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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호/신작단편/이준태/20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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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단편
이준태
20년후
웅천이라는 곳은 행정구역으로는 진해시 웅천동으로 진해시내에서 경화동을 지나가는 국도를 따라가면 해군 신병훈련소를 지나고, 덕산사격장을 지나, 진해비행장을 나란히 하고 해안가로 가면 속천, 장천하는 칠비와 동방유량공장이 나오는 공단 가는 길이고, 그 중간에서 산으로 올라가는 국도를 따라 고개를 올라가는데 중간 쯤에 화장터가 있었고, 고개를 넘어서 천자봉 자락을 굽이굽이 돌아 한참 가면 적지 않은 들이 나오고, 지서와 동사무소가 있는 큰 마을이 나오는 데 거기가 웅천이다. 시내에서 이십리나 떨어져 있어 동이라는 행정구역보다는 면이 더 어울려 보일 것 같은 그런 촌락이었다.
남준의 사관후보생 시절에 웅천에서 주야간 독도법실습을 했었고, 임관 다 되어서는 대민지원을 간적이 있어 낯 설은 지역은 아니었다.
경비대 웅천소대는 그 지역 해안을 방어하는 것이 주임무였다. 삼포,명동의 해안으로부터 괴정포구를 지나, 우측으로 흰돌이의 돌출부해안까지 약 6KM정도되는 해안을 방어하였고, 웅천을 지나 부산 쪽으로 가면 창원시 웅동면이 있고 웅동면에 통제부의 식수를 공급하는 수원지가 있었는 데 그 시설보호를 맡고 있었다. 웅동이나 웅천이나 지금은 통합된 창원시에 속한다.
사실 최전방 연평도에서 1년 6개월의 소대장시절도 만만치 않았는데 후방이라고 진해에 오니, 다른 동기생들은 여유로운 영외생활을 즐기는데 또 다시 책임 막중한 해안 방어소대장을 맡게되니 마음 편할리 없었겠지만, 손바닥 만한 섬에 최전방이라고 소령, 중령, 대령 즐비한데다가 경계근무니 진지작업이니 교육훈련이니 하면서 쉬지 않고 볶아대는 연평도 보다는, 독립부대로 명실공히 지역사령관으로서 면모 갖추고 있었고, 체질적으로 흙 밝기를 좋아하고, 거칠은 자연과 같이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남준은 그곳 생활을 퍽 즐겼으며, 특히 그곳 사람들의 풍성한 인심과 아름다운 바닷가 마을의 정경은 오래도록 잊을 수 없었다.
부대배치
부대방어지역이 하도 넓어 좌측, 우측하는 개념이 애매하기도 하지만, 부대배치도 상으로 보면 좌측 돌출부가 1분대 분초였고, 대원들은 애칭으로 흰돌이산장이라고 불렀다.
웅천소재지에서 차를 내려서 남쪽으로 걸어 내려오면 학교와 동사무소를 거쳐서 남문이라는 곳에 이르고 거기서 큰길을 계속 따라가면 소대본부가 위치하는 괴정부두가 나오고, 남문에서 좌측으로 난 작은 길을 따라 해안가로 가게되면 와성,사도하는 마을이 나온는데 와성마을은 양 쪽 돌출부 안으로 깊숙이 들어와 만의 가운데에 자리잡은 반농반어의 바닷가마을 이었다. 와성의 해안가를 돌아서가다가 산으로 접어드는 고살길이 나오는데 다랑이 논 사이로 얼마 쯤 가다가 산길로 접어들고 그렇게 1KM정도 가다보면 분초가 나오는 데, 1분대에서 사용하는 옹달샘이 일품이었다. 산중턱에 있어 물맛이 좋을 뿐만아니라 수량도 많고,겨울에는 따숩고, 여름에는 시원하여, 더울 때 순찰가서는 아예 홀랑 벗고 물을 끼얹기도 했다
소대본부
남문에서 큰길로 계속 남쪽으로 가면 작은 다리하나 건너서 오르막길이 나오고 제법 숨이차도록 오르다보면 고갯마루가 나오는데, 고갯마루에 올라서면 괴정포구가 한눈에 들어온다. 고갯마루에 성황당 당산나무 같은 느낌을 주는 느티나무가 있었고, 느티나무 곁으로 돌계단을 따라 20여미터 올라가면 소대본부막사가 있었다. 이 소대본부는 3개월정도 있다가 저 아래 해안가 쪽으로 옮기게 된다. 고갯마루에서 한참 내려가면 어선과 작은섬들을 연결해주는 도선의 선착장이 있었고, 그 선창가로 횟집이 대여섯 군데 성업 중이었고, 그 선창가를 돌아서면 목선을 만드는 작은 조선소가 있었고, 조선소 안쪽으로 새로운 소대본부가 들어서게 되었다.
