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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호/신작시/양승준/참외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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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456회 작성일 17-01-05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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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양승준





참외



냉장고에서 오래된 참외 하나가 나왔다
아내가 넣어 두고는
그만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쭈글쭈글한 게 잘 깎이지 않았다
쉽게 과육을 내주지 않겠다는 듯
제 몸을 꽉 움켜잡고 있었다
괜한 고집을 부리는 품이
쥐뿔도 없이
자존심만 내세우는 나를 닮았다
며칠만 늦었더라면
참외 속은 누렇게 농익어
쉰내가 났으리라
분명 맛도 못 보고
버렸어야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아직 쓸 데가 있을까
버렸어야 했는데, 
어젯밤에도 아내는
잠든 나를 보며
그렇게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갑자기 내게서 노인 냄새가 났다









싸리나무를 추억하다




이른 아침부터 뻐꾸기가 우는 게
제법 여름 느낌이 나는 요즘입니다
아카시아 향이 사라진 산길에는
키 작은 싸리나무들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앉아
연자색 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화려하지는 않아도 꿀이 많아
양봉 농가에서 특히 좋아한다는 꽃입니다
그러고 보니 오래 전,
특전사에서 군대 생활할 때
가지를 태워도 연기가 나질 않아
침투 훈련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게 해 주던
제 추억 속의 나무이기도 합니다


아, 그보다도 더 각별하게 떠오른 것은
부디 사람이 되라며
찰지게 제 종아리를 휘감던 싸릿대 회초리입니다
마치 발정기에 든 어린 당나귀처럼  
천방지방 날뛰던 저의 성정을
그때마다 눈물로 다독여 주신 어머니


겉은 부드러워도 속은 야무진 이 싸리나무처럼
남에겐 관대하고 자신에겐 엄격해야 한다는
어머니의 깊은 뜻이
함께 담겨 있었던 건 아니었는지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오늘도 저는
저에게 한없이 너그러웠습니다
어쩌면 제가 좋은 시를 쓰지 못하는 것도
바로 그런 까닭인지 모르겠습니다
시를 쓴다는 것, 그것은 제가
저를 향해 드는
일종의 회초리이기 때문입니다









**약력:1992년 《시와시학》 및 1998년 《열린시학》(시조)으로 등단. 시집 『뭉게구름에 관한 보고서』,『슬픔을 다스리다』,『위스키를 마시고 저녁산책을 나가다』,『영혼의 서역』,『사랑, 내 그리운 최후』,『이웃은 차라리 없는 게 좋았다』. 연구서 『한국현대시 500선 · 이해와 감상』 상·중·하 등. 원주예술상, 강원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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