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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호/산문/남태식/끌림 또는 자연스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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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457회 작성일 17-01-05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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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

남태식





끌림 또는 자연스러움
―한강 연작소설 『채식주의자』를 읽다.





‘눈물’ - 상가 빈소 앞에 엎드렸을 때 애초에 울려고 작정했던 것처럼 이유 없이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때가 있다. 영화 ‘화려한 휴가’를 볼 때도 그랬다. 20여 년이나 젊은 직장후배와 함께 갔었는데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직 주요 장면은 시작하지도 않았는데도, 배우들의 연기가 뛰어난 것도 아니었는데도, 감동적인 장면은 전혀 나오지도 않았는데도 눈물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갑작스레 쏟아지기 시작해서 계속 줄줄줄 흘러내렸다. 극장에 관람객이 많지 않았고, 제일 뒷자리에 앉아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긴 했지만, ‘왜 이러지, 이러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을 하고, 옆자리에 앉은 후배가 ‘왜 그래요, 뭐에요’ 하고 핀잔을 주는데도 불구하고 눈물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영화를 다 보고 난 뒤에 옆자리에 앉아서 계속 휴지를 챙겨주던 후배의 영화평은 호평이 아니었는데 나는 눈물을 그칠 수가 없었고, 끝난 뒤 머리가 말끔히 씻겨나간 것처럼 무엇을 보았는지조차 떠올리기가 어려웠다. 후배를 난처하게 만들었던 것에 대해서는 극장을 나와서 ‘5ㆍ18 광주’에 대한 진실과 내게 끼친 영향과 그와 관련된 내 기억을 들려주는 것으로 얼버무리기는 했지만 참 겸연쩍었다.
‘단상들’ - 『채식주의자』를 읽는 동안 참 많은 말들이 의도하지 않은 장소에서의 눈물처럼 밀려들어왔다. 이 글은 그 밀려온 말들에 대한 단상들이다.
‘취향’ - 엄밀하게 말해서 주인공 영혜는 채식주의자가 아니다. 어떤 이념이나 급격한 변화의 단계에서 주체적으로 선택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육식거부자’라고 하면 그런대로 어울리는 것 같기는 하지만, 다시 엄밀하게 말하면 이것도 아니다. 영혜의 의식은 ‘꽃’에서(「몽고반점」) ‘나무’로(「나무불꽃」), ‘육식거부’에서 ‘채식거부’로까지 갔기 때문이다. ‘죽임 당한 모든 생명 먹기를 거부?’ 영혜의 ‘음식거부’ 행위를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고민했지만 짧게 한마디로 할 수 있는 표현은 찾지 못했는데, 그냥 ‘생명식 거부’라고 할까.
‘일탈’
‘폭력’
‘폭력에의 기억’
‘차이’- 나는 어릴 때부터 못 먹는 것이 참 많았다. ‘안 먹는 것이 아니라, 못 먹는 것’ 그 중 가장 심한 것이 육식이었다. 생일날에 끓여주는 소고기미역국 국물을 한 숟가락만 먹고도 설사를 할 정도로 내 몸의 육식에 대한 거부는 심했다. 스물다섯 살 때부터 식사자리를 번거롭게 하지 않겠다는 이유 하나로 육식을 시작하기는 해서 지금은 육식을 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좋아하지는 않아서 굳이 찾아서 먹지는 않는다. 하니 나 역시 ‘채식주의자’도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육식거부자’이고, 육식 외에도 이것저것 가리는 음식들이 꽤나 많아서 주변의 사람들에게 핀잔을 많이 들으면서 살았고, 살고 있다. 가리는 음식 외에도 먹을 음식은 많아서 굳이 어떤 음식을 안 먹는다고 해서 문제를 일으키는 것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꽤나 심하게 심술들을 부렸다. 영혜의 가족들이 보이는 ‘폭력에까지 이르는’ 행태들이 우리 가족에게서 나타나지 않았던 것은 ‘천성적인 육식거부자’가 나 말고도 우리 가족 중에 더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엄마, 그리고 엄마의 친정고모. 이렇게 글을 쓰고 있으려니 가족들 중에 내가 모르는 ‘천성적인 육식거부자’가 어쩌면 더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다만 드러내지 않았을 뿐인 것은 아닐까. 그래도 나는 양호한 편이어서 생선은 엄청 좋아하고 어느 정도 강한 향이 있는 나물도 잘 먹지만, 엄마는 모든 육식과 향이 강한 채소류, 해초류를 거의 못 먹고, 대고모는 생선장사로 자식들을 다 키우고 공부 시켰음에도 생선까지 못 먹는다.
