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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호/중편연재/손용상/土舞원시의 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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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603회 작성일 17-01-05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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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연재

손용상





土舞원시의 춤




<새로운 연재를 시작하며>
이 글은 인도네시아 群島의 동쪽 끝인 ‘이라야 쟈야’ 섬이 그 무대다. 지도에 보면, 파푸아뉴기니아 서쪽 부분 약 절반의 땅으로 면적은 한반도의 약 2배에 이른다고 한다. 이 섬은 지금까지 천연의 밀림과 원시가 현존하는 미지의 땅으로, 50년대까지만 해도 ‘식인’의 관습이 남아 있었다는 미개지역이다. 고도 4천 미터 이상의 산악 지대가 산맥을 이루고 있으며, 남미 대륙의 아마존 지역에 버금가는 세계의 오지奧地중 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미개지역에서 지난 80년대 중반, 이 지역에서 ‘산판 사업’을 벌였던 한국의 한 기업이 있었다. 당시 이른바 우리 산업 역군들의 해외 진출이 피크를 이루던 시절, 열악한 환경과 조건에도 불구하고 우리 코리안들은 회사의 명령에 따라 군말 없이 이곳에 와 둥지를 틀었다. 따라서 이 소설은 당시 이곳에서 근무했던 한국인 직원들이 밀림을 누비며 현지에서 벌어졌던 실제 얘기들의 편린을 모은 것으로, 필자가 나름대로 새로이 만들고 다듬고 정리한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절반은 사실에 근거한 야담野談을 소설화한 것이고 나머지 절반은 창작이다. 생각 끝에 동일한 배경, 인물로 구성을 다시 하고 연결함으로써 오히려 장편보다는 5개 테마의 연작중편으로 구성하였다.

얘기를 요약하면 이렇다.
한국의 중견기업의 엘리트 중역인 김철민이 해외 현지법인 책임자로 발령받아 부임하는 첫날, 자카르타에서 ‘태극기’ 좋아하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외도를 한다. 그는 제 정신이 돌아오자 순간적으로 자신도 회사 주변에서 별수 없이 ‘똥 묻은 개’로 폄하될 것을 후회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하지만, 어쩌랴! 다시 마음을 추스르고 비행기를 3번이나 갈아타며 산판 현장으로 날아간다. 그는 비행기를 타고 내리며 자신이 점점 문명세계에서 멀어지는 현실을 피부로 느끼면서 현장에 도착했지만, 하필이면 바로 그 날 현장 직원 한 사람이 물에 빠져 죽는다.

그리고 이 헤프닝을 시작으로 주인공 철민이 이에 대처하는 과정과, 이에 따른 삶과 죽음에 대한 인간적인 고뇌, 기업과 가정, 열악한 밀림 현장에서 악전고투 하는 우리 코리안들의 오기와 객기客氣, 현장과 본사 인력간의 사고적思考的 괴리… 등등이 군살 없이 파헤쳐지고, 또한 숲속의 공창公娼 마을에서 우연히 알게 된, 그 옛날 혹시나 일제의 강제 위안부이었을지도 모르는 ‘우리 할머니 순順이’의 흔적을 찾아보려는 안타까움, 아울러 그야말로 우화寓話 같은 현지 게릴라들과의 ‘법’으로 말할 수 없는 원시와의 어울림 등등…으로 구성되어 원시와 문명의 틈바구니를 이어가는 투 트랙의 이야기가 적나라하게 펼쳐진다.

다만, 내용 중 일부는 과거 필자 본인이 썼던 다른 일부 소설에서 잠깐씩 ‘양념’처럼 소도구로 사용되었거나 또는 아예 단편으로 발표되었던 점이 있었음을 미리 밝혀둔다. 왜냐면 후일 혹 이 소설 내용 중 일부가 작가가 썼던 다른 소설과 혼동해서 ‘자기 표절’로 비난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부하건대, 이번의 중편소설 ‘토무土舞’는 과거에 그렇게 산발적으로 단편화 또는 소도구로 쓰여 진 것들과는 달리 새로운 시각과 각도로 주제를 연결시켜 약 550매의 연작 중편으로 다시 묶은 것이다. 지난 날 김성동 작가의 ‘목탁조木鐸鳥’라는 중편이 차후 ‘만다라’로 다시 태어나듯이, 본인도 그런 기분으로 이 소설을 마무리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끝으로 건강을 다치고 반편의 몸으로 지난 7년 동안 죽기 살기로 버티며, 그 동안 팽개쳐두었던 창고 속의 소재들을 다시금 일깨워 이번에 13권 째의 소설집을 위한 원고를 탈고하고 나니 이제는 조금 지친다. 다시금 내가 지난 시절 얼마나 허황하게 살며 딴 짓을 했었는지…. 왜 좀 더 진작 맘을 고쳐먹지 않았는지 새삼 후회감이 엄습한다. 내 아내에게도 미안하고… 하지만 언제 떠날지는 모르겠으나, 앞으로 살아있는 동안은 몇 권 정도의 얘기 보따리는 더 풀어놓고 가고 싶다. 욕심일까?

