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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호/단편소설/심봉순/하지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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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798회 작성일 17-01-05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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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심봉순





하지감자




대청마루에 엎드려서 책을 읽고 있던 나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마룻바닥이 차서 아까부터 일어나고 싶었다. 퍼들퍼들했던 감자포기조차 척척 짜부라지는 한낮에도 마루는 시원하다 못해 선뜩했다. 뒤란의 자두나무 가지가 열려 있는 쪽문으로 곧 비집고 들어올 태세다. 가지에는 푸른 자두가 조롱조롱 달렸다.
대청마루에 앉아 있으면 동네 입구가 한눈에 다 들어왔다. 마루가 덩그렇게 올라앉아 있기도 했지만 집 앞에는 넓은 감자밭밖에 없기 때문이다. 감자밭 옆으로는 동네를 감싸며 강물이 흘렀고 그 위로 길게 놓인 출렁다리가 마을의 관문 역할을 했다.
감자꽃이 하얗게 피어 있는 밭둑으로 걸어오던 사람은 어느새 대추나무 울타리를 돌아 커다란 돌배나무가 서 있는 안마당 쪽으로 저벅저벅 들어오고 있었다. 대추나무가 울타리처럼 빙 둘러싸여 있는 바깥마당은 대청마루에서는 돌아앉아 있어 보이지 않았다. 
“아지매 있능교?”
모습과 함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없는데…….”
“이게 누고? 윤희 아이가?”
대답 대신 고개를 크게 끄덕이면서 오빠보다 오빠 옆에 서 있는 낯선 여자를 연신 흘끔거렸다. 오빠보다 키가 한 뼘은 더 컸고 덩치도 오빠보다 두 배는 커서 사바나에 사는 코끼리 같은 여자였다. 그런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오빠를 내려다보며 샐샐 웃고 있자 오빠는 마치 화답이라도 하듯이 코끼리 같은 여자를 쳐다보며 실실 웃고 있었다.

두 달 전에도 오빠가 우리 집에 왔었다. 감자를 심는 날이었다. 아버지는 전날에 얻어 놓은 일꾼들과 일찌감치 밭에 나갔고 엄마는 그들의 새참 준비로 부산한 아침이었다. 아침잠이 많은 나도 그날만큼은 눈치껏 일찍 일어나야 했다. 엄마는 이미 국수를 삶아 채반에 사려놓고 국수 위에 올릴 고명으로 커다란 팬에 호박을 둘둘 볶고 있었다. 내가 눈을 부스스 뜨고 부뚜막에 나와 앉아 있자 참깨를 빻으라고 했다. 플라스틱 작은 절구는 참깨나 마늘을 빻기는 맞춤이었다. 참깨가 밖으로 튀지 않게 한쪽 손으로 절구의 아가리를 막으면서 조심스럽게 빻고 있는데 부엌문을 떠억 막고 서는 누군가가 있었다. 아버지인 줄 알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아침 해를 등지고 있어서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군인 아저씨였었다. 엄마가 먼저 알아보고는 호박을 볶던 나무 주걱을 팽개치고 군복 입은 손을 덥석 잡았다.
“아지매 절부터 받으시소.”
“절은 무슨 절, 이래 무탈하게 다녀온 것만 해도 됐지. 그래 이제 아주 제대를 했겠지. 형님이 얼마나 좋아하실까. 형님은 어디 편찮으신 데는 없던가?”
“어데요. 어제 제대하고는 밤 기차를 타고 아지매 집부터 먼저 와 모르겠니더. 감자 심는 날인가 보네. 그래 서 있지 말고 새참 어서 만들어 주소. 아제가 소리치기 전에 밭에다 날라 줄랑께.”
“아이고 내 정신 좀 보게. 자네 얼굴 쳐다보느라고 호박을 태워버리게 생겼구만. 그런데 오는 날이 장날이라고 제대하자마자 쉬지도 못하게 일부터 시켜 어쩌나?”
“아지매도 참, 일복도 복이라는데 그 복을 내가 왜 마다하겠능교. 글구 지금 감자를 심어놓아야 하지 때 캐 먹을게 아니겠능교. 아지매, 나는 하지 감자가 제일 맛있는 것 같니더. 감자꽃이 아직 다 수그러들지 않은 하지 무렵에 캔 햇감자는 껍질이 창호지보다 더 얄다라서 꼭 놋숟가락으로 싹싹 깎지 않았능교.”
“맞네, 자네가 하지 감자로 떡을 해주면 참 잘 먹었어. 올해도 햇강낭콩으로 달달하게 소를 넣어 떡을 해줄 테니 꼭 와야 하네.”
“감자떡도 만들어 주고, 아지매요 나 장가가게 색시 좀 소개해 주소.”
그는 광주리에 국수가 담긴 채반과 고명과 빈 대접을 담으면서 책가방을 메고 나오는 나를 보더니 한쪽 눈을 찡긋했다.
“어, 윤희 학교 가는구나. 선생님 말씀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하래이.”
나는 오빠의 말에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마당으로 나와 아무도 안 보는 곳에서 혀를 날름 빼물었다.
“글쎄 매일 밭에 엎어져 사는 내가 예쁜 처자를 어디 구경을 했어야 말이지. 요즈음은 자기 짝은 자기가 찾는 세상이 되어 젊은 사람들이 자기 마음에 드는 짝을 찾기가 더 쉽겠지. 인물이 저래 좋은데 색시 자리가 없을까 봐.”
그의 색시 타령에 엄마가 꼬리를 살짝 내리는 것을 보면 결국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것이 분명했다. 군대 제대를 한 지 하루밖에 지나지 않은 사람이 고작 한다는 말치고는 점잖은 말은 아닌 것 같았다. 그래도 제대하자마자 일을 시켜 먹는 것이 미안한지 칭찬도 곁들었다. 아무리 뜯어보아도 잘생긴 데라고는 한 군데도 없는 오빠를 잘 생겼다고 하는 것을 보면 알조였다.
