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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호/산문/김영식/가지 않은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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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586회 작성일 17-01-06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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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

김영식





가지 않은 길




“어머!, 성원씨 아니세요? 저예요. 수정이.”
오피스텔 빌딩 회전문을 통해 밖으로 나선 순간, 막 문으로 들어오려는 삼십대 후반의 약간 동그란 얼굴의 여인이 그를 반가운 표정으로 쳐다보고 우뚝 섰다. 얼굴 테두리를 빙 1센티 정도 잘라내기만 한다면 십여 년 전의 익숙한 얼굴 그대로인, 성원이 전 직장에서 함께 일했던 김수정이었다. 조용한 호수에 돌 하나 떨어진 듯 순간 가슴이 출렁거렸다. 하지만 그는 가슴의 파문을 얼굴로 드러낼 만큼 미숙한 청년은 아니다. 아니, 얼굴로 드러날 만큼의 파문이 아니었을지도.
“아, 수정씨 이게 얼마 만입니까? 여기서 다 만나다니.”
“성원씨, 이 빌딩에 계세요?”
“예, 십 년 됐죠? 회사 그만 두고 곧바로. 수정 씨는 웬일로?”
“와우, 세상에. 저, 지난주부터 여기 오피스 하나 얻어 들어왔어요.”
“아, 그래요? 반갑네요. 저기, 근데, 제가 지금 약속 있어 외출하니까 이따가 저녁 6시에 볼까요? 바로 여기 지하 커피숍에서.”
“네, 그래요. 정말 반가워요. 씨 유 레이러. 저 꼭 할 말 있어요.”
환한 미소를 남기고 몸을 돌려 회전문으로 들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늘씬한 그녀의 뒤태가 그를 계속 붙잡았지만 그는 억지로 몸을 돌렸다. 길을 가는 성원의 눈앞에는 그녀의 뒷모습이 잔상으로 어른거렸다.
성원은 대학 졸업 후 어느 외국계 회사의 서울지점에 입사했다. 지점치고는 규모가 큰 백여 명 정도의 회사지만 성원이 돌이켜보건대 그 회사는 요즘 말하는 아무도 모르게 숨겨진 신의 직장이었다. 월급은 국내 대기업의 1.5배~2배 수준이고 당시 아직 국내기업은 토요일도 오전 근무했던 시절에 그 회사는 이미 주5일 근무였다. 토요일에 어디 등산을 가려고 해도 친구들은 대부분 근무일이라 혼자 또는 회사 동료와 함께 다녔는데 하산 후에 들어간 식상에서는 종종 ‘학생’이라 불리기도 했다.
성원이 그 회사에 들어간 건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다. 우연히 학교 취업게시판의 공고를 보고 학장 추천서를 얻어 면접과 영어시험을 거쳐 막상 회사에 들어가 보니 자신처럼 서민 출신의 입사자는 드물었다. 중도에 갑자기 들어오는 신입사원도 있고 공채라는 형식을 통해 들어왔지만 미리 이런저런 인맥으로 내정된 사람도 많았다.
성원의 입사 후 반년이 지나 명문대 출신의 남자 신입사원이 들어왔다. 일단 신입사원이라 수습기간이 있어 몇 개월간 회사는 지켜봤지만 그는 반년이 지나도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알고 보니 그는 명문대를 체육특기자로 입학하고 졸업한 자로 회사에 부지점장의 인맥으로 들어오긴 했는데 영어도 늘지 않았고 업무를 처리할 능력도 되지 않았다. 그는 결국 1년 만에 회사를 그만두었다. 하지만 그런 그도 활기차게 ‘회사 일’을 한 때가 잠시 있었는데, 그건 운동선수 출신이라고 사내체육대회 행사 간사를 맡았을 때였고 또한 그는 남모르게 열심히 ‘회사(에서의) 일’을 했던 듯, 회사에서 가장 예쁜 여직원인 지점장 비서와 퇴사 한 달 전에 결혼식을 올렸다. 짧지만 매우 성공적인 회사생활이 아니었을까.
