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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호/신작특선/김영미/귀가 가렵다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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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특선
김영미
귀가 가렵다
바람이 길을 내려는지
바람 부는 날엔 귀가 더욱 가렵다
묵은 침묵을 깨고 달팽이관이 움직인다
고막 속에서 맴도는
모르스부호의 타전, 게슈타포의 걸음, 심장이 떨리는 소리
바람을 타고 오는 고주파의 변형엔
들을 수 없는 소리가 너무 많다
경직과 전율 사이를 옮겨 다니는
나의 위기와 의지 사이에서
까닭 없이 흔들거리는 가벼운 중심은
합리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생활과 격리된 적분과 미적분을 나누는 통계는
이해할 수 없는 그들만의 이야기였고
오래된 관습으로 마모되어 설레지 않는 감각 중에
여전히 뜨거움으로 해독할 수 없었던 난제는
세상을 향한 뜬금없는 두근거림
돌아눕지 못하는 한밤의 신들린 고통
나와 다른 것들에 관한 두려움의 보고서
마찰이 마찰과 부대끼는 소리
상처의 이름 뒤에 붙은 단절에 대한 수많은 견해
맞물리지 못하는 생각들의 부정교합
듣고 싶지 않았던 말들의 반란
귀가 가렵다, 바람의 귀가 아프다
달라서 낯설었던 너의 이야기가
귓속을 후벼 파는 밤엔 깨질 것 같은
줄탁에 관한 설레임의 보고서를 쓴다
그러므로 말하지 않아도
사는 동안 보탬 한 번 돼주지 않던
인생의 멱살을 잡고 흔들다 제대로 얻어맞고
대리기사를 부르는 늦은 밤
젊은 대리기사의 한숨소리가 민망하고 낯설다
낮에 일이 있어 나오지 말까하다
대목이라는 사장의 말에 할 수 없이 나왔다고
같이 대리운전을 하다 슬그머니 그만 둔 대학동창 녀석이
스스로 세상과의 인연을 끊은 어제
친구를 위해 마지막으로 할 수 있었던 일은
세 번의 절이었다고
근데, 사는 게 뭡니까?
밤과 낮을 바꿔 살아도 달라지는 게 없다는
젊디젊은 하루살이가 밤을 지우며 새벽을 향해 달린다
하루 종일 눈치와 침묵으로 기약 없는 밤을 밝히고 있을
나의 하루살이가 가슴으로 날아든다
친구가 어제 아침까지 있었다던 장례식장을 지나자
손등으로 눈가를 쓱 훔치는 대리기사
구름이 새벽달을 지우고 바람이 차를 태워 달리고 침묵이 그와 나 사이를 가르고
고요만 긴 거리를 헤매다니다 아스라한 별빛이 되는 밤
말 한마디 못하고 고개 숙여
눈자위 붉힌 채 가녀린 어깨만 떨던
가슴 짠한 나의 별이 차창을 떠나지 않는다
말간 새벽 별빛이 흐리다
나무들의 울음
여름 깊은 밤, 나무들은 기억을 퍼올린다
바람과 같이 앓던 성장통
계절과 나눈 서툰 감정의 결
몸을 비틀어도 버릴 수 없었던 모진 인연
시간과 함께 수천 가지에 불어와
잎사귀를 흔들던 바람의 이야기들
귀를 기울여 모든 이야기를 다 듣는 것은 아니지만
보지 못한 이야기들을 상상처럼 부풀려 아프지 말기를
정오의 태양에 맹세한 푸르른 서약이 있다
그래도 갓난아기가 나오지도 않는
어미젖을 빨다 기력이 다해 죽었다는
세상일이 아닌 것 같은 이야기를 들은 날은
나무도 홀씨를 날려야했던 어미였기에
먹먹해지는 가슴을 기어코 터트리게 돼
울음을 멈출 수가 없는 것이다
홀로 견뎌야하는 어두운 숲의 밤보다
아기의 허기진 입술을 적실 수 없었던
어미의 마른 젖을 보았을 바람의,
젖은 눈을 채우던 공포가 가슴을 더 두들겼다
어느 누구도 간직하지 못한
원시의 통곡이 별빛을 품고 글썽일 때도
바람이 남기고 간 간곡한 진실이
세상의 모든 상처가 되지 않길
무성한 여름의 이름으로 기원하고
새벽이 오는 미세한 떨림 하나에도
나무들은 제 작은 가슴과 발끝으로 움켜쥔
서러운 세상의 낮은 이야기들을
별빛을 향해 실어 나르며
개울이 터지듯 옹이진 곡절을 토해내는 것이다
낮잠
한겨울 지하실의 차가운 바닥
군용 담요 위에 곡선으로 누운 여자
선 하나에 미간을 모으는 선뜻한 연필자국이
그녀의 몸에서 반듯한 모서리를 훔쳤다.
