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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호/추모특집/허문태/외로움과 가난, 그리고 병고가 전 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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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492회 작성일 17-01-05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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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특집

허문태




외로움과 가난, 그리고 병고가 전 재산
―랑승만 시인을 추모 하며




   “인천문협 고문이신 랑승만 선생님께서 오늘 영면에 드셨습니다.”(2016년 4월 28일) 선생님의 부음을 받은 것은 인천문협에서 보낸 문자메세지였다. 그때 나는 동네 뒷산을 산책 중이었다. 죄인처럼 털썩 바위 끝에 주저앉았다. 외로움과 가난과 병고 속에 꼿꼿이 좌정하고 계셨던 선생님. 나는 왜 자주 찾아뵙지 못하고 멀리서 빙빙 돌고 있었던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동안, 눈부시게 초록을 내뿜던 자귀나무와 떡갈나무가 솟구치던 이파리를 축 늘어뜨린다.



그 긴 봄날의 장마에도
비 한 방울 맞아 보지 못하고
어느 반시신反屍身처럼 후줄근히 버려진
우산이나 펼쳐들고
이 봄날에 마지막 오는 비를 맞으며
가버린 그네라도 만나
호젓한 찻집이나
낯선 주막에라도 들러
차를 마시건 술 한 잔 기울이면
그게 곧 세상 사는 기쁨이겠는데


술도 못하고
먼지 자욱한 세상을
이 저녁에도 오는
저승비를 맞으며
절뚝거리는 쓸쓸한 귀가歸家의 발길이여......


                                                                                                  ―「이 저녁에도 오는 저승비」전문



   늙고 외로운 병객의 몸으로 비를 맞으며 절뚝절뚝 귀가하는 쓸쓸한 풍경이 가슴 아프게 읽혀진다. 늘 사람들과 어울려 시를 논하고, 낭만과 희망을 말하면서 밤이 늦도록 술에 취하기도 하고, 아프게 비가 오는 날은 혼자 호젓한 찻집이나 낯선 주막에서 고독의 깊은 심장을 꼭 껴안고 있는 모습이 선생님의 모습이 아니던가? 저녁비를 맞으며 늙고 외롭고 가난한 병객의 몸으로 쓸쓸히 귀가하는 모습이라니. 뇌졸중으로 쓰러져 반신불구의 몸으로 피를 토하듯 살아온 선생님의 삶에 내가 추모라는 이름으로 글을 쓰는 것도 또한 죄를 짓는 것 같아 극히 조심스럽다. 글자 하나하나에 속죄하는 마음으로 글을 쓴다.
   선생님을 처음 만난 것은 1970년대 후반 그러니까 40여년 전이다. 함께 활동하던 '묵시 문학회' 회원들이 조촐하게 준비한 시화전에 선생님께서 오셨다. 어떻게 아셨는지 격려차 방문하셨다. 특유의 당당한 모습으로, 연신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시며, 검은 뿔테 안경을 두 손가락으로 잡아 눈에 바짝 끌어당기시면서 멋지게 격려의 말씀을 하셨다. 나는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선생님만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말씀을 했는지는 하나도 기억에 없었다. 다만 시인을 직접 보고 있다는 것에 감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늘 같은 시인을 지금 눈앞에서 보고 있다니. 40대 중반에 선생님은 그 날 바로 내 마음에 태양으로 자리 잡았다. 아무런 검증도 없이 선생님이 내 마음에 쳐다 볼 수도 없는 태양으로 자리 잡은 것은 순전히 나의 외로움 때문이었다. 어린 나이에 외로움을 심하게 앓고 있던 나였다. 감당할 수 없는 외로움은 엉뚱한 행동을 하게 만들었고, 점점 더 모나고 외톨이가 되어 가고 있었다. 외로움에 떨고 있는 내게 당당하고 독선적인 선생님이 너무도 좋았다. 시간만 되면 선생님을 찾아갔고 심포동과 숭의동 근처 대포집에서 자주 술을 마셨다. 그러나 선생님의 당당함과 독선과 강한 주관은 저항이었다. 무엇에 대한 저항일까? 선생님은 외로움에 빠득빠득 저항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당당하고 독선적인 모습은 타고난 외로움이 온몸에 피가 되어 흐르고 있는 선생님의 저항이며 몸부림이었다.
   ‘더 외로워야 덜 외롭다. 외로워야 자신을 알 수 있고 자기를 알아야 제대로 된 소통을 하며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후천적 외로움이 아니다. 선천적인 외로움에서 오는 동물적 감각이 외로움에 저항함으로써 외로움을 극복하고 있었던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술자리가 길어지면 술이 외로움과 어깨동무를 하였고 선생님은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셨다. 외로움에 사무친 눈물은 더 맑았다. 술자리에 끝까지 남아 있던 나는 선생님의 그런 모습을 종종 보았다. 쓸쓸하고 측은했다. 외로움에 떨고 있는 사내의 어깨는 외소하기 그지없었다. 술에 취해 어둠 내린 숭의동 언덕빼기를 휘청휘청 걸어 귀가할 때면, 요절한 일본의 천재 시인 ‘이시까와 다꾸보꾸’의 시 한 구절을 읊으셨다.
“산은 험준하지만/저 산을 넘으면/고향의 등불이 보이는데//나그네는 눈물 없이 이 언덕을  넘지 못하네.”
   나는 숭의동 언덕빼기를 선생님과 그 시 구절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함께 올랐다. 단칸방에는 어린 두 아들이 잠들어 있었고 다시 오랫동안 밤이 세는지도 모르고 술을 마셨다.
   “외롭지 않은 시인이 있을까? 외로워야 시를 볼 수 있다. 혼자일 때 인간의 내면이 가장 충만해지는 것을 몸은 약속처럼 안다. 그래서 시인은 허허로움이 호젓함이 될 때까지 더 절실하게 외로워야 한다. 시는 내 안의 외로움을 발견하고, 그 외로움을 챙겨 나를 지탱하는 힘으로 가꿔가야 하기 때문이다.” 라고 이명수 시인은 말한다.
그러나 선생님의 외로움은 아무도 말하지 않은 아무도 경험하지 않은 외로움이다. 소란스런 외로움이 선생님의 외로움이었을 것이다. 마치 가시를 뒤집어 쓴 밤송이가 매끈하고 둥근 밤을 껴안고 있듯이 선생님은 소란함과 까칠함 속에 그 소중한 외로움을 간직하고 계셨던 것이다.