그깟 남자 얼굴 잘생겨 봤자 얼굴값밖에 할 것이 없다는 엄마의 말이 그럴듯하다면 키라도 커야 할 터인데 어깨에 소쿠리를 덜렁 얹어 밭둑으로 앞장 서가는 오빠나 뒤에서 육수가 든 주전자를 들고 따르는 엄마의 키가 도긴개긴이다. 엄마도 보통의 여자 키보다 작은 축에 끼이고 보면 오빠는 얼굴도 못생긴데다가 키도 난쟁이 똥자루만 해 소개해 줄 색시가 옆에 있다고 해도 자신 있게 못 할 터였다. 그런데 볼 때마다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만 해대니 내가 콧방귀를 안 뀔 수가 없었다.

그런 그가 두 달 만에 알아서 색시를 옆에 끼고 보무도 당당히 마당에 들어서고 있었다. 하짓날이었다. 때마침 엄마가 한 손에는 감자가 담긴 소쿠리를 안고 한 손에는 호미를 들고 마당에 들어섰다. 감자밭에서 그들을 본 모양이었다. 그리고 건넛집에 사는 숙모도 마당에 들어섰다.
이 마을은 그랬다. 집성촌이라 낯선 사람의 등장은 금방 알 수가 있었다. 집배원이나 연락병이 있는 것도 아닌데 본능적으로 아는 모양이었다. 바람일 수 있었다. 낯선 바람은 감자밭에 엎드려서 감자를 캐고 있던 엄마에게도 부엌 봉당에서 나물을 다듬던 숙모에게도 전해지는 모양이었다.
엄마와 숙모가 대청마루에 자리를 잡고 앉기를 기다려 오빠와 그 여자는 큰절을 했다. 그리고는 그는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고 그 여자는 무릎을 한쪽으로 포개서 앉았는데 맨발이었다. 멀쩡히 잘 닦아 놓은 큰길을 놔두고 감자 밭둑으로 걸어온 것은 우리 집에 빨리 오고 싶은 마음에서 일 것이다. 나도 학교에 오갈 때 꼭 밭두둑으로 다녔고 우리 식구 모두 그 길로 다녔으니 감자밭 두둑으로 다니는 것을 탓할 이유는 없었다. 단지 우리 집에 처음 인사를 온 그 여자의 발이 맨발이었다. 더군다나 흙이 잔뜩 묻어 있어 내가 봐도 낭패스러웠다.
이 마을에서는 특히 우리 집에서는 아무리 삼복더위라고 해도 여자가 발가락을 내놓은 맨발로 대청마루나 방으로 저벅저벅 다니는 것을 천하의 불상놈 짓이라고 했으니 말이다. 거기에다 여자가 남자보다 키가 큰 것은 절대 용납이 안 되는 집안인 것도 낭패였다.
우리 집안의 대부분 남자가 보통 체격에 보통 키를 가진 것도 문제였다. 아니 보통보다는 조금 미달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한 표현인데 이것도 집안의 남자들은 자랑거리에 속했다. 누대로 내려오는 선비 집안이기 때문이란다. 큰 체격은 병기를 다루는 데 필요한 것이지 학문을 탐구하는 데는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들의 배우자도 그들 남자보다 작아야 하니 당연히 작은 사람들만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나와 육촌인 그는 집안 남자 중에서 가장 작은 축에 속했다. 그런데 시대가 바뀌면서 외모의 기준도 많이 바뀌자 무조건 그들의 주장을 밀고 갈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는 학문 탐구의 재주도 없었기 때문에 선비 운운하면서 합리화를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이렇게 엄청나게 큰 여자를 데리고 올 줄은 아무도 예상을 하지 못했다. 키가 크더라도 덩치가 작았더라면 그냥 늘씬한 맛에 봐 줄만도 하건만 덩치까지 한 덩치 해서 더 커 보였고 더 우람해서 질려 버릴 정도였다. 그러면 얼굴이라도 예뻤더라면 모든 것이 덮였을 텐데 광대뼈가 툭 튀어나왔고 매부리코에 길기만 할 뿐 어디 한군데 예쁜 곳이라고는 없었다. 거기에다가 상상조차 하기 싫은 발가락이 보이는 흙투성이 맨발이니 엄마와 숙모는 기가 질릴 만도 했다. 그렇지만 내색을 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그렇다고 처음 보는 처자에게 큰절을 받고 덕담 한마디 안 해주는 것도 양반의 체면에 도리가 아닌 것 같아 절 받은 두 사람 중의 한 사람 정도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처지였다. 그도 당연하다고 생각을 하고 있는지 벙글벙글 웃으면서 엄마와 숙모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그 여자는 흙투성이 맨발이 가지런히 포개져 있는 마룻바닥에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렸다가 지우고, 그렸다가 지우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래도 형님 자리인 엄마가 이렇게 한마디 했다.
“허우대가 이리 좋은 처자를 자네는 어디서 데리고 왔는가?”
엄마 나름 전략일 수가 있었다. 단 한 번으로 그와 그 여자에게 다 말을 해 버렸으니까.
“흐흐, 아지매가 보기에도 크니껴? 아지매, 이야기는 차차 하기로 하고 밥은 언제 줄라꼬 이래 앉혀 놓기만 하능교? 하지 감자 캐서 떡을 해 준다고 철석같이 약속해놓은 것은 벌써 잊어버렸능교?”
그의 말에 숙모가 할 일이 생겨 반갑다는 표정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얼른 감자를 캐와 감자떡을 만들어야겠다며 일어섰다. 우리 밭에 있는 감자는 감자꽃이 아직 한창이라 덜 여물었을 거라는 말도 보탰다. 그러자 엄마도 햇강낭콩을 따오겠다며 일어나서 나가버렸다. 과연 숙모가 한 구박 캐온 감자는 우리 밭에서 캐 온 감자보다 굵었다. 그것을 숙모와 엄마가 둘러앉아 잘 벼려진 놋숟가락으로 싹싹 깎았다. 순식간에 한 구박의 감자를 다 깎았다. 그것을 마당 한 귀퉁이에 있는 수돗가로 가지고 가 씻은 다음에 강판에 쓱쓱 갈기 시작했다. 오빠가 감자를 같이 깎겠다고 나서자 햇감자는 잘못 깎으면 아까운 것이 다 나간다며 숙모가 말렸다. 심심해 죽겠다고 오빠가 엉너리를 치자 정 심심하면 색시에게 동네 구경도 시켜 줄 겸 한 바퀴 돌고 오라고 했다. 그러자 오빠는 좋은 생각이라며 그때까지 대청마루에 앉아서 마룻바닥에 그림만 그리고 앉아 있는 여자에게 산책을 다녀오자며 불러냈다. 그 여자의 몸에 짝 들러붙는 티셔츠에 반바지 차림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8㎝나 되어 보이는 높은 통굽 샌들도 기가 막혔다. 오빠와 그 여자가 대문을 나서자 그제야 엄마와 숙모는 하던 일을 멈추고 한숨을 폭 쉬었다.