2016년 9월
손용상 拜



아페타이즈

…“데사 수니 빠라디소Desa Sunyi Paradiso라는 말은 그냥 ‘고요한 천국마을’이란 뜻인가 봐요. 지금은 시끄러운 천국이 되었지만……듣기로는 오래 전에 그 마을 촌장이 딸을 하나 낳아 지어준 이름이 수니야라고도 하고, 그 애 엄마가 동양인인데 꼬레아라는 말도 있고…….”
“뭐야? 촌장 마누라가 꼬레아라구?”
철민은 관자놀이에 소름이 확 돋으며 침상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순전한 상상일 수도 있겠지만, 그는 반세기도 이전의 파푸아 뉴기니아의 일본군 점령 시절이 떠올랐고 더하여 그 시절 우리네 꽃다운 처녀들의 위안부 차출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리고 어쩌다 오지의 섬으로 끌려간 그 중의 한 처녀가 탈출을 했든, 현지인에 의해 구출이 되었든, 납치를 당했든 간에 이 숲 속으로 끌려와서 정착하여 딸을 하나 낳았다? 그 처녀의 이름은 아마 분紛이 아니면 순順이였을 것이고, 그 여자는 모든 걸 운명에 맡기고 태어난 아이나마 엄마 이름처럼 ‘순이’를 그대로 붙임으로써 언젠가는 제 뿌리를 찾게 하려 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본문 중에서)


 제1화 / 미지未知의 입구

1.
남국임에도 아침 공기는 선선했다.
현장으로 가기위해 새벽같이 일어난 철민은 출장소 빌라의 3층 베란다 창가에 서서 심호흡을 했다. 먼 풍경으로 보이는 아래거리에는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차량행렬이 줄을 잇고 있었다. 종려나무 가로수 사이사이로 종종걸음을 치며 바삐 서두는 사람들의 모습도 조그맣게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마치 철민에게 판토마임의 한 장면을 바라보는 것처럼 생경하고도 묘한 느낌을 가져다주었다.
철민은 창문을 열고 베란다로 나섰다. 시끌한 소음이 서늘한 바람과 함께 그의 귓전으로 밀려왔다. 철민은 다시 한 번 깊이 숨을 들여 마시며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침햇살이 구름을 뚫고 빗살처럼 온 누리에 퍼지고 있었다. 그는 무심히 담배 한 꼬치를 빼어 물며 문득 내 팔자도 참 기구하다는 생각이 들어 쓴 웃음을 지었다.
한때는 풀 한 포기 보기 힘든 사막복판에서 새벽에 일어나 해질녘까지 무던히도 이곳저곳을 헤매던 기억이 되살아나며, 그곳의 아침과 이곳의 아침 햇살은 왜 이렇게 느낌이 다를까? 하는 생각을 모아보았다.

ㅡ참 황량하기도 했었지!
철민의 머릿속에는 그가 과거 3년간이나 몸담아 젊음을 보냈던 아라비아 북부의 어느 도시가 선명히 떠오르며 공연히 손끝이 저려오는 향수 비슷한 것을 느꼈다.
그 시절 그는 무려 3천명이나 근무하던 한 대형 현장의 캠프관리 요원으로 차출되어 비행기를 탔었는데, 지금도 뇌리에 생생한 것은 비행기를 타고 가면서 걱정 아닌 걱정에 잠 한숨 못자고 아랍어 회화 책을 들여다보며 푹푹 한숨을 내쉬던 일이 어제 같았다. 더군다나 그의 보직이 캠프관리과의 식품 등 일상용품 구매 업무인지라 하다못해 일이삼사라도 아랍어로 지껄일 줄 알아야 하겠다는 강박관념이 그를 짓눌러 도무지 잠이 오지 않음은 말할 것도 없었고 식사하저 할 의욕이 나지 않았던 것이었다.
회사의 선배나 동료들은 까짓것 그 동네도 사람 사는 동네인데 안 되면 만국어(손짓발짓)로 대화하면 다 통할 터인데 뭘 그리 안달이냐고 퇴박을 주었지만 그만은 도무지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기억이 되살아왔다.
물론 회사의 명령을 받고 학원을 다니며 회화의 기초는 배운다고 배웠지만, 도무지 아랍어라는 게 전부가 지렁이 기어가는 형상이라 참 애도 어지간히 먹었으나, 막상 실전에 임한다고 생각하니 알던 것도 까맣게 생각이 나지 않았던 것이었다. 게다가 나중엔 슬그머니 오기가 치솟아 책을 팽개쳐버리곤, 앞으로 그곳에서는 절대로 술을 먹지 못할 것이라는 주의에 화급한 마음이 들어 술 배 부터 채워 넣었던 일이 떠올라 그는 다시 한 번 벙긋 혼자 웃음을 머금었다.

