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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호/아라세계/신연수/인천문학사(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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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683회 작성일 17-01-05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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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세계

신연수




인천문학사(3)
─ 평론가 김동석의 수필들




1) 김동석과 인천
   오랜만에 청계천에서 헌책방을 하는 고향 후배가 전화를 했다. 후배는 간단한 안부인사 후 책이야기를 꺼냈다. 요즘 문학작품집, 특히 시집 값이 많이 올랐다면서 오장환 시집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본 뒤 오래된 시집이 몇 권 나왔는데 구입할 의향이 있는지와 구입할 경우 얼마나 줄 수 있는지를 물었다.

   퇴근시간에 맞춰 회사 근처로 찾아 온 후배를 만났다. 의례적인 인사 후 후배는 오장환 시집 『헌사』와 김기림 시집 『새노래』, 안회남 창작집 『불』 등 소위 월북 작가 작품집 몇 권을 건네준다. 가격이 만만치 않았지만 낮에 이미 전화로 이야기한 터라 별말 없이 값을 지불하고 책 상태를 자세히 살펴보고 있는데 후배는 낡은 비닐봉투에서 다른 책 몇 권을 더 꺼내 놓는다. 표지는 거의 빛이 바랬으며 해방공간의 질 나쁜 종이에 인쇄돼 조금만 만지면 금세 부서질 듯한 고서 10여 권이 60여 년의 세월을 건너왔다.

한 권, 한 권 들쳐보니 이제는 정말 문학사 속에서나 이름이 존재하고 실물은 좀체 보이지 않는 문학 작품집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해방공간에 나온 문예잡지 몇 권은 이름만 들어 보았을 뿐 단 한 번도 본적이 없는 것이었다. 특히 나에게 가벼운 흥분마저 불러일으킨 것은 수필가 및 문학평론가로 활동하다 월북한 인천 출신의 김동석金東錫이 주관했던 《주간週刊 상아탑象牙塔》이었다. ‘상아탑’은 1945년 12월 10일 창간되어 1946년 6월 25일까지 전부 7호가 발간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날 내 앞에 나타난 것은 창간호와 2~3호, 5호 등 모두 4종이었다.

   김동석은 1913년 9월 25일 경기도 부천군 다주면 장의리 403번지에서 태어났다. 이 곳은 현재 인천 숭의로타리 부근으로, 당시는 경기도 부천에 속했는데 1936년 부제가 바뀌면서 인천에 편입됐다. 김동석은 1921년 3월 가족과 함께 인천부 외리 75번지(현재 배다리 사거리 부근)로 이사해 이듬해인 1922년 4월 인천공립보통학교(현재 창영초등학교)에 입학한다. 보통학교 졸업 후 인천상업학교(현재 인천고등학교)에 입학했다가 1930년 1월 시위를 주도, 퇴학을 당하자 1932년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로 편입한다.

그 후 김동석은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학교) 법문학부에 입학, 1938년 3월 제10회로 문학과를 졸업한다. 당시 경성제대 졸업자 명부를 보면 문학과 18명 중에는 김동석 외 국문학자 김사엽金思燁과 극작가 오영진吳泳鎭, 수필가 배호裵澔, 영문학자 방용구龐溶九가 함께 공부를 한 것으로 나타난다. 또 법학과에는 정치인 정운갑鄭雲甲, 철학과에는 철학자 최재희崔載喜, 사학과에는 박문서관 주인인 출판인 노성석盧聖錫이 포함돼 있다.

문학과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김동석은 경성제대 졸업 후 모교인 중앙고등보통학교 영어교사를 거쳐서 광복이 될 때까지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 전임강사로 재직한다. 그리고 광복 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 문학평론가로 활동하면서 김동리 등 민족주의 문학가들과 순수-참여 논쟁을 벌여 문단의 주목을 받는다.

1947년 11월 ‘신천지’에 발표된 김동석의 ‘순수純粹의 정체正體-김동리론金東里論’은 당시 문단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이에 맞서 김동리가 1948년 1월 《신천지》에 ‘생활生活과 문학文學의 핵심核心-김동석 군의 본질本質에 대하여’를 발표함으로써 촉발된 ‘순수와 참여’ 논쟁은 70년이 지난 지금도 문단에 널리 알려질 정도로 한국논쟁사의 일대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하지만 김동석은 1950년 가족들과 함께 월북함으로써 우리 문단에서는 홀연히 자취를 감추고 만다. 그 후 1951년 12월 판문점에서 열린 휴전회담을 취재하던 언론인 이혜복이 중앙고보와 보성전문학교 스승인 김동석을 만난 것이 김동석에 대한 마지막 기록이다. 1964년 8월 월간 《세대》 15호에 실린 이혜복의 기록을 보면 김동석은 왼쪽 가슴에 ‘공작원’이라는 리본을 달고 있었는데, 이는 북측이 김동석을 영어통역원으로 참석시킨 것인데 그 후 그의 행적은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월간 《세대》에는 김동석과 이혜복이 함께 찍은 사진도 한 장 실려 있는데 이것이 김동석에 대한 마지막 모습이다.