“자네는 처자가 마음에 드는가?”
“형님은요?”
“녹삭군 같은 게 어디 한 군데라도 눈에 차는 데가 없네.”
“덕소 형님은 더 기가 찰 것 같아 걱정이 되니더.”
“덕소 형님 눈이 좀 높은가? 질부들 보라고, 하나같이 인물이면 인물, 자태면 자태, 거기다 살림 솜씨까지 물 하나 안 나게 잘하는 사람들로 봤는데 어디 저런 처자가 눈에 찰까.”

덕소는 오빠의 본가가 있는 마을 이름이었다. 우리 집에서 버스로 두 시간을 타고 가면 나오는 깊은 산골이었다. 숙모네도 원래 그 마을에 살았었는데 숙모네의 큰딸이 중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자 우리 마을로 이사를 왔다. 중학교도 없는 오지 마을이었으니까. 감나무는 참 많은 동네였었다. 숙모네가 아직 이사를 나오기 전인 방학 때면 놀러 가곤 했다. 언니가 우리 집에서 초등학교에 다니던 때였다. 그 동네도 초등학교는 있긴 했지만 한 시간이나 걸어 나와야 했다. 오빠는 한 시간을 걸어 다니면서 초등학교에 다니다가 중학교부터는 아예 학교 앞에서 하숙했다.
우리가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면 고등학생인 그가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파르스름하게 깎은 머리를 교모로 눌러쓰고 교복을 입고 가방을 옆구리에 낀 채였다. 그는 언니와 내가 버스에 내리자마자 대뜸 언니를 보더니 공부 열심히 하라고 했다. 나는 그때 초등학교도 다니지 않았던 시절이었지만 나보고도 학교 입학하면 공부 열심히 하라고 했다. 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교모를 삐딱하게 쓰고 한쪽 다리를 약간 건들건들 흔드는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또 아지매 말을 잘 들어야 한다고 훈계도 했다. 아지매라면 우리 엄마를 지칭하는 것이다. 그 말에는 나도 공감이 되었다. 
버스에서 내려 집까지 들어가자면 한 시간을 넘게 걸어 들어가야 했다. 두 사람도 어깨를 나란히 해서 걸어갈 수 없는 오솔길이라 차가 다닐 수가 없었다. 자갈이 뒤덮여 있는 강가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비 오면 꼭 처녀로 둔갑한 도깨비가 나타난다는 찍소를 지나가야 했다. 내가 믿지 않자 오빠는 처녀로 둔갑한 도깨비를 본 적이 있다고 했다.
어느 비 오는 날 찍소 옆에서 머리를 풀어헤친 처녀가 쪼그리고 앉아서 울고 있더라고 했다. 그냥 지나치면 좋았을 것을 사나이 대장부가 처녀가 우는 데 못 본 척할 수가 없어서 가까이 가서 물었다고 했더란다. 왜 우느냐고 했더니 그 처녀 하는 말, 덕소까지 가야 하는데 다리가 아파서 울고 있다고 하더란다. 이상하긴 했지만 오빠도 일요일이나 집에 가는 처지라 혹 그사이에 누가 이사를 왔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얼굴이 아주 예뻐서 의심조차 하고 싶지 않은 것이 가장 솔직한 심정이었다고. 혼자 타박타박 걷는 길에 생각지도 않게 예쁜 처녀가 동행하게 되어 가슴이 설레기도 했단다. 처녀는 대뜸 오빠 보고 업어 달라고 하더란다. 옆에 누가 있었으면 남사스러울 일이었지만 강가에는 오빠와 처녀밖에 없자 용기가 생겨 처녀 앞에 등을 돌려댔다. 처녀는 등에 답삭 업히더라고 했다. 처녀를 업고 책가방을 들었지만 업은 것 같지가 않아 순간 이상하긴 했다. 하지만 울렁증이 생긴 것처럼 심장이 벌렁거리고 정신이 하나도 없는 바람에 금방 잊어버렸다. 처녀는 얌전히 업혀 가지도 않고 오빠가 쓰고 있는 모자를 벗겼다 씌웠다 장난도 치면서 연신 깔깔거려 언제 마을 어귀까지 온 줄도 몰랐다고 했다.
눈앞에 그의 아버지가 서 있자 그때야 등에 업혀 있는 처녀가 걱정되더라고 했다. 이유가 어떻게 되었든 간에 남녀가 유별한 마당에 다 큰 처녀를 업고 있는 꼴을 들켜버렸으니 난감할 노릇이었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는 한술 더 떴다고 했다.
“왜 몽당 빗자루를 업고 오노?”
“야?”
조금 전까지 오빠의 두 귀를 잡아당기면서 깔깔거리던 처녀가 몽당 빗자루로 변해 있었다. 아무도 오빠의 말을 믿을 것 같지 않았지만 빗자루를 업고 온 죄로 처녀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문제는 그의 아버지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동네의 노인들은 그의 말을 믿었다. 도깨비의 장난질이라고 했다. 그의 아버지가 그때 나타나지 않았다면 저승길까지 잡혀갔을 터인데 그의 아버지 때문에 도깨비가 몽당 빗자루만 남겨놓고 줄행랑을 쳤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기들의 경험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꼭 비 오는 날이었고 머리카락이 엉덩이까지 치렁치렁 내려오는 처녀였다며……. 눈이 커다랗고 입술이 석류같이 붉지 않았냐고 노인들이 오히려 오빠에게 물었다고도 했다. 여전히 내가 믿지 못하는 얼굴을 하자 사실 그때부터 공부가 안되더라고 했다. 학교에서 공부를 제일 잘했었기에 명문대학을 나와 판검사를 할 생각이었는데 공부만 하려고 하면 처녀 도깨비가 나타나서 귀를 잡아당기고 귓속에다 깔깔 웃음소리를 집어넣으며 방해한다고 했다. 부모도 오빠가 도깨비에게 잡혀가지 않는 것만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언니가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면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었다.

