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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호/산문/박혜숙/돌을 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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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421회 작성일 17-01-06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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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

박혜숙





돌을 품다




   무릉계곡의 아침은 청정하다. 바위틈을 굽이쳐 흐르는 물은 소리만 들어도 서늘하다.  삼화사에서 아침 공양을 마치자마자 댓바람에 길을 나섰다. 어제 보아둔 너럭바위에서 계곡물에 발 담그고 신선놀음이나 즐기려던 생각이었다. 느슨하던 걸음이 관음암 이정표 앞에서 갈등한다. 무릎 통증을 염려하면서도 발은 이미 비탈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암자로 가는 길은 오르막부터 시작한다. 녹록치 않은 산길이다. 물소리는 멀어지고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목덜미에 감긴다. 시원한 계곡을 버리고 험한 길을 택한 것은 암자를 보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피서객이 몰려드는 물가보다는 호젓한 숲속에 나를 온전히 맡기고 싶은 생각에서다. 육신의 휴식보다 마음의 정화가 절실했나보다. 완강하게 버티는 산길을 오를수록 몸은 무거워지는데 마음은 오히려 가벼워진다.
오르막 중간에서 눈과 발이 함께 멎는다. 참나무 밑동에 날카로운 바위가 박혀있다. 나무의 옆구리를 파고 든 무뢰한은 넓적하고 각이 진 커다란 돌이다. 그다지 굵지도 못한 나무가 감당하기에는 버거워 보인다. 제 몸도 지탱하기 어려울 비탈에서 나무는 흘러내리는 돌의 무게까지 견디고 있다. 나무의 고통이 내 옆구리로 전해진다.
십여 년 전 어느 새벽의 일이다. 숨도 쉬기 힘들만큼 옆구리에 극심한 통증이 왔다. 산통에 버금가던 통증은 병원 응급실에서 마약성 진통제 주사를 맞고서야 진정되었다. 강도처럼 습격해 일격을 가한 통증의 원인은 결석이었다. 생전의 아버지가 몇 차례나 겪었던 그 고통스런 병증을 내가 닮아있었다. 나를 돌개바람 속에 흔들었던 돌은 겨우 쌀 톨 만한 작은 것이었다.
   우리 동네 산에도 돌과 한 몸이 된 나무가 있다. 등산로 옆에서 오가는 사람들의 눈요깃거리가 된다. 사람들은 ‘돌 먹는 나무’ 라고 부르지만 내 눈에는 ‘돌 낳는 나무’의 모습이다. 아이를 낳을 때 엄청나게 열리는 산문産門처럼 나무거죽이 벌어졌다. 그 사이로 밋밋한 돌이 빠져나오는 모습이다. 보기에 다소 민망하지만 돌을 포식하는 무지한 입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산고를 견디는 모습에 연민을 느껴 출산을 빨리 끝내도록 도와주고 싶은 심정이다.
이질 간의 만남은 고통스럽다. 서로 융합 할 수 없는 성질 때문이다. 숲에서는 키 큰 나무를 감고 올라가는 덩굴 식물을 흔히 볼 수 있다. 혼자 설 수 없는 덩굴식물이 광합성을 하기 위해 택한 방법이다. 염치를 아는 덩굴은 자신의 줄기를 유연하게 만들고, 큰 나무는 기꺼이 몸을 빌려주어 함께 살아간다. 그러나 돌과 나무의 만남은 그렇지 못하다. 돌의 성질은 고집스럽고, 차갑고 단단하다.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이기적이다. 그러므로 상대적으로 약한 나무의 희생이 크다.
자신의 삶을 온전하게 다스리며 살고 싶은 것은 사람이나 나무나 마찬가지리라. 돌과 부딪힌 나무도 아프고 힘겨웠을 것이다. 나무가 소리를 낼 수 있었다면 산이 떠나가라 소리치고 계곡의 물소리보다 더 크게 울었으리라. 그 울음소리가 골짜기를 타고 산 속 구석구석 퍼졌다 한들 누구하나 위로하고 도와주는 이 있었을까? 사람 세상의 인심이 그러하듯 이 산중의 모든 생명들도 각자 자신의 짐을 힘겨워하면서 귀머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그 고통 속에서도 나무는 잘 자랐다. 사고뭉치 자식을 치마폭으로 가려 안은 듯, 추락하는 가족의 위험을 막아내려는 모성의 모습 인 듯, 옆구리에 박힌 돌을 온 몸으로 견디고 있다. 아니, 품어 안고 있다. 소아마비를 앓은 다리처럼 약한 밑동으로 높이 자란 몸체를 지탱하고 있는 모습이 대견하다. 가지는 주변의 여느 나무 못지않게 풍성하고 잎이 푸르다.
   사람 세상의 일도 마찬가지다. 부딪쳤을 때 고통을 당하는 것은 약자다. 개인의 사사로운 욕심이 걸림돌이 되기도 하고, 융통성 없는 제도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할 때도 있다. 전쟁과 같은 시대적 혼란으로 인생이 험난해지기도 한다. 중도에 은퇴를 하고 낯선 세상에서 뛰어들었던 남편도 앞을 막는 장벽이 힘에 부쳤을 것이다. 나 또한 힘든 장애물 때문에 절망했던 날이 있었다. 돌이켜보면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그 상황을 뛰어넘을 만큼 강한 힘이 아니었다. 오히려 욕심을 내려놓고 더 너그러워졌기 때문이다. 인정하고 껴안았기 때문이다.
내 몸속에는 지금도 돌이 있다. 지난번 건강검진 때 담낭에 여러 개의 돌이 있는 것이 초음파 검사로 발견되었다. 언제부터 자리 잡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고맙게도 아직까지 내게  아무런 위해를 가하지 않았다. 나도 처음 고통스러웠던 그 새벽처럼 두려워하지 않는다. 돌이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면 먼저 내치지 않을 것이다. 내 안에 자리를 내주었으니 함께 편안히 지내기를 바랄 뿐이다.      
    계곡 물의 흐름은 거침이 없다. 수많은 돌과 바위가 길을 막아도 망설이지 않는다. 완력으로 장애물을 넘어트리지 않고 부드럽게 바위를 감싸고 흐른다. 고통 앞에서 최고의 선禪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품어 안는 것이다.








**약력:1994년 《수필과비평》로 등단. 인천문협 에세이포레 회원. 수필과비평 문학상 수상. 수필집『빈들에 허수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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