2) 첫 수필집 『해변의 시』 발간
   김동석은 김동리와의 논쟁을 통해 좌익 평론가로 널리 알려졌다. 물론 이전에 주간지인 《상아탑》을 발간하면서 많은 문인들과 교류함으로써 이미 문단에서는 그 이름이 많이 알려졌지만, 오늘날까지도 김동석을 기억하는 것은 바로 순수와 참여 논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김동석의 저서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역시 평론집인 『예술藝術과 생활生活』(1947.6.10. 박문출판사)과 『뿌르조아의 인간상人間像』(1949.2.5. 탐구당서점)이다. 그런데 1980년대 월북작가들의 작품이 해금되면서 김동석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또 작품집도 새롭게 발간되기 시작했다. 특히 평론가로만 알려진 그에게 평론집 외 시집과 수필집은 물론 잡지까지 다양하게 발간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또하나 수필가라는 타이틀이 붙게 되었다.

평론집 외 김동석은 시집 『길』(1947년 정음사)과 수필집 『해변海邊의 시詩』 그리고 3인 수필집 『토끼와 시계時計와 회심곡回心曲』 등을 발간한다. 이 중 해방공간에 나온 명수필집 중 하나인 『해변의 시』는 최근 모출판사에서 문고본에 포함시켜 재출간 하면서 인기를 끌고 있는데 이 책에 수록된 수필을 보면 곳곳에 인천의 옛 풍경들이 묻어나고 있다. 1940년 결혼, 경동 145번지에 신혼집을 마련해 살다가 1942년 인천을 떠날 때까지 20여 년을 싸리재 인근에서 살아온 탓인지 김동석의 수필에는 싸리재와 월미도 등 인천에 대한 기억이 여러 군데 나온다.

   “내가 살던 거리에는 왜 그리 시계포時計鋪가 많았든지 서너 집 걸러선 시계포였는데 그 중에 제일 작은 시계를 진열陳列한 가게가 ‘천시당天時堂’이었다. 나는 보통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천시당 앞을 지날 때마다 이 ‘일금백원야一金百圓也’라는 정가표正價票가 달린 시계에다 눈독을 들여 놨었지만 부친을 암만 졸라야 막무가내였다. 지금도 그 시계는 응당 그 진열창陳列窓 속에 있거니….” (수필 「시계」)

“애관愛館에서 본 ‘애국愛國의 나팔喇叭’이라는 활동사진活動寫眞에 나오는 토끼는 나에게 길이길이 잊히지 않는 깊은 인상印象을 주었다. 시방 돌아보면 애국愛國의 나팔喇叭은 제1차대전第一次大戰에서 취재取才한 영화映畵 같은데 불란서佛蘭西 어느 조그만 마을에서 피난避難하느라고 야단법석인 장면場面이 있었다. 그 틈사귀에서 어린 소녀少女 하나가 토끼 한 마리 두 귀를 쥐고 서서 울고 있는 정경情景이 내 어린 가슴에 어찌나 귀엽고 가엽게스리 파고 들었든지” (수필 「토끼」)

또 “첫 여름 한나절 햇빛을 받고 월미도月尾島 조탕潮湯은 꼬호의 그림인 양 명암明暗이 선명鮮明했다. 이 풍경風景을 배경背景으로 하고 소복素服한 여인女人과 감색紺色 양복洋服에 노타이 샤쓰를 입은 젊은이가 금빛 모래사장에다 나란히 발자국을 찍으면서 걸어간다. 바다와 하늘은 한 빛으로 파아랗고…”로 시작되는 「해변의 시」나 “시방 우리는 월미도月尾島 다리를 걸어가고 있다. 서西에서 북北으로 길게 금빛 구름이 걸려 있는 것이 꼭 황금黃金다리 같다. - (중략) - 석양夕陽이 막 떨어진 자리는 시뻘겋게 불탔다. 간조干潮였다. 그래도 고랑에는 물이 남아 있었다”는 ‘낙조落照’에서는 월미도에 대한 추억이 묻어난다.

