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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호/신작시/강우식/타조 알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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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강우식
타조 알
장닭 한 마리가 열 명의 마누라를 거느리고 알콩 달콩 알을 까며 살았다. 여편네들이 여럿이니 간혹 사랑싸움도 있었지만 그러려니 하였다. 숫처녀도 바람난다는 봄날 하루였다. 양지쪽 알둥지에 든 한 여편네가 평소와는 달리 나오지는 않고 하루종일 배앓이에 저녁 무렵에야 거우 홰를 쳤다. 산고 끝에 얻은 것이 오리 알이었다. 하루아침에 낙동강 오리 알 신세가 된 장닭은 내 새끼를 낳았다고 동네방네 자랑스럽게 긴 목청을 뽑을 수 없었다. 재산이 주는 것이 가슴 아프지만 오리 알을 낳았으니 오리하고 천만년 잘 살라고 내쫓았다. 그리고 사랑도 미움도 다 무덤덤해진 세월이 흐른 뒤에 문밖으로 내좇은 계집과 사는 뒤뚱발이 오리남편을 우연히 만났다. 그래도 한때 알까기하며 살았다고 소식이 궁금하여 오리에게 “잘 사나요” 물으니 퉁명스럽게 “그년 엊그제 죽었어요.” 하였다. 그리고는 그 말 끝에 “가당찮게 타조 알 낳다 뒈졌어요”라고 가래침처럼 뱉고 등을 돌렸다.
우리 집 거실에도 아내가 아프리카에서 나 몰래 데려온 타조 알이 있다. 그 타조 알의 몸 전체에는 누구의 알을 낳다가 죽었는지 모르지만 위용을 자랑하는 사자, 코끼리, 기린의 화상이 이력서처럼 새겨져 있다. 내가 아프리카 여행지에서 아내의 비밀스런 욕망을 모르고 “그런 알을 사느냐”는 한마디에 안 산 줄 안 타조 알이다. 나에게 들키기 싫어서 불륜처럼 장롱 속 깊숙이 감춰두었던 애장품이다. 아내의 시크릿이다. 이까짓 타조 알 하나가 뭐라고 하다가 아니 내가 모를 숨기고 싶은 내밀스런 큰 욕망의 호코기가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나는 용서하지 못할 일 용서하듯이 감추기보다 꺼내 놓았다. 타조알 하나에 연연해 온 속이 좁은 사내였던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해 참회하듯이 거실에 내놓았다. 사실 나는 평생 폼생폼사의 장닭정신으로 살아왔다. 그 장닭의 기세 좋던 붉은 벼슬은 축 처지고 요즈음은 타조 알을 볼 때마다 호랑이, 코끼리, 기린이 아니라 그 아버지의 무늬를 가져도 좋으니 지금 아내가 살아만 있었으면 하는 세상에서 제일 어리석고 부질없는 생각을 바보천치처럼 지우지 못하고 하루는 쓸쓸히 하루는 슬프게 하루하루를 산다. 이 봄날이 마치 날자, 날자 하면서도 날지 못하는 타조의 아니 이상李葙의 <날개>와 같다.
파도의 기억
잊고 싶지 않아도 모른 체 잊고 싶은 것이 있고
또 잊은 것들은 쉽사리 떠올리기도 어려운데
그녀가 시집가면서 툭 던지고 간 말
나 늬 눈길 안주니까 다른 남자에게 시집간다.
(그 남자는 원래 남의 사람이란 뜻의 남자他者였는데
내가 된다는 말이었다.)
눈물 훔치며 말해서인지 뒤돌아서 가는
그녀의 치맛폭이 파도처럼 하얗게 뒤집혔다.
그 파도는 인생의 하고많은 파도 중에서도
늙어서도 바다에 가면 아직도 우는 게 보인다.
**약력:1941년 강원도 주문진 출생. 1966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호 水兄, 老平, 果山. 시집 『사행시초』(1974), 『고려의 눈보라』(1977), 『꽃을 꺾기 시작하면서』(1979), 『물의 혼』(1986), 『설연집』(1988), 『어머니의 물감상자』(1995), 『바보산수』(1999), 『바보산수 가을 봄』(2004) 발간. 시극집 『벌거숭이 방문』(1983), 시에세이집 『세계의 명시를 찾아서』(1994), 시론집 『육감과 혼』, 『절망과 구원의 시학』(1991), 『한국분단시연구』, 시연구서 『한국 상진주의 시 연구』발간. 현대문학상(1975), 한국시인협회상(1985), 한국펜클럽문학상 시부문(1987), 성균문학상, 월탄문학상(2000) 수상, 김만중문학상 수상. 성균관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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