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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호/산문/천선자/진도 문학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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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
천선자
진도 문학기행
5월 28일 새벽에 일어나 인스턴트커피 한 잔과 샌드위치로 아침을 먹는다. 속이 허전할 땐 잡곡밥에 김치, 고추장, 된장에 나물을 무치고 청국장에 풋고추를 송송 썰어 넣고 부글부글 끓여 주시던 어머니의 밥상이 생각나지만, 이젠 바쁘다는 핑계로 인스턴트 음식으로 아침을 대신한다.
모처럼의 여행, 설레는 마음으로 명품 숄더백을 메고 여행가방을 끌고 출근길 차가 막힐 것 같아 서둘러 나간다. 너무 일찍 도착해서 강우식 선생님댁 지하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차 안에서 잠을 자다가 오전 8시 상가 앞 약속장소로 간다.
일행을 기다리는 동안 자판기커피를 뽑아서 먹으며 주위를 둘러본다. 아파트 빌딩숲 속에 있는 단독주택의 담을 넘는 담쟁이들의 행렬, 살구꽃, 무궁화꽃이 목을 길게 빼고 나를 구경한다.
시간이 되자 한 사람씩 나타나 인사를 주고받고 음료수와 간단한 먹거리를 받아들고 차를 타는데, 난 먹던 커피를 들고 차를 탄다. 1호차에는 강우식 선생님, 박하리, 정치산, 외현, 정령 시인과 나, 그리고 박민예 씨가 같이 타고 2호차에는 장종권 선생님과 수원문인협회 박병두 회장님, 정미소, 권월자, 정무현, 정남석 시인 그리고 전영랑, 신경숙 씨가 마지막으로 타고 약속시간보다 좀 늦게 출발한다.
오후 2시 진도에 도착해 향토문화회관(토요민속여행)을 관람하기로 했지만, 주말이라 차도 밀리고 출발이 늦어지는 바람에 공연 중에 들어가면서 난 또 인스턴트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시고 컵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살금살금 앞 사람을 따라 들어간다.
진도북춤, 진도씻김굿, 진도만가 등을 관람하고 창과 연극을 혼합한 심청전을 관람한다. 심청전 중 뺑덕어멈이 심봉사와 결혼해 살면서 바람을 피우는 대목을 남녀주인공이 걸쭉한 전라도 방언으로 재미있고 신명나게 하여 도중에 웃음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단순히 남도의 노래와 춤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오랜만에 우리의 얼, 우리의 문화 속에 젖어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나고 할머니가 생각나고 어릴 때 살던 고향집과 동무들이 생각나서 아련한 기억 속 옛집을 찾는다.
사립문을 열고 들어서면 댓돌 위에서 버선발로 나와 아이구, 내 새끼,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내 새끼, 왔는가, 하시며 반겨주시던 할머니가 살아오신 것 같고 광목으로 만든 한복을 입고 머리에 흰 수건을 쓴 주인공은 우리 어머니 모습 같아서 한참 동안 옛길을 더듬는다.
예술회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공연장으로 진돗개쇼를 보러 간다. 우리 일행이 도착했을 땐 이미 진돗개쇼가 끝나고 몇 시간 뒤에 다시 열린다고 한다. 순수 토종인 진돗개의 멋진 쇼를 볼 수 없는 것은 아쉬움으로 남지만 할 수 없이 발길을 돌린다.
늦은 점심과 이른 저녁을 먹고 난 다음 세방낙조를 구경하기로 결정하고 먼저 대성수산시장으로 간다. 일층에 있는 수산시장에서 회를 떠 이층에 있는 식당으로 올라간다. 민속주인 홍주와 노란색 울금막걸리를 한 사발씩 부어 놓고 두 선생님께서 건배사를 하고 우리는 다 같이 건배한다.