김동석의 첫 수필집 『해변의 시』는 1946년4월 박문출판사에서 초판이 나왔다. 46판, 128면으로 된 이 수필집에는 「꽃」, 「나의 돈피화豚皮靴」, 「고양이」, 「해변의 시」 등 4부로 나눠 총 25편의 작품이 실려 있다. 그리고 후에 농원 그림으로 유명한 서양화가 이대원李大源이 한 장정裝幀은 발이 굵은 마포지에 저자와 제목 등을 인쇄한 별지를 붙였다. 별지는 두 줄로 된 붉은색 직사각형을 그리고 그 안에 첫 행에는 ‘수필집隨筆集’, 둘째 행에는 붉은색으로 ‘해변海邊의 시詩’, 셋째 행에는 ‘김동석 저金東錫 著’라고 인쇄된 특이한 것이었다.

   이 초판은 현재 대부분 마포지가 떨어져 나가 처음 원형을 그대로 유지한 책은 거의 찾아보기가 어렵다. 그러나 1949년 2월 10일에 나온 재판은 57판으로, 초판보다는 판형이 커진데다 하드커버로 된 표지에 그린 게와 소라, 조가비, 고둥 등이 붓글씨로 된 제호와 잘 어울리는 아주 잘 만든 미본이다. 책 뒤에 실려 있는 ‘해변의 시를 내놓으며’라는 저자의 글은 초판과 재판 모두 동일하다.

‘해변의 시를 내놓으며’에는 김동석의 수필에 대한 인식이 잘 드러나 있는데, 이 글에서 김동석은 “수필은 과거를 여실히 드러내는 것으로,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장르가 바로 수필”이라고 밝힌다.

   “수필隨筆은 생활生活과 예술藝術의 샛길이다. 시詩도 아니요 소설小說도 아닌 수필隨筆-이것이 소시민小市民인 나에게 가장 알맞는 문학의 장르였다. 이를테면 어버이 덕德에 배부르게 밥 먹고 뜻뜻히 옷 입고 대학을 마치고 또 5년五年 동안이나 대학원에서 책을 읽고 벗과 차茶를 마실 수 있었다는 것은 조선朝鮮같은 현실現實에서는 보기 드문 행복幸福이었다. 그러나 나의 예술藝術을 위해선 불행不幸했다. 이러한 산보적散步的인 생활生活에서 나오는 것은 수필隨筆이 고작이다. 때로 시詩도 썼지만 그 역亦 희미한 것이었다. 하지만 자기自己를 송두리째 드러내는 것이 예술藝術이라면 이 수필집隨筆集은 나의 시집詩集 『길』과 더불어 나의 과거過去를 여실如實히 말하고 있다. 뒤집어 말하면 지난날의 내 미천을 털어 놓고 보면 요것 밖에 없는 것이다.” (‘해변의 시를 내놓으며’ 중)



3) 3인 수필집 『토끼와 시계와 회심곡』
김동석은 『해변의 시』를 펴내고 6개월 후인 1946년 10월 20일, 경성제국대학 문학부 동창생인 배호裵澔, 시인 김철수金哲洙와 함께 3인 수필집 『토끼와 시계時計와 회심곡回心曲』을 발간한다.
서울출판사에서 나온 이 수필집은 46판, 146면으로 서양화가 조병덕趙炳悳이 장정을 했으며, 모두 27편의 작품이 실려 있다. 김철수가 「회심곡」, 「진달래」, 「홍수洪水와 닭」, 「수박과 여인女人」, 「꿈」, 「운명運命」, 「목노ㅅ집」, 「지도地圖」, 「검둥의 서름」,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과 나와는」 등 10편. 김동석이 「창窓」, 「어떤 이발사理髮師」, 「토끼」, 「뚫어진 모자帽子」, 「조그만 반역자叛逆者」, 「기차汽車속에서」, 「나의 경제학經濟學」, 「칙잠자리」, 「벌과 베룩과 전쟁戰爭」 등 9편. 배호가 「도회都會」, 「시계時計」, 「유리’ ‘빠진 이」, 「담배」, 「셋째 딸」, 「구두의 천문학天文學」, 「동경憧憬의 고도古都」 등 8편을 수록하고 있다. 그리고 김철수의 머리말과 배호의 발跋이 붙어 있다.

