을 생각하며 이곳까지 온 것이 식구들에게 공연히 미안스러워 손마디를 딱딱 꺾었다.
3.
차가서고 차창 밖으로 ‘한식ㆍ일식 전문집-유끼(雪)’라는 네온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그 앞에 서있던 박 과장과 이 대리가 손을 흔들며 차 앞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비쳐왔다.
“아, 안녕하세요. 시… 실장… 아아니 이 이사님.”
철민이 차에서 내리자 박 과장이 꾸벅 인사를 하며 갑자기 말을 더듬었다. 철민은 박 과장과 이 대리의 손을 함께 잡으며 그의 말더듬 버릇이 다시 도진 것이 우스워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잘들 있었어요? 근데… 박 과장은 또 왜 그래요?”
철민이 박 과장의 배를 쿡 찔렀다.
“아, 아닙니다.”
그가 씨익 웃었다. 박 과장은 그네들 네모건설의 ‘사관생도’라 할 수 있는 공채 출신이었다. 몇 년 전 철민이 기획부장 시절 신입사원 면접을 볼 때 그들은 처음 만났다. 풀 네임은 박일랑, 이름이 특이했고 생긴 건 다소 울퉁불퉁했지만 그저 평범한 인상이었다. 그러나 영문학 전공인 그의 입사원서에 첨부된 성적은 아주 월등해 1차 2차 시험에 무난히 합격했는데, 긴장할 때의 그의 말더듬 버릇은 아직 고쳐지지 않은 것 같았다. 그는 입사 이후 남보다 두 배의 노력으로 그 말더듬 버릇을 고친 듯 보였는데, 해외 발령 이후 혼자서 출장소장 역할을 하다 보니 나사가 풀어진 탓인지, 아니면 현장상황에 스트레스가 쌓인 탓인지 그의 말투에 옛날 버릇이 되살아난 듯했다.
철민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버릇이 되살아난 것은 오히려 근래 이곳 프로젝트로 인해 난리를 친 회사사정 때문에 긴장이 더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했다. 하긴 직급 높은 황 이사의 눈치 보랴, 그가 저지른 갖가지 일들을 정리해서 리포트 하랴, 현지 은행에 융자받으러 사업현황 적당히 꿰맞춰 가짜 실적 제출하랴… 그러다 보니 스스로 사기꾼 같고 간첩 같은 심정이 안 들 수도 없을 터였다.
철민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따라 들어오던 경리 이 대리가 메모지와 더불어 팩스 용지 한 장을 내밀었다.
“뭐야?”
“사모님이랑 본사 비서실 미스 리가 전화했고요, 회장님 지시사항인가 봐요.”
“뭐라셨어?”
“글쎄요…, 도착하시면 회장실로 전화 하시라고….”
이 대리가 황 이사의 눈치를 흘끔 살피며 어물거렸다.
“알았어. 나중에 하지 뭐. 우선… 배고파 죽겠다. 곱창부터 채우고 보자구.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는데….”
철민은 우정 팩스 용지를 무시하는 척 접어 안주머니에 넣으며 그들을 따라 실내로 들어섰다. 한식집도 아니고 일식집도 아닌 다소 어정쩡한 실내장식이 낯설었다.
4.
“옴마나, 어서 오세요. 이 분이 새로 오신다는 김 이사님?”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여자 한명이 반기듯이 그들을 맞으며 철민에게 눈인사를 했다.
“그렇다네. 앞으로 내 대신 우리 회사 오야가다로 오셨네. 잘 모시라구… 한 몇 년 홀애비로 지낼테니까… 아, 그리고 이쪽은 이집 주인 유끼꼬(雪子)여사야.”
황 이사가 실없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철민에게 그녀를 소개시켰다.
“일본분이세요?”
철민이 눈을 껌벅이며 물었다. 그녀가 눈웃음을 치며 바싹 그의 옆으로 붙어섰다.
“아녜요, 아이노꼬예요. 할머니가 일본분이셨는데… 여기 와서 그냥 그렇게 이름을 붙였어요. 아이 피곤하시겠네. 자 일루 오세요.”
그녀는 의외로 시원시원하게 자기 족보를 털어 놓으며 철민의 윗저고리를 벗기듯 받아들었다.
