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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호/아라세계/신연수/초창기의 인천문학仁川文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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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896회 작성일 17-01-06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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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세계

신연수






초창기의 인천문학仁川文學
―『습작시대習作時代』 2호와 『월미月尾』





   인천 최초의 문예지인 《습작시대習作時代》는 1927년 2월 1일, 진우촌에 의해 창간되어 총 4호까지 나왔다. 그리고 한 달 후인 3월에 2호, 그리고 4월에 3호가 각각 나왔는데 4호는 〈동아일보〉 기사로 발간된 것이 보도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뿐 실물이 확인되지 않아 그 내용은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

현재 《습작시대》는 필자에게 창간호가, 그리고 연세대도서관에 3호가 각각 소장되어 그 내용이 알려져 있다. 하지만 2호와 4호는 어느 곳에서도 보이지 않고 있어 연구자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그나마 지난 2002년 《인천문화비평》제10호에 이희환 씨 해제로 창간호와 3호는 영인이 되어 일반인도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은 다행이라 하겠다. 2호와 4호도 하루 빨리 발굴되어 인천문학사 연구에 자료로 제공되기를 빌어 본다.

《습작시대》는 창간호와 2호를 46배판으로 만들었는데 3호부터는 당시 일반적인 잡지처럼 판형을 국판으로 바꾸었다. 그래서인지 3호에는 ‘四月刷新號’라는 이름을 붙였다. 또 판형이 바뀌면서 면수도 20면(창간호의 경우)에서 55면으로 크게 증면되었지만 전체적인 분량으로 볼 때 종전과 크게 늘어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런 면에서 쇄신호라는 이름도 외형적인 변화를 든다면 몰라도 내용적으로 본다면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굳이 찾는다면 종전엔 보이지 않던 신진 문인들이 새롭게 동인으로 참여하고 이들이 쓴 일부 작품이 눈에 띄는 정도라고나 할까?

현재 연세대학교에 소장되어 있는 3호를 보면, 표지 중앙에는 “습작시대”라는 한자로 디자인된 글씨가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좌측에 ‘4월 혁신호’, 우측에 ‘정가 금 15전’, 하단에 ‘인천 습작시대사 발행’이라고 디자인되어 있다. 이 표지는 인천문인이면서 우촌과 함께 아동문학을 연구하는 ‘꽃별회’ 동인으로 활동한 박동석朴東石의 작품이다.

수록 작품은 ‘평론’, ‘상화想華’, ‘6호란六號欄’, ‘시가’, ‘창작’ 등 5가지 카테고리에 총 20편이 실려 있는데, 일부 시작품은 하나의 제목 아래 2편이 실리기도 해 실제로는 총 22편이 수록되어 있다. 평론은 박아지朴芽枝의 ‘농촌시가소론農村詩歌小論’, 전영택田榮澤의 ‘사람과 글’, 양주동梁柱東의 ‘문예단상文藝斷想’, 김도인金道仁의 ‘나의 결투장決鬪場’, 유도순劉道順의 ‘문예잡담文藝雜談’ 등 5편, 상화는 엄흥섭嚴興燮의 ‘신춘예찬新春禮讚의 일절一節’, 이성로李城路의 ‘외로운 봄날’ 등 2편이다.

또 육호란은 이은성李隱星의 ‘인상잡초印象雜草’, 염근수廉根守의 ‘낙랑기樂浪記’, 홍효민洪曉民의 ‘일기日記2篇’, 남호한인藍湖閑人의 ‘습작習作과 나’, 파운把雲의 ‘이야기 두마듸’, 변추풍邊秋風의 ‘고좌한담孤座閑談’ 등 6편인데, 여기서 ‘육호란’이란 다른 작품의 경우 본문이 5호 활자로 조판되어 있는데 비해 이보다 한 급 낮은 6호 활자로 조판한데서 붙인 이름으로, 가볍게 읽을 수 있는 글이나 유머 정도로 보면 된다.

그리고 시가는 박아지의 민요시 ‘힌나라’와 ‘봄 기다리는 마음’ 2편, 우이동인牛耳洞人의 ‘봄 물결’, 장정심張貞心의 ‘내 맘도’와 ‘주主시여’ 2편, 소용수蘇瑢叟의 ‘이 무슨 설음인고’ 등 총 6편이고 창작은 윤귀영尹貴榮의 ‘김주부金主簿’, 이경손李慶孫의 희곡 ‘승객乘客’, 한형택韓亨澤의 희곡 ‘종鍾소리 나는 날’ 등 3편이다.

이중 3호부터 새 동인으로 참여한 《월미》의 주간 김도인의 경우 당시 신진 문인임에도 불구하고 《습작시대》 2호에 실린 팔봉 김기진의 글을 비판하는 공개서한을 발표해 주목을 받았다.


2호는 현재 실물을 찾을 수 없어 팔봉의 글 전문을 볼 수 없지만, 김도인은 팔봉이 ‘지역 문학청년들을 문학적 완성도 없이 공리성만을 추구한다’며 ‘습작시대 동인들의 미숙함을 비판’한데 대해 맑스 신봉자의 폭언이라고 강력 비난했다.

