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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호/아라포럼/고창수/좋은 시란 어떤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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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578회 작성일 17-01-05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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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포럼(제11회)


고창수





<좋은 시란 어떤 것일까>

일시 : 2016년 6월 27일(토) 오후 5시
장소 : 아라아트홀
정리 : 고나연







   변변치 못한 저를 초청해 주셔서 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번역에 관한 이야기로 소개를 해주셨는데 농담 한마디 합니다. 미국의 한 장관이 사절단을 데리고 프랑스를 방문해서 불어로 연설을 했답니다. 그런데 불란서 사람들은 그가 영어로 연설하는 줄 알았다고 합니다.
한국시를 그동안 몇 십년 동안 천오백 편 내지 이천 편은 본 것 같습니다. 고전 작품들도 많이 읽었지요. 저는 시인이기 때문에 자유롭게 우리 동료 시인들 작품들도 읽었습니다. 그런데 번역에 있어 외부 번역가들은 시단에 잘 들어오려 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자기가 시인이 아니기 때문이고 우수한 번역가라 하더라도 자막 번역처럼 했다가는 말썽이 나니까요.
   저는 시인이니까 이해해주시고 하여 우리 민초를 중심으로 번역을 합니다. 저로선 한국시에 대해 굉장히 친근감도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외국어 공부도 하고 세계시를 많이 읽으면서 한국시와 세계시에 대한 평형과 균형감각 같은 것도 생겼습니다.
   사설은 접고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한국에서는 별로 신통치 않고 알려지지도 않은 시인인데 제목을 ‘좋은 시’로 한다는 게 외람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제 자신이 좋은 작품을 많이 쓴 것도 아니라 ‘좋은 시’라는 제목으로 이야기 한다는 게 좀 어색하기는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시를 쓰고, 시를 좋아하여 읽는 사람들의 관심사는 언젠가는 좋은 시를 읽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또 ‘좋은 시를 써야되겠다’는 것은 제게 늘 관심의 대상이 된 제목이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양해해 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1920년대로 생각되는데, ‘황무지’라는 시를 써서 세계를 놀라게 한 일이 있었죠. 그 전 세계의 시 동향과는 전혀 다른 혁명적인 시였습니다. 장시 400행에 달하는 시를 써서 세계를 경악하게 만든 대 작품이었습니다. 그게 ‘황무지’인데요. 여러분도 다 읽어보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작품을 원래는 한 천 줄 정도 쓴 것 같아요. 그것을 이즈라 파운드라는 선배 시인에게 보여주면서 한 번 봐달라고 했더니 이즈라 파운드가 감히 그걸 절반으로 줄여버렸어요. 한 400행 정도로 줄여버렸거든요. 그렇게 과감하게 줄인 걸 발표해가지고 세계를 놀라게 한 문학사상 획기적인 작품을 만들어냈죠. 이즈라 파운드도 대단한 시인이고 시론가인데 이 분이 시를 세 가지로 분류한 일이 있습니다.
시는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첫째는 음악성이 강한 시로 Melopoeia입니다. 멜로는 우리 멜로디와 어원이 같은 히랍어로 음악의 멜로디라는 말과 같은 어원인 것 같습니다. 음악적인 요소가 강한 시가 Melopoeia입니다. 다음이 시각적인 요소가 강한 시로 Phanopoeia입니다. 세 번째는 시각적인 이미지가 강한 시로 Logopoeia입니다. 로고스는 말이라는 뜻이죠. 철학적인 요소가 강한 시를 말합니다. 이렇게 셋으로 나누는데 우리나라 Melopoeia에 속하는 시는 우리가 좋아하는 김소월, 김영랑, 서정주, 이런 분들의 시들로 음악성이 강한 시라 생각할 수 있겠죠. Phanopoeia는 시각적인 이미저리인데, 이미지라는 말은 라틴어의 이마어라는 말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마어라는 말은 초상화로 사람의 얼굴을 그리는 것입니다. 이미지라는 건 곧 그림이라는 것이죠
   사람의 눈에 나타나는 영상을 이미지라고 하는데 영상성이 강한 시입니다. 시는 처음 노동할 때 노래를 부르면 노동이 쉬워지는 그런 것도 있지요. 사람들끼리 모였을 때 노래를 하면서 흥겹게 지내는 즐거움을 가지는 것인데, 시와 노래가 비슷한 효과를 갖는 것 같아요.