“자, 개나발 한 번 하자구.”
그들이 예약된 방에 들어가 시킨 음식들이 나오자 황 이사가 뭐가 그리 바쁜지 부지런히 잔에다 술을 채우며 엉뚱하게 개인과 나라의 발전을 기원하자며 술잔을 높이 들었다.
“개나발!”
그들은 웃음을 얼버무리며 일제히 잔을 부딪치곤 입 속에 술을 털어 넣었다. 카아-황 이사가 다소 과장되게 입맛을 다시며 철민 앞으로 잔을 내밀었다.
“역시 쐬주야. 자, 김 이사님 한잔 받으시라구.”
그는 직원들이 있어서인지 또 갑자기 말투를 존칭으로 바꾸었다. 철민은 그의 그런 가식이 마음에 안 들었지만 암말 없이 그의 술잔을 건네받았다. 황 이사가 술을 따르며 지나가는 말투처럼 변명하듯 현장얘기를 화제에 올렸다.
“거 말야, 밀림 속을 헤매다 보면 가끔 길을 잃을 때가 있거덩. 하루는 말야… 그라운드 서베이를 들어갔는데 길잡이를 하던 현지인 녀석이 갑자기 말라리아로 나자빠졌어요….”
그의 얘기를 요약하자면 이러했다.
-길잡이 하던 현지인이 급성 풍토 열병에 걸려 캠프로 후송이 되자 나머지 일행들은 의논 끝에 그래도 조사를 강행하기로 결정을 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한 번의 그라운드 서베이를 실행하자면 그 대상 지역을 항공촬영하고 그 현상 필림을 근거로 나무 종류와 잎의 크기를 분석하여 그곳에 계산상으로 몇 그루의 경제 수종이 분포하고 있으며, 그들의 축적이 얼마나 되는지를 사전에 예측해야 했다. 그래야만 비로소 지상 조사에 임하게 되는 것이고 그리고 그 준비기간 동안 들어가는 경비가 엄청나기 때문에 일단 시작 되면 길잡이를 하는 현지인 리더가 갑자기 쓰러졌다 해서 쉽사리 현장 조사를 포기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회사 돈 들어간 게 한두 푼이야? 그러니 강행을 할 수밖에….”
황 이사는 당연하지 않으냐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알다시피 지상 서베이는 대략 보름 동안의 기간으로 약 100헥타 정도의 산판을 샅샅이 훑어보는 것인데, 그럼으로써 베어낼 나무의 분포를 기록하고 어떻게 임도를 닦아 장비를 얼마나 투입하며 잘라낼 나무들을 어디에 집적할 것인가 등등…. 산림사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절차 중의 한 요인이 아니냐?그러기에 이 작업은 그냥 대충대충 기획해서는 그야말로 돈만 왕창 날리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고민 끝에 강행을 했는데, 그때의 길잡이 없이 달려든 오기 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아마 평생한 고생만큼 한 것 같았다고 말하며, 그는 아주 비장한 표정까지 지어 보였다.
그러나 철민은 보고서를 통해 이미 그러한 과정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현장 일선의 포레스터들이 그 작업을 하면서 얼마나 고생을 하고 있는지도 여러 경로를 통해 웬만큼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이 고생을 하는 것만큼 그 결과가 신통하지 않았고, 더구나 몇몇 현장직원의 보고에 의하면, 항공 서베이를 한 후에 그 결과를 가지고 그라운드 서베이를 들어간다는 핑계로 밀림으로 들어가 어디 적당한 곳에서 캠프만 쳐 놓고 보름 동안 낚시나 하거나 사냥만 하다 돌아오는 일이 다반사라 했다. 그리고 본사에다는 그냥 항공촬영 결과만을 마치 더블 서베이의 결과인 양 보고했기 때문에 사업 시작 3년 만에 이 프로젝트를 말아먹게 된 것이라고 가로 늦게나마 본사 모두가 알아버린 것이었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자 황 이사는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그동안 자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현장의 악조건 속에서 얼마나 희생을 했으며 또 얼마나 일선에서 뛰었는지를 이제 와서 변명을 늘어놓는 셈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그가 고생을 한 것만은 사실일 것이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요? 암튼… 고생 많으셨겠네.”
