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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호/신작시/박찬선/들길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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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박찬선
들길
오게, 풀냄새 나는 들길로 오게
풀들은 저마다 이슬방울을 달고
해맞이에 분주한 때일세.
바지가랭이가 좀 젖으면 어떤가
밤새 치장을 한 온갖 풀들의 풋풋한 모습을 보면
모두가 한 몸으로 개벽을 꿈꾸었던 얼굴이 떠오르고
풀과 내가 한 포태胞胎의 소산으로 하나임을 알지니
하늘 향해 하나 같이 팔 벌려 기구하는
어울려서 아름다운 풀들의 세상
어린 풀벌레도 덩달아 노래하고 있나니
오게, 아무리 오랫동안 헤맨다 해도
다시 떠난 곳으로 돌아오는 것을
물씬물씬 풍기는 푸른 풀냄새
마음도 풀물이 드는 살아있는 생명의 냄새
영성이 뿜어내는 포덕布德의 향기일세.
들길은 내가 나에게로 돌아오는 길
들길은 내가 나에게로 돌아가는 길
동녘으로 트인 밝은 빛의 길은
모두가 하나 되는 하늘길인 것을
어서 오게, 어지러운 잠자리에서 뒤척이지 말고
풀꽃이 반겨주는 들길로 오게.
티치아노의 신중함의 알레고리*를 보고
건강을 위해 뒤로 걷기를 하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의 눈은 뒤를 본다.
역사탐방, 지나간 행사의 걷지 않은 현수막을 보고
허리에 겨울옷 입은 묵은 가로수를 보기도 한다.
얼마쯤 걷다가는 돌아서서 바로 보며 걷는다.
훨씬 활기차다.
마치 살아있는 것은 움직이는 것이라고 증거를 하듯
북녘에서 날아온 청둥오리들의 움직이는 그림을 본다.
이월상품 특가 매출 오늘이 마감이라는
가두방송을 듣기도 한다.
그러다가 신나게 걷다가 무릎에 이상이 왔는지
딱 멈춰 서더니 주저앉는다.
현기증으로 오는 어둠, 앞이 보이지 않는다.
어둠 속에서 늑대, 사자, 개의 얼굴이 한꺼번에 나온다.
싸울 줄 알았는데 바라보는 방향이 각기 다르다.
지나가던 세 사람이 연달아 심호홉을 시킨다.
눈을 뜨고 일어선다. 다시 걷는다.
보이지 않는 심연으로 점점 빠져 들어간다.
* 티치아노Tiziano Vecellio(1490년경-1576) 16세기 베네치아 미술의 황금기를 이끈 화가. 1565년 경 켄버스에 유채 76×69cm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 세 남자 왼쪽 티치아노 자화상.(과거) 가운데 아들 오라치오(현재) 오른쪽 조카 마르코(미래). 아래에 늑대, 사자, 개의 머리. 헬레니즘 시기에 이집트에서 숭배 받은 지하세계의 신 세라피스의 상징물. 세라피스가 들고 다니던 뱀의 몸통에 머리 셋 달린 짐승은 영원한 시간을 의미함. ―과거의 경험을 통해 현재에 신중하게 행동하고 미래에 경거망동하지 않도록― 그림 상단에 쓰인 글.
**약력:1976년 《현대시학》 추천. 시집 『돌담 쌓기』, 『상주』, 『세상이 날 옻을 먹게 한다』,
『도남 가는 길』. 평론집 『환상의 현실적 탐구』. 설화집 『상주 이야기Ⅰ,Ⅱ』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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