시에 노래적인 요소가 강하지만 시가 발달해가는 과정에서 시각적인 요소가 부각된 것 같아요. 특히 서구에서는 근대와 현대를 거치면서 시에 시각적인 요소가 부각된 것 같습니다. 물론 옛날부터 있어왔죠.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철학자들은 시인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 있는데, 그것은 시인의 천재성으로 메타포, 즉 은유 비유를 만들어내는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비유나 은유라는 것은 두 가지 사물을 견주어 비슷함을 드러냄으로써 감동을 주는 것이거든요. 시인은 언뜻 봐서는 동떨어지고 이질적인 다른 사물 가운데에서 어떤 동질성을 발견하고 유사한 것을 발견하는 사람들인데요, 그 능력이 시인의 천재성의 중심적인 요소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얘기를 아리스토텔레스가 한 적이 있거든요.
플라톤은 시인은 우리 공화국에서 쫓아내야 한다는 얘기를 했어요.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그 이데아의 세계를 모방해서 이데아의 진짜 세계에서 동떨어진 모사품을 가지고 사람들을 혼돈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공화국의 질서 속에서는 맞지 않고 혼란을 가져오는 사람들이라고 예술가 모두를 그렇게 보았죠. 화가도 그렇고 다른 예술가들도 그렇다고 보았지요. 이데아 본체의 진실 세계를 모방해서 사람들에게 혼돈을 가져온다는 이유로 해서 시인들을 싫어했죠. 예술가들의 모방 기능을 상당히 나쁘게 평가했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제자이지만 생각을 달리하여 시인들은 모방하는 게 오히려 사물의 본질과 자연을 돋보이게 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시인들의 독창성을 높이 사야 된다는 생각으로 세계 모든 직종의 사람들을 일렬로 세워놓는다면 제일 앞에 시인들이 와야 된다고 한 것입니다. 시인들은 가장 우수한 사람들이다. 히랍의 어느 철학자가 얘기한 걸로 생각됩니다. 모방보다는 오히려 독창적인 게 중요하다는 사상이 나와서인데, 이미저리를 만드는 능력이 시인의 능력 중 가장 중요한 능력인 것 같아요
   요즘 한국문학 번역원에서 프로젝트를 하나 맡아 박제천 시인의 시를 번역해서 미국 출판사에서 출판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박제천 시인의 시를 전부 읽고 있는데 십여 년 전에 코넬대학교에서 박제천 시인의 시집을 하나 낸 일이 있습니다. 요즘 전집을 가지고 읽을 때 이 양반의 상상력의 깊이와 넓이에 대해 아주 감탄하고 놀랐습니다. 시를 번역하면서 읽으면서 굉장히 감동하고 감탄했습니다. 전집을 읽어보시면 무변의 상상력을 가지고 있는 분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한국의 우수한 시인들의 시는 물론 제가 많이 읽었지만 특히 가까이 있는 분들로는 강우식, 박제천 시인이 아주 우수한 시인들입니다. 그 상상력의 깊이와 넓이에 대해 감탄하는 것은 그 양반이 동떨어진 사물들에서 유사성을 발견해 내는 능력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게 아주 놀라운 상상력이거든요. 사람은 보통 기억력이 있고 판단력이 있고 여러 층의 지적 능력이 있는데 가장 높은 능력이 상상력 아니겠습니까. 기억력이 있으면 시험에 백점 맞을 수 있지요. 백점을 맞으면서도 판단력이 있어야 기억나는 물건들과 사물들을 판가름해서 흑백을 가리고 우열을 가릴 수 있지요. 그런 능력이 오히려 더 높은 능력 같기도 하고 그 위의 능력으로는 상상력과 창의력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시각적인 이미저리를 만들어내는 은유와 비유를 잘 만들어내는 능력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 다음 세 번째 요소로 Logopoeia 하는 거는 역시 철학적인 사고가 잘 형성화 된 시 작품이 중요하다는 것이죠.