철민은 정말 애 먹었겠다 는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다시 술잔을 건넸다. 옆의 박 과장과 이 대리는 그냥 꿀 먹은 벙어리 마냥 술잔만 홀짝거리고 있었다. 황 이사가 그들의 눈치를 흘끔 보며 철민의 잔을 받아들었다.
“거럼거럼. 참 그때 생각하면 추억이네…. 근 하루를 길을 잃고 밀림 속을 헤메는데… 야아, 김 이사 산거머리 공격 받아봤어?”
“아니 뭐… 월남에서 잠깐 겪긴 했지만….”
철민이 어물거렸다. 황 이사는 월남 그 깐 것과는 비교도 안 된다는 듯 더욱 과장이 심해졌다.
“야아. 나도 월남 있어 봤지만… 그건 껨도 안되요. 이놈들은 말야. 마치 실처럼 눈에 보이지도 않아요. 이놈들이 나뭇잎 밑에 무더기로 붙어 있다가 사람이 지나가면 그냥 후두둑 떨어지는 거야. 피 냄새를 맡은거지. 그래가지곤 그냥 마구 옷 틈으로 파고드는데….”
황 이사가 잠깐 말을 끊고 술잔을 입으로 털어 넣는 사이 박 과장이 희쭉 웃으며 틈 새를 비집고 들었다.
“모 몸이 근질거려 나 나중에 옷을 벗어보면 이이 놈들이 온몸에 드 들어붙어 그 그냥 통통한 나 나방이처럼 피 피를 빨고 있는거지요.”
그러면서 그는 일부러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 대리가 쿡쿡 웃었다. 철민이 물었다.
“박 과장은… 어떻게 알아? 그라운드 서베이도 했었나?”
“아아니요. 현장 추 출장가면 지 직원들이 얘기들을 해주지요. 그러고… 화 황 이사님 시 십팔번이잖아요…. 이 이사님, 밥 먹는데 거 거머리얘긴 고 고만하시고 제술 하 한잔 받으세요.”
박 과장이 그 얘기 들을 만큼 들었다는 뉘앙스를 풍기며 농담처럼 그의 무용담을 자르고 나서자 황 이사가 탁 술잔을 놓으며 돌연 표정이 험악해졌다.
“너… 너 박 과장 이 쌔끼. 나 엿멕이는거야?”
그의 입에서 갑자기 욕설이 터져 나왔다. 박 과장이 당황했다.
“아아니, 이 이사님. 저저는 그 그냥 재미있으라고 하 한 소린데요….”
“이 쌔끼… 재미 좋아하네. 너 이 쌔끼, 오야가다 바뀌었다고 그렇게 갑자기 변할 수 있는거야?”
“아이고 형님. 저 보긴 박 과장이 그런 뜻으로 한 건 아닌 것 같네요.”
철민이 딱한 표정으로 말리고 나서자 황 이사는 더욱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이번엔 철민에게로 화살을 돌렸다.
“내 말야, 그냥 암말 않으려고 했는데… 김 이사 당신말야, 당신도 그러면 안 돼. 회장빽으로 출세했다고… 적을 만들지 말라고….”
뭣 때문에 얼마나 속이 상했는지는 모르지만 황 이사는 술 몇 잔의 힘을 빌어 좌충우돌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5.
이 세상 모든 생물이 그들이 존재하는 한 싫든 좋든 자연이 내리는 이슬을 받아먹고 산다면, 어떤 놈은 그놈을 마시고 똥을 만들고 또 어떤 놈은 약을 만든다고 하든가. 철민은 취한 황 이사의 횡설수설을 귓등으로 받아넘기며 문득 왜 이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가 일했던, 그리고 앞으로 철민 자신이 일해야 할 곳이 오염되지 않은 천연의 밀림이어서 매일 들여 마시는 공기가 청량하고 이파리에 맺힐 이슬방울이 영롱할 것이란 상상이 지나쳐 그런 느낌이 떠올랐을까. 황 이사가 입에 거품을 물며 계속 지껄이고 있었다.
“씨팔 말이야. 김 이사, 당신은 회장 측근이니까… 알 거 아냐? 도대체 어떤 개자식이 날 씹은거야? 내가 여기서 슈킹이라도 해먹었다는 거야, 뭐야? 씨팔, 난 말이야. 이 산판에서 말이야, 아침이슬에 신발 적셔가며 밤에 별 뜰 때까지 좆 빠지게 헤매고 다니며 내 인생의 마지막을 걸려고 했는데….”
