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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호/신작시/유정임/낙숫물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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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유정임
낙숫물
오랜만에 달항아리 같은 친구 집
대청마루에 앉아있다
백련차 한 잔 앞에 놔주고 친구
부엌에서 무얼 더 주고 싶어 달각거리고 있는 동안
소나기 한 소끔 지나가고
처마 끝에 낙숫물 똑똑 떨어진다
둥글게 퍼져가는 낙숫물 소리
부엌에서 들리는 마중물 같은 작은 달각거림
처마 넘어 막 지나가는 구름 발자국 소리 같은
까마득하게 잊었던 침묵의 소리들까지
파장은 꿈틀대며 혈관을 타고 온몸을 훑어내린다
어느 임의 손끝보다 더 세심한 애무
마른땅에 물 스미듯 번지는 따스한 전율에
취한다
아파트 허공 중에 살면서
비는 늘 직립이었고
창에 매달려 울던 매미처럼 모든 소리는 고성이었고
각지고 날카로운 것들의 쳇바퀴 속에서
여린 것들과 이별을 하고도 이별한 줄도 모르고
귀 먹었어도 귀 먹은 줄도 모르고 살았던
거칠고 가시 돋친 시간을 몸을 지우고 다독인다
메마른 우둔함조차
헤아리지 않고 그저 똑똑
한 줄기 햇살 속 영롱한 파문
따듯한 우주 속에 몸을 담근다.
매미와 늙은 남자
매미 한 마리, 방충망에 붙어
다른 세상을 들여다보고 있다
푸근해 보이는 소파에 앉아있는 사람
이리저리 걸어 다니는 사람
은은한 채도로 빛은 어룽댄다
한결같은 바람도 느껴진다
저 사람의 어깨에 붙어 울 수 있다면
저 소파에 앉아 쉴 수 있다면
저 불빛 속에서 춤을 출 수 있다면
매일 울어야 하는 이 악착같은 울음
멈춰도 좋지 않을까
방충망에 붙은 매미 꿈을 꾸는지 요동이 없다.
늙은 남자
꼼짝 않고 방충망에 붙어 있는 매미를 의자에 앉아
고개를 오른 쪽으로 꺾고 올려다보고 있다
그 적막을 삼킨 늙은 몸에
작은 죽음 하나가 붙었다
할아버지가 만들어준 매미채가 사라진다
방죽 길에 서 있던 미루나무가 사라진다
어머니는 또 어디를 가셨는가
자전거 타고 면사무소에 가신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으신다.
새파란 재잘거림이 웅얼웅얼 사라진다
그는 기다리고 있다
神藥 같은 시원한 한 줄기 바람을
그 신약을 삼킨 매미가 힘차게 울어 주길
작은 죽음 하나 훨훨 날아가길
**약력:2002년 《리토피아》로 등단. 시집 『 봄나무에서는 비누 냄새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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