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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호/아라세계/신연수/초창기의 인천문학仁川文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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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세계
신연수
초창기의 인천문학仁川文學
1) 인천문학사를 위한 시론試論
1977년 6월 인천시인협회仁川詩人協會 이름으로 『인천시인전집仁川詩人全集』의 발간이 추진된 바 있다. 인천시인협회는 그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은 단체로, 인천문인협회 회원이며 당시 《인천문학》을 발간하던 시인 최병구 씨가 회장으로 되어 있는 단체이다.
이 때 배포된 자료의 ‘인천시인전집 발간의 말’을 보면 “인천시협이 발족된 것은 1957년이옵니다. 그 동안 회원제위께서는 향토시단을 위시, 한국시단의 주류멤버로 그 활동상이 눈부신 바 있습니다. 이번 본회는 창립 20주년 기념사업으로 향토시단의 연혁과 근원을 밝혀두고자 오늘까지 인천시단을 끈질기게 지켜온 분들의 작품집 인천시인전집을 발간코자 하오니”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인천시인전집에 수록되실 분이라 하여 이인석李仁石, 한상억韓相億, 조병화趙炳華 등 59명의 이름을 열거하고 있다. 그 면면을 보면 당시 인천에서 활동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이인석, 홍윤기洪潤基, 최수진崔秀鎭, 이흥우李興雨, 임진수林眞樹, 홍원태洪元泰, 한무학韓無學, 김춘석金春碩, 김병제金秉濟, 장수복張壽福, 장종태張鍾泰, 유승완 등 이미 오래 전에 인천을 떠난 시인이 상당수 있으며, 심지어는 정우영鄭又榮, 이관제李寬濟, 정범노鄭範老, 이종범李鍾範, 이완세李完世, 이호명李鎬明, 강건일姜健一, 이여석李如石, 김칠관金七官, 왕연중王然中 등 계속적인 활동 여부가 분명치 않는 사람들도 포함돼 있다.
그렇다면 누구를 인천문인이라 할 수 있으며, 어디까지를 인천문학사에 포함할 수 있을까? 인천시인전집에 언급된 59명을 놓고 보더라도 이들을 모두 인천문인이라 할 수 있으며, 과연 인천시인전집에 포함할 수 있을까?
먼저 인천문인이라고 할 때 다음과 같은 경우가 아닐까?
첫째는 인천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인천에서 계속 활동하는 사람이다. 타계한 사람이 포함됨은 두 말 할 나위가 없다. 둘째는 인천에서 나고 자랐지만 직장 등의 이유로 인천을 떠나 다른 곳에서 활동하는 사람이다. 셋째는 다른 곳에서 나고 자라 인천으로 옮겨와 활동하는 사람이다. 넷째는 다른 곳에서 인천으로 옮겨와 활동하다가 다시 또 다른 곳으로 옮겨간 경우라도 그가 인천에서 활동하던 시기는 인천문인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경우 인천활동시기를 어떻게 정하느냐는 문제는 있겠지만.
그래도 문제가 있다. 인천에서 태어나거나 자라지 않았지만 현재 인천에 살면서 인천에서는 전혀 활동하지 않는 사람은 어떻게 하며, 또 인천과 전혀 무관한 사람이 인천을 소재로 해 쓴 작품은 어떻게 보야 하는 하는가? 그리고 이것이 해결되면 인천문학사의 전부가 해결된 것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인천의 근대사는 벌써 한 세기 반 가까이 되고 인천사 역시 자리를 잡았지만 인천문학사는 시대구분을 비롯하여 각종 문학단체는 물론 문인 개인들에 대한 기록이나 작품집, 연표 등 어느 것 하나라도 정리된 것이 없다. 그저 몇몇 개인이 그때그때 기억에 의존해 단편적으로 기록한 것이 전부인 것이다. 이로 인해 인천문학사는 집필자에 따라, 그것도 신빙성 있는 1차 자료가 아닌 기억이나 전문傳聞을 근거로 기술함으로써 상당부분 오류를 빚고 있는 것이다.