희한하게도 그의 말 속에서도 마치 철민의 생각을 읽은 듯 이슬 얘기나 나오자 그는 싱긋 웃음이 나왔다.
“하이고 황 선배님. 누가 뭘 슈킹했대요? 회사는 그냥, 큰돈이 들어가 회사가 안 되니까… 뭔가 플레닝이 잘못된 게 아닌가,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게 아닌가… 그런 차원이지요. 뭐… 섭한 거 있으면 풀어버리세요. 모두가 회사 운이 없는 탓으로 돌려야지요…. 자, 술이나 한 잔 더하세요.”
철민은 술 취한 척 마구 막말을 뱉어내면서 틈틈이 그와 직원들의 반응을 떠보는 듯한 황 이사의 모습이 딱하다는 생각이 들어 얼른 술잔을 들어 그의 입을 막았다. 그가 한숨을 푹 쉬며 떨치듯 철민의 손에서 잔을 빼앗았다. 철민은 그의 잔에다 술을 따르며 좀 전에 그가 뱉어낸 말을 잠시 곰씹어 보았다.
-출세? 회장빽으로?
가끔 들어온 말이었다. 심지어는 이곳으로 발령 나기 전 비서실의 미스 리와 단둘이서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도 그녀가 그런 말을 했다.
“실장님은… 좋으시겠어요.”
“뭐가?”
“회장님이 이뻐하시잖아요.”
“얘는? 그럼 임마, 내가 그 어른을 몇 년을 모셨는데…싫어하시겠어?”
“그러니까요… 앞으로 실장님은 출세가 보장된거나 마찬가지 아니예요?”
“인석이? 얌마, 출세가 무슨 회장이 이뻐한다고 하고 안 그런다고 못하냐? 모다 저하기 나름이지.”
“그래도… 하여튼 앞으로 잘 좀 봐주세요, 헤헤헷….”
그녀는 어리광도 아니고 쫑코도 아닌 실제 그대로 뭔가 부러운 눈짓으로 철민을 당황스럽게 만든 적이 있었다.
-그럴까?
철민은 머리를 흔들었다. 하긴 한 조직체의 오너가 미스 리 말마따나 예뻐해 준다면 분명 다른 사람보다는 그 조직에서 이른바 ‘끗발’을 부릴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제 아무리 측근이고 설사 제 자식이라 한들 모든 것이 저하기 나름으로 판가름 나는 것이 순리이지, 가슴만 뜨겁다고 될 일이 아니고 머리만 냉철하다고 이뤄질 일도 아닌 것이었다.
-어려운 이바구(이야기)다….”
철민은 잠깐의 생각에서 벗어나 무심히 한마디 중얼거리자 황 이사가 멈칫 술잔을 들다말고 그에게 눈길을 모았다.
“뭐라고?”
“아 아니예요, 잠깐… 그보다 황 선배님?”
“?”
“아까 말이요, 선배님 말씀중에…제가 회장빽으로 운운하셨는데… 그 말… 듣기 거북한데… 취소하시지요?”
“아 거야… 뭐… 내가 그랬나?”
황 이사가 슬쩍 꼬리를 내리며 오리발을 내밀었다. 철민은 논리적으로 다그치고 들었다. 그는 이 기회에 황 이사에게 공사를 분명히 해 둬야할 필요가 있겠다고 느끼며, 여기서 그렇게 하지 못하면 인계인수 과정에서 또 무슨 황당한 하소연을 들어야 할지 몰라 그는 못을 박고 싶었다.
“저… 아실지 모르지만… 별 나이롱 뽕으로 딴 것 아닙니다.”
“이 사람 무슨….”
황 이사가 어물거렸다.
“다른 뜻이 아니라… 제 경우 회사 근무연수나 승진연수 등등 모두가 정상적으로 이뤄졌고, 선배님 말처럼 회장님이 봐줘서 갑자기 벼락치기로 된 게 아니라는 점…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야… 김 이사 그동안의 실적들은 다 알고 있는 게 아닌가….”