이 밖에도 3호에는 여러 신인들이 동인으로 참가하고 있다. 우선 눈여겨 볼 사람은 박아지朴芽枝 시인이다. 박아지 시인은 해방 후인 1946년 3월 우리문학사에서 『심화’心火』라는 시집을 발간하기도 하는데, 이때에는 민요시 ‘힌나라’와 ‘봄을 기다리는 마음’ 등 2편을 처음으로 발표한다.

또 다른 신인은 장정심張貞心이다. 장정심은 여류시인으로, 1930년대에 『주主의 승리勝利』와 『금선琴線』이라는 종교시집을 잇달아 내기도 하는데 3호에도 종교시 2편을 발표한다. 그 밖에 영화감독인 이경손李慶孫과 인천문인인 한형택韓亨澤이 각각 ‘승객乘客’과 ‘종소리 나는 날’ 등의 희곡을 발표하는데, 이 감독의 희곡은 3막인 전부를 수록하지 않고 일부만 발췌, 소개해 아쉬움을 남겼다.

《습작시대》가 제4호로 막을 내리고, 인천에 새로운 문예지가 탄생한 것은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나서였다. 그 동안 인천부仁川府에서 내는 기관지 《인천仁川》과 《농촌월보農村月報》 등 잡지가 전혀 발간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들은 모두 특수지로, 문예 중심의 잡지가 다시 등장한 것은 1937년 1월 10일 창간된 《월미月尾》가 처음이다.

새로운 잡지 《월미月尾》의 탄생
《월미》는 46배판, 50면의 ‘취미’와 ‘문예’를 근간으로 한 종합지 성격의 잡지다. 편집 겸 발행인은 김도인金道仁, 발행소는 인천부 용강정(仁川府 龍岡町, 현재 중구 인현동) 24, 백미사白眉社이며, 창간호만 내고 더 이상 나오지는 못했지만 당시 인천하면 ‘월미도’를 떠올릴 정도로 인천을 대표하는 이름으로 나온『월미』는 인천에서 나온 최초의 종합지로서 의미가 커다 하겠다.

당초 《월미》는 발간준비 단계에서 제호를 《백미》로 정했다가 발간하면서 『제호를 변경, 월미』로 바꾸었다. 주간인 김도인은 제호변경에 대해 “친구 박성원朴盛源이 순백의 2층 양옥을 짓고 그 이름을 ‘백미’라 불렀는데, 그곳에서 친구는 ‘약藥과 화장품化粧品영업’을 하고 자신은 잡지발행을 계획했는데 《백미》라는 잡지 이름을 정하고 보니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 잡지를 약업藥業의 선전지로 볼 수 있어 인천을 표시하는 이름인 《월미》로 바꾸었다고 말한다.

동아일보 인천지국 기자출신인 김도인은 한때 진우촌이 주도한 《습작시대》 동인으로 참여하기도 했으며 우촌, 정암, 원우전 등과 극단 ‘칠면구락부’를 조직해 활동하는 등 해방 후까지 인천의 문화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한편 창간호로 끝난 《월미》를 복간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끝내 결실을 맺지 못하고 민족분단의 와중에 월북한 것으로 추정된다.

주간인 김도인이 쓴 발간사를 보면 《월미》창간의 일단을 살펴볼 수 있다.
 
“인구 10만을 산算하는 인천에 이곳을 본위本位로 삼은 출판물 한개가 없을소냐? 미력이나마 공헌供獻이 있고저 출생出生하였으니 왈 월미”
“의의意義가 깊은 것까지 알면서 유지維持문제를 우려하고 실현이 없을소냐? 노력해보고저 시작하였으니 왈 월미”라 밝히고 있다. ‘인구 10만의 지역사회 인천을 위해 어려움을 각오하고 월미를 만들었다’는 김도인 나름의 의지표현이라 하겠다.

지면을 살펴보면 지역을 위한 확고한 창간의지를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월미》는 먼저 지역을 표방한 잡지답게 인천에 대한 정보를 앞부분에 소개하고 있다. 이어 가정란과 체육계의 동향 등 생활과 교양에 관한 글을 실었으며, 뒷부분 절반 이상 지면에 문예란을 배치해 전체적으로는 종합지이면서도 문예지를 표방할 수 있도록 했다.

먼저 눈에 띄는 인천 관련 글은 K기자의 ‘인천을 노櫓젓는 이들’이다. ‘관계官界의 선두先頭’인 인천의 기관장 명단을 첫 머리에 싣고 이어 정치국丁致國과 김윤복金允福 등 인천의 유지들이 시내 만석정 6번지에 설립한 ‘계림자선회鷄林慈善會’의 연혁과 사업 및 그 역원 명단을, 다음으로 인천체육회의 창립과 그 역원 및 부서들을 각각 소개했다.