서쪽 하늘이 검게 물들더니
코를 풀게 하는 묵은 내음 나는
겨울 묵은지 한 포기 앞에 놓고
외롭디 외로운 술잔을 드네.


서쪽 하늘이 비구름으로 꽉 차
흐르지도 못하고 막힌 하늘이더니
갑자기 쏟아져 내려온 천둥소리
貧者의 지붕 위에 자우慈雨로 내려
묵은지 한 포기보다 더 지독한
가난한 하늘 냄새 지붕 위를 감돌다
쏟아지는 소나기 한 줄기.


                                                                      ― 「貧者의 하늘」 전문



   시인은 가난하다. 그래서 시인은 행복하다. 가난을 즐기고 가난을 노래한다. 그러나 시인은 빈곤하다. 여차하면 절대적 빈곤에 허덕인다. 절대적 빈곤을 인정하고 시인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인정받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시정신 시인정신으로 철저히 무장하시고 사셨다.

“‘시 한 편 쓰면 10년은 더 살고, 시 한 편 발표하면 20년은 더 살며, 시집 한 권을 내놓으면 30년은 더 산다.’ 나의 정신생명 부활의지의 문학정신적 신조라 하겠습니다. 아니 의지이고 집념입니다. 詩의 생명력을 마시며 詩를 쓰고 언제나 거듭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또한 나의 詩는 불교정신을 바탕한 중생애적衆生愛的인, 더불어 사는 인연의 아픔과 사랑을 나누는 철학을 터득합니다. 또한 詩는 영혼과 생명의 소리여야 한다고 지론至論합니다. 그래서 우리 詩의 독자는 詩를 통한 시인의 영혼과의 만남으로 우주적인 사랑을 교감하고 신선한 생명력을 나눈다고 봅니다.”  


                                                                                                 ―2014년 《아라문학》 봄호에서 



   어쩌면 유한한 물질에 대해서는 초월하고 무한한 정신생명의 우주적인 사랑과 교감하며 사셨고 그렇게 살려고 하셨다. 한 번은 김영승 시인의 『무소유 보다 더 찬란한 극빈』 출판기념회 때의 일이다. 극빈과 맞서고 있는 대표적인 시인의 출판 기념회에서 선생님은 김영승 시인이 본 『무소유 보다 더 찬란한 극빈』을 늘 보고 있었다는 듯이, 늘 그 속에 있다는 듯이, 아무도 올 수 없는 그 경지에서 김영승 시인을 보았다는 듯이, 절규 하듯 장문의 글을 써오셔서 울분을 토하듯 축사를 하셨다. 축사가 너무도 길어서 모두들 민망해 하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거침없이 외쳤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그 자체로 이 시대의 시를 쓰며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퍼포먼스였다. 이런 가난의 길 외로움의 길 고통의 길을 갈 수 있는 사람만이 시의 길에 오라고 외쳤던 한 편의 시였다. 아니면 김영승 시인이 말하는 『무소유 보다 더 찬란한 극빈』에 도달하여 누구도 누리지 못하는 고고한 세계를 거닐어 보라는 것이었을 것이다.
   선생님은 1956년 24세의 나이로 《문학예술》지誌에 이한직 선생으로부터 시 「숲」이 추천되어 문단에 발을 들여 놓았다. 당시 김관식, 천병상, 박봉우, 윤삼하, 박재삼, 권일송, 조윤제, 박성룡 등 시우詩友들과 명동의 백작들이 되어 詩와 술과 사랑과 낭만으로 정열의 불꽃을 태웠다. 이 때가 선생님이 가장 시인으로써 행복했던 시절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지금도 가난한 시정신 때문에 궁핍하게 살아가며 피를 토하듯 시를 쓰며 살아가는 시인들이 많다. 대부분의 시인들이 궁핍하게 살아간다. 깨끗한 영혼을 조금이라도 더럽히지 않으려고, 헐값에 팔아 치우지 않으려고 피를 흘리며 시를 쓰는 시인들이 있다. 선생님과 같이 가난에 행복을 음미하며 궁핍함을 감내하려는 시인들이 있다. 선생님의 가난한 시정신은 그들이 시를 지키고 영혼을 지키고 우주적인 사랑을 실천해 나가는데 큰 힘이 될 것이다.