ㅡ그 지글지글하던 태양하며 또 모래바람은 얼마나 지독을 떨었는가….
아침 지평선을 뚫고 불쑥 솟아오르던 태양은 그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대지를 순식간에 달구며 몸도 마음도 모래처럼 서걱거리게 했었고 그래서 그들은 항상 메말라 있었던 기억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들의 캠프에서는 크고 작은 실랑이들이 끊어지질 않았었다. 식당에서는 기능직, 관리직 할 것 없이 밥투정 반찬 투정이 다반사로 일어났고 심지어는 개고기가 먹고 싶다며 구해오라고 억지를 부리던 직급 높은 양반들의 생떼도 심심찮았었다. 그런가하면 정기적으로 포르노 영화를 틀어주어 주체할 수 없는 성욕을 회사에서 해결 해줘야 하지 않느냐는 어이없는 건의도 들어와 관리직원들을 난감하게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런 건 ‘사람이 하는 일’인지라 그런대로 웃고 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일주일에 두세 번씩 불어대는 모래바람은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철민은 그때 모래가 마치 밀가루 분말처럼 그토록 미세한 가루라고는 미처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이었다. 한번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실내의 틈이란 틈으로는 그놈의 모래 분말이 가차 없이 뚫고 들어와 몇 밀리미터씩이나 하얗게 쌓이고, 밥솥이고 국솥이고를 온통 바이러스처럼 쳐들어와 모래 밥과 모래 국을 만들어 놓곤 했었다.
사람들은 누구도 입을 벌리지 않았고 물에 적신 수건을 얼굴에 덮고는 꼼짝 않고 누워있는 도리밖엔 없었었다. 그럴 때면 캠프는 마치 죽음의 도시처럼 괴괴했고 움직임 없는 정지된 사진처럼 가라앉아 있었었다.

“뭐하세요? 식사하세요”
언제 왔는지 박과장이 방 안쪽에서 철민을 불렀다.
“응… 굿모닝.”
철민이 그를 향해 얼굴을 돌리며 가볍게 손을 들어보였다.
“아침나절엔 조금 쌀쌀해요. 기온차가 좀 심한편이예요… 사우디는 어땠어요?”
박과장은 마치 철민의 속을 읽은 듯 사우디아라비아 얘기를 꺼냈다.
“안 그래도… 그쪽 생각하고 있었어. 여긴… 그래도 거기보담은 양반일세.”
“그래요? 듣기론 그렇지 않다던데….”
박과장은 중동근무 경험이 없어 그런지 고개를 갸웃했다.
“여기는 그래도… 사우디처럼 자동차 보니트에다 계란 프라이할 정도의 뜨거움은 없잖아?”
“그랬어요?”
“그럼… 한참 뜨거울 땐 정말 자동차 보니트 위에다 계란 깨뜨려 프라이하는 장난도 해봤거덩. 그나저나….”
“네에?”
철민이 말머리를 돌리자 그도 표정을 바꾸었다.
“여기하고 현장하고 타임 디프런스가 얼마야?”
“여섯 시간요.”
“그렇게나 차이나? 그럼 그곳은 새벽이겠네?”
“그렇죠. 현장시간은 한국시간하고 같아요… 지금 준비하셔야 되는데….”
“그러지 뭐….”
철민은 짐을 꾸려 아래층으로 내려가며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듣기론 이곳은 사우디처럼 땡볕은 덜하지만 온 천지가 밀림이라 풍토병이 많다고 했다. 특히 말라리아는 걸리면 환자에게 시간차 고열을 몰고 옴으로써 처음엔 다른 사람들에게 마치 환자가 꾀병을 부리는 것으로 비치게 한다든가? 철민은 입맛이 떨어지며 벽에 걸린 인도네시아 지도를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쟈바, 스마트라, 칼리만탄, 슬라베시, 이리얀자야… 다섯 개의 큰 섬이 그들의 주축이었고 수없이 깔린 섬만도 수만 개가 넘는 광범한 나라가 그곳이었다. 철민은 오늘 그가 가야할 이리얀자야 땅을 손끝으로 찍어보며 갑자기 현기증을 느꼈다.