김철수의 머리말을 보면 당시 문인들의 수필관을 엿볼 수 있다.
   “수필이란 혹은 생활의 잉여剩餘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조선에 수필이 적었음은 그만큼 우리들의 생활이 부족했던 탓이다. 풍토風土가 지닌 환경이나 새로운 계절의 유행에서 우리는 무엇을 마시고 무엇을 생각해야 하느냐. 달팽이의 철학이 현대의 식량이 될 수 없고 원자탄의 성능만이 또한 현대를 대표할 수는 없다. 전쟁은 과학자나 상인의 창의創意에 맡기자. 그러고도 우리에겐 생활이 있을수 있고, 생활이 있는 곳에 반드시 그 생활의 잉여가 있다. 물론 생활의 잉여란 하나 상식의 세계요. 그것이 곧 우리가 말하는 수필이요 또한 그 수필이란 사람된 누구나가 다 가질 수 있고 가지고 있다.”

   그리고 배호의 발문을 보면 3인 수필집이 만들어지게 된 배경이 나온다. 김동석과 배호는 십 수 년래 교우가 있지만 김철수와 배호는 김동석이 주관한 주간 잡지 《상아탑》에 글을 발표함으로써 알게 된 인연으로, 어느 날 세 사람이 한자리에 있다가 누군가의 제안에 따라 우연히 3인 수필집을 만들게 됐다는 것이다. 이들은 “과거에 수필이 문단에서 푸대접을 받은 감이 없지 않으니, 이에 새로운 생명을 고취해 보자는 공통된 생각”을 하게 됐고 “누군가 3인 수필집을 내보자고 수필적 제언을 함에 따라 서로 합의가 되어 수필집을 내게 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세 사람은 모두 8.15 이전부터 수필을 써 왔지만 이 책에 실린 수필은 저마다 다른 성격을 띠고 있다. 먼저 김동석의 수필은 8.15 이전 소위 지하운동으로 써 둔 수필이었고 김철수의 수필은 생활의 여유에서 우러나온 것이었으며, 또 배호의 수필은 순전히 편집자의 요구에 의한 소산所産으로 두 사람의 여유보다 오히려 곤핍困乏에서 나온 것 같아 따분하고 실증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4) 주간 《상아탑》의 창간
   《상아탑象牙塔》은 해방공간에 쏟아져 나온 여러 문예잡지의 하나이다. 잡지라고 했지만 외형상은 팜플렛이나 전단지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릴 것 같다. 광복된 해인 1945년 12월 10일 나온 창간호는 46배판, 6면으로 되어 있으며 이후로도 작게는 4면, 많아야 16면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먼저 창간호를 보면 1면에는 창간사격인 ‘문화인文化人에게-상아탑을 내며’가 있고, 2면에는 김동석의 ‘예술藝術과 생활生活-이태준李泰俊의 문장文章’이, 3면에는 오장환의 시 「병病든 서울」이, 4면에는 박두진의 시 「장미꽃 꽂으시고-혁명가革命家를 맞이하는 시」가, 그리고 5~6면에는 배호의 「노신魯迅의 일생一生」으로 되어 있다.

이처럼 《상아탑》은 외형은 보잘 것 없지만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어떤 문예지 못지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상아탑》에 실린 몇 편의 시는 한국문학사에 기록될 만한 명작이다.

   먼저 창간호에 실린 오장환의 「병든 서울」은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이며, 또 같은 이름의 시집 제목이기도 하다. 청록파 신인인 조지훈의 「완화삼琓花衫」과 박목월의 「나그네」는 화답시로, 1940년에 씌여졌으나 발표되기는 《상아탑》 제5호가 처음이다. 또 조지훈의 대표작 중 하나인 「낙화落花」 역시 5호에 처음 실려 있다.

그리고 《상아탑》 제6호에는 박두진의 대표작이며 첫 시집의 표제작이기도 한 「해」가 실려 있으며, 박목월의 대표작인 「윤사월閏四月」 역시 여기에 실려 있다. 또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은 ‘디아스포라’ 김학철金學鐵의 단편소설 「상흔傷痕」도 이 6호에 실려 있다.

마지막 호인 《상아탑》 제7호는 《삼사문학三四文學》을 주도하다 광복 직전인 1945 년 6월4일(음력 4월24일) 사망한 신백수申百秀 특집호로 꾸며졌다. 이처럼 《상아탑》은 평론가인 김동석이 주관했지만 평론보다는 시나 소설에서 더 많은 수작이 수록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하지만 《상아탑》은 한 호라고 해봐야 몇 장에 불과하고 그것도 겨우 7호를 내고 폐간되었으니 현재 남아있는 원본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희귀본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비록 일부이기는 하지만 그 희귀본이 내 눈앞에 나타났으니 처음 받아 볼 때의 그 감격은 지금도 내 손 끝에 남아 있는 듯하다.