배가 고프던 참에 허겁지겁 회와 매운탕을 먹으며 덕담도 한마디씩 섞어 맛나게 먹고 다음 목적지인 지산면 가학리에 있는 낙조를 보러 간다. 기상청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멋진 낙조를 볼 수 있는 곳이 이 곳이라고 추천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일몰 장소는 많지만, 진도의 세방낙조는 그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일몰을 볼 수 있는 장소이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섬과 섬 사이, 노을의 향연이 절정으로 치닫고 솟대 사이로 비치는 붉은 빛, 그 빛을 바라보는 사람도 금세 붉게 물들어간다.
낙조가 떨어지는 것을 끝까지 보고도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바다에 빠진 눈을 찾고 있다. 이곳은 1597년(선조30) 음력 9월 16(10월 25일) 정유재란 때 이순신장군이 지휘하는 수군 13척이 일본 수군 130여 척을 물리친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명량해전, 명량대첩이라 불리기도 한다. 강하게 일어나는 물살은 아직도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전 중인 것 같고 선조들의 기상을 보는 것 같아 뿌듯하다.
붉은 해를 한 입 베어 먹으며 달려온 땅거미 사이로 우리 일행은 단체사진을 찍고, 소나무가 서 있는 계단에 앉아 낙조를 날린다. 강우식 선생님의 노란울금막걸리로 붉어진 얼굴이 밤의 실루엣을 걸치고, 어둠과 빛의 교차점에 선 우리 일행도 밤의 실루엣을 걸치며 하나가 된다.
우리 일행은 낙조가 완전히 진 뒤에도 떠나지 못하고 바다를 바라보다가 사천리숙소 운림예원으로 간다. 2호차는 먼저 숙소로 가고 내가 탄 1호차는 진도 시내에 들러 간재미회무침을 사고 케이크를 사 늦은 밤에 숙소에 도착한다.
마당에 들어서니 소나무 향이 솔솔 사람의 발길을 끌어당긴다. 내 몸 일부분이 오래 전부터 한옥의 일부처럼 느껴져 너나할 것 없이 흙과 나무가 된다. 진도군에서 운영하는 한옥마을 안의 한옥인데, 숙소로도 쓸 수 있다.
간담회를 열린다. 장종권 선생님이 막비회원 외의 초대손님에게 감사 인사를 드리고 다음날이 생일인 정무현 시인의 생일 축하 케이크를 나누어 먹으며 정담을 나눈다.
강우식 선생님은 그 동안 치과치료 때문에 술을 드시지 않으셨는데, 기분이 좋은 오늘을 그냥 보낼 수 없다고 하시며 잔을 드신다. 선생님께서 전에 부르시는 노래가 딱 한 곡이었는데, 준비를 하셨는지 바로 서너 곡을 하시고 해당화를 같이 부르신다.
처 사랑 이야기를 하다가 강우식 선생님에게 첫사랑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조르니까 거나하게 취하셔서 젊은 날의 러브스토리 한 자락을 들려주신다. 지독하게 선생님을 사랑했던 여인이 있었고, 그녀는 강우식 선생님의 먼 발치에서 끝까지 바라보셨다고 하신다. 얼마나 사랑했으면 저승에 가더라도 천년만년 기다린다고 했을까.
정남석 시인이 농담을 건넨다. ‘선생님 오래 사셔야겠어요, 저승까지 따라온다고 하니 정말 무섭겠어요.’ 옆에서도 한마디씩 거든다, ‘선생님 오래오래 사셔요.’(하하하, 호호호) 웃음소리가 문지방을 넘는다.
옆에서 감기로 고생하다가 주무시던 정미소 회장님이 갑자기 일어나 배를 쥐고 웃는다. 나도 덩달아 웃으며 옆 사람이 일어날까봐 입을 틀어막으며 킥킥댄다. 새벽까지 옆방에서 들리는 말소리가 도란도란 문지방을 넘고 댓돌을 넘고 산자락을 넘어 아침을 부른다. 어떻게 보면 이 여인의 한결 같은 사랑이 집착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다른 쪽에서 보면 지고지순한 사랑이고 너무나도 곧아서 다른 길을 보지 않은 것이다.