당시 괴정포구는 제법 붐비는 편이었다. 눈앞에 보이는 연도니 송도니 하는 작은 섬들을 육지와 연결시켜주는 도선들이 끊임없이 드나들었고, 때 마침 양식업이 활기를 띄기 시작하여 피조개, 전복 등을 일본으로 수출하여 어촌은 풍요로웠고, 그 근방이 청정해역으로 좋은 횟감이 많이 나온다는 소문이 자자하여 때때로 손님 치르는 것도 웅천소대장의 임무였다.
3분대 분초
소대본부에서 우측으로 보면 육안으로 돌출부가 보이는데 직선거리로는 1,5KM정도 되지만, 해안으로 걸어서가면 2KM정도 되었다. 초소입구에 삼포라는 동네가 있어 ‘삼포초소’라고 부르기도 했다. 삼포마을에서 조금더 가면 명동이라는 제법 큰 마을이 있었는데 그곳에 국민학교가 있었고, 버스 종점이 있어 삼포에서는 시내를 가려면 그 쪽에서 차를 탔다.
삼포는 전형적인 어촌으로 마을 전가구가 항상 어구를 손질하고, 고깃배가 매일 드나드는 조용한 바닷가 마을이었다.
‘황석영의 삼포로 가는 길’의 배경이 된 지명이 이 곳 삼포라 하고, 또 가수 강은철이 같은제목으로 된 노래를 불러 우리 귀에 익숙한 지명인데, 작품의 주제가 공업화로 인하여 잃어가는 고향의 모습과 인간성 상실 이었다.
실제로 몇 년 전에 그 근방에 한번 가 볼 기회가 있었는데 엄청나게 큰 조선소가 들어서 있었고, 옛날 삼포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웅동 수원지
웅천에서 부산 쪽으로 가면 바로 인접해 있는 면이 웅동면 인데, 웅천에서 웅동으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에 검문소가 있었다. 그 검문소 옆으로 산길이 있었고, 그 산길을 타고 내려가다보면 대원들이 경비근무하는 수원지 정수장 시설에 이르렀다.
수원지는 해군시설이라서 인지 훨씬 넓고, 깨끗했다. 수원지 뚝 아래로 아름드리 벚꽃 나무가 있어 벚꽃 피는 4월에는 적지 않은 관광객들이 다녀갔고, 수원지 안으로는 군사시설보호구역으로 숲이 울창하고 물이 좋아 여름철에 군인가족들에게는 각광받는 계곡이었다.
대원들 별칭으로 휴양지초소였다. 전역 2,3개월 앞둔 대원들을 편히 쉬었다가 사회적응 준비하라고 의례적으로 보내곤 했다.
웅동수원지 아랫동네로 장가를 들어 처갓집에서 진해로 출퇴근을 하던 해군장교가 있었는데 고향친구로 가까이 지냈다. 농번기마다 인력지원을 해주었고, 농촌에서 자랐던 남준도 농사일을 직접 거들어주며 우의를 돈독히 했다. 그해 가을에 수원지 뜰에 가꾸는 모과나무에 모과가 제법 열렸다. 모과를 술 담으라고 두어 바가지 보냈더니. 보름 쯤 후에 전화가 왔다. 술이 익었다고, 그 날 저녁 밤이 이슥할 때까지 술을 얻어 마시고. 자정이 넘어 이십여리 길을 걸어오는데 온 산하가 달빛이 가득했다.
남산
웅천에서 남쪽으로 보이는 제법 큰 산, 와성사도로 가는 길에 접어 드는 산, 후보생 시절 야간독도법 실습 때 그 산록을 헤매던 기억이 있다. 해발 2백여 미터 되는 정상에 올라가 보면 여기저기 무너진 성곽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고, 성곽 주위로는 시누대가 많이 자라고 있어 성은 이순신 장군이 쌓은 성이고, 화살로 쓰려고 시누대를 심었을 것이다라고 확정적으로 대원들에게 설명하곤 했는데,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무식이 도를 넘었다고나 할까. 연 전에 방영되었던 ‘불멸의 이순신’에서 보면 임란이후 정유재란 때까지 그 지역은 한번도 우리수군이 상륙한 적이 없었던 곳이었다. 즉 왜놈들이 쌓았던 왜성이었던 것이었다.
봄이 오면 진달래 먼저 피고, 이십 일 후 쯤 철쭉이 피는데 진달래 보다 색깔이 더 진한 철쭉이 피던 철에는 온 산이 눈이 시리도록 붉었다. 가을에는 키 넘는 억새가 장관을 이루어
철마다 사진을 찍으러갔지만, 꽃 앞에서 일렬로 서서,또는 성곽 앞에서 버티고 찍는 아마튜어 솜씨로는, 흥분에 떨며 감탄하던 그 아름다움을 십분의 일도 담지 못한 것 같다.