인천은 1883년 개항 이후 급성장한 도시다. 특히 개항과 함께 각종 서구문물이 이 땅에 도입될 때 가장 먼저 접했기 때문에 어느 도시보다 근대화의 기운이 가장 생동했다. 이는 근대문학에 있어서도 별로 다르지 않아, 근대문학에 대한 인식이 아직 확립되지 않았을 때 인천사람이 쓴 시가 ‘독립신문’에 실리는가 하면, 구한국시대인 1904년 인천에서 발행된 일본인 경영의 한글신문 대한일보에는 이미 여러 편의 문학작품들이 소개되기도 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도 인천사람들의 작품이 각종 문예지에 기고되는가 하면 유명문인들이 월미도나 인천항 등을 소재로 한 작품을 발표하곤 했다. 또 인천에서는 문학단체나 그들이 발간하는 문예동인지도 계속되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습작시대’나 ‘월미’ ‘시와 산문’ ‘문예탑’ 등이다.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 이후 북에서 내려온 문인들과 피난을 갔다가 돌아온 문인들이 인천에 정착하면서 전쟁 직후에는 인천문학이 풍성해지기도 했다. 특히 전쟁을 전후해서는 인천에도 문단이 형성되기도 한다. 1950년 6월 10일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약칭 문총) 인천지부가 결성되어 눈길을 끌었다. 이 때 문학분과위원장은 한상억씨였다. 그러나 문총은 전쟁기간 중 종군활동이 활발해지면서 그 산하단체로 범 문단적인 한국문학가협회(약칭 문협)를 결성했으며 인천에도 그 지부가 탄생해 대부분의 문인들이 그 아래 결집하게 되었다. 문협 인천지부는 1955년까지 존속하는데, 그 회원 중 이인석, 한상억, 고봉인高鳳仁, 김진엽金振燁 등은 군사계몽작가단軍事啓蒙作家團으로 활동하기도 한다.
2) 초창기의 인천문학- ‘습작시대習作時代’
인천문학사를 나눈다면 크게는 근대와 현대로 나눌 수 있을 것이고, 굳이 시대구분을 한다면 근대문학기는 다시 1945년 해방 이전과 해방공간에서 한국전쟁 전, 그리고 한국전쟁 이후 등 3기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현대문학기는 전쟁이후 1950년대와 1960~70년대, 1980~2000년대, 2000년 이후 등 4기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인천에서 나온 최초의 문예지는 1927년 진우촌秦雨村의 『습작시대習作時代』다. 습작시대는 1927년 2월 1일 창간호가 나왔다. 창간호는 가로 22.5cm, 세로 30cm의 반 타블로이드판으로, 표지부터 판권까지 17면이고 광고 3면을 포함하면 모두 20면으로 되어 있다. 편집 겸 발행인은 진종혁秦宗爀, 인쇄인은 노승진盧承軫이며 인쇄소는 경성 동흥인쇄소同興印刷所다. 그리고 발행소는 진종혁의 집주소와 같은 ‘인천부 용리 60번지의 습작시대사’이며, 인쇄날짜는 소화2년(1927년) 1월 28일, 발행날짜는 소화2년 2월 1일이다. 또 정가定價는 10전, 우세郵稅는 2전이며 경성 총판매소는 덕창서림德昌書林으로 표기되어 있다.
습작시대를 주도한 진우촌은 1904년 7월 22일생으로, 본명은 종혁이고 우촌은 예명이다. 우촌의 조부 진학명秦學明은 구한국시대 관비유학생으로 도일한 바 있었고, 부친 진수秦秀는 관립외국어학교에서 독일어를 배우고 인천해관에서 통역을 했다. 일찍부터 신문물을 접해온 집안의 영향을 받은 우촌은 1918년 경성 배재학당에 입학, 인천에서 경성으로 통학하며 4년 후 졸업한다. 이 때의 경험은 훗날 우촌이 경인선기차통학생친목회와 배재고보 학생회 모임인 인배회 등의 활동으로 이어지고 그 활동은 또 한용단과 제물포청년회, 소성노동회 등으로 넓혀진다.