이 세 가지로 분류하는데 각 시의 종류에서 우수한 최고의 시들이 나올 수 있겠지요. 나름대로 나오겠지만 만약 이 세 종류의 시들에서 꼭 우열을 가려야 된다면 역시 제일 중요한건 형이상학적이고 철학적인 요소가 강한 시일 것이다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시 이론을 공부하고 생각하면서 꼭 절대적으로 이게 최고라고 얘기하진 않습니다. 예를 들면 김소월의 ‘산에는 꽃이 피네’, ‘산유화’ 같은 시들이 세계 최고의 음악성을 가지고 있지만 꼭 이 시가 ‘황무지’보다 못하다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각 종류마다 장르마다 절대적인 비교는 없는 것 같아요. 말하자면 조그맣든 크든 좋은 시는 얼마든지 많다는 것이지요.
   들판에는 수백 가지 수천 가지 꽃들이 피어있는데 그 중 어느 꽃만 최고다 하는 것보다는 여러 가지 꽃들이 제 나름대로 이쁘고 아름답다. 마음속으로 생각하면서 시를 쓰는 게 좋은 것 같아요.
    경우에 따라 보는 사람의 각도에 따라 이해관계에 따라 목적에 따라 좋은 시를 골라내야 합니다. 하지만 신춘문예에서 시를 꼭 하나만을 골라야 할 경우에는 부득이하게 어떤 이유를 대서든지 좋은 것을 고르겠지요. 그래도 거기에 출품한 시 중에서는 비슷비슷하게 좋은 것도 많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영국에 유명한 문학평론가 I.A. 리처드가 있습니다. 이 사람의 시론서 중 세계적으로 유명한 시론서가 있는데 그게 ‘Principles of Literary Criticism(문학 비평의 원칙들)’이라는 책이 있어요. 그 책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여러 번 읽어봤는데 잘 모르겠어요. 얼마나 어려운지. 그런데 이 사람은 요즘 얘기하는 뉴 크리티시즘이라 해서 신비평의 시조뻘이 되는 문학이론가입니다. 이 사람의 시론서를 보면서 제가 가장 강력하게 각성한 게 시는 정서적인 언어다라는 것이죠. 그런 얘기를 한 게 있습니다. 시는 내용 자체에 정서가 섞여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산문적인 내용만 읽는 게 아니고 시가 담고 있는 감정 속에 얽혀져있는 내용을 읽어야 하는데 그게 시의 진수라는 거죠. 그러니까 시는 감정과 정서를 전달하는 것이다.
   허버트 리드라는 영국의 문학평론가는 모든 예술은 음악 상태를 지향한다.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모든 예술은 음악의 상태를 지향한다는 것이지요. 제가 음악도 듣고 음악 공부도 하면서 왜 이런 얘기를 했냐 생각해 보니까, 음악을 들으면 직접적으로 감수성에 호소하지 않습니까. 한국의 뽕짝이라던가 한국의 타령이라던가를 들으면 그 음악이 우리의 감성에 직접적으로 호소하지 않습니까. 설명이 더 필요 없이 직접 전달된다는 것을 음악의 가장 중요한 기능으로 본 사람이 있습니다. 시에도 그 음악성이 중요합니다. 시에도 음악성이 있어야 호소력이 커지거든요. 시 구절 속에 음악이 포함 돼 있도록 시의 언어와 시어를 가꾸어야 된다라는 말 같습니다. 제 생각에는 좋은 시를 열심히 소리 내어 수십 번 외울 정도로 읽는 게 첫 번째인 것 같아요. 저도 5~6십년 동안 읽는 습관이 있는데요. 하루에 서너 시간씩 꼭 소리 내어 읽습니다.