남산의 해안가로 돌출부에 우리1분대에서 진입하는 야간근무초소가 하나 있었고, 그 초소로부터 소대본부까지 험한 벼랑을 오르내리는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던 해안순찰로가 있었다. 한 없이 바다를 보며 걷는 길이었다. 남준은 이 길을 즐겨 다녔다. 바다의 저쪽 건너편은 거제도 였고, 관목을 헤치고, 가시덤불을 비켜가는 험한 길이었다. 가다가 보면 꿩, 노루도 심심치 않게 만나고 호젓하기 그지없는 길이었다.
괴정포구 가던 고갯마루에 우측 능선에 위치하고 있었던 소대본부는 산등성이에 있어 포구가 한눈에 들어오고, 시계가 틔어있어 경관은 뛰어났지만, 해안근무부대로는 여러 가지 불비한 점이 많았다. 주야간으로 수없이 드나드는 소형어선과 도선들을 해안으로부터 500미터이상 떨어져 있는 산등성이에서 관측, 통제가 힘들 뿐 아니라, 비상시에 전혀 대처할 수가 없어 오래전부터 소대본부 이전계획이 수립되어, 남준이 임지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막사 건립공사가 착수 되었었다.
고갯마루 소대본부에서 2개월여나 근무를 했나. 78년 7월 중순쯤 이사를 한 것 같다.
아무리 군인들 이삿짐이지만, 이십여 명 가까이 되는 식구에다가 군인들 개인병기 및 장구 만만치 않아서 아침부터 오후 늦게 까지 짐을 옮기고, 밤늦게 까지 정리하다, 대충 마무리하고 취침에 들도록 하였다.
다음 날 어둠이 가실 무렵, 이른 새벽쯤이나 되었던 것 같다.
처음에 쿵쿵하면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이어, 우리 소대 상황실 근무자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린다. “소대장님! 소대장님!” 느낌이 예사롭지 않다.
침상에서 벌떡 일어나, 방문을 열고 나가니 바로 코앞에 해군의 푸른 전투모에 별 두개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당시의 통제부 사령관 이었고, 그분이 나중에 해군참모총장까지 지내셨는 데.....
이런 엄청난 일이 내 앞에서 일어나다니, 하급장교 중소위가 군대 3년 통 털어도 이렇게 지근한 거리에서 별 둘의 거물을 조우하는 경험은 거의 없었다. 산천초목이 벌벌 떨던 Two Star Admiral(해군제독)이 앞에 짐짓 굳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목소리가 터져라고 “충성” 하고 경례를 올렸지만, 이미 상황은 엎지른 물이었다.
이곳 저곳을 다니면서 상황실 시계가 걸려있지 않고 구석에 박혀있다는 둥, 관물 정돈이 엉망이라는 둥, 취사장이 불결하다는 등등의 지적사항은 남기고 떠났지만, 도저히 용서가 될 수 없는 상황은 진즉 전개 되어있었다. 소대 야간 근무초소가 뚫린 것이다. 전혀 제지 없이
소대막사까지 들이 닥쳤던 것이다. 소대본부에 주야간 근무초소가 있었는데, 통상 취사병이 말직 근무자로 근무를 서다가 동이 트면 주계(취사장)에 들어가서 밥을 짓곤 했다. 정확히 밥 짓던 시간에 우리초소를 통과 했던 것이다.
대단한 독종이었다. 새벽에, 그것도 통제부에서 10KM나 떨어진 궁벽한 해안가에 더구나 일출이나 일몰시간이 경계근무 취약시간 아닌가. 그 뒤로 그 전에도 통제부의 최고 사령관이 웅천소대를 방문한 적은 전무했으니. 소대본부 이전을 보고 받은 것 같았고, 내심 이런 결과를 기대하고 왔었고, 돌아가면서 스스로의 족집게 같은 통찰력에 흡족했을 것이다. 노회한 장군이었다. 오랜 군 생활에 틀림없다고 예측을 하고 들른 것이다.
나중에 육군들 이야기를 들으니 전두환이 사단장 시절에 이렇게 암행 순찰을 많이 돌았다는데 전두환은 근무 태만자가 발각되면 그 자리에 영창을 보냈다 하니, 남준이 만났던 해군제독은 전두환보다는 조금 나았다. 지휘관의 순찰에 대한 에피소드는 많다. 졸고 있는 초병을 보고는 초병이 깨어날 때까지 대신 경계근무를 섰다던 나폴레옹처럼 좀 더 멋지게 꾸미지 못하나?
어차피 쇼멘십이겠지만, 격무에 지친 장병을 격려는 못할망정
그가 돌아가고 경비대본부에 보고를 하니, 빗발치는 전화에 경비대가 발칵 뒤집혔다.