  2 .
가루다, 거대한 새-신천옹信天翁을 일컫는다고 하든가. 그러나 인도네시아 국영항공기는 국내선이라 그런지 그 이름에 걸맞은 인상적인 느낌은 별로 없었다. 철민은 직원들의 배웅을 받으며 비행기에 올랐을 때 그는 남국 특유의 냄새와 더불어 뭔가 쿵쿵한 실내 분위기가 온몸을 휩쌈을 맛보았다.
―비행기를 세 번이나 갈아타야 된다고?
철민은 코를 킁킁거리며 자리에 앉아 벨트를 매고 기내 잡지를 펴들었다. 그리곤 뒷 페이지의 지도를 펼쳐놓곤 다음 기착지인 슬라베시섬의 우중판당을 눈으로 찾았다. 시간상으로 3시간. 타임 디프런스를 감안하더라도 프라잉 타임만 2시간이 넘었다.
그리고 다시 1시간을 기다려 이리얀자야 대륙의 머리 꼭대기에 붙어있는 비약 섬까지 또 2시간을 날아가고, 거기서 다시 프로펠러 비행기를 갈아타고 현장이 있는 본섬까지 1시간을 가야했다. 계산을 해보니 얼추 8시간. 시차와 대기 시간을 빼더라도 운항 시간만 대충 6시간이 걸리는 거리였다. 그냥 자카르타에서 한국으로 가는 시간과 맞먹는 여행이었다.
철민은 책을 덮으며 한숨을 푹 쉬었다. 듣기론 그가 가야할 이리안자야 섬은 우리나라 남북한을 합친 면적의 2배라고 하던가. 거기다가 아직 인류의 발걸음이 닿지 않은 고도 4천 미터 이상의 산들과 천연의 밀림이 반 이상이고 지금까지도 산자락 어딘가의 숲속에는 식인종이 무리지어 살면서 원시를 지키고 있다는 곳이었다.
“절대로 혼자 다니면 안 되여, 우리 현장에는 현지 경찰 1개 분대가 상주하고 있으니까 꼭 보디가드를 데리고 다니라고. 옛날에 록펠러 집안의 가족 한명도 그곳서 행방불명 됐는데… 아마 잡혀 먹힌 것으로 추정이 됐다지….”
전임자의 말이었다.
“경찰이 식인종 출신이면 어쩌죠?”
“할 수 없지, 뭐. 그냥 당신은 도시락 되는 거지 뭐. 핫핫핫….”
황 이사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그에게 겁을 주며 킬킬거렸지만 철민은 웃음이 나오지 않았었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아릿한 동경과는 달리 이제부터는 현지에서 밀림을 헤맬 생각을 하니 솔직히 두려움과 후회감이 앞서며 그를 현실로 되돌려 놓았다.
하지만 기왕에 저질러진 일이었다. 그는 한 순간의 상념을 털어버리곤 비행기 창밖으로 눈을 주었다. 다행히 날씨만큼은 쾌청해 아래로 까마득히 내려다보이는 점점으로 이어진 수많은 섬들이 바다위에 뜬 채, 마치 누비이불 위에 엎어놓은 작은 밥주발처럼 앙증맞게 비쳐져왔다. 그 아래 밀림 속에는 누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보이는 풍경만큼은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철민은 물끄러미 그 광경을 내려다보다가는 문득 20대 시절 베트남 전쟁에 투입되기 위해 군함을 타고 가다가 겪었던 일이 선명히 떠오르며 가늘게 눈을 모았다.