“그래서 말씀인데…황 선배님 여기서 고생하신 것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일선 책임자가 판단미스나 착오로 조직에 누를 끼쳤다면… 스스로 판단하셔야지 누구 탓할 일이 아니란 점… 황 선배님이 아마 더 잘 알고 계시리라 믿어서… 그나마 제가 선배님이랑 개인적으로 대학동문이란 연고 때문에… 등 떠밀려 온 것 같습니다.”
“무슨 소리야?”
황 이사가 요령부득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회장님이… 혹 황 이사 섭섭해 할지도 모르니까 후배인 제가 가서 잘 설명하고 납득시키라고 하셨습니다.”
“….”
황 이사의 입이 갑자기 봉해졌다. 그가 묵묵히 술잔을 만지작 만지작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박 과장이 힐끔 철민의 눈치를 살피며 끼어들었다.
“이 이사님. 그 그딴 얘긴 내 내일 하시고 오 오늘은 오오랜만에 술이나 하한 잔 하시지요.”
“그러세요, 이사님. 한 잔 하시고… 자카르타의 달밤이 어떤가도 한번 돌아보시고….”
박 과장을 따라 이 대리도 거들고 나서며 철민더러 눈을 껌벅거렸다.
“그래, 그러자구. 자, 황 선배님… 이제 마음 푸시고 개나발 한 번 더 하십시다요.”
철민이 그들의 말을 받아 분위기를 바꾸며 황 이사의 잔에 다시 술을 따랐다. 그리곤 불쑥 한마디 농을 던졌다.
“황 선배님?”
“?”
“나 장가 한 번 안 보내 줄꺼요?”
그가 어색한 표정을 슬그머니 풀며 벌쭉 웃었다.
“장가? 김 이사 오자마자 장가갔다고 본사에 또 소문나면 어쩔려구?”
그러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방안에 설치된 부저를 두어 번 누르자 잠시 후 마치 기다리고나 있었던 듯 마담인 유끼꼬가 눈이 황소만큼이나 큰 현지 아가씨 한명을 데리고 들어와 철민의 옆에 앉혔다.
6.
그녀는 이름이 에띠라 했다. 함께 따라 들어온 마담인 유끼꼬는 그녀가 자카르타의 무슨 전문대학을 다니며 밤에 아르바이트를 하는 학생신분이라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녀는 간간이 한국말도 더듬거릴 줄 알았고 한국 요리도 잘 할 줄 안다고 재잘거리며 밉지 않은 모습이었다.
“뭘 잘하는데?”
“또뽀끼.”
“또뽀끼?”
철민이 무슨 소린지 감을 못 잡고 고개를 갸웃하자 유끼꼬가 얼른 통역을 하며 호호홋 웃었다.
“얜 떡볶이를 잘해요.”
“왜 하필이면 떡볶이를 아르켰누?”
철민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며 술잔을 비우자 그녀가 얼른 잔에 술을 채웠다. 술병을 잡은 그녀의 손가락이 몹시도 가녀리게 보였다. 뭐라할까? 보통의 꽃띠 처녀들의 손처럼 오동통한 느낌보다는 남국여자 특유의 가무잡잡하면서 마르고 긴 손가락이 생소했지만, 그것은 이상하게도 문득 철민에게 성욕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무심코 그녀의 손을 잡아 같이 술을 따랐다. 그녀가 방글 웃었다.
“남자들 잘 볶으라고 마담이 특별지도 했다네… 안 그런가?”
황 이사가 갑자기 어울리지 않게 으하핫 웃음을 터뜨리며 유끼꼬를 쿡 찔렀다.
“옴마나… 황 이사님 어떻게 알았죠?”
“거야… 뭐. 마담이 워낙 남정네들 잘 볶아 잡수니까… 마담이 기르는 저 녀석도 어딜 가겠어?”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마치 오늘 저녁 철민에게 그녀를 수청이라도 들 게 하려는 듯 그들은 서로 눈을 주고받으며 키득거리고 있었다. 철민 자신도 솔직한 심정으로는 이국에서의 첫 밤을 누군가와 함께 지내고 싶은 마음이 없진 않았지만 어째 기분이 썩 내키지 않은 찜찜함이 그를 자제케 하고 있었다.
-쥐약인갑다.
