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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호/서평/김영덕/성적 페티시즘의 은밀한 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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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497회 작성일 17-01-05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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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김영덕





성적 페티시즘의 은밀한 발현
―정령 시집 『크크라는 갑』




   정령 시인의 두 번째 시집 『크크라는 갑』제2부는 시오타 아키히코 감독의 ‘달빛 속삭임Moonlight Whispers’류의 영화에서 그려지는 인간관계의 불균형과 모순, 가학적 충동 속에서도 순간적으로 발현되는 에로티시즘을 연상시킨다. 시인은 그것도 매우 익살스럽고 천진난만한 방식으로 진술하며 자신이 땀 흘려 개간한 독특한 그 지평에 독자들을 초대한다.



1.
덜커덩거리던 버스가 밤골에 선다.
밤꽃 향기 들이 마시며 기지개 한 번 켠다.
알사탕 문 아이가
밤꽃 잎 달랑달랑 떨어지는 길가에 쉬를 하다가,
버스가 덜덜덜 서두르자
고추를 털다 말고 버스에 얼른 오른다.
밤톨 같은 아이의 콧물에서 밤꽃 향기가 난다.

아랫도리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밤꽃 잎이
훌훌 날아 옆자리 노인의 팔에 살짝 기댄다.
노인이 지팡이를 콕콕 찍는다.
버스 안은 밤꽃 향기로 가득하다.
차창으로 밀려드는 바람이 밤꽃 잎을 슬쩍슬쩍 건드린다.   밤꽃 잎들 사르르 온몸 흔들며 꽃비로 흩날리다가,
뒷자리 새댁의 치마폭에 살포시 내려앉는다.
새댁의 얼굴이 붉어진다.
아낙들이 새실새실 웃는다.
풀밭에서 있었던 꽃잠이야기 풀어진다.
풀꽃들도 낯빛을 붉히더란다.


                                                                    ―「밤골 버스 안의 밤꽃 향기」



   다소 통속적이지만, 고금을 막론하고 밤꽃 향기는 강한 남성성masculinity을 유추시킨다. 강력한 메타포인 밤골의 그 밤꽃 향기가 화학반응을 일으켜 작고 가냘픈 소년의 고추와 콧물로 변신하다가 하릴없이 전성기를 넘겨 이미 쇠락해가는 노인의 지팡이라는 페티시로 전이되어 거의 이울어지는 듯하다. 그러나 곧 그 버스 안은 밤꽃 향기로 가득해진다. 노인의 지팡이를 콕콕 찍는 도발적이며 상징적인 행위를 통하여 남성성은 불끈 솟구치는 것도 부족하여 오히려 도처에서 일렁이며 넘실대기 시작한다. 이제 버스 안은 원시적 남성성이 장악하여 온통 남성 에너지의 도가니가 된다. 차창으로 밀려드는 바람까지 가세하여 이 남성성은 결국 버스 안이라는 그 폐쇄된 공간에서 여성성femininity의 대표격인 새댁의 치마폭으로 자연스럽게 접속intercourse된다. 마침내 세상의 천지만물, 음양의 조화가 완벽하게 이루어져 결합한 것이다. 성적 페티시즘Sexual Fetishism을 통한 판타지를 팽팽하게 유지해 나가다가 결정적일 때 터뜨리는 시인의 회화적 스토리텔링 방식이 유쾌하다. 삶에 대해 따뜻하고 쾌활한 태도를 끝까지 이어간 화가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처럼 말이다.  


기차가 터널을 빠져나온다. 빨간색 스카프가 바람에 나부낀다. 그녀가 난간에서 창밖을 바라본다. 운다. 그가 달려온다. 눈물을 닦아주며 웃는다.
가방을 든다. 기차가 선다. 봄꽃 흐드러지는 봄, 밤이다. 가뭇한 그림자가 들창에 다가선다. 너울너울 춤을 춘다. 두 그림자 달구경 한다.
풀이 누워서 잔다. 꽃이 하르르 진다. 그가 가방을 든다. 옷깃을 세우고 바람 속으로 들어간다. 바람이 거세진다. 그녀가 머리칼을 쓸어 올린다.
눈이 온다. 눈밭에 눈사람 두 개 덩그렇다. 하얗게 쌓여가는 눈, 책을 덮는다.