‘동일성’ - 왜 모두는 같아야 하는가. 왜 같은 음식을 받아들이고 먹어야 하는가. 동일성에 대한 강요와 차이에 대하여 보이는 엄청난 거부감과 혐오. 동일성이라는 이름으로 저지르는 일상의 무수한 폭력들.
‘각주’ - 『채식주의자』는 연작소설이어서 표제작이자 사건의 발단이 되는 「채식주의자」외에도 「몽고반점」과 「나무 불꽃」이라는 제목의 2편의 작품이 더 있다. 하지만 「채식주의자」가 발단이라고 해서 「몽고반점」이 전개가 되고 「나무 불꽃」이 결론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나무 불꽃」까지 읽으면 소설을 일단 다 읽은 셈이 되는데 문득 드는 생각이 하나. 「몽고반점」과 「나무 불꽃」은 혹 「채식주의자」의 ‘각주’는 아닐까, 「채식주의자」에 붙이는 ‘덧붙임’, 다만 ‘덧붙임이면서 독립한’, 그리고 돌림노래처럼 돌아가서 「채식주의자」로 한 번 더 가는 것은 아닐까, 해서 이 연작소설은 3부작이 아닌 4부작은 아닐까, 하는 생각. 결국 발단과 전개만 있고 결론은 없는. (없을까?)
‘습관’
‘관습’
‘도피’
‘죽음’ - 언니 “네가! 죽을까봐 그러잖아!” 영혜 “…… 왜, 죽으면 안 되는 거야?”(「나무 불꽃」) 왜 죽으면 안 되지? 이 사회는 죽음에 대하여 놀랄 정도의 강박을 보여주고 있다. 장수가 곧 인간의 최고, 최선의 진리로 여겨지면서 장수에 대한 선망과 더불어 죽음에 대한 공포감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죽음은 가장 자연스러운 삶의 한 과정, 일부일 뿐인데 이러한 죽음에의 공포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죽음을 애써 유예하고 삶을 계속 연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악의 행태일 수도 있다.
‘삶’
‘견딤’ - 나도 가끔 나에게 묻고 답한다. 잘 견디고 있니, 잘 견뎠구나, 잘 견디고 있구나. 이런 문답을 하는 날에는 가끔이지만 혼자 울기도 한다. 우는 행위로 견딤을 대신?
‘비인간’
‘비동물’
‘꿈’
‘편안함’ - 쉰을 넘기면 그 이후의 삶은 덤이다, 라는 생각을 하며 살았다. 쉰을 넘기고 드디어 ‘덤의 삶’을 살게 되자 그 때부터 나는 행복해졌다. 덤이어서 행복한 삶. 몇 년 전 급성심근경색으로 죽을 고비를 한 번 넘겼다. 의사는 잠깐이지만 심장이 멈췄다고 했다. 듣고 보니 심장의 통증으로 오락가락 하는 상황에서 ‘이렇게 그냥 죽어도 괜찮겠다’ 하면서 순간 잠시 잠 속에 빠졌던 것처럼 생각되어지기도 했다. 다시  한순간 아직은 죽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과 함께 통증이 시작된 지 시간이 많이 지났음을 깨닫고는 바로 일어나 병원으로 내 발로 뛰어가 삶을 연장시키기는 했지만 그 날부터 나는 편안해졌다. 살았기에 편안해진 것이 아니라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서 편안해졌다.
‘얼굴’
‘꽃’
‘나무’ - 이 셋은 각 이야기에 등장하는 주요 사물들이다. 사물들?
‘지워짐’
‘소멸’
‘혁명’
‘깨어짐’
‘차별’
‘무시’
‘배려’ - 내 까다로움을 받아주고 이해해주고 기다려주고 도와주기까지 한 친구들이 새삼 고맙다. 나는 많은 부분에서 친구들의 ‘고문관’이고 세상의 ‘고문관’이다.
‘환멸’ - 나 역시 몸의 거부로 음식에 환멸을 느낀 때도 있었다. 대부분은 한두 가지 음식이었지만 가끔은 모든 음식이 그랬다. 입맛이 없거나 몸에 이상이 있거나 한 것은 아니었는데 가끔 그랬다. 음식통?