그러나 우촌의 관심은 문학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 1923년 5월 동아일보 1,000호 기념작품 공모에 희곡 ‘개혁’과 동화 ‘의좋은 남매’를 응모해 동시에 당선되는가 하면, 9월에는 동아일보사가 물산장려운동의 일환으로 동아일보사가 실시한 작품공모에 ‘시들어 가는 무궁화’가 또 당선되기도 한다.
그 후 우촌은 배우이며 연출가인 정암鄭岩과 무대장치가인 원우전元雨田, 언론인인 고일高逸과 향토연극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칠면구락부七面俱樂部를 설립하는가 하면 1938년 1월에는 극단 ‘낭만좌’를, 광복후에는 극단 ‘고향’을 창단해 창작극을 상연하기도 한다.
우촌은 또 아동문학연구를 위한 ‘꽃별회’를 1927년 1월 창립한다. 이 꽃별회는 습작시대 창간과 비슷한 시기 때문인지 그 멤버들이 대부분 습작시대에 그대로 참여해 눈길을 끈다. 창립멤버는 인천의 박동석朴東石, 김도인金道仁, 한형택韓亨澤과 강서의 유도순劉道順, 경성의 최병화崔秉和, 안준식安俊植, 강병국姜炳國, 노수현盧壽鉉, 주요한朱耀翰, 양재응梁在應, 염근수廉根守 등이다.
‘습작시대’ 창간호는 면마다 굵은 이중 괘선으로 곽郭을 두른 후 그 위에는 중앙에 ‘습작시대’ 좌우에 면수와 ‘창간호’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곽은 4단으로 나눠 한 단은 33행, 한 행의 글자 수는 약 14자이다. 또 본문은 국한문혼용체이고 표기는 당시의 관행대로 띄어쓰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그리고 표지 디자인을 보면 1단 중앙부분에 ‘문예잡지, 습작시대, 창간호’를 3행으로 도안했으며 그 좌우에는 깜깜한 밤하늘과 별, 달, 그리고 사람과 펜, 촛불, 책상 등의 그림이 그려져 있고 제일 가장자리에는 한자로 ‘월’ ‘간’ 두 글자가 씌여 있다. 이 도안은 동양화 6대가의 한명인 노수현盧壽鉉이 했다. 그리고 2단엔 본문보다는 좀 큰 글씨로 된 목차, 3~4단에는 주요한의 습작시대라는 글이 각각 실려 있다.
목차를 보면 습작시대에 실린 글의 전모를 알 수 있다. 순서대로 보면 주요한의 ‘습작시대’, 윤기항尹基恒의 ‘문단과 작가’, 정국당鄭菊堂의 ‘인생에 대한 조각 생각’, 유도순劉道順의 ‘산보散步’, 염근수廉根守의 ‘낙랑기樂浪記’, 최병화崔秉和의 ‘기우奇遇’, 김동환金東煥의 시 ‘월미도해녀요月尾島海女謠’, 김여수金麗水의 시 ‘인천항仁川港’, 유도순의 시 ‘과부寡婦’, 한정동韓晶東의 시 ‘꿈’, 강병주姜炳周의 시 ‘희작戱作 2편’, 엄흥섭嚴興燮의 시 ‘내 마음 사는 곳’, 변추풍邊秋風의 시 ‘아침에’, 나그네의 시 ‘바다의 노래’, 한형택韓亨澤의 시 ‘겨울밤’, 김순민金淳民의 ‘시조時調’, 윤귀영尹貴榮의 소설 ‘간호부看護婦’, 양재응梁在應의 소설 ‘안해’, 최호동崔湖東의 소설 ‘승리자勝利者’, 그리고 편집여언編輯餘言 등으로 되어 있다.