                                                                                                                                   ―「19금 소설」 전문


   시인은 터널을 빠져나오는 기차, 나부끼는 빨간색 스카프, 눈물, 가방, 봄꽃, 밤, 들창에 다가서는 가뭇한 그림자, 너울너울 추는 춤, 누워서 자는 풀, 하르르 지는 꽃, 세우는 옷깃, 쓸어 올리는 머리칼, 눈사람, 그리고 하얗게 쌓여가는 눈 같은 상징성 강한 소품들과 최소한의 서사만으로 에로틱한 소설 한 편을 완성해 냈다. 부지불식간에 봄과 여름, 가을, 겨울이 오고 또 갔다. 그 밖의 서술들은 어쩌면 액세서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독자들은 모두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에로틱한 영화 한 편을 감상하고 ‘19금 소설’ 한 권을 통독한 셈이다. 
한편, 이 시를 읽다보니 문득 6,70년대의 가수 이영숙이가 불렀던 ‘그림자’라는 제목의 대중가요와 그 시절의 적막한 풍경이 흑백영화 화면으로 떠오른다. 사실 그 시절 일부 가요는 당시 사춘기를 막 통과 중이던 미래 시인들의 감성을 뒤흔들며 지금까지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기도 한다.
외로운 밤에 나의 창문을/흔드는 이 누구일까/잠 못 이뤄서 찾아 나온 우리 님일까/반가움에 일어나 창문을 여니/말도 없이 찾아온 바람이었네/외로움에 우는 내 가슴을/살며시 흔들었네.
깊어가는 밤 나의 창가에/비치는 저 그림자는/보고 싶어서 찾아 나온 우리 님일까/깜짝 놀라 일어나 창문을 여니/뜰에 있는 소나무 그림자였네/외로움에 우는 내 가슴을/얄밉게 놀려주네.



2.
떡쌀을 빻으러 가요.
쿵덕쿵 공이가 떡쌀 빻는걸 보려고요.
쿵덕쿵 박자에 맞춰 쌀을 고르고요. 
쿵덕쿵 방아를 잡아요.
쿵덕쿵 소리에
얼굴에서는 꽃방아를 찧고요.
방앗간에는 꽃이 가득 피어요.
울긋불긋 꽃 한 다발을 움켜지고요.
쿵덕쿵쿵덕쿵 심장도 덩달아 찧고요.
쿵덕쿵쿵덕쿵 그냥 잡고만 있었는걸요.



                                                                       ―「몰래 쓰는 단양연가·12, 물레방앗간」 전문



   남녀의 교합을 연상시키는 방아 찧는 풍경에서 발현revelation되는 에로티시즘을 익살스럽게 그린 시다. 도둑 제 발이 저리다고 ‘시골 처녀’인 화자는 마지막 행에서 손을 홰홰 내저으면서 ‘그냥 잡고만 있었는걸요’라고 묻지도 않은 변명을 하지만, 물레방앗간에 간 이유가 떡쌀 빻기 위한 것도 있겠지만,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라고 ‘공이가 떡쌀 빻는 걸 보려고’ 갔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비밀이다.
‘박자에 맞춰 쌀을 고르고요/쿵덕쿵 방아를 잡아요/쿵덕쿵 소리에/얼굴에서는 꽃방아를 찧고요/방앗간에는 꽃이 가득 피어요/울긋불긋 꽃 한 다발을 움켜지고요/쿵덕쿵쿵덕쿵 심장도 덩달아 찧고요’라는 각 행의 서술은 네이팜탄처럼 폭발하고야 마는 절정climax을 향해 리드미컬하게 점차 고조되어가는 남녀간 능동적이며 교호적인 성애의 과정을 패러디하여 상징적이지만 매우 과감하게 묘사하고 있다.








**약력:2014년 《리토피아》로 평론 등단. 평론집 『원시적 에너지와 낭만의 방정식』. 아라포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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