그래서 독방을 써요. 우리 서당에서도 소리내어 읽으면 귀, 눈이 울리잖아요. 귓속에 울리고 눈으로 보고 피부로 울려들어가서 내부로 들어가는 것 같아요. 울림이 내부로 들어가서 무의식을 차지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눈으로만 보는 거는 효과가 절반 밖에 안 돼요. 물론 눈으로 볼 때는 봐야 되겠죠. 빨리 봐야 될 때는 눈으로 보는 게 빠르겠지요. 그러나 큰 소리로 읽어서 자기 내부 무의식 속까지 내용이 스며들어가도록 읽는 습관이 시인에게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저는 외국어 공부를 하면서 읽는 훈련을 많이 했는데요. 그게 우리 문학을 하는 분들에게도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시 속에 음악을 다져넣는 것은 이런 울림을 통해 무의식 속에 스며있는 일종의 시의 율동, 시의 충동, 시의 운율 같은 것이 묻어나오게 하거든요.
   음악성이 없는 시인들이 있어요. 아무리 읽어도 음악적인 감동이 안 옵니다. 산문적으로는 지적이니 무어니 해도 시를 읽으면 음악적인 감동이 와야 하거든요. 그게 안 오는 시들이 있어요. 그거는 이런 훈련이 모자라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시에서 음악적인 요소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T.S 엘리어트도 이야기했습니다. 시는 하나의 낱말로 표현되기 전에 하나의 리듬으로 생겨나서 그 리듬이 하나의 아이디어나 이미지를 탄생시킨다는 그런 요지의 말이지요. 오히려 음악성이 내용이나 아이디어 사상보다 더 앞선다. 시는 음악적이고 리듬적인 충동으로 시작된다. 이런 얘기가 상당히 중요한 것 같아요. 시는 원래 음악적인 충동으로 시작된다. 제가 이렇게 생각하는 데는 인간이 의사 소통의 도구로 말을 만들어 내기 전에 말의 전신인 원초적 감정이나 감흥, 동작, 충동 등이 있었다는 것이고, 시는 그러한 감정이나 충동을 직접적으로 표현해내는 특수한 능력이 있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시의 특징으로 생각하는 주문 같은 주술성도 이러한 원초적인 감정 충동과 연결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음악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서정주 시인도 제가 한동안 상당히 좋아했습니다. 서정주 시인께서 유럽 일주를 하셨을 때 스위스에 제가 근무하고 있었는데 우리 집에 와 한 사나흘 묵으셨어요. 불란서 몽블랑도 가고, 유럽과 스위스도 구경시켜드리면서 시 얘기를 많이 했어요. 내가 한국의 시인으로 있어도 그 양반이 생각하면 젊은 어린 시인이지만 저는 그 양반의 시를 이미 몇 번 번역을 했을 때에요. 나는 번역가로서 대등한 위치에서 그 양반하고 시 탐론을 했거든요. 서울에 와 이따금씩 사당동에 있는 집으로 가 맥주 내어놓고 마시기도 했지요. 얼큰히 취하면 시는 서러움이에요. 그런 얘기도 했어요. 시는 마술이에요. 그런 얘기도 했어요. 시는 서러움이다 하는 거는 시는 감정이라는 거죠. 우리가 시 쓰는 것은 소설가가 산문 쓰는 것 하고는 다르죠. 시인은 감정을 중복적으로 전달하는 거니까요. 가끔 서정주 시인이 ‘지금은 먼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이제 거울 앞에 와 앉은 내 누이같이 생긴 국화꽃’을 얘기할 때 이것은 감정이 어린 얘기죠. 감정어린 얘기를 우리 감정에 호소하는 거지 누나가 뭐 자기 앞에 앉아있는 사실적인 걸 전한 건 아니죠. 그 사실을 감정에 섞어서 슬픔 서러움 또는 기쁨에 따라 말을 섞어 넣는 것인데 우리에게 던져주는 메시지는 감정이죠.
그게 시의 특징입니다. 시인은 감정적 서정을 자기 시에 투입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시를 한 줄 한 줄 쓰면서 감정과 정서와 음악성과 충동 율동 같은 게 짜여 있어야 시로서 호소력이 있다는 거죠.