이 중 시 몇 편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맞춤법은 필자가 현행에 맞춰 고침)
놀 저물 때 마다 멀어 지네 내 집은
한 달에 보름은 바다에 사는 몸이라
엄마야 아빠가 그리워지네
진주야 산호를 한 바구니 캐서
이고야 올 날은 언제이든가
고운 천 세발에 나룻배 끌 날 언제던가
보면 볼수록 멀어 지네 내 집은
엄마야 아빠야 큰 애기라 부르지 마오
목이 메어 배따라기조차 안 나오우
―김동환 「월미도해녀요」 전문
홍합 따라 올 때는 제비나름 해 왔더니
갈 때는 소도 못 믿어 가겠네
그 애 못 본 날은 오리가 십리
올 때 안은 바구니는 향불 핀 향로같더니
갈 때엔 바다 속 차돌바위인 것 같네
그 애 못 본 날은 치마무게로 한 집 거리
초저녁이라 산길패 왔더니
섬이 안 보이네 월미도月尾島가 없어 졌네
하늘 치어다 봐도 눈물에 달조차 안 뵈네
―김동환 「그 애 못 본 날은」 전문
조선의 서편 항구 제물포의 부두세관의 기旗는 바닷바람에 퍼덕거린다.
젖빛 하늘, 푸른 물결, 조수潮水 내음새
오오 잊을수 없는 이 항구의 정경이여
상해上海로 가는 배가 떠난다
저음의 기적 그 여운을 길게 남기고
유랑流浪과 추방追放과 망명亡命의
많은 목숨을 싣고 떠나는 배다.
어제는 Hong Kong 오늘은 Chemulpo 또 내일은 Yokohama로 세계를 유랑하는 코스모폴리탄
모자를 삐딱하게 써고 이 부두에 발을 디딜 때
축항 카페로부터는 술 취한 불란서佛蘭西 수병의 노래
오 말세이유! 말쎄이유!
멀리 두고 와 잊을 수 없는 고향의 노래를 부른다
부두에 산 같이 쌓인 집을
이리 저리 옮기는 노동자들
당신네들 고향이 어디시오?
우리는 경상도, 우리는 산동성山東省 대답은 그것뿐으로 족하다는 말이다
월미도와 영종도 그 사이로
물결을 헤치며 나가는 배의
높디높은 마스트 위로 부는 바람
공동환共同丸의 기발이 저렇게 퍼덕거린다
오오 제물포! 제물포!
잊을 수 없는 항구의 정경이여!
―김여수 「인천항」 전문
3편 모두 인천을 소재로 한 창작시로, 필자들이 습작시대의 원고청탁을 받고 쓴 작품인 듯하다. 그 밖에 구고舊稿도 몇 편 있는데 유도순, 아동문학가 한정동, 소설가 엄흥섭의 시 등이 그렇다.
님이 떠남으로 맘이 흔들리던 날
천지가 있고도 암암하던 날
하얀 눈이 내린다
이지러진 감각의 몸뚱이를
둘러싸고 부딪히며 눈이 내린다
한 마음 한 뜻으로 두 갈래 길에 세는 몸이니
지나쳐도 못 잊을 날이 아닌가
이 강산에 해마다 눈은 왔지만
수많게 맞을 날에 나릴 눈도 참 많지만
이 날을 못 잊나니 못 잊을 눈이다
―유도순 「눈」 전문
귀뚜리 남은 서름
실어 보내는
시들은 꽃잎에는
찬 서리 한 줌
울며불며 찾아도
대답은 없고
바람에 흔들흔들
그림자 홀로
하도 애를 쓴다고
편지 주셨나
받아보니 새빨간
단풍丹楓만 한 잎
―한정동 동시 「단풍 한 잎」전문
나는 북국北國이 좋아
거기는 나의 사랑하는
동생들 사는 곳
몸은 비록 남국南國에 떠돌아도
내 마음 사는 곳은
먼 북국 나그네
나는 북국이 좋아
거기는 눈 덮인 곳
흰 눈이 내려 덮이는 곳
찬바람도 얼음 강물도
나의 친한 친구
몸은 비록 남국에 떠돌아도
내 마음 사는 곳은
먼 북국 오직 그 나라
―엄흥섭 「내 마음 사는 곳」 전문
이 밖에 창작소설과 논설 중 윤기항의 논설 ‘문단과 작가’는 당시의 문단을 걱정하면서도 장래 문단에 큰 기대를 갖고 쓴 글로, 선배작가들에게 후배작가들을 지도할 의무가 있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작가들은 자기 개인의 즐거움이 아닌 민중으로 하여금 그 무엇이라도 느끼게 만들어 민중들이 장차 살아갈 방침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당시 유행하던 프로문학의 주장과 같은 것으로 당시 프로문학의 영향력을 짐작케 한다.