양말도 신지 않은 여자라 집에서 반대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큰집에서 승낙했다. 무엇이든지 도깨비에게 잡혀가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결혼하고 우리 동네에서 신접살림을 차렸다. 신접살림을 차린 집은 큰 개울물을 건너 언덕 위에 등대처럼 홀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동네를 한눈에 다 굽어 보이는 전망이 좋은 집이었다. 방 한 칸에 부엌이 딸린 일자 구조에 방 앞으로 조그마한 골마루가 달린 집이었다. 됫박만 한 방안에 세간이라고는 까만 서랍장이 전부였다. 서랍장 위에 이불 한 채와 베개 두 개가 전부인 단순한 방이었는데 생뚱맞게 모자가 많았다. 벽에다 빙 둘러 가면서 못을 치고 모자를 열 개도 넘게 걸어두었다. 예쁜 모자도 아닌 새마을 모자 같은 그 모자 때문에 신혼 방 냄새는커녕 올케의 감각 없음이 한심스러울 지경이었는데 마당가에 늠름하게 자리 잡고 있는 느티나무 때문에 자주 오빠네 집에 올라가곤 했다. 그렇다고 일부러 놀러 가고 싶지는 않았다. 주로 엄마 심부름이었다. 솥 다른 음식을 만들 때면 나를 꼭 오빠네 집으로 올려 보냈다. 
오빠는 보이지 않고 올케와 면사무소 직원으로 보이는 남자와 둘이 느티나무 아래 놓여 있는 평상에 앉아 있었다. 몸이 호리호리하고 키가 자그마한 남자는 통계조사를 나온 모양이었다. 그런데 올케의 태도가 마뜩잖았다. 대답은 하지 않고 자꾸 웃기만 했다. 올케가 웃음이 많은 사람도 아니었고 또 나도 알만한 간단한 것을 모를 리도 없을 것 같은데 자꾸 웃기만 했다. 처음 우리 집에 인사를 와서 대청마루 바닥에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렸던 것처럼 이번에는 평상에 그림을 그리면서 자꾸 웃었다. 이런 올케의 행동이 그 남자에게 답답할 만도 하건만 그 남자도 같이 웃기만 했다. 그 남자는 이 집에 온 목적이 올케와 마주 쳐다보며 웃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감자옹심이가 든 냄비는 뜨거워서 더는 들고 있을 수가 없었다. 엄마는 감자로 만든 음식은 특히 뜨거울 때 먹어야 한다며 솥에서 펄펄 끓는 것을 냄비에 퍼 담아 주었다. 처음에는 그것을 마당 귀퉁이 살짝 내려놓고 돌아서서 내려올 작정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 헛기침하면서 마당으로 성큼성큼 들어가자 그때야 올케와 그 남자는 웃음을 그치고 나를 쳐다보았다. 
“엄마, 올케언니는 남자 보고 자꾸 웃어. 물어보는 것 대답도 하지 않고.”
육촌이었지만 시누이 값을 하고 싶었는지 집으로 쪼르르 내려와서 엄마에게 살짝 일러바치기도 했다. 엄마는 내 말에 쓰다 달다 말도 없이 듣고 있기만 했다. 오히려 말한 내가 민망스러워 내 방으로 들어가서 가만히 엎드려 있었다.

“형님요. 형님요, 아직 안 주무시니껴?”
숙모가 밖에서 누가 들을세라 아주 작은 소리로 엄마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저녁밥을 먹은 지 한참이나 지난 시간이었다. 초저녁잠이 많은 엄마는 아마 잠자리에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엄마는 숙모가 두 번도 부르기 전에 부리나케 방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울타리 밖에서 숙모와 엄마는 무슨 말인가 속닥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둘이서 자박자박 발걸음 소리를 남기며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아버지도 설핏 든 잠에서 깨어난 것 같았다. 엄마가 다시 자박자박 발걸음 소리를 내면서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간간이 헛기침 소리와 책장 넘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잠이 오지 않았다. 숙모와 엄마가 이 밤중에 어디로 가는지 짐작이 되기 때문이었다. 너무 자주 일어나는 일이어서 익숙할 때도 되었건만 아버지처럼 신경이 쓰였다. 자정이 넘어서야 돌아온 엄마가 아버지와 나직나직 무슨 말인가를 나누기는 했지만 잘 들리지는 않았다.
오빠와 올케는 참 잘 싸웠다. 듣고 보면 싸울 일도 아닌데도 평생 안 볼 것처럼 동네가 떠들썩하도록 싸웠다. 그리고는 그 다음날이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너무나 멀쩡하게 서로 쳐다보며 내려다보며 샐샐 웃으며 동네를 휘젓고 다녔다. 그런데 자기들끼리 부부싸움을 하면 했지 꼭 오빠는 숙모에게 알렸다. 엄마보다는 숙모가 어렸을 때부터 한동네에 살았기에 더 편한 모양이었다. 그러면 숙모는 혼자 오빠네 집으로 가는 것이 엄두가 나지 않는 모양인지 꼭 엄마와 함께 갔다. 부부싸움을 하고 있다는데 안 가볼 도리는 없을 테니까. 오빠가 주로 올케언니에게 두들겨 맞는 모양이었다. 하긴 덩치로 보나, 키로 보나, 성정으로 보나 모든 면에서 올케언니가 한 수 위긴 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엄마와 숙모가 나타나면 신랑을 두들겨 패더라도 멈춰야 할 터였다. 그런데 신랑을 엎어놓고 코끼리만 한 것이 신랑의 몸뚱이를 턱 타고 앉아서 주먹 가는 대로 퍽퍽 때렸다. 오히려 엄마와 숙모를 흘끔흘끔 보면서였다. 오빠는 마누라 밑에 깔려 퍽퍽 두들겨 맞으며 온갖 앓는 소리를 할 뿐이었다.