   폴 발레리는 ‘종족의 언어의 언어를 순화’하는 기능이시인의 중요한 기능이다 했고, T.S. 엘리어트도 종족의 언어를 순화 하는 게 시인의 중요한 기능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자주 생각하는데 처음에는 순화한다는 게 뭔지 잘 몰랐어요. 그러다가 최근 이런 얘기를 할 기회가 있었어요. 성균관대학 국문과 교수이고 영화감독인 제 불란서 친구와 아주 친한 친구가 있어요. 나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영화감독이고 지금은 영화를 가르치는데 국문학과 교수입니다. 이 사람은 시인이기도 하고 저술가이기도 하고 영화감독이기도 합니다. 아니 순화한다는 게 무슨 소리냐 하고 물었더니 자기도 글쎄 잘 모르겠다 하다가 당시 불란서 언어에 자꾸 다른 용어들이 섞이면서 순수한 모국어에 외국어도 섞였겠죠. 불란서어를 순화해야 된다. 우리가 쓰는 모국어에 더 가까운 걸 찾아내야 한다는 그런 뜻 같아요. 언어에 응축되어 있는 서정성과 함축성 같은 걸 통틀어 얘기하는 것이겠지요. 하여튼 음악적인 요소가 중요하다는 것, 메타포적인 요소가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에즈라 파운드는 천재적인 이론가입니다. 이 분은 중국 한시를 영어로 번역했습니다. 중국 한시를 번역하는 서양인으로선 첫째로 꼽히는 그런 분이죠. 세계지도를 잘 알고 라틴어, 히랍어, 불어, 스페인어, 다 잘하는 천재 같은 양반인데 이 분도 역시 형이상학적인 내용이 중요하게 작용한 시가 우수하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철학적인 내용으로 보면 한국시도 우수하지 않습니까. 선시 같은 걸 보면 우리도 우수한 전통을 가지고 있는데, 대단히 철학적이고 이상적이고 높은 차원의 사색 결과물들이거든요. 서양시에서 중요한 시작법을 가져온 초현실적인 시가 있죠. 보들레르부터 시작해서 그 이후 초현실주의, 다다이즘, 슈리알리즘, 초현실주의가 있습니다. 처음 불란서에서 일어난 문예운동이죠. 일차대전 전까지 인간은 이성이 최고의 가치라 했는데 이것은 플라톤의 이데아적인 사상입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성이 인간이 최고의 가치라는 것이지요. 이상적인 국가가 건설된다 했는데 계속 따라가다 보니깐 일차대전, 이차대전의 비극들이 벌어집니다. 인간 문명이 파괴되는 양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사람들은 인간의 이성에 대해 회의를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상적인 국가로 인간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느냐라는 회의를 가지고 나타난 게 다다이즘이죠.
그 배후에는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지그문트 프로이드라는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가 있지요. 불교 노장사상에서는 뻔히 옛날부터 알고 있는 거였는데 서양도 영향을 많이 받았죠. 인간정신을 연구해 보니깐 우리가 보통 살아서 갑순이 갑돌이 하고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생각을 하던 것이 인간의 무의식이 발견되면서부터 무의식은 빙산의 일각이라는 것을 알았죠. 바다 위에 드러난 쪼끄만 부분이 의식이고, 그 안에 가라앉아있는 어마어마한 얼음덩어리는 무의식인데, 사실 인간을 지배하는 건 무의식이라는 원리를 발견한 거죠. 놀라 자빠진 거지요.