이튿날에는 전통 남화의 성지 운림산방으로 갔다. 상록수림 사이로 마치 한 폭의 동양화처럼 앉아있는 운림산방, 전통 남화의 성지라 할 수 있는 이곳은 조선조 남화의 대가인 소치 허련(1808-1893)이 말년에 거쳐하던 화실이며 그의 당호로 일명 ‘운림각’ 이라고도 한다. 여러 채의 초가와 사랑채, 화실, 소치기념관 등이 있으며 남종문인화의 본산이다.
소치는 비록 낙도에서 태어났으나 천부적인 재질과 강한 의지로 시, 서, 화에 능하여 40세에 현종을 뵐 수 있었다. 그리고 현종이 쓰는 벼루에 먹을 찍어 그림을 그렸는가 하면 홍선대원군, 민영익, 정하연 등을 비롯하여 권문세가들과 어울리면서 시를 짓고 글을 쓰며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1856년 추사가 세상을 떠나자 고향으로 돌아와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첨찰산 아래 쌍계사 남쪽에 자리를 잡아 집을 짓고 화실을 만들어 여생을 보냈다.
소치의 아들 미산 허형, 미산의 아들 남농 허건, 손자 임전 허문 등 4대에 으르고 소치의 방계인 의제 허백련에 이르기까지 그의 화풍에 뿌리를 둔 수많은 가지들은 운림산방을 정신적 고향으로 삼고 있다. 많은 제자들을 배출시켜 전국 각지에서 열정적인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미술관을 관람한다. 운림산방 내의 전시관에는 허련 가문의 남종화를 비롯한 424점의 소장품이 전시되어 있고 전시관 입구에 들어서면 허련 가문의 가계부가 붙어있다.
전시관에는 허련의 작품을 비롯해 그의 손자인 허건의 작품까지 남화를 대표하고 흐름을 살필 수 있는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허련 가문의 화가들의 작품을 인물별로 잘 정리해두어 남화의 흐름을 한눈에 알아 볼 수 있는 공간이다.
돌담으로 둘러진 안쪽에는 소치의 살림집이 있고 그 전면 우측에 허위가 머물던 사랑채도 보인다. 돌담을 대각선으로 우리 일행도 사진을 찍는다. 장종권 선생님은 카메라를 들고 들어오는 사람마다 앉아보라고 하시면서 사진을 찍는다.
운치 있고 산새 좋은 풍경에 빠져서 나도 모르게 선조들이 걸어간 길을 따라 생각에 잠긴다. 푸른 잔디밭에 핀 시계꽃, 가만히 들여다보니 거꾸로 도는 시계의 방향, 옛날 사랑방 아씨가 되어 진달래빛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구름다리 위에서 도련님을 만나 네잎클로버를 찾는 상상을 한다.
눈은 연못 속 잉어 두 마리가 헤엄을 치고 폭죽처럼 퍼지는 물방울에 가 있다. 연잎 위에 있던 개구리들이 물 속으로 첨벙 뛰어드는 소리에 깜짝 놀라 하늘을 보니, 흘러가던 흰구름도 놀라 파란하늘을 하얗게 물들인다.
다음일정은 바로 옆에 위치한 쌍계사이다. 입구에서 단체사진을 찍고 덕담 한마디씩 주고받으며 올라간다. 쌍계사는 신라시대 도선국사가 창건한 후 수 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른다. 절 양편에 하천이 흐른다 하여 쌍계사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사찰의 뒤편에는 천연기념물 제107호인 상록수림이 울창하게 펼쳐져 있다. 사찰 남쪽으로는 조선말 남종문인화의 대가였던 소치 허련 선생이 기거하던 운림산방이 연접해 있고 북쪽으로는 진도의 명산인 첨찰산이 둘러싸고 있다. 현재의 절은 숙종 23년(1697)에 건립 되었는데 현존하는 진도 사찰 중 가장 규모가 크다. 1592년 임진왜란 시 서산대사와 사명당이 승병을 일으켜 왜병과 싸운 것은 너무나도 유명하며, 현재 유형문화제 제121호로 지정되어 있다.
