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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호/신작시/노혜봉/해쑥 냄새를 품다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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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노혜봉
해쑥 냄새를 품다
“저 쑥!” 눈치코치도 없다는 어이없는 표정
쑥이라고 날 놀렸던 외삼촌도 가신지 오래, 모른 척
숙맥이라 부르며 딸 근심 걱정 떠날 날 없던
어머니도 하늘로 가신지 몇몇 해, 해가 갈수록
초봄 해쑥을 뜯어 살짝 말려 끓인 된장국이 좋다
냄새가 향긋이 코에 눈에 스며서 제 맛을 돋군다
슴슴한 된장국에 쑥색이 혀에 감돌아 참맛이다
바랜 쑥색은 그늘진 느낌을 감추어서 보기에 좋다
그래, 이제야 제법 쑥으로 자랐다 진짜 곰쑥이다
비알 밭인지 허공인지 분간 못하는 어린 장님인 듯,
헛발질 삶을 살아가는 빈손에 참쑥을 뜯어 놓으면
숙맥菽麥도 걸음아 나 살려라 저만치 도망가는,
철부지 나는 아직도 일마다 숙맥 노릇 하며 산다
햇봄에 쑥전 쑥개떡 쑥버무리 해먹으면 온몸이 향긋해
끓는 물에 들어가야만 쌀가루에 범벅으로 짓찧어야만
본색이 스며든다 쑥은 사철 질리지 않는 참한 친구
온 뜰 안, 누구는 쑥향이 은은한 그 번짐으로 좋단다
속살속살 속 살
홍매화 꽃잎 환하게 드리운
안마당 둘레가 노을빛이다
여유당與猶堂* 서안書案 상
옻칠한 나무 무늬도 노을빛이다
옛 선비의 펼쳐진 하피첩霞皮帖
고비 안의 편지가 머뭇머뭇
망설이며 숨죽인 좀벌레
살얼음물 건너듯 주름살을 편다
봄볕 속살이 팽팽하다
문집 갈피갈피 잘 익은 먹 냄새
차올라 모처럼 마음이 내킨 듯
천장까지 온통 금빛 천지다
쇠내 냇물을 바람 따라
건너 온 홍매화 꽃잎 몇,
梅鳥圖 그림을 보다가
귀엣말로 딸애에게 속살속살……
봄빛 고요한, 안마당에 붓글씨
여與*여, 유猶여
매화그림자를 벗어놓다
* 다산 정약용 생가의 편액 여유당.
* 여與 : 머뭇머뭇 겨울 냇물을 건너듯 하라는 뜻 유猶 : 조심조심 사방을 두려워하는 듯 하라는 뜻.
**약력:1990년 《문학정신》으로 등단. 시집 『산화가』,『쇠귀, 저 깊은 골짝』, 『봄빛절벽』,
『좋을好』. 성균 문학상, 시인들이 뽑는 시인상, 류주현 향토문학상, 경기도 문학상 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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