특히 실물로 나타난 4개호를 영인본과 확인한 결과 영인본에 일부 잘못된 부분도 찾아냈다. 잘못된 부분은 창간호가 10면이 아닌 6면이라는 것이다. 이는 영인본을 제작할 때 제5호에 들어 가야할 7~10면을 창간호의 6면 뒤에 잘못 붙인 때문이다. 《상아탑》 창간호부터 폐간호까지 수록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주간 《상아탑》’ 수록 내용>
창간호, 1945년 12월 10일, 정가 50전,  총 6면.
1면 (칼럼) 文化人에게-象牙塔을 내며,  2면 藝術과 生活-李泰俊의 文章, 金東錫,  3면 (詩) 병든 서울, 吳章煥,  4면 (詩) 장미꽃 꽂으시고-革命家를 마지하는 시, 朴斗鎭,  5면 魯迅의 一生-文學과 行動,   裵澔역,  6면 꿈틀거리는 自由-Smouldering Freedom을 읽고, 冬石역.

제2호, 1945년 12월 17일, 정가 50전, 총 4면.
1면 (칼럼) 學園의 自由, 2면 藝術과 生活(承前)-李泰俊의 文章, 金東錫, 3면 藝術家와 革命家, 郭沫若, 裵澔역, 4면 (詩) 鍾소리, 吳章煥,  演劇과 革命-‘暴風의 거리’를 보고, 咸世德.

제3호, 1946년 1월 14일, 정가 50전, 총 4면.
1면 (칼럼) 藝術과 科學,  2~3면 (詩) 비가 내린다, 趙芝薰,  林和論- 그의 詩를 中心으로, 金東錫,  4면 文字와 革命- 漢字廢止論, 裵澔역,  社告- 投稿歡迎, 顯微鏡.

제4호, 1946년 1월 30일, 정가 50전, 총 4면.
1면 象牙塔,  2면 林和論(承前)-그의 詩를 中心으로, 金東錫, 3면 (詩) 陣痛, 金章漢, (隨筆) 빠진이, 裵澔, 4면 (詩) 눈 내리는 거리에-學兵의 靈柩를 따라가며, 金哲洙,  사고- 5월 초부터 월간으로 발간.

제5호, 1946년 4월 1일, 정가 4원, 총 16면.
1면 戰爭과 平和,  2~3면 詩를 위한 詩-鄭芝溶論, 金東錫, 4~5면 性格의 悲劇-D·H 로렌스에 관하여, 金舜梧, 6면 (詩) 따사한 나라여, 朴斗鎭, 7~8면 兒童演劇과 敎育, 金東杓, 9~10면 (隨筆) 回心曲, 金哲洙, (隨筆) 어떤 理髮師, 石水洞人, 11면 (詩) 玩花杉-木月에게 주는 詩, 趙芝薰, (詩) 落花, 趙芝薰, (詩) 나그네-술익는 강마을의 저녁노을이여(芝薰) 朴木月, (詩) 三月, 朴木月, 12면 出版雜話(1) 盧聖錫,  13~16면 故鄕, 魯迅 작, 裵澔 역.

제6호, 1946년 5월 10일, 정가 5원, 총 16면.
1면 民族의 良心, 2~3면 小市民의 文學-兪鎭午論, 金東錫, 4면 性格의 悲劇(2)-D·H 로렌스에 관하여, 金舜梧, 5면 (詩) 해, 朴斗鎭, 6면 詩의 秘密, 趙芝薰, 7면 (詩) 實驗, 꿈, 皮千得, 8면 復活에 對하야-一種의 自作詩解說, 徐廷柱, 9면 (詩) 봄비, 閏四月, 朴木月, 10면 쓰지 못한 運命, 金哲洙, 11면 (詩) 아네모네, 全斗南, 12면 演奏家의 誠實-私信的인 安柄昭론, 朴容九, 13~16면 (短篇小說) 傷痕, 金學鐵.

제7호, 1946년 6월 25일, 정가 5원, 총 16면.
1면 愛國心,  2~4면 基督의 精神, 金東錫, 5면 (詩) 종달이, 全斗南,  6~16면 (申百秀 特輯) 歷, 故 申百秀작 肖像(柳錫淵작), 7면 申百秀 略歷,  12면 歷의來歷, 李時雨, 14~15면 申百秀와 三四文學과 나, 鄭玄雄.









**약력: 시인. 인천문협 회원, 근대서지학회 회원. 법률신문사 이사 겸 총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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