“질부 이러다가 사람 잡겠네. 무슨 싸움을 이렇게 숭악하게 하는가 그래. 남들 보기에 남사스럽지도 않은가.”
엄마와 숙모가 일제히 달려들어 부처님 앞에 비손하는 신실한 신도처럼 빌어야 그때야 슬그머니 오빠의 등에서 내려왔다. 오빠를 두들겨 패지 않으면 살림을 부수는 날이었다. 그나마 있던 살림도 부부싸움으로 다 날아가게 생겼다. 처음에는 오빠가 시작했다. 말싸움 끝에 화가 난 오빠가 자기가 먹던 밥그릇을 방바닥에 던졌다. 그러자 그런 오빠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올케가 오빠 앞에 있던 밥상을 번쩍 들어 마당에다 내던졌다. 방 안에 유일하게 자리 잡고 있던 서랍장도 이미 망가진 지 오래되었다. 올케가 도끼를 들고 몇 번 내리찍어서였다. 오빠가 먼저 서랍장을 건들기는 했다. 화가 난 나머지 주먹을 쥐었지만 그 주먹을 올케에게 차마 못 날려 옆에 있는 애먼 서랍장에 한 방 먹였다. 그런데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올케가 밖에 나가더니 도끼를 들고 와서 나무 패듯이 서랍장을 캉캉 내리찍었다. 오빠가 말리지 않았다면 서랍장도 이미 폐기처분 되어 아궁이의 장작으로 쓴 지 오래일 것이다. 상다리가 부러지면 엄마와 숙모는 밥상을 새로 사서 들였고 접시가 깨어지면 또 접시를 보충해주었지만 서랍장은 그대로 두었다. 괘씸해서였고 가운데 도끼 자국이 나 있지만 쓰는 데는 상관이 없기도 했으니까.
“아지매 나는 저 사람과 더는 살 수가 없니더. 내가 날마다 맞고 사는 것을 아지매들이 보지 않았다면 믿을 수가 있겠니껴”
오빠가 꺼이꺼이 울면서 한탄을 하면 옆에 앉아 있는 올케는 숨소리만 거칠었지 고개를 푹 숙이고 방바닥에 손가락으로 그림만 그릴 뿐이었다. 조금 전까지 오빠를 타고 앉아 주먹으로 퍽퍽 때렸다는 것을 믿어야 할지 어째야 할지 헷갈릴 정도였다.
급기야 올케가 집을 나가 버렸다. 동네가 감자꽃으로 하얗게 덮여 있던 하짓날이었다. 하얀 감자꽃이 저녁놀에 붉게 물들자 마당으로 들어오는 오빠의 얼굴에도 붉은 노을이 어려 있는 평화로운 저녁이었다. 마침 햇감자를 한 바구니 캐온 엄마는 껍질을 벗겨 분이 팍삭 나도록 하얗게 쪄 놓고 애호박을 송송 썰어 넣고 끓인 콧등치기국수와 함께 저녁상을 봐 들마루에서 먹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엄마는 안 그래도 처음 수확한 감자를 찌자 그것과 함께 콧등치기국수를 한 냄비 따로 담아 두었다. 식구들 저녁상을 차려주고 국수가 붇기 전에 후딱 오빠 집으로 다녀올 생각을 하던 중이었는데 당사자가 들어오자 반가워했다. 먼저 한 그릇 먹이고 그 손에 들려 보내 줄 작정이었다.  
오빠는 콧등치기국수도 한자리에서 두세 그릇 비울 정도로 좋아했는데 그날은 젓가락으로 깨작거리기만 했다. 엄마뿐 아니라 식구들은 오빠의 그런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숙모네도 같이 저녁을 먹던 날이었다.
“자네 어디 아픈가?”
숙모가 참지 못하고 오빠에게 물었다.
“어데요.”
“그런데 그 좋아하는 하지 감자를 손 하나 안 되고 있는가? 국수 가락을 세고 있으니.”
“질부 생각나서 그러는가?”
숙모가 말을 하고도 어색한지 살짝 웃었다.
“그 사람 집 나갔니더.”
오빠는 마치 아무런 일도 아니라는 듯이, 바람 불면 나뭇잎 떨어지는 것처럼 불쑥 내뱉고는 감자 하나를 들고 한 입 베어 물었다. 볼이 금방 풍선처럼 불룩해졌다. 풍선의 바람이 빠지듯이 오빠의 볼이 홀쭉할 때까지 우리는 일제히 숟가락을 밥상에 내려놓고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오빠는 우리의 이런 마음과는 아랑곳없이 다시 새 감자를 들고 한 입 한 입 베어 물고 우적우적 씹어 삼키기만 했다. 한 소쿠리 담겨 있던 감자가 반으로 줄어들 때까지 오빠가 감자만 우적거리며 먹고 있자 엄마는 열무 물김치를 오빠 앞에 밀어주었다. 참다못한 아버지가 헛기침을 한 번 하자 그제야 오빠는 감자 먹는 것을 중단했다.
“언제 집을 나갔는가? 애들은 어찌하고?”
“재 너머 당숙네 들깨 심어주고 왔더니 없데요. 애들은 일찍 저녁 먹여 재웠니더.”
“애 버려두고 나가는 사람이 저녁밥을 해놓고 갔던가?”
“어데요. 밥하는 거 쉽데요. 걱정하지 마소, 애들 밥해 먹여가면서 일 다닐 수 있을 테니. 일 나갈 낮 동안만 아지매들이 교대로 수고스럽지만 애들을 좀 봐 주소.”
날마다 싸우면서 딸만 연년생으로 둘 낳아 놓고는 올케는 집을 나가버렸다. 바람이 났을 수도 있었고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었겠지만 오빠는 변명조차도 입 한 번 벙긋하지 않았다.