   그러니까 프로이드의 학설부터 인간정신을 심층심리학 해가지고 보니까 이게 이성을 가지고는 아무것도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들고 일어난 지성인들의 운동이 다다이즘이죠. 인간은 비이성적이고 무질서하다는 사상이 나오면서 무의식을 연구해야 된다는 지성인들, 시인들, 문인들의 운동이 다다이즘이고 초현실주의라는 것이죠. 인간의 무의식을 상대로 했다는 것이 인간 예술 사상에서도 큰 획기적 변화의 계기가 된 겁니다. 그 다음부터 미술운동에서도 인상주의로부터 시작해서 상징주의, 표현주의, 입체주의로 발전합니다. 인간의 심리상태를 파헤치고 미지의 것을 드러내는 운동이 지적 분야에서 일어난 거죠. 예술, 과학, 모든 분야에서입니다. 예술작품도 무의식을 소재로 하지 않은 작품은 가치가 없다 했지요. 의식의 흐름이라는 문학의 조류, 문학적인 사상이 나오고 표현의 방법도 나온 거죠. 그 의식의 흐름이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같은 작품을 탄생시켰습니다. 저도 영문학을 전공해서 500페이지 되는 책을 읽어보려 했지만 아무리 읽어도 모르겠어요. 원어 속에 갇힌 무의식의 작용들을 파헤쳐 보려 했던 것이지요. 특히 stream of consciousness(의식의 흐름) 작가들, 여류작가가 있죠. 박인환의 누구를 생각한다. 버지니아 울프 같은 사람의 등대로 등 소설을 읽어보면 무의식의 흐름이 아주 아름다워요. 문장도 아름답고 내용은 잘 모르겠지만 아름답습니다.
   T.S. 엘리어트가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어려운 시를 읽으면 이해되기 전에 즐길 수는 있다. 율리시스를 읽어보면,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걸 보면, 무슨 말인지 모르죠. 전후 좌우 조리가 안 맞고 논리적이지 않고 허튼소리만 계속 하는 것 같습니다. 자세히 읽어보면 뭔가 줄거리가 있지요. 또 이오네스코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희곡작가이고 극작가인데 ‘대머리 여가수’ 이런 희곡이 있어요. 재밌는 희곡인데 그런 걸 읽어보면 알 듯 모를 듯하면서도 굉장히 재밌는 줄거리가 생기는 걸 알 수 있거든요.
옛날 이태백이 쓰던 테크닉을 지금도 씁니다. 어느 누가 썼건, 서정주, 김춘수가 썼건, 누가 쓴 수법이나 표현법은 인류 공통의 유산입니다. 이건 쓰지 마라, 라는 법이 없거든요. 옛날 플라톤이 썼던 2000년 전의 수법이라고 해서 쓰지 말라는 법이 없어요.
인간이 발견한 모든 수법은 우리가 쓸 자유가 있죠. 자기가 표현하기 위해 표현 수법을 찾기 위해 세계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찾아서 쓰는 거죠. 그 수법과 내용에 늘 다양하게 관심을 가지고 시를 개발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깨달음이라는 얘기를 많이 하지 않습니까. 저도 논문을 쓰면서 불교 공부를 했거든요. T.S.엘리어트의 시에 나타난 불교 사상을 주제로 논문을 쓰고는 했는데 그래서 선불교의 발상법 같은 것을 보고 돈오점수하는 그런 게 있죠. 사물의 이치에 대해 깨달음을 가진다 하면 굉장한 희열을 갖다 주는 거거든요. 추측컨대 이런 것 같아요. 깨달음이 온다 하는 건 자기가 수행을 하던가, 좌선을 하던가, 명상을 하던가, 모든 수행 방법을 쓰면서 이 세상의 이치를 깨닫는 것 아니겠습니까. 나는 무어냐, 나는 누구냐,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 이 우주는 무어냐, 산다는 것은 무어냐, 왜 사냐, 이런 이치를 깨닫는 것이 말하자면 도에 통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도에 딱 통하는 경지에 달할 때에는 완전히 인간적인 속박에서 벗어나 해탈해서 하늘로 날아가는 것 같은 그런 경지 같아요. 그래서 시에서도 이런 몇 줄의 각성을 주면 인간에겐 무한한 희열을 주는 거니까, 그런 각성을 주기 위한 시 를 쓰는 게 우리의 목적이겠죠.
이즈라 파운드의 시를 하나 읽겠습니다. ‘지하철역에서’라는 시입니다.