그들이 탄 LST 함은 당시 월남 제 2도시인 나트랑 외항에 정박해 있었다. 내일이면 보트를 타고 상륙해 막 바로 전투부대로 배치될 운명을 가진 병사들은 막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는 내륙의 산들을 착잡한 심정으로 바라보며 뱃전에서 담배 연기만 뿜어대고 있었다.
그때였다. 멀리서 무장 헬리콥터인 미군의 건 쉽 들이 무리지어 날아가며 아래 숲을 향해 콩 볶듯 한 기총소사를 해대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었다. 다다다다… 위에서 아래로 쏘아대는 오줌줄기 같은 총알 행렬에 맞서 아래서 베트콩들이 쏘아 올리는 똑같은 응사광경은 멀리서 보는 그들에게 마치 한편의 아름다운 무성 필림을 틀어주듯 이상한 감개를 불러 일으켰었다.
그 아래에서는 절대 절명 바로 바로 죽음이 눈앞에 다가왔겠지만 멀리서 그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연신 감탄을 뱉어내며 박수를 치고 있었으니… 그래서 전쟁이란 옆에서 보는 사람들에겐 그만큼 재미있는 해프닝도 없다고 했다던가?
그는 그 이후 근 3개월여를 정글을 기며 숯가루를 얼굴에 바른 채 뛰고 뒹굴고 쏘면서 한 시절을 보냈다. 어떨 때는 스스로가 마치 ‘주검을 두루마리처럼 말아 쥐고’ 아프리카의 정글을 해매었다는 시인 "랭보"라도 되는 것처럼 수첩에 삶과 죽음에 대한 감상 나부랭이를 끼적여 놓기도 했었고, 또 어떨 때는 어제까지 함께 있었던 부상당한 동료를 헬리콥터로 후송하면서 속으로 꺼이꺼이 눈물을 삼키며 피나도록 입술을 깨물기도 했었다.
그러나 나중의 사이공 시절은 또 어땠었나?
야전근무를 교대하고 민사심리 요원으로 차출되어 월남어 교육을 받으려 도시로 올라왔을 때, 그곳은 전장이 아니었었다. 환락과 술과 마약이 공공연히 판치고 있었고 부정과 음모와 질시가 시체속의 구더기처럼 온 도시를 물들이고 있었더랬다.
거기서 그는 보고 배우고 느꼈었다.
조국과 민족은 간곳이 없었고 피 튀는 전장과는 또 다르게 눈빛 반짝이며 뒤통수를 쳐 상대를 쓰러뜨리고 할퀴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생존의 현실을 우울한 눈으로 지켜보면서 내가 뭣 때문에, 누굴 위해서 이 짓거리를 하고 있는 건지… 참으로 고뇌에 찬 나날을 보내며 시간을 죽였었다.
그러다 결국 사람들은 대다수가 주어진 여건에 따라 현실에 동화되고 그렇게 속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개똥철학을 몸에 익힘으로써, 어느 날 그의 가슴에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순수'는 간곳이 없어져 버렸음을 깨닫곤 한때는 온통 술로 세월을 보낸 적도 있었다.
 
―그런데 또 정글로 들어간다?
그러나 그곳은 당시의 베트남의 그것처럼 피 튀는 전장은 아닐지라도 어쩌면 그보다 더한 어려움과 함정이 있을지도 모르는 미지의 세계였다.

 3.
“우주 라이크 썸 드링크?”
기내의 스튜디어스가 깜짝 그의 상념을 일깨웠다.
“오오… 두 유 해브 비어?”
“슈어, 벗 유 해브 투 페이… 오케이?”
“오우케이.”
그는 그녀가 달라는 대로 지폐 몇 장을 집어주곤 캔 맥주를 받아 벌컥벌컥 몇 모금에 다 마셔버렸다. 맥주 맛은 쓰고 찝찔했지만 뭔가 앙금처럼 그의 가슴속에 묻어있는 갈증을 어느 정도 씻어주었다. 비행기는 어느새 첫 기착지를 향해 기수를 내리고 있었다. 적도 부근이라 했다. 각종 태풍이 잉태되는 지역이라든가, 그래서인지 주변이 적막하고 고요한 느낌이었다.