청탁받은 사람만 뽑아서는 회사도 좋은 인재를 확보하기 어려웠을 것이니 성원처럼 아무런 인맥 없는 공채 입사자는 그래도 전 사원의 반 이상은 되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런 공채 출신 중에서도 성원만치 가난한 집안 출신은 거의 없었다. 이것도 출세라고 해야 하는 것인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사회적 신분상승은 어쨌든 그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여직원은 남직원보다 인맥 입사자가 더욱 많았다. 아주 오래전에는 여상 출신의 우수한 여직원을 뽑았지만 그 당시에는 대졸이 흔해져서 여직원도 대졸사원 채용으로 바꾸었는데 공채도 있었지만 이런저런 인맥으로 들어온 ‘양가집 규수’가 많았다. 그들 대부분은 들어와서 이삼 년 정도 근무하다가 결혼 후 곧 회사를 그만 두었다. 회사는 결혼하면 그만두는 조건으로 ‘규수’들을 받아들였다는 게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김수정은 바로 그런 규수의 한 사람이었다. 성원이 입사하고 3년 정도 지난 어느 날, 성원과 같은 부서에 신입 여사원이 들어왔다. 취업 연령을 좀 넘긴 20대 후반인데 일본에 몇 년 미국에서 몇 년 동안 공부하고 얼마 전에 귀국했다고 하는, 얼굴은 미인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아주 세련된 스타일의 여자였다. 며칠 후 성원의 귀에도 그녀에 관한 정보가 들어왔다. 그녀는 국내 모그룹  회사 사장의 딸이며 그녀가 입고 다니는 옷은 모두 한 벌에 백만 원이 넘는 브랜드라고 했다.
어느 날 점심시간, 식사를 마친 성원이 커피를 뽑아 먹으려 회사 휴게실에 들어가니 한 구석에 여직원들이 모여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 속에 있는 수정이 성원을 발견하고 이리 오라고 손짓을 한다. 성원은 다가가 그녀들 옆에 섰다.
“성원씨는 초등학교 어디 나왔어요?”
뭐라고? 질문의 의도를 짐작할 수 없었다. 사회에 나와 이런 질문 하는 사람 만난 적이 없었다. 서울 변두리의 공립초를 나왔다고 하는 성원의 대답에 수정 등은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들어보니 수정의 옆에 앉은 A양은 홍대부초, 건너편의 B양은 리라초이고 수정은 B와 같은 리라초인데, 회사에는 동문도 몇 있고 또 남자직원 중에도 누구는 동문이라고 한다. 그녀는 이 회사 들어올 정도라면 성원도 당연히 사립을 나왔다고 생각해 족보를 맞춰보려고 질문했던 것이다. 사립초 동문들은 학교 다닐 때는 물론이고 졸업 후에도 계속 이 그룹 저 그룹으로 부모끼리도 그들끼리도 자주 만난다고 했다. 딴 세상 이야기였다. 수정은 말을 돌렸다.
“독서클럽 다시 시작하시는 게 어때요? 이야기 들었어요. 저랑 B가 하고 싶어요.”
재작년에 성원은 뜻 있는 몇몇 사원들과 격주에 한 번씩 만나는 독서클럽을 만들어 이끌었던 적이 있었는데 다섯 명의 회원 중 핵심적인 여직원 한 명이 결혼하며 회사를 그만두고 또 입사 동기 남직원은 지방사무소로 전근 가는 바람에 클럽 활동은 중단된 상태였다.
적극적인 성격의 수정 덕분에 독서클럽은 활기가 넘쳤다. 솔직히 성원이 기대한 만큼 회원들은 제대로 책을 읽지 않았지만 그러면 어떠하리, 청춘들은 작품의 줄기 탐색은 제쳐두고 꽃과 가지를 안주삼아 넓고 얕은 대화로 즐거운 술자리를 가졌다.
어느 날 독서클럽 모임을 마치고 수정과 성원은 함께 전철을 타고 갔다. 어떤 말결에 수정은 똑똑하고 착한 사람이 좋다고 했다. “착하고 똑똑한 사람은 눈이 초롱초롱 한데 성원씨 눈이 그래요. 반짝 반짝거려요. 호호…….” 성원은 “그래요?”라고 싱긋 웃을 뿐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그때 성원에게는 대학 때부터 사귄 지금의 아내가 있었다. 이미 결혼을 약속한 상태라 다른 여자에 대한 마음은  닫아버린, 수정의 말대로 ‘착한’ 성원이었다. 잠시의 침묵 후에 그녀는 전철을 내렸고 그 이후로 다시 그런 장면은 찾아오지 않았다.