그는 머리를 쓸어 올리며 그녀의 손을 놓고 입맛을 쩍 다셨다. 황 이사가 그의 눈치를 흘끔 살피며 물어왔다.
“어때?”
“뭐가요?”
“오늘 저녁… 호텔에 가기 보다는 얘네 집에 가서 떡볶이나 해먹지….”
“차암… 형님두….”
“가도 괜찮아.”
황 이사의 유혹은 은근했다. 게다가 박 과장과 이 대리마저 빙글빙글 웃음을 머금은 채 그렇게 하시죠!하는 표정들이라 철민은 머리에 혼선이 오기 시작했다. 그의 궁 금함이 바로 말로 이어졌다.
“얘네 집이라면… 혼자 사나요?”
“아니, 마담과 함께 살아.”
“그럼…?”
“여기서 1차하고 그 집 가서 2차를 하자는 얘기지… 그리고 퍼지면 그곳서 자고… 그리고… 김 이사 원하면 썸씽도 가지고….”
“도대체 뭔 얘기요?”
철민이 그때까지도 이들의 얘기에 헷갈려하자 이 대리가 끼어 들었다.
“마담 언니가요… 단골손님들에게만 오픈하는… 마… 비밀요정인 셈이지요.”
“아이씨….”
철민은 그때서야 감이 잡힌다는 듯 머리를 끄덕이다가 풀썩 웃음이 나왔다.
참 우리 한국 언니들은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세계 방방곡곡 어딜 가나 먹고 마시는 영업집이 없는 곳이 없는데다 보태서 군데군데 서울 강남 뺨치는 룸사롱에다 아가씨들까지 있는 곳도 솔잖게 봐왔다. 그래, 그건 좋다고 치자. 왜냐면 외로운 여행객들, 밑돈이 숨을 못 쉬어 안달을 하는 어벙한 국산 아저씨들의 회포를 풀어주는 것도 그 얼마나 좋을소냐… 라는 영업방침(?)을 내 세우고 밥 먹고 살겠다는데야 누군들 말릴 수 있겠나만, 이젠 거기다 한술 더 떠 비밀요정이라니… 철민은 마음이 착잡했지만 또 그만큼 그곳이 어떤 곳인지 궁금해 가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이 일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황 이사도 이곳을 드나들다가 현지처 한명을 꿰차고 살림을 차렸다고 했다.
“그럼… 나 혼자 가라는 게 아니고 다함께 가는 거란 말이지….”
“아이, 그럼요. 오늘은 김 이사님 부임 첫날이라 제가 한턱 쓰는 거예요. 부담 갖지 마시고….”
유끼꼬가 누차 편한 마음으로 모시겠다고 바람을 잡으며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7.
그야말로 질펀한 밤이었었다. 새벽녘, 타는 듯한 목마름에 눈을 뜬 철민은 한순간 여기가 어딘지 금방 머리가 돌지 않아 한동안을 마른침만 삼키며 멀뚱멀뚱 눈만 굴리고 있었다. 잠시 후 그가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을 때 큰 침대 옆자리에 에띠가 얇은잠 옷만 입은 채 잠들어 있음이 어렴풋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그제 서야 모든 상황이 흐릿하게나마 일깨워지며 더듬더듬 일어나 탁자에 놓인 물병을 들어 입에 부어 넣었다. 다소 정신이 돌아오며 엊저녁의 풍경이 머릿속 에서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이른바 그녀네 요정은 ‘밀림’이라는 간판이 별도로 붙어 있었다. 그곳은 유끼雪 식당의 바로 뒤에 붙어있는 이층 양옥으로 방이 무려 8개나 되었고 1층과 2층이 별개로 분리되어 적어도 2개 팀의 손님이 서로 얼굴을 보지 않고도 마실 수 있는 시설이 골고루 갖추어져 있었다.
그들이 1차 자리를 끝내고 유끼꼬를 따라 그곳으로 갔을 땐 이미 연락이 된 듯 1층에 술자리가 마련되어 있었고 한국 아가씨까지 한사람 낀 호스티스가 세 사람이나 더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철민은 기가 죽었다. 처음 들었을 땐 외국에서 몰래하는 방석집이 뭐 그렇고 그렇겠지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시설이며 집기 비품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어느 유명 요정 못지않게 꾸며져 있었다. 철민이 슬그머니 황 이사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형님, 이거 장난 아니네….”