철민은 슬라베시의 우중판당을 거쳐 또 1시간 반을 날아왔다. 로컬타임으로 오후 3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는 이리안자야 섬 꼭대기의 비약 섬 공항 터미널에 앉아 창밖으로 펼쳐진 햇빛 밝은 활주로와 그 너머로 눈부시게 일렁이는 코발트색 바다를 바라보며 공연히 무언가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슴이 찌르르했다. 공항이라야 마치 시골역사 같은 터미널 건물과 메인 활주로 한개, 그리고 보조로 서비스 도로가 양쪽으로 겹쳐져 있는 자그마한 규모의 시설이 전부였다.
대형 제트기는 내릴 수가 없고 F-18 정도의 100석 내외 비행기만 이착륙을 할 수 있는 비약 공항엔 여행객도 많지 않았다. 주로 검은 피부의 현지인들만이 동양에서 온 노란 인종이 신기한 듯 철민의 주변에 몰려 자기들끼리 무어라 쑤알라 대고 있었다. 특히 머리에 부스럼이 난 아이들 몇은 노골적으로 그를 집적거리며 장난 걸 듯 손을 벌리고 있었다. 철민은 무심코 동전이라도 몇닢 던져줄까 하다가 불현듯 해외 여행 초기 정보부 오리엔테이션 담당자의 말이 떠올라 쓴웃음을 지었다.
―동남아 후진국 여행시는 조심해야 될게 있습니다. 특히 공항 주변에는 거지 아이들이 많아 떼거지로 ‘헬프 미’를 요구하는데, 이때 한 두 사람 보태주다간 잘못하면 껍데기를 홀랑 벗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예 무시하고 빨리 그 자리를 피하는 게 상책이지요….
그는 얼른 생각을 바꾸며 천천히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아이들이 따라올 듯 하다가 누군가 큰소리로 야단을 치자 머쓱하니 돌아가고 말았다.
공항 활주로 아스팔트 위에는 하오의 태양이 작열하며 아지랑이가 어지럽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한쪽 구석으로는 이제 곧 철민이 타고 본섬으로 가야할 쌍발 프로펠러 비행기가 정비사들의 진찰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무슨 영문인지 그 중의 한 사람이 작은 해머 같은 연장을 들고 연신 프로펠러를 쳐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뭘하는 거지?
철민은 고개를 갸웃하며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한순간 너무나 놀라 입이 벌어지고 말았다. 자세히 보니 한쪽 프로펠러는 돌아가고 있는데 그가 해머로 두드리는 쪽 프로펠러는 돌다 멈추고 멈췄다가는 또 돌아가고 하는 것이 아닌가.
―얘네들이… 저걸 타고 가라는 건가?
철민은 기가 막히다 못해 은근히 화가 치밀어 서둘러 눈을 두리번거리며 공항 직원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더욱 말문이 막힌 것은 어렵게 만난 공항 직원의 말이었다.
“왓 쓰 해픈?”
“저걸 봐라. 저 비행길 타라는 거냐?”
“뭐가 어떤데?”
철민이 녀석을 데리고 창가로 갔을 때는 그 비행기의 프로펠러가 아주 힘차게 돌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또 한 번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공항직원은 별 이상한 놈 다 본다는 듯이 그의 어깨를 툭 쳤다.
“그게 아니고… 아까보니… 해머로… 프로펠러를….”
“누가?”
“너희 정비사들이….”
“그럴리가 없다. 비행기 문제없다. 그런데… 너 어디서 왔냐?”
녀석은 별로 할 일이 없는 듯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사람 좋게 웃었다. 흑인 특유의 하얀 이빨과 두터운 입술에서 방금 피워 문 담배연기가 뭉클 뿜어져 나왔다. ‘내가 헛것을 보았나….’ 철민은 영 정신이 산만했지만 눈에 보이는 것이 멀쩡한 데야 뭐라고 할 말이 없어 눈만 껌벅거렸다. 녀석이 다시 물었다.
“저팬이냐? 코리언이냐?”
“코리언이다….”
“오우… 너 미스터 황 아냐?”
“미스터 황?”
“그래. 페떼 네모PT Nemo에서 일하는 삐삐난(왕초)인데….”
철민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페떼 네모―그의 회사 현지 이름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주)네모. 인도네시아 현지법인 명이었다.
“잘 알지… 넌 어떻게 아냐?”
“응, 히 이즈 굿맨이다. 여기 올 때마다 너희 나라 진생도 주고 담배도 줬다. 넌…없냐?”
철민은 세 번째로 기가 막혔다. 말로 듣기론 이 나라 공직자들은 이른바 ‘와이로’를 무척이나 밝힌다고 들었지만, 이렇게 처음 본 사람에게 노골적으로 뭘 달라고 하니 희한한 생각이 들었다. 하기야 쟈카르타 박 과장의 얘기로는 좀 더 편하게 여행하시려면 여권 속에 5달라만 넣고 다니면 만사 O.K 라고 했었다.