‘냄새들’ - 읽다보니 소설의 내용들이 내 기억과 겹쳐서 읽힌다. 음식에 관련한 온갖 기억들이 소설의 문장에 덧입혀져 새로운 문장으로 만들어지고 또 다른 이야기들을 생성시킨다. 음식 냄새와 관련된 단어는 회피, 도망. 짬뽕 냄새를 피해 멀찍이서 혼자 밥을 먹던 기억은 자주 있다. 간장 끓이는 냄새에 집으로 가던 발걸음을 돌려 친구 집으로 향한 적도 있었다. 음식에 대한 환멸과 연결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늘 먹는 음식도 가끔은 비위가 상해 뚜껑을 덮고 밀친 일은 많았다. 냄새거부자? 구역질. 최근에는 이런 증상이 거의 없다. 음식이 바뀐 것도 아닌데 이 또한 신기하다. 생각하면 뜬금없이 이런 대접 받은 음식에게 미안하다.
‘나무의 세계’
‘꽃의 세계’
‘비폭력’
‘비공격’
‘상처’ - 상처가 거의 막판에 떠오른 것은 이상하다. 처음 발단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거나 떠올렸어야 하는데 왜 막판에서야 떠올랐을까. 내 의식의 밑바닥에도 이러한 말을 떠올리지 못하게 하는 어떤 강박이 있었을까. 강박이 있었다면 이 강박 역시 상처이겠지. 드러내어야 함에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는 상처.
‘끌림’
‘자연스러움’ - 먹고 난 뒤 토하거나 설사하거나 체하거나 앓는 행위를 반복하면서 내가 결정하고 실행에 옮긴 행위는 처음 음식을 먹을 때마다 재는 것이었다. 이 음식은 소화가 되는 음식인가, 소화가 되면 시간은 얼마나 걸리는가, 몸이 거부하지는 않은가 등등. 처음부터 몸이 거부하는 음식은 아예 먹지 않았으니 재는 음식은 그나마 몸이 거부하지는 않은 음식이었겠으나 그리 많지는 않았다. 이렇게 어린 시절부터 몸이 받아들이는 음식과 받아들이지 않는 음식을 가려가면서 먹었어도 병원에는 꽤나 드나들었다. ‘급체, 식체, 급체, 식체’ 내 진료카드에 줄줄이 기록되어 있던 병명들. 몸이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거부하는 행위는 마음의 행위가 아니라 몸의 행위이다. 몸 이야기에서는 항상 몸이 옳다. 마음이 앉을 자리를 별도로 마련해서는 안 된다. 영혜는 육식거부 행위에 대한 원인이 무어냐고 묻는 질문에 꿈이라고 답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몸이다. 영혜의 거부는 몸의 끌림에 따른 자연스러움이다. 육식에 대한 영혜의 ‘끌림’과 ‘자연스러움’을 인정했다면 소설은 완전히 달라졌겠지.
‘나’ -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행위는 나를 읽고 듣고 보는 행위이다. 나를 읽고 듣고 보면서 나를 돌아보는 행위이다. 읽고 듣고 보되 나를 이입하는 대상은 각자 다를 수는 있다. 『채식주의자』에서는 이야기를 생성시키는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영혜 외에 각각의 이야기를 구술하는 세 명의 화자가 나온다. 남편, 형부, 언니. 이 중에서 내가 나를 이입한 대상은 영혜였다. 겪은 바 내게 가장 가까운 대상이어서 자연스럽게 이입되었지 싶다.
‘생각’ - 한강의 소설은 끊임없이 ‘생각’을 불러 일으켰다. 연달아서 읽은 『소년이 온다』와 『흰』도 비슷하기는 했지만 『채식주의자』가 가장 많은 생각을 떠올리게 했다. 해서 『채식주의자』를 읽는 시간은 『채식주의자』를 생각하는 시간이었고, 『채식주의자』를 읽으면서 떠올랐던 갖가지 생각들과 기억들을 되새기는 시간이었다.
‘사족’ - 『채식주의자』라는 제목 때문에 환경과 관련한 생각들도 조금은 했다. 밀집사육으로 인한 대기오염 같은 것. 그러나 이것은 결국 사족이겠구나 싶어 접었다.







**약력:2003년 《리토피아》로 등단,  시집 『망상가들의 마을』 외, 김구용시문학상(2016)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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