“그렇다구….”
“누가… 스폰서요? 혹 국내 조폭이나 무슨 정치꾼 끄나풀 아니요? 이 집 마담?”
“글쎄… 듣기론 K그룹 C회장 현지처란 말도 있고… 그나저나… 그깐 게 뭔 상관이야? 오늘은 기왕 왔응께 혁띠 풀어놓고 좆나게 마시기나 하자구… 밀림으로 들어가는 첫날 아닌가… 핫핫핫.”
황 이사는 야릇하게 말꼬리를 흐리며 저고리를 벗어 여자에게 던지곤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곤 마치 자기가 무슨 포주나 되는 것처럼 호스티스들에게 손님을 짝을 지워주기 시작했다.
술자리란 원래 그러게 마련인가 보았다 시작 전엔 다소 찜찜한 생각에 조심을 한답시고 등허리를 곧추세우며 자세를 흩트리지 않다가도 한 순배 두 순배 술잔이 돌아가기 시작하자 예라, 씨부럴! 언놈이 본사에 꼬나 박으려면 박아라. 술 마시는 게 뭔 죄냐? 일만 똑바로 하면 그만이지! 하는 생 오기가 저절로 생기며 철민은 그야말로 혁대를 끌러 버렸다. 그리곤 그때까지도 잠깐잠깐 눈앞을 어른거리던 서울의 마누라, 새끼들의 생각도 털어버린 채, 이왕 먹는 거 모든 거 다 잊어버리고 신나게 놀아보자는 오기로 오히려 좌중을 주도하면서 목구멍으로 쉴 새 없이 술잔을 털어 넣기 시작했다. 그들은 노래하고 춤추며 여기가 만리 이국인 자카르타라고는 조금도 생각이 미치지 않은 채 마치 서울 인사동의 한 요정이라도 된 듯이 온몸의 긴장을 배설하듯 털어내 버리고, 그리고 기억을 잃어버렸다.
8.
“일어나세요! 쥬스 마시세요.”
아침 비몽사몽에 젖어있던 철민은 누군가 조심스레 흔드는 바람에 깜짝 눈을 떴다. 고개를 돌리자 지난밤의 그녀가 잠자리 날개 같은 투명 잠옷 바람으로 쟁반에 오렌지 쥬스를 받쳐 들고 미소를 띤 채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어… 굿모닝… 탱규.”
철민은 공연히 쑥스러워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않은 채 우물우물 일어나 쥬스 컵을 받아들었다. 그녀가 옆에 다가와 앉으며 그의 흐트러진 머리를 손가락빗으로 가다듬었다.
“미스터 황… 은?”
철민은 할 말이 궁해 그냥 컵 째로 쥬스를 받아 목구멍으로 부어넣곤 그제 서야 그녀를 돌아보았다. 곁에 바싹 붙어 앉은 그녀의 윤기 있는 검은 머릿결이 그의 어깨를 간지럽히고 있었다.
“어제 저녁 가셨어요.”
“그럼… 우리 직원들은?”
“그분들도요. 아마 조금 있다… 이리로 오실 거예요.”
-그럼… 나 혼자 이 아이하고… 골아 떨어져 여기서 잤다?
그는 갑자기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비록 일요일이긴 했지만 어제 저녁 받은 회장의 팩스도 검토하지 않았고 하다못해 미스 리에게 잘 도착했다고 전화 한통도 못 건 것도 마음에 걸렸다. 더구나 서울 집에서는 또 얼마나 궁금해할지… 그것도 걱정되었다.
-이거 젠장… 완전히 덫에 걸린 건 아닌지 모르겄다.
철민은 입맛을 쩍 다시며 무심코 일어났다가 황급히 주저앉았다. 아랫도리에 아무 것도 걸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얼른 속옷을 찾아 꿰어 입곤 샤워실로 도망치듯 들어가 찬물을 틀어놓곤 머리부터 들이밀었다.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이 년들이 이렇게 사람을 녹여놓곤 발목을 잡는다?
-객지 생활 외롭다고 이런 곳 드나들다 한 살림 차린다?
-부임 첫날 술에 웨까닥 가설랑은 오입을 했다고 누군가 씹는다?