얘긴즉, 가끔 현장에서 급히 필요한 중장비 부품이나 한국 식품들을 인편에 공수해 올 경우가 있는데, 이 경우 정식 통관을 하려면 며칠씩 걸리고 결국에는 급행료를 주어야만 해결이 되곤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예 입국 시 5불이건 10불이건 여권에 끼워 제출하면 짐 검사는 물론 오히려 자기들이 짐꾼까지 불러 일사천리로 통과시켜준다는 것. 박 과장은 이런 사례들을 얘기하며 웃지 못 할 에피소드 한편도 끼워 들려주었었다.
이 나라 공무원들의 얘기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세관공무원들의 부정이 하도 심해 말썽이 일자 당시 수하르토 정부에서 어느 날 특별히 그들만의 급료를 100% 인상하면서 “제발 부정은 하지 말라, 앞으로 걸리면 파면에 형사 처벌하겠다”며 강력한 조치를 취했는데, 이 해프닝은 석 달 만에 원형으로 복귀되었다는 것이었다. 원인인즉, 급료인상은 인상된 대로 받아먹고 부정은 여전하였기에 본때로 몇 사람만 쇠고랑을 채운 후 이 조치는 없었던 걸로 취소되었다는 웃지 못 할 스토리였다.

철민은 입맛을 쩍 다시면 가방을 풀어 가지고온 한국담배 한 박스를 꺼내 아예 통째로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곤 그의 손을 잡으며 진지하게 말했다.
“이봐요, 나는 킴이고 당신이 얘기한 삐삐난 황의 후임자로 여기 왔는데… 앞으로 잘 사귀자. 그런데….”
 "오우 그러냐. 고맙다. 난 너희 페떼 네모 사람들 많이 안다. 앞으로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라.“
“응, 그러마. 고맙다. 그런데 혹… 다음 비행긴… 없냐?”
“왜?”
“내가보니… 저 비행기 말인데… 프로펠러가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그가 알만하다는 듯 히힛 웃으며 주머니를 뒤적여 운항시간표 같은 것을 꺼내들었다. 그리곤 그것을 잠깐 들여 다 보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철민은 가슴이 덜컥했다.
철민은 죽으나 사나 저놈의 비행기를 타야하나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는 입술을 축이며 혹시나 하여 녀석의 표정을 살폈다. 녀석이 공연히 헛기침을 하며 목에 힘을 주었다.
“자야뿌라(이리얀지야 섬의 수도)로 가는 건 없고… 한 시간 후에 미국 사람들이 개발하는 광산으로 가는 민간 경비행기가 한 편 있기는 한데… 그냥 태워줄는지 모르겠다.”
민은 구세주를 만난 듯 머리에 전구가 반짝 켜지며 바싹 그에게 달라붙었다.
“야, 그거 잘됐네. 너 그것 주선해 주면 50불 주마.”
“정말?”
그는 신이 난 듯 철민에게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이며 서둘러 일어섰다.
철민은 휘적휘적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문득 ‘이거 내가 뭘 잘 못 생각하는 게 아닐까’하는 마음이 들며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왜냐면 어차피 이런 오지까지 올 결심을 했을 땐 죽고 사는 걸 운명에 맡길 것이 아니었나. 그런데 부딪쳐보기도 전에 지례 겁부터 먹는 것이 스스로 마음에 들지 않아 기분이 몹시 얹잖아졌다. 그런데다가 자야뿌라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을 현지 직원들은 또 얼마나 당황할 것인가.
그는 불쑥 생각 없이 공항 직원에게 밑돈까지 약속하고 비행기를 바꿔달라고 한 것이 후회스러워졌다. 그는 부리나케 일어나 서둘러 녀석을 다시 찾기 시작했다. 그때 녀석은 마치 숨었다가 나타난 것처럼 저만치서 춤추듯 건들건들 걸어오며 그에게 손가락으로 O표 신호를 보내왔다. 철민은 그에게 다가가 다급하게 말했다.
“야, 내 부탁 취소하자. 우리 직원들이 자야뿌라 공항에서 기다리는 걸 미처 생각 못했다. 미안하다….”
“뭐… 어쩐다구?”
녀석이 눈을 부라렸다. 너 이 새끼 장난하냐는 표정이었다.
“미안하다구… 나 그냥 저 비행기 타고 가겠으니… 내 부탁 취소해주라.”
“그래? 그래도… 네가 한 약속은 지켜줘야겠다. 50불주라. 내가 저쪽 사람들에게 약속을 했으니…그건 지켜야 한다.”
“뭐…라구? 이런 도적놈 같으니라구….”
이번엔 철민이 우정 인상을 써 보이며 혼자 욕지거리를 중얼거렸지만, 이미 상황은 꼼짝없이 50달러를 날릴 수밖엔 없을 지경이 되어있었다. 그는 슬쩍 한번 튕겨보았다.
“줄 수 없다면?”
“그러면 안 된다. 약속은 지켜라.”
녀석의 태도는 단호했고 막무가내였다. 그가 입에 침을 튀기며 뱉어놓는 말인즉 “내 잘못이 아니고 네가 ‘마인드 체인지’를 했으니 할 수 없다는 요지였다.
철민은 배가 아프고 자신이 ‘으바리’ 같이 생각되어 속이 상했지만 녀석의 말이 또 틀린 것이 아니었기에 하는 수없이 그는 지갑을 꺼냈다. 그리곤 잠깐 한 30달러로 깎아볼까도 생각했지만 바로 그 생각은 접어 넣고 말았다. 치사한 마음이 들어서였다. 철민은 그에게 50불을 건네주곤 카악 가래를 긁어 들리며 빈정거리듯 물었다.
“저거… 비행기 가다가 떨어지면… 얼마나 보상해주냐? 한 50만불 주냐?”
“글쎄… 인샬라다.”
녀석은 무슬림인 듯 철민의 물음을 ‘신의 뜻’으로 돌리며 히힛 웃었다.
“씨앙!!”
철민은 바싹 약이 올랐지만 더 이상 말을 끊은 채 서둘러 짐을 챙겨 보딩 게이트로 발을 옮겼다. 다행히 비행기는 프로펠러를 잘 돌리며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그리곤 본섬인 이리얀자야 자야뿌라를 향해 기수를 돌렸다.