쌍계사로 올라가는 길은 차가 다닐 정도로 넓은 길이고 양 옆으로 울창한 수림이 그늘을 만들어 산길을 오르는 발걸음이 가볍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가며 하는 이야기 소리가 살랑살랑 바람을 일으키며 계곡물이 되어 흐르고, 흐르는 물소리는 다시 가슴을 촉촉이 적신다.
우리의 일행이 사찰에 도착하니 복원사업이 한참 진행 중이다. 대웅전은 천막으로 가리고 분주하게 공사가 진행 중이고, 부속 건물과 주위 경관만 보며 아쉬움을 달래고 내려온다.
내려오는 길에 차와 천연물감 들인 옷을 파는 찻집에서 강우식 선생님, 장종권 선생님과 함께 보이차를 한 잔씩 마신다. 마음에 남은 탁한 소리는 갯가에 내려놓고 청아한 물소리, 새소리를 담아 쌍계사를 뒤로하고 내려온다.
이튿날 성지를 둘러보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팽목항으로 간다. 분향소 위에 놓인 과자, 과일, 초콜릿, 노트, 장난감, 등등 한참 바라보다가 노란 리본이 바람에 나부끼는 방파제를 걸으며 먼 바다만 쳐다본다. 타일 위에 그려진 추모의 그림과 글을 보며 눈시울이 붉어진다. 저마다 말을 더듬거리며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지 못하고 발등만 보며 걷는다.
차창 밖에는 활짝 핀 노란금계국이 옹기종기 모여 웃는다. 아무리 빨리 달려도 도로 옆으로 심어 놓은 노란금계국이 자꾸 따라온다. 노란 병아리들, 정령 시인의 말에 모두 화들짝 놀라 차창 밖을 바라본다. 지금부터 노란이란 단어를 쓰는 사람은 일 만원의 벌금을 내는 내기를 해요. 혼자서 웃고 떠들고 분위기를 바꿔보려는 모습에 모두 애써 웃는다. 하지만, 얼마가지 않아서 너도나도 노란 병아리들, 진도를 떠나도 잊지 않을 거야, 노란 병아리들, 노란 병아리들, 노란, 노란, 노란, 모두 벌금형을 당한다.
진도에서 마지막으로 들린 곳은 한정식 집인데, 손님이 너무 많아 정원에서 기다리며 강우식 선생님과 장종권 선생님, 몇몇 사람은 울금막걸리 한 병으로 지루한 시간을 달래신다. 수원문인협회 박병두회장님과 권월자 시인, 그리고 내가 같이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또 몇몇은 감꽃을 주워 목걸이를 만들기도 하고 꽃과 나무를 보며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가 각종 생선과 나물 등 푸짐한 남도 밥상을 받고 너도나도 좋아라 한다.
서울로 출발한다. 이번 진도 문학기행에서 얻은 수확은 우리의 얼, 우리전통문화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고 반성하는 계기다 됐다는 것이다.
운전을 해 주신 장종권 선생님, 수원문인협회 박병두 회장님, 박하리 시인, 정남석 시인, 정령 시인께 감사드리고, 모든 일을 도맡아 추진해준 이외현 시인, 그리고 그의 친구 박민예 씨에게 감사드린다. 이 외 참가자들은 정치산, 정무현, 권월자, 전영랑, 신경숙 동인들이다.
**약력:2010년《리토피아》로 등단. 시집 『도시의 원숭이』. 막비시동인. 리토피아문학상.전국계간지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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