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12호/신작특선/정치산/낙서·3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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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특선
정치산
낙서·3
눈이 무겁다. 눈발이 투두둑 떨어진다.
뱀의 꼬리를 놓치고 달아나는 눈발이다.
뱀의 입에서 터져나오는 트림이다.
목숨 줄이 질겨서 갑갑해.
그 소리에 알몸이 되어 가려진다.
칼바람 에이는 강가에 버려진다.
틈이란 틈은 다 파고들며 머리카락을 자른다.
잘린 머리카락을 들고 살쾡이 걸음으로 사라진다.
바람의 그림자가 되어 시시 때때로 눈발이 흩날린다.
오늘 또 느닷없이 옴팡지게 얻어맞는다.
눈이 무거워 뱀의 꼬리를 놓고 달아난 눈발이 쏟아진다.
후두둑 바람이 불자 다시 눈들이 다가오고 문이 흔들린다.
선잠을 깬 그의 머리 위로 내려앉는 눈발에 하늘이 열린다.
닫힌다.
낙서·4
떨어지는 문장입니다. 지워지는 얼굴입니다. 사라지는 세포입니
다. 가라앉는 먼지입니다. 뭉개지는 그림입니다. 깊어지는 어둠입니
다. 사라지는 안개입니다. 사라졌다 뭉쳐지는 안개입니다. 안개 속
에 삼켜지는 얼굴입니다. 흩어졌다 사라지는 문장입니다.
심해에서 재생되는 물방울입니다. 떠오르는 기포입니다. 고요하
게 만들어지는 파문입니다. 하나가 여럿으로, 여럿이 하나로 뭉쳐지
는 에너지입니다. 저만치 밝아지는 눈입니다. 또렷이 만져지는 코입
니다. 쫄깃하게 삐죽이는 입술입니다. 해맑은 귓바퀴입니다. 싱싱한
달팽이관입니다. 또렷이 드러나는 몸통입니다. 드디어 나타나는 얼
굴입니다. 끝내는 읽혀지는 문장입니다.
낙서·5
아침부터 알람이 목을 졸랐어.
여덟 시에 시계를 던져버리고 아홉 시에 핸드폰을 꺼버렸지.
늦게 도착한 버스 앞문도 걷어찼어.
그리고는 신발 한 짝을 끌고 버스를 탔지.
어젯밤 취해서 버스에 놓고 내린 신발 한 짝이 점잖게 타고 있었어.
그들만의 궁에 한 발이 빠졌던 거야. 한 발이 달아났던 거야.
버스 안의 시간은 아직도 어제의 시간이었어.
깨어난 어제의 시간이 기지개를 켜고
아침은 오후를 향해 부지런히 달렸어.
목을 조르던 알람은 스르르 봉인을 풀고
버스 문이 힘차게 열리고 있어.
달 속으로 스민 뱀
달을 베어 문 꽃뱀이 껍질을 벗는 날이었어.
노을은 오므라지는 연꽃에 갇히고
뱀의 혀는 우주를 들어 올리고 있었지.
노을은 연꽃 속에서 혼절하고
꽃눈이 환한 뱀은 노을을 강물로 집어 삼켰어.
눈이 맞은 뱀이 달 속으로 스며들었어.
깜빡, 달이 취하고 잠들지 못한 항아는
지구를 두 바퀴 반이나 돌고 돌았지.
뱀의 혀는 은빛으로 물들고
툭툭툭, 몇 알의 씨앗을 낳아놓았지.
폭폭폭, 꽃씨가 터지는 새벽이었어.
낙서·6
명왕성에서 온 그녀의 핸드폰 문자를 읽는다.
그가 금성의 달을 가져왔단다.
그녀의 문자들이 지그재그로 달아난다.
그녀의 폰이 하얗게 깜빡인다.
화성에서 온 그녀가 핸드폰 문자를 읽는다.
그가 금성의 달을 숨겨놨단다.
그녀의 폰이 부르르 떤다.
그녀들이 수신한 문자가 그에게 전달된다.
그 남자, 달아나는 문장을 잡아다가 열을 맞춘다.
그 옆으로 슬금슬금 지렁이 기어간다.
그가 인공위성 하나를 꺼버린다.
전파가 한 방향으로만 흘러간다.
그가 있던 곳의 위치가 사라진다.
잡아다가 열을 맞춘 문장이 사라진다.
그도 사라진다. 인공위성이 켜진다.
사라진 그가 금성의 달 속에서 그녀들의 문자를 읽는다.
<시작메모>
연두색 잎들이 초록으로 몸을 바꾸고 있는 풍경이 눈에 들어오는 날이다.
아침마다 어김없이 찾아드는 두루미 떼가 물속을 헤집어 놓는다.
헤집어 놓고 가버린 시간 밖으로 기억이 흐른다.
바람이 불어온다. 흐르던 물살이 역방향으로 흘러간다.
그렇게 흘러간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닌 날이다.
기억을 쪼아낸 시간이 손끝에 머물러 제멋대로 끄적거린다.
**약력: 2011년 《리토피아》로 등단. 시집 『바람난 치악산』. 막비시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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