 4.
아래에서 펼쳐지는 본섬은 망망한 숲의 바다가 까마득하게 전개되며 그 사이 사이로 지렁이처럼 꾸불텅꾸불텅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강물은 빛 좋은 햇살에도 불구하고 전혀 반짝임이 없었고 마치 카바이트 탄 탁주처럼 음울한 색깔을 띄우고 있었다.
철민은 왜인지 마음이 쾌치 않았다. 꼭 비약 섬 공항에서 어이없이 50불을 사기 당하듯 날린 탓만은 아니었다. 뭐랄까? 섬 주변의 바닷물은 가없이 맑아 눈요기만으로도 가슴이 탁 트이는 느낌이었는데, 정작 그가 가서 심신을 붙이고 살아가야 할 곳은 마치 수많은 연체 벌레들이 고물거리는 동굴에 들어가는 것처럼 찜찜한 기분이었다.
 
―아아, 미지의 저 섬에는 또 뭐가 도사리고 있을까….
그는 창가로부터 눈을 떼며 의자를 등 뒤로 젖혀 머리를 기댔다. 그는 두려움과 함께 한편으로는 알 수 없는 설레임으로 잠시 눈을 붙였다. 불과 엊그제 서울을 떠나왔지만 회장을 만나고 여비서와 저녁을 함께하고, 아내와 석별의 섹스를 나누고 모친과 아이들에게 뽀뽀세례를 퍼붓고… 어디 그뿐이었나. 자카르타에 도착한 후로도 전임자와 신경전을 벌이며 티격 거리다 종래엔 유끼(雪)의 요정에서 현지 처녀의 젖무덤에 코를 처박은 해프닝 하며… 단지 사나흘 동안에 겪었던 모든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르며 아주 오래된 사진을 보듯 기억이 새로워졌다. 그는 참 철딱서니 없이도 ‘태극기’ 좋아하다 스스로 빠져버린 그날의 함정陷穽에 다시 한 번 쓴 입맛을 다셨다.








**약력: 경남 밀양 출생. 1973년 〈조선일보〉신춘문예 소설 당선. 소설집 『베니스 갈매기』, 『똥 묻은 개 되기』. 장편소설 『그대속의 타인』, 『꿈꾸는 목련』. 전작장편掌篇 『코메리칸의 뒤안길』. 중편소설 『꼬레비안 순애보』, 『이브의 능금은 임자가 없다』. 콩트·수필집 『다시 일어나겠습니다, 어머니!』. 에세이집 『우리가 사는 이유』. 에세이·칼럼집 『인생역전, 그 한 방을 꿈꾼다』. 시·시조집 『꿈을 담은 사진첩』. 경희해외동포문학상, 미주문학상, 고원문학상 수상. 한국, 미주문인(소설가)협회, 달라스 문학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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