-완장 채워주니… 자알 논다. 자알 놀아….
철민은 그를 은근히 견제하며 빈정거릴 부회장의 얼굴이 떠오르며 찬물에 머리를 쳐 박은 채 이빨에 마구 칫솔질을 해댔다. 후회막급으로 가슴을 쳐댔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9.
“편히 주무셨어요?”
철민이 대충 샤워를 마치고 거실로 나왔을 때 언제 왔는지 박 과장과 이 대리가 소파에 앉아 있다가 꾸벅 인사를 했다. 철민은 그들의 얼굴조차 똑바로 보기가 공연히 어색해 잔뜩 볼멘소리를 했다.
“사람들이 뭐 그래? 출장소 빌라로 가기로 했었잖아?”
“죄 죄송해요. 허헌데… 너무 취하셔서 그 그냥 주무시게 했어요. 그나저나… 시 식사 하셔야죠?”
아닌 게 아니라 철민은 속이 제 속이 아니었다. 술이야 온 세계를 헤매면서 가히 영웅적으로 마신 전력이 화려하지만 그야말로 허리띠 풀고 먹은 다음 날은 어김없이 속이 쓰리고 더부룩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언젠가 그의 동창인 내과 의사 녀석은 그의 내장을 한번 들여다보곤 “야 이 새끼야. 작작 좀 쳐 먹어라. 아직까지 딴 이상은 없다만 니 새낀 현재 십이지장이 궤양성으로 변형이 되어 있다고… 약 처먹고 밥통하고 곱창 좀 달래라” 어쩌구 하며 잔뜩 겁을 준 적이 있었는데, 철민은 그때뿐이었다. 어머니와 아내의 잔소리 푸념에 진저리를 치며 한 일주일은 꼬박꼬박 약도 먹고 조심을 했지만, 그 시간이 지나자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그는 또 옛날로 돌아가고 말았었다.
“아이고 이 뿌리없는 낭구같은 자석아, 그렇게 모질지가 못해서 어떻게 처자식 멕여살릴래?”
어머니가 연신 혀를 차며 당신의 십팔번을 얼마나 되뇌셨는지 몰랐다.
옆에서 철민의 옷을 챙기던 이 대리가 불쑥 입을 열었다.
“내일 아침 비행기표 끊었어요. 산판 현장에도 연락했고요… 식사하시고 오후에 본사에 스케쥴이랑… 팩스 하실거죠?”
“그러지 뭐…그나저나 어디…콩나물 해장국 같은거 없을까?”
철민은 이 바닥에 그런 게 있는지 없는지 미처 생각도 못한 채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저쪽에서 거실 한쪽의 문이 열리며 주인인 유끼꼬가 활짝 웃음을 머금은 채 손을 흔들며 나오고 있었다. 철민은 흘깃 그녀를 일별하며 직원들을 향했다.
“박과장, 그리고 이대리?
“아, 예에….”
“있잖아… 내가 엊저녁 똥밟은 것 같네. 츳….”
“네에?”
박과장과 이대리가 공연히 흠칫하며 자세를 바로 했다. 절제 없이 태극기 좋아하다가 저지른 짓거리를 때늦게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는 임지에서의 첫 단추를 끼우며 그냥 오물통에 빠지고 말았다. 철민은 정말 스스로가 어머니 말처럼 자신이 ‘뿌리 없는 나무’처럼 생각되어 입 속에서 쓴 물이 돌았었다.
**약력: 경남 밀양 출생. 1973년 〈조선일보〉신춘문예 소설 당선. 소설집 『베니스 갈매기』, 『똥 묻은 개 되기』. 장편소설 『그대속의 타인』, 『꿈꾸는 목련』. 전작장편掌篇 『코메리칸의 뒤안길』. 중편소설 『꼬레비안 순애보』, 『이브의 능금은 임자가 없다』. 콩트·수필집 『다시 일어나겠습니다, 어머니!』. 에세이집 『우리가 사는 이유』. 에세이·칼럼집 『인생역전, 그 한 방을 꿈꾼다』. 시·시조집 『꿈을 담은 사진첩』. 경희해외동포문학상, 미주문학상, 고원문학상 수상. 한국, 미주문인(소설가)협회, 달라스 문학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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