성원은 반 년 후 결혼을 했고 수정은 1년 후에 결혼한다며 회사를 그만 두었다. 남자는 어느 재벌의 아들로, 결혼 후 남편이 곧 뉴욕지사로 발령 받아 함께 떠났다는 말이 들려왔다.
몇 년 후, 회사가 구조조정을 한다며 좋은 조건으로 명예퇴직 신청을 받았다. 성원은 삼십대 중반의 젊은 나이였지만 회사를 사직했다. 작은 무역회사를 직접 경영하고 싶었다. 그런데 마침 그때가 주식의 활황기였다. 모증권사의 광고 카피 “Buy Korea”로 대표되는 시기였다. 직접 투자에 자신이 없어 처음에는 증권회사에 맡기는 간접투자를 했다. 금세 한 달 만에 수익이 달성됐다고 연락이 왔다. 좀 더 투자를 늘렸는데 또 금세 수익이 달성되었다. 아예 직접 투자에 나섰다. 계속 돈은 불어났다. 하루에도 몇 백만 원이 올랐다. 굳이 새로운 일을 할 필요가 없이 그저 사무실에서 컴퓨터로 주식만 쳐다보면 되었다. 나머지 시간에는 독서나 하며 시간을 보내면 될 터였다.
그러다가 폭락이 찾아왔다. 손절매를 하지 못한 성원은 보유 현금으로 주식 물타기를 계속했다. 퇴직금도 바닥났다. 아무리 그래도 꾸준히 갖고 있으면 언젠가 오를 것이라고 생각했던 주식이 느닷없이 감자減資라는 것을 당했다. 성원은 감자라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얼마 후 잔고는 1/10이 되었다.
정신 차리고 새로 무역 일을 시작했지만 당장 돈이 벌릴 리 없었다. 시간이 지나며 수출 건 몇 건이 성사되어 조금 수입이 생기긴 했지만 그가 취급했던 아이템은 이미 중국보다 경쟁력이 떨어졌다. 늘 돈에 쪼들렸다. 아내는 아이 출산 후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주부가 되었는데 급작스런 성원의 퇴직으로 불안해 하다가 결국 주식으로 퇴직금을 날리고 몇 년 지나도 월급을 제대로 갖다 주지 않는 성원을 곱게 볼 수가 없었다. 아내와의 불화가 잦은 불쾌한 삶이 이어졌다. 부부싸움 후 밖으로 나와 포장마차에서 혼자 소주잔을 기울일 때마다 성원의 머리에는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이 떠올랐다. 내가 만약 수정과 결혼했더라면…….
커피숍에 앉아 있는 수정은 여전히 활달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미국생활이 오래된 탓인지 엄, 엄 하는 미국식 말투가 섞였지만 그것이 오히려 세련되게 보였다.
서로 아는 지인들에 대한 현황 파악이 끝나고 수정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잠시 얼굴의 화장을 고쳤다.
“참, 제가 할 말 있다고 했죠?”
“네, 그랬던 것 같습니다만.”
성원은 아까 헤어진 후에 수정의 ‘할 말’을 상상해 보았다. 어떤 이야기일까? 혹 남편과 이혼하고 싱글로 한국으로 돌아온 것일까? 그렇다면……. 성원은 갑자기 목이 타서 커피를 크게 한 모금 들이켰다. 
“성원씨는 요즘 비즈니스 잘 되세요?”
“저야 뭐, 그저 그렇습니다.”
“엄, 요즘 저 뭐하는지 아세요? 저 요즘 잘 나가요. 음, 먼쓰리 2천 들어오죠. 암스킨이라고 아세요? 저 한 3년 했는데 지금 제가 라이온 클래스인데 이 정도만 되면 가만히 앉아 있어도 돈이 들어와요. 그리고 요즘 차이나 다니면서 네트워크 세팅 아이엔지예요. 거기 셋업만 되면 1년 내에 플러스 2천은 베리 이지해요. 어때요? 성원씨, 제가 베리 굿 오포튜니티 주는 거예요. 옛날 인연 생각해서 성원씨니까 이스페셜리. 저랑 같이 해 보지 않겠어요?”
‘…(ㅜ_ㅜ)….’








**약력:작가·번역가. 2002년 계간 《리토피아》 신인상. 저서로 『그와 나 사이를 걷다-망우리 사잇길에서 읽는 인문학』(문광부 우수교양도서). 최근의 번역서 『산월기』(나카지마 아쓰시, 문예출판사, 2016.10). 블로그: blog.naver.com/japanli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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