낮에 좀 이상하긴 했다. 어쩌면 나는 올케가 집을 나가는데 말리기는커녕 방조를 했는지도 몰랐다. 개교기념일이라서 온종일 대청마루에서 빈둥거리다가 엄마의 심부름을 가게 되었다. 우리 동네는 구멍가게 하나 없는 동네라 초등학교 앞까지 다녀와야 했다. 집 앞에 관문처럼 놓여 있는 기다란 출렁다리 두 개를 건너면 초등학교를 담장처럼 둘러싸고 있는 아까시나무 군락지가 나왔다. 꽃이 다 떨어진 아까시나무를 빙 둘러 내려가면 초등학교 교문이 나왔고 교문 앞에는 문구사와 토끼네가 있었다. 아이 이름 중에 토끼가 있어서 가게 상호도 토끼네가 되어버린 가게였다. 그 앞에 올케언니가 서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토끼네 앞에 몸은 서 있었지만 눈은 교문 너머 운동장을 향해 있었다. 나도 덩달아 올케의 시선을 따라 운동장을 바라보았다. 아이들이 쪼그리고 앉아서 공기놀이도 하고 사내아이들은 공도 차고 있었다. 조카인 희지와 희주도 보였다. 희주가 그네에 앉아 있고 희지가 희주의 등을 밀어주고 있었다. 내가 보기엔 도긴개긴인데 그네는 움직이고 있었다. 그네가 움직일 때마다 삐걱삐걱 소리가 났다. 올케는 그네 타는 아이들을 한참 바라보더니 지갑에서 천 원짜리 두 장을 꺼내 나에게 건네주었다. 그네 다 타고나면 아이스크림을 사주란다.
“언니는 어디 가는데?”
그러고 보니 입은 옷도 평소보다 신경을 좀 써서 입었고 화장도 평소보다 진했다. 올케는 날마다 화장을 하건만 화장기술이 없었다. 퍼런 아이섀도를 눈두덩이에 너무 발라 차라리 민낯이 나을 정도였다. 무엇보다 손에 꽤 큼직한 가방 하나에 작은 지갑도 들고 있었다. 그래서 물어봤다.
“어디 좀 다녀오려고 그래요.”
“어디?”
“그냥 저기요. 저녁에 돌아올 거니 걱정 마요.”
저녁에 온다는 사람의 가방이 너무 커서 영 이상했지만 올케는 다시 운동장을 한번 들여다보고는 총총히 가버렸다. 손에 올케가 건네준 천 원짜리 지폐 두 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토끼네 가게 안으로 들어가는 것 말고는 내가 할 일이 없었다. 그때 올케의 손목을 부여잡았다든가 들고 있던 가방이라도 빼앗았다면 올케가 집을 나갔을까 싶었다. 하긴 오빠도 못 이겨 매일 두들겨 맞고 사는 큰 덩치를 내가 어찌해 볼 수는 없겠지만 올케가 집을 나가는 것에 방조했다는 느낌을 오랫동안 지울 수가 없었다.
큰소리를 치던 오빠는 말과는 달리 그다음부터 집안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 꼴을 바라보고 있어야 하는 엄마와 숙모가 가장 안타깝고 답답했겠지만 두 분은 모종의 합의를 봤다. 절대로 언덕 위에 있는 오빠 집의 일은 올케가 돌아올 때까지 모른 척하기로 했다. 일주일에 반은 같이 밥을 먹던 일도 싹 없앴고 그 집의 청소와 빨래와 아이들도 오빠가 알아서 하든지 말든지 방관자로 있기로 했다. 그래야만 발등에 불 떨어진 오빠가 수소문해 올케를 찾아올 것이라며. 오빠는 새로 장가를 들면 되지 자기 발로 나간 여자를 절대로 찾아다니지 않을 거라고 큰소리를 탕탕 치자 엄마와 숙모는 그런 철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일침을 가했다.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인물이 번듯하나 아니면 키라도 크나 아니면 덩치라도 있던가 그것도 아니면 직장이라도 번듯하던가 그것도 아니면 아이라도 딸려 있지 않다던가 해야 어디 눈까진 여자가 들어올 것이라고 했다. 숙모는 한술 더 떠서 집안에 돌연변이가 확실하다고 했다. 공부도 제일 많이 못 했으니 변변한 직장을 잡을 수가 있나 그렇다 보니 결혼도 어찌 길바닥에서 만난 여자와 해서 영 찝찝하더니 그래도 잘 살아주길 바랐다고 했다. 그런데 이 집안에 지금까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집을 나가는 며느리가 다 생겨버렸으니 동네 남사스러워 어디 다닐 수가 없다고 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때 도깨비 때문일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숙모는 오빠가 부부싸움을 해도 도깨비 때문이라고 했다. 쟁기질하다가 허리를 슬쩍 다쳐도 도깨비 때문이라며 안 좋은 모든 것을 다 도깨비에게 뒤집어 씌웠다.