마른 숨소리로 가득한 스케치북을 향해
그녀의 눈이 그녀의 발끝이 그녀의 가슴이
숨겨진 바로크의 외설을 유혹한다.
설마 시간을 베끼고 있지는 않겠지.
내 가슴을 만져봐. 들려?
세습된 생각은 치워버려. 외설? 예술?
장님은 마음을 본다지. 느껴져?
당신이 밑바닥을 보여주기 전에는
나도 이해할 수 있는 것만 이해할 거야.
너무 뻔한 것이 우리들의 몫이라며 슬픈 일이니까.
죽을 수 없을 때 살아야하는 고통을 느껴봐.
욕망은 벽 쪽을 향하는 그림자처럼 한곳으로만 기울지.
내 마흔 아홉 개의 그림자를 가둘 수 있겠니.
너의 작은 스케치북 속에.
4B연필의 모든 것은 모노
수백 장을 그려도 가진 것은
수많은 검은 고독
겨울을 닮아가는 그림들의 잔해가
지하실에 맴돈다
피곤에 절은 자신의 몸을 껴입고
목탄처럼 가벼운 상상이 스케치북에 갇힐 때
지하에 떨어지는 짧은 겨울 햇살을
그녀의 몸이 받는다
트레싱페이퍼에 복사되는 문자처럼
투명해지는 갑골무늬들
삶이야 무엇이었든 간에 괜찮다
벌거벗은 몸에서 나른하게 퍼지는 코고는 소리
그녀는 아마 선사시대를 꿈꾸고 있을 것이다
눈 먼 시간들에게
왼쪽 두 방울, 오른쪽 두 방울
투명한 점안 액이 눈 안에서 핏물처럼 고이다 스며든다.
삼십 분 후에는 낯선 세상을 만날 수 있으니 조심하세요.
낮은 목소리로 그녀가 속삭였다. 조심하세요, 라고
색이 없는 빛이 들어왔다.
르누아르의 허물어진 늙은 인상들이 움직였다.
수잔 발라동의 눈은 한 곳에 머물렀으나
그녀의 깊은 동공은 늘
바람 속을 드나드는 불꽃처럼 흔들렸다.
그녀의 춤사위가 하얀 드레스 속에 파묻혔다.
음악소리는 멀어지고 사물들이 스쳐 지나가거나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우두커니 서 있다가
뒤돌아가거나 툭 치고 갔다.
이전에 알고 있었거나 알고 있다는 것은
모두 이전의 일
알아 볼 수 있는 것과 알았던 것은
눈이 빛으로 가득 채워지기 전의 기억들
눈부신 기억들은 쉽사리 부서져가고
빛은 모든 것을 삼키며 견고하게 자라났다.
사물들이 다 지워졌을 때
빛은 살아 움직였다 불꽃처럼 너울너울
눈물이 흘렀다 감각이 더욱 예민해져 있었다.
죽었다고 믿었던 것들이 소름처럼 살아났다.
어젯밤에 잃어버렸다고 믿었던 말도 생각났다.
사막 이전 낙타가 없던 벌판
그들의 무리 속으로 말은
사막의 푸른 별을 물고 북쪽으로 가고 있었다.
목숨보다 더한 것이 거기에 있음으로
그녀가 다가와 말했다 눈에 빛이 가득하군요
빛으로 눈을 다 채워버리다니 어리석군요.
하는 수 없어요 캄캄해지길 기다리든지
그녀가 별 하나를 눈 속에 넣었다.
말이 북쪽으로 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혀를 차며 조심하라는 말을 했으나
나는 이미 떠나고 있었다.
나의 말이 떠난 그 곳 북쪽으로
**약력:《제주작가》, 《 문장21》로 등단. 시집 『달과 별이 섞어 놓은 시간』,『물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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