윤귀영의 소설 ‘간호부’는 스물대여섯 살의 청년환자와 고아로 자란 간호부 간의 비극적인 사랑을 그린 것으로 비록 짧은 단편소설이지만 묘사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윤귀영은 1905년 공주에서 출생, 19세 때 ‘개벽’지 현상모집에 입선함으로써 글재주를 보였는데 습작시대 이후에는 공주에서 창간된 ‘백웅白熊’의 원고수집을 주도하기도 했다.
이 밖에 ‘안해’를 쓴 소설가 고봉孤峯 양재응은 습작시대와 백웅의 동인으로 참여하지만 이후에는 ‘어린이’ 등에 동화를 발표하는 등 주로 아동문학가로 활동한다. 한형택은 희곡작가로, 인천에서 소인극연극운동에 참여하는데 ‘백웅’에 보낸 희곡원고가 검열로 삭제되는 아픔을 겪기도 한다. 또 아동문학가인 고접孤蝶 최병화는 서울 출신으로, 연희전문을 졸업한 후 교원을 거쳐 아동잡지인 ‘별나라’의 편집을 맡는가 하면 아동극단인 ‘호동好童’을 조직해 활동하기도 했다.
이처럼 ‘습작시대’는 인천 최초의 문예지로 전국의 다양한 문인들이 참여해 발간되었다는데 그 의의가 매우 크다. 인천에서는 그 이전에도 내리교회에서 존스목사가 펴낸 ‘신학월보’나 오천석이 만든 ‘개척’ 경인선통학생친목회의 회람지 등이 발간되기는 했다. 하지만 이들은 문학과는 무관하거나 회보 성격으로 발간, 문예면은 전혀 찾아 볼 수 없어 인천문학사는 암흑기나 다름 없었는데 습작시대가 창간됨으로써 비로소 인천문학사가 발아되기 시작한 것이다.
둘째, 습작시대는 서울이 아닌 지방에서 만들어져 4호까지 발간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당시는 서울에서 발간된 문예지도 창간호나 2~3호를 내는 것이 고작이었는데 지방에서 발간된 문예지가 4호까지 냈다는 것은 흔치 않은 것으로 그 의의가 결코 적지 않다 하겠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습작시대의 창간은 인천문학사만이 아니라 한국문학사적으로도 의의가 크다 하겠다. 당시는 한국문학사의 초창기로, 현대문학이 아직 자리를 잡지 않은 때이다. 그런데 습작시대가 창간에 인천은 물론 서울과 다른 지방의 문인들까지 많이 참여했다는 것은 의의가 있으며, 또 다음해 공주에서 발간된 ‘백웅’과 평양의 ‘백치白雉’, 진주의 ‘신시단新詩壇’과 황주의 ‘생의성’(生의聲)은 물론 1930년대 원산의 ‘초원草原’ 등 지방문예지가 잇달아 발간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습작시대의 창간은 한국문학사 측면에서도 의의가 크다 하겠다.
**약력:시인. 인천문협 회원, 근대서지학회 회원. 법률신문사 이사 겸 총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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