이어 연극인 정암鄭巖은 ‘인천의 지형은 여성적’이라며 인천의 각 마을을 여성의 몸에 비유해 설명한 ‘인천지형仁川地形의 곡선미曲線美’로 눈길을 끌었으며, 김소석金小石은 ‘인천권투운동仁川拳鬪運動의 장래將來’를, 임하참林河參은 ‘인천인물론’을, 이도령李道令은 ‘인천仁川의 모-던 만평’을, G선생線生은 ‘인천음악동호인점고仁川音樂同好人店考’ 등 인천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제공했다.

인천사회에 있어 한호 발간으로 단명한 《월미》가 중요한 이유는 지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문예란 때문이다. 《월미》는 일반인은 물론이고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거의 알려지지 않은 탓에 수록작품 대부분이 2001년 연세대학교 소장본이 공개되면서 처음 알려졌다는 점에서 크게 주목을 받았다. 이는 『월미』가 그동안 이름만 전해졌을 뿐 실물공개는 이루어진 적이 없어 수록작품 대부분이 미공개작(?)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수록작품을 보면 먼저 아동문학에서는 동화작가 최병화의 창작동화 ‘산속의 외딴집’, 금별의 동요 ‘별’이 있으며 수필은 소설가 엄흥섭의 ‘인천소감’, 은구산殷龜山의 ‘인천해안에서 만난 소녀’가 실려있다.

그리고 시는 시인 김해강金海剛의 ‘청공靑空을 머리에 이고- 새봄을 맞으며 인천의 젊은 동무들게’와 시인 박세영朴世永의 ‘월야月夜의 계명사鷄鳴寺’, 희곡작가 함세덕의 ‘고개’가 있고 이어 규수소곡閨秀小曲이라는 제목아래 최수경崔秀京과 김성희金星熙가 각각 ‘꿈’과 ‘괴로운 밤’이 실려있다.

이중 함세덕咸世德의 경우는 극작가나 연극인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데 시를 창작, 발표함으로써 시인으로서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 주기도 했다.



누나야 고개로 오너라
훈풍에 쌓인 삼월 비탈엔 초록이 미끄러지고
길손 없는 들길이 봄빛에 잠들었다.
너의 유난히 밝은 귀를 기울여라
어제 밤 처녀별이 쉬고 간 골자기에
긴-치마 끌며 내려오는 봄여신 발소리여
누나야 이런 날이면 우리는
부엌문을 차고 나서 들뫼에 올라앉아
봄 맞아 푸른 들판을 바라보며.
가슴속 깊이 감췄던 먼- 행복을 날렸지야


누나야 고개로 오너라
새로운 자유의 땅의 예감
그것은 봄이면 피는 먼 꿈
돌밭에 뿌려진 생명을 무럭무럭 키우고
삶은 보리에서 싹이 트는 기적을 보여주자
벌레들이 쉬는 풀숲을 적시는 샘같이
가능성 있는 희망이 용솟음치지 않니?


끝없이 뻗은 참된 삶의 길에다
참된 눈물과 참된 웃음을 흘리며
배꽃 핀 목장에 양 기르는 목동같이
누나야 오늘도 이 희망과 예감을
고이고이 키우자


어둠의 등대같이 우리의 등불로
새날과 새 삶을 맞으러가자
누나야 고개로 오너라
끝없이 뻗은 들판이 우리를 부르지 않니?
무한한 푸른 하늘이 우리를 반기지 않니?


                                                                           ―함세덕 시 「고개」 전문



   그리고 촌극寸劇이라고 소개된 극작가 송영宋影의 작품 ‘인생미두人生米豆’를 비롯하여 윤기정尹基鼎의 꽁트 ‘호의好意’가 실렸는가 하면 ‘고향’의 작가 민촌 이기영은 ‘백인당百忍堂’이라는 연재소설 1회분을 실었는데 잡지가 창간호로 끝나 아쉽다 하겠다.

   마지막으로 실린 창작은 배찬국裴燦國의 단편 ‘여분餘憤’이다, 배찬국은 편집후기에 소설가로 되어 있을 뿐 다른 인적사항은 알 수 없는데, 《월미》의 표지와 목차 및 본문의 커트도 그렸다는 점에서 주간 김도인과 가까우면서 그림에 관심이 많은 인천사람인 듯 하다. 1930년대 초 일부 신문에 경성고보와 경성법학전문학교를 나와 미전美展에서 특선을 하는가 하면 전시회평을 쓰기도 한 배찬국과 동일인물이 아닌가 한다. 배찬국은 소설 ‘여분’ 의 내용 중에도 여러 가지 미술용어를 사용하고 있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그리고 또 생각나는 것은 일제강점기 인천에서 사업을 하다가 해방 후 서울에서 ‘백양당’이라는 출판사를 경영하며 표지장정을 직접한 배정국裵正國과는 어떤 관계인지 궁금하기도 하다.








**약력:시인. 인천문협 회원, 근대서지학회 회원. 법률신문사 이사 겸 총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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