병신으로 살아온 인생살이
반평생을 반신불구로 살아온
부처께서 주신 몸을 다스리지
못한 눈물겨운 죄
누가 따뜻이 안아주랴


병신으로 살아온 반평생
지나는 나그네조차
거들떠보지 않고
비웃음을 날리는데


나 떠나는 날
맑고 맑으신 달이
눈물을 흘리시겠는가
울음을 우시겠는가


나 떠나는 날은 달도 울지 않으리


                                                                   ―「나 떠나는 날은 달도 울지 않으리」전문



   1980년, 40대 후반의 나이에 한국잡지협회 이사회 참석 후 귀가하던 중에 뇌졸중으로 쓰러지셨다. 오른쪽으로 마비가 와 반신불구의 몸이 되었다. 한창 일할 나이에 이혼하여 간호할 아내도 없고, 아이들을 키우고 가르쳐야 할 때에 청천병력이었다. 온갖 치료에도 불구하고 마비된 몸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 몸 그대로 35년이 넘게 병고에 시달리셨다. “부처께서 주신 몸을 다스리지/못한 눈물겨운 죄”를 한없이 뉘우쳐도 “맑고 맑으신 달이/눈물을 흘리시겠는가”라고 한탄한다.
   우리는 모두 예비 장애인이다. 정상적인 몸이 갑자기 다치거나 회복할 수 없는 병을 얻게 되면 장애인이 된다. 장애인은 고통스럽다. 사회의 차별과 편견도 고통스럽지만 스스로 좌절과 절망에 빠져 어둠에 갇히는 것이 더 고통스럽다. 선생님은 졸지에 장애인이 되셨지만 곧바로 장애를 극복하셨다.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첫 번째 할 일이 자신이 장애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나는 절룩거리는 나다. 나는 이 세상에 하나 뿐인 나다. 
   선생님은 숨기지 않고 가리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모습을 내보이셨다. 지팡이를 번듯하게 세우고, 고개를 치켜세우고, 입을 꽉 다문 모습으로 항상 당당하셨다.
선생님은 그런 반신불구의 몸으로 문협행사는 물론 출판기념회, 시화전 등 여러 문학행사에 자주 참석하셨다. 또한 불구의 몸으로 장애인들을 돕는데도 적극적이셨다. 자신을 돕겠다고 독지가들이 준 돈을 다시 자신보다 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자신의 궁핍을 오히려 풍요로 만드셨다. 뼛속까지 젖어있는 부처님 자비정신의 실천이셨다. 선생님의 이런 모습이 불구의 불쌍한 모습으로 동정심을 자극하려는 것으로 보았다면 잘못 본 것이다. 사람 불편하게 하는 특유의 언행이 다소 주위의 사람들을 힘겹게 했지만 그때마다 가까이 있던 우리들은 자신을 합리화하면서 선생님 곁을 벗어나려고 하지는 않았는지, 조금의 자선을 베풀고 마치 할 일을 다 한 것처럼 당당하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선생님의 거울에 비춰진 내 모습이 참으로 남루하고 비루하다.
   돈이 최고의 가치가 되어버린 이 시대에 가난한 자의 모습은 비참하기 짝이 없다. 시인이라고 면죄부가 주어지지 않는다. 가난해도 당당한 시인의 모습은 지금 찾아보기가 어렵다. 가난해도 외로워도 병고에 시달려도 당당하고 독선적으로 아프게 빛난 선생님의 모습은 어느 누구도 다시 재현할 수 없을 것이다. 맑은 눈물을 소리 없이 뚝뚝 흘리시며 힘겹게 언덕을 넘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그 언덕을 넘으신 선생님은 지금 고향의 등불을 벅차게 내려다보고 계실 것이다.
산 능선 아래 언뜻 자귀나무 한그루가 부채살 같이 퍼지는 연분홍꽃을 흐드러지게 피웠다. 그 꽃들 사이로 호랑나비 한 마리와 긴 꼬리제비나비가 한가로이 날고 있다.


 


 
 



**약력: 2014년 《리토피아》로 등단. 막비시동인.  본지 부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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