바닷가 어디쯤의 꼬막 정식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에서 올케를 데리고 왔다. 퍼들퍼들했던 감자꽃이 불쑥 솟아오른 두둑 위로 누렇게 짜부라질 즈음이었다. 집을 나간 지 일 년만이었다. 뒤통수에 대충 한 가닥으로 묶고 다녔던 긴 머리를 단발로 자르고 구불구불하게 파마하고 돌아왔다. 마치 파마를 하러 잠깐 외출을 한 모양새였다. 대청마루에 오빠와 함께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올케에게 누구도 그동안 어디에서 무엇을 했으며, 왜 집을 나갔는지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그다음 날 아침부터 일 년 동안 올케 행적이 도마 위의 생선처럼 사람들 입방아에 덜렁 올라앉았다. 면사무소 직원과 눈이 맞은 모양이었다. 오빠 몰래 살짝살짝 바람을 피우다가 꼬리가 길어 오빠에게 직통으로 들켰던 모양이었다. 평소보다 더 큰 싸움은 불을 보듯이 뻔한 일이었다. 문제는 올케의 태도였다. 두 무릎을 착 꿇고 싹싹 빌어도 시원찮을 판에 적반하장으로 살림을 때려 부수고 오빠를 나무 장작 패듯이 퍽퍽 두들겨 팼다. 오빠가 먼저 살림을 부수어서 따라 했단다. 남자만 살림을 부스라는 법이 있느냐며. 오빠가 언니의 뺨을 한 대 때렸다고 맞은 자기가 너무 분해서 열 배로 매를 돌려주었단다. 안 그러면 자기 성격상 분이 풀리지 않는다며. 그리고도 모자라 벌건 대낮에, 하지에 짐을 싸서 도망을 갔다. 면사무소 직원과 바닷가 어디쯤 방 한 칸 구해 살림을 차렸단다. 안에서 깨진 바가지가 밖에서 새지 않을 리가 없었던지 면사무소 직원과도 그런 식으로 몇 번을 싸울 수밖에. 면사무소 직원은 더는 참을 수가 없어 한밤중에 올케만 버려두고 종적 없이 사라졌단다. 홀로 남은 올케는 먹고는 살아야겠기에 처음에는 콩나물 해장국집에서 몇 달 콩나물을 다듬다가 꼬막 정식 집에서 몇 달 일하다가 오빠에게 잡혀 집에 돌아오게 되었다며.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정도의 이야기는 굳이 사람들 입방아에 올라가지 않아도 얼마든지 짐작하고 남을 일이었다. 일 년 동안 집을 나가서 할 일이라고는 뻔하지 않은가. 올케가 집을 나간 이후로 면사무소 직원까지 보이지 않았다는데 쓸데없이 상상력까지 동원할 필요도 없었다. 더 놀라운 일은, 그러니까 누구도 짐작하지, 아니 상상하지 못했던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올케가 남자와 도망간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번에는 비교적 짧게 끝났을 뿐이란다. 전에 살던 남자를 버리고 오빠와 결혼까지 하고 아이를 두 명이나 낳았다니. 오빠도 감쪽같이 몰랐던 사실을 전에 살던 남자가 어느 날 오빠에게 찾아오는 바람에 알게 되었단다. 그 남자는 알고 보니 자기도 첫 남편이 아니었던데 오빠에게 감당할 자신이 있느냐고 물어보더란다. 앞날이 불 보듯이 뻔하다며 오히려 오빠를 측은하게 여기며 돌아갔단다. 사연이 이쯤 되면 날마다 싸워도 모자랄 듯 보였다.
그런데 며칠을 잘 지내는 것 같더니만 또 부부 싸움을 하는 모양이었다. 언제나 부부싸움에는 이유가 있었지만 이번에는 반찬이 문제였다. 올케가 날마다 꼬막 무침과 콩나물만으로 밥상을 차려준다는 이유였다.
“아지매요 나는 꼬막 무침이 싫니더. 서방이 싫다고 하는데도 날마다 꼬막만 올리니 내가 밥상을 냅다 마당에 던져 버렸니더.”
엄마와 숙모는 마당에 널브러져 있는 다리가 건들거리는 밥상을 바로 세우고 접시를 모으고 그중에 깨진 것은 마당가에 버리고 반찬들은 빗자루로 살살 쓸어 모아 수챗물에 넣었다. 다 늙은 아지매들이 부부싸움 말리러 다니는 것도 몸서리가 나고 뒷정리하는 것도 지겹다고 한마디 하면서 청소를 했다. 처음으로 오빠에게 불평을 늘어놓은 날이었다.
엄마와 숙모는 올케 때문이라고 했다. 집을 나갔다가 오더니만 방바닥에 그림은 그리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다고 마당에 널브러진 반찬 그릇들을 정리할 생각은 않고 마치 남의 일인 양 팔짱을 끼고 씩씩거리며 노려보기만 하는 올케가 야속하더라고 했다. 꼬막이 싫다는 신랑에게 꼬막 무침은 왜 만들어서 이 분란을 일으키는지 그깟 하나 있는 신랑 비위도 못 맞추는 것이 딱하기도 했다고 한다. 꼬막만 봐도 밥상을 엎는 심정을 한 번도 헤아리지 못하는 올케가 미워서 불평을 늘어놓았다고 했다. 그런데 오빠는 그것이 섭섭했는지 이사를 가 버리고 말았다.

멀리는 아니었다. 우리 동네에서 버스를 타고 가면 30분 걸리는 거리였다. 동네 이름은 금촌이었다. 석탄 광산이 있는 마을이라 동네 한복판에는 거대한 저탄장이 산처럼 우뚝 자리 잡고 있었는데 제대로 덮여 있지 않았다. 그래서 거리는 날마다 시커멓게 석탄가루가 날려 집이나 가로수나 마을 옆으로 흐르는 강물도 시커먼 색이어서 흐린 날의 마을처럼 언제나 회색빛이 감싸고 있었다.
오빠가 광산에 취직했다. 광산에 취직하게 되면 사택이 지급되었다. 검은 강물이 흐르고 있는 옆에 똑같은 크기와 똑같은 모양의 지붕 낮은 집이 사택이었다. 
엄마와 숙모는 오빠가 새로 둥지를 튼 곳을 한 번 다녀오더니 두 분이 약속이나 한 듯이 며칠 자리보존을 하며 일어나지 못했다. 사택은 말이 방이지 서랍장 하나 들여놓지 못할 정도로 됫박만 한 방이 한 칸에 부엌이 전부였고 화장실과 우물은 마을 한가운데에 두고 사택 사람들 모두가 공동으로 썼다. 언덕 위에 집도 별로 번듯하지 않았으니 집 때문에 자리보전을 한 것은 아니었다. 작업복은 당연히 석탄을 캤으니 시커멀 수가 있었다. 무릎까지 오는 장화도 당연하였고 목에 감은 수건이 검은 것도 당연했다. 처음에는 못 알아본, 사람의 얼굴이라고 할 수도 없는 눈동자의 흰자와 이빨만 하얗고 모두가 새카만 오빠의 모습 때문이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입술은 얼마나 빨아먹었는지 분홍색으로 변해 있었다. 평소에는 회사 목욕탕에서 목욕하고 돌아왔지만 그날은 부랴사랴 집부터 온 불찰이었다. 직업에 귀천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옛말에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라는 말도 있으니 그 꼴이라도 위험하지 않다면 감수할 것이다.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는 사고에 오빠라도 예외가 될 수 없으니 더 기가 막힐 일이었다. 급기야는 이사하려면 지금보다 더 좋은 곳으로 가든가 아니면 아예 멀어서 신경을 쓰고 싶어도 쓸 수 없는 곳으로 가든가 해야지 했다.