군중 속에서 환영처럼 나타나는 이 얼굴들
축축한, 검은 가지의 꽃잎들



   이게 세계적으로 인구에 회자되는 시입니다. 이미지즘의 영상을 중요시하는 파운드가 이미지즘 운동의 제일 효시였죠. 이게 이미지즘의 대표적인 시입니다. 지하철 속에 들어가니 지하철 속 군중이 젖은 나뭇가지에 있는 꽃잎 같이 보였다.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면서 우리에게 하나의 이치를 깨닫게 해주는 강렬한 시입니다. 남이 생각하도록 하는 그런 계기를 주는 시가 좋은 것 같아요. 나도 그런 걸 잘 못쓰지만 예를 들면 최근 내가 번역을 했던 시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시이기도 하죠. 서정춘 시인은 짧은 시를 쓰기로 유명한데 ‘죽편-여행’ 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여기로부터 멀다
칸칸마다 밤이 깊은
푸른 기차를 타고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백년이 걸린다



   대나무의 한 마디를 가지고 이야기 할 때 그걸 한 칸으로 보고 마디 하나를 지나가는데 백년이 걸린다. 이게 좀 엉뚱한 발상이지만 우리를 사물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게 합니다. 일상적으로 우리 주위의 사물을 다시 보게 하는 시를 쓰면 인상이 많이 남죠.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를 읽었습니다. 처음에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인간이 과학적인 발명을 하고 또 교향곡 같은 음악을 만들어내고 좋은 문학작품을 쓰는 것은 죽음 같은 인간의 조건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다.’ 이런 얘기가 나오거든요. 그런데 시도 마찬가지죠. 궁극적으로 인간의 조건을 극복하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이 이렇게 피같이 묻어 나와 하나의 작품이 되는 감동이 되겠다는 것이지요.
   시의 종류에 상관없이 인간의 눈과 귀와 마음과 가슴에 새로운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희망차고 신비로운 우주와 지구와 인간에 대한 비전을 보여주고 감동시키는 시 작품은 모두 좋은 시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좋은 시를 쓰고 아이디어를 뜨게 하는 데는 좋은 방법이 걷는 것이랍니다. 시인 중 미국의 월러스 스티븐이라는 미국 최고의 시인이고 엘리어트 못지않은 시인이 있지요. 그 양반이 꼭 하루에 한 시간 정도 자기 집에서 직장으로 걸어다닐 때 걸으면 생각이 더 잘드는 것 같대요. 집에 앉아서 책보고 있으면 생각이 잘 안 나오는데 걸으면서 생각이 나는 건 좋은 것 같습니다.

   저는 카메라로 사진을 찍기 때문에 옛날부터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거든요.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기에 시간낭비 아닌가 생각을 했는데요. 가만히 생각하니깐 그게 아니에요.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면 사물들과 경치든 나무든 보면서 예사롭지 않게 보거든요. 이 나무를 어느 방향에서 어느 각도에서 찍으면 제일 아름답게 찍겠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사물에 대해 관찰력이 생기게 되는 것 같아요. 요즘 디카 같은 건 저렴하고 핸드폰도 있으니까 자주 찍으면서 카메라 가지고 다니는 것도 많이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아우라가 있다고 말합니다. 엑스레이로 찍으면 사람의 몸에서 열이 나는 게 찍힌답니다. 그걸 아우라라고 하는데 예술작품에서는 이런 아우라가 풍겨져 나옵니다. 뭔지 모를 빛 같은 게 풍겨나온다는 것이고, 전문가들이 이런 걸 보고 예술작품의 우수성을 진단한다는 거죠.







**약력:1965년 《시문학》으로 등단. 시집 『파편 줍는 노래』, 『산보로』, 『몇 가지 풍경』, 『시네포엠』, 『소리와 고요 사이』,

『사물들, 그 눈과 귀』. 영문시집 『Landscapes』, 『Seattle Poems』, 『What the Spider Said』. 번역시집 『Korean Poetry Anthologies』,

『Sending the Ship to the Stars』(박제천 영역시집).

시문학상, 정문문학상, 시인들이 뽑는 시인상, 바움문학상, 성균문학상, 코리아타임즈 및 펜클럽한국본부 번역문학상, 루마니아 Lucian Blaga 세계시축제 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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