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사이트 내 전체검색

수록작품(전체)

12호/신작시/김왕노/복사본 외 1편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211회 작성일 17-01-05 16:10

본문

신작시

김왕노





복사본



바람에 나부끼는 자작나무 잎이 나를 복사한다.
나는 수천 수 만 장 복사된다.
잎맥만 뚜렷하고 오래 태양에 빛 바래어서
낡은 문장과 읽어도 혼란스러운 무의미로 복사된다.
어느 가을날 내 복사본인 자작나무 잎이 바람에 휘날릴 때
내 청춘도 한 철 보낸 후의 끝물로 휘날릴 것이다.
오늘은 나를 복사한 자작나무 잎이 끝없이 서걱대고
원본이지만 나도 오래 자작나무 잎과 서걱댈 것이다.
먼 훗날 원본마저 희미해진 날 자작나무 잎은
복사할 사람 하나 없어 하늘만 거푸 복사해 댈 것이다.








월출산 벼랑 검독수리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뼈에서 살을 발라먹으며 할아버지를 천장하고
하늘을 휘저으며 도는 검 독수리가 되었다.
할아버지는 범도 무서워 얼씬거리지 못하게 하는 누룩 소 한 마리
 이 땅의 수난사 위로 억센 울음이 풀로 돋아나
명검보다 더 날카로운 날을 가지고 밤마다 억울하다며
쩡쩡 울 때도 할아버지 그 풀 다 뜯어먹고
게으르게 되새김질 하다가 때로는 배안의 풀에 날이 살아났는지
붉은 눈으로 앞굽으로 땅을 벅벅 긁어대며 울었다 한다.
울음에 하늘 한 편이 와장창 무너져 내리고
코뚜레 끼지 않는 할아버지라 아버지는 고삐를 잡고 달래서
할아버지를 집으로 모셔오지도 못했다.
할아버지에게 주눅 든 아버지는 먼 들판에 나가
새알을 줍고 해당화 피면 해당화 붉은 언덕에 올라
먼 바다에서 돌아오는 고래 울음소리 기다리면서
고래 등에 꼽을 녹슨 작살을 날마다 닦으며 손보았다.
할아버지는 여전히 너른 들판을 차지하고 파수하는 누룩 소 한 마리
들판으로 철없이 대닫는 바람에게도 뿔을 창처럼 겨누던 할아버지
할아버지 죽어 가죽은 북으로 남기고 언제 다시 태어나라며 울었다는 아버지
개망나니 나를 키우고서 돌 속까지 쪼아대는 날카로운 부리로
할아버지 살을 파먹고서 하늘에 날아올라 검독수리 한 마리가 되신 아버지
검독수리 월출산 높이 선회하며 울 때마다 아버지 목소리를 듣는다.
아버지 영혼이 된 누룩 소 할아버지의 소똥 냄새도 맡는다.
세월이 어두울 때는 거침없이 뿔을 앞세우고 고래 같이 등을 휘어
앞으로 내달리던 할아버지, 범도 무서워했다던 할아버지
투우보다 더 뜨거운 콧김의 할아버지
우레보다 더 큰 굽 소리 내면서 내달렸다던 할아버지
백두대간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소 울음 울던 할아버지의 영혼으로
깎아지른 것보다 더 깎아지른 정신을 가진 아버지는
여전히 검독수리 한 마리로 월출산 벼랑에 살고
누룩 소 할아버지는 리모델링해 몇 천 평 넓힌 내 꿈속의 들판에서
지금도 한가로이 풀을 뜯는다.
나는 이것이 나의 내력이라 가끔 별에게 들려준다고 밤이슬에 젖는다.









**약력: 1992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집 『슬픔도 진화한다』, 『말달리자 아버지』(문광부 지정도서), 『사랑, 그 백년에 대하여』,

『중독』(박인환문학상 수상집), 『사진속의 바다』(해양문학상 수상집),『그리운 파란만장』등.

한국해양문학대상, 박인환 문학상, 지리산 문학상,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 문학창작금 등 수혜 및 수상. 시인축구단 글발 단장, 시와 경계 주간.

추천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대한노래지도자협회
정종권의마이한반도
시낭송영상
리토피아창작시노래영상
기타영상
영코코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정기구독
리토피아후원회안내
신인상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