언감생심 이제는 부부싸움은 하지 않을 줄 알았다. 싸움이라는 것도 여력이 있어야 하니까. 그런데 여전히 부부싸움을 자주 했다. 
같은 동네에 살 때도 부부싸움만 하면 이혼을 하겠다는 소리를 밥 먹듯이 했던 터라 여사로 여기고 가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한동네에 살면서 언덕 위로 올라가기는 쉬워도 부부싸움을 말리기 위해 버스를 타고 가기에는 부담스러운 점이 많았다. 그래도 처음 몇 번은 엄마와 숙모는 버스를 타고 오빠가 사는 금촌에 다녀왔다. 부부싸움을 말린다는 핑계였지만 밑반찬에 김치와 감자와 고추장과 된장과 간장을 가져다주기 위해서였다. 그런 다음에는 싸움질한다는 연락을 받아도 모르쇠로 일관했다. 회색 도시에서 날아오는 소리는 웬만한 것은 별거 아니기도 했다. 유월의 들판처럼 퍼들퍼들한 목숨이 하루아침에 주저앉아 버리는 것이 회색의 고장 금촌에서는 자주 일어나는 일이었다. 그래서 날마다 싸움질은 들판의 식물처럼 퍼들퍼들 살아 있다는 낭보쯤으로 여겨버렸다. 그래서 그랬을 것이다.
오빠가 죽어가고 있다는 소리를 믿지 않았다. 이번에는 정말인데 왜 자기의 말을 믿지 않느냐고 올케가 소리를 질러도 전화선을 타고 나오는 말은 같은 말이라도 진정성이 없었다. 싸움 중에 농약을 마셔버렸다는 소리도 믿을 수가 없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엄마와 숙모는 허둥지둥 버스를 탈 수밖에 없었다.
“희지 애비, 이게 뭔 일인가? 왜 철없이 이런 짓을 하고 그러는가?”
오빠는 방안에 얌전히 누워 있었다. 엄마와 숙모를 알아보고는 히죽 웃기도 하며 약을 마시게 된 이유를 조곤조곤 이야기했다. 병원 가서 응급처치를 받고 방금 돌아왔다고 했다. 그라목손을 마셨다고 했다. 그라목손이라는 말에 엄마가 ‘흑’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제초제인 그라목손을 먹고 살아난 사람은 지금껏 한 명도 없을 정도로 아주 독성이 강한 농약이었다. 오빠는 엄마가 울자 하던 말을 멈추고 엄마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올케에게 겁을 줄 생각이었지 정말 마실 생각은 없었다고 했다. 먹지도 못하는 등신이라고 부아를 돋워도 참을 걸 그랬다고도 했다.
“아지매요 내가 잘못 했니더. 그만 우시소. 내가 이래 철이 없어 어쩔라는 지 모르겠니더. 하지가 다가오는데. 하짓날에 아지매가 달달하게 강낭콩 소를 넣어 만든 감자떡을 내가 얼마나 좋아했니껴, 그걸 먹고는 죽어야 하는데 어쩔라는가 모르겠내여. 아지매요 하지가 며칠이나 남았능교?”
“이 사람아, 무슨 그런 숭악한 소리를 하는가? 마음 약한 소리 하지 말게나. 요즈음은 의술이 발달해서 그라목손 할배를 먹어도 다 살아난다고 하네. 그러니 마음 단단히 먹게나. 일어나면 감자 한 밭을 다 캐서 날마다 감자떡을 만들어 주고 커다란 가마솥에 날마다 쪄 줄 것이니 어여 일어나기나 하게.”
“내가 돼진교? 감자 한 밭을 우째 다 먹겠능교? 아지매요 하지가 언젠교? 얼마 안 남았는 것 같은데 이레 기억이 가물가물하니더.”
“내일모레네. 자네 나랑 약속하세. 내일모레 하짓날에 내가 감자를 한 가마솥 쪄 놓을 테니 꼭 먹어야 하네. 안 그러면 내가 용서를 하지 않겠네.”
“아이고 한참이나 기다려야 하겠네. 아지매에게 혼이 안 날라면 버텨야 하는데. 자꾸 속이 아프니더. 잠도 자꾸 오고예. 아지매요, 나는 살고 싶니더. 죽기 싫니더. 무서워 죽겠니더.”

선산에 오빠의 자리는 없었다. 문중에서 순리를 거스른 불효자는 자격이 없다며 서슬 퍼렇게 반대를 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방이 푸른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외딴 밭으로 오빠를 안고 도망치듯이 들어왔다. 하늘을 찌를 듯한 커다란 소나무가 우뚝 서 있는 감자밭이었다. 연분홍빛이 보일 듯 말 듯 은은히 감도는 감자꽃이 하얗게 피어 있었다. 감자꽃 한 송이가 거의 수국만 했다. 감자 잎은 퍼들퍼들 윤기가 졸졸 흘렀다. 이랑이 두둑했다. 감자밭 한가운데에 생뚱맞게 서 있는 소나무는 물고기 비닐처럼 붉게 번쩍였다. 소나무 둥치 밑에 오빠를 묻고 푸른 소나무를 쳐다보았다. 고개를 뒤로 한껏 젖혀야 했다. 푸른 가지 사이로 난데없는 몽당 빗자루가 하나 걸려 있었다. 엄마와 숙모는 그것을 한참이나 쳐다보더니만 처녀 도깨비가 마중을 나온 모양이라고 속삭였다. 하짓날이었다.









**약력: 강원도 태백출생. 2006년 《문학시대》로 등단. 장편소설 『방터골 아라레이』. 단편소설집 『소매각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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