곧이어 경비대장이 지프를 타고 나타나더니, 거침없는 발길 질, 주먹 질 무슨 변명이 통하겠는가? 무슨 구실을 대겠는가? 아예 몸을 맡겨 버렸다.
그런 끔찍한 시간을 보내고, 이제 끝났는가? 하였더니. 또 호출 그 시간 대 근무자 1.3분대를 포함하여 13시까지 경비대 본부에 도착, 도착 보고를 하니 차렷자세로 대기, 7월의 땡볕아래 기합중의 기합이었다. 한시간 쯤 지나니 얼굴에 땀방울이 골을 이루어 뚝뚝 떨어진다. 나무그늘을 그리다가 지쳐서 포기, 포기 조차도 않되어 의식이 가물가물한 상태였나, 한시간 반이나 지났나? 1 분대 대원하나가 졸도를 했다. 고마웠다. 긴급히 의무실에 업혀가고 난리를 치더니 기합해제.
소대본부 이사 턱을 이렇게 치러냈다.
맥아더장군이 남긴 명언
“전쟁에 패배한 군인은 용서할 수 있어도, 경계에 실패한 군인은 용서할 수 없다.”
남준이 웅천소대에 부임한 때가 1978년도 중반이었으니, 그 당시 우리나라가 산업화 초기단계에 진입할 때였다. 중동에 해외건설 붐이 일기 시작했고, 마산수출자유지역은 자리를 잡아가고, 창원에 국가산업단지가 조성되어 여기저기 공장이 들어설 즈음이였다. 아직은 마을마다 젊은 사람들이 있어 농사일도 거들고 뱃일도 하고 하던 때였다.
초소 주위의 마을 새악시들과 대원들의 스캔들이 심심찮게 있었는데, 마을 총각들과 해병대 대원들과는 근본적으로 상대가 되지 아니했다. 체격이 좋고, 기상도 뛰어났겠지만, 다들 전방에서 근무하다 차출되어온 인원들이기 때문에 집안에 배경도 있고, 사는 것도 윤택하여 세련됨이 동네 총각들과 비교도 않되었다. 그래서 인근마을의 건달처녀들은 모조리 우리대원들의 차지였다. 물론 대원들과 마을 시악시들의 만남이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고, 우주 삼라만상이 음양의 조화로 이루어지는 것인데, 누가 그걸 말릴 수 있겠는가?
다만, 년전에 제대한 고약한 고참병들이 야간근무 진입 시에 동네 시악시들과 같이 진입하여 날을 새곤 했다고 하여, 그 것만은 철저히 엄금 시켰다.
그러던 어느 날, 소대본부 통신실에 통신병이 초소간의 통화를 감청하는 것 같은데, 무엇이 그리 좋은지 킬킬거리며 웃고 있었다. 전화기를 뺏어서 들어보니, 3분대 고참병하나가 야간초소에서 동네 아가씨와 함께 복초로 근무를 서고 있다고 떠벌리고 자랑하고 있는 중이었다. 퍼뜩, 이대로 나둬서는 않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소대본부에 비상을 걸고, 선임하사에게 전화를 직접 받으라 하였고, 절대로 소대장이 순찰 떠났다는 것을 알리면 혼이 날 것이라고 몇 번이나 다짐을 하고, 순찰병 한명을 데리고 후레쉬를 들고 삼포로 떠났다. 낮에도 인적이 별로 없던 길인데, 칠흑 같은 밤길 만만치 않았다. 삼포, 바닷가 마을은 고요하였다. 초소에 들어서니 개짖는 소리, 근무초병의 야간 암구호 수하 “ 손들어! 뒤로돌아!”하는 것을 제치고 내무반으로 바로 쳐들어가니 술판이 벌어져 있었고, 금방 초소 밖에서 여자의 교성을 들었는데 흔적이 없다. 해병대 초소에 출입하는 여자라서 인지는 몰라도 민첩성이 대단하였다. 그리고 삼포 청년 김삼용군과, 분초장 오하사와 제대말년의 김 병장 등이 술판을 벌여놓고 있었다. 김삼용은 해병대 예비역으로 남준이 연평도 입도하기 전에 제대하였다는 연으로 평소 마을에서 만나면 서로 ‘하소’하고 지내던 처지였다. 물론 야간초소에 술을 마시는 것은 않되지만 그를 크게 나무라겠는가? 분대장이하 전 대원을 밖에 집합시키고, 추궁하니 짜 맞춘 듯이 오리발이다. 분대장은 느낌이 외따로 떨어진 독립초소라서 고참병들의 눈치 보느라 정신이 없는 허약한 하사관 이었다. 당사자인 김00을 불러 세웠다. 지금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경기도 화성이 고향이었고, 연평도에서 2중대 1소대장 할 때 남준의 소대원이었는데, 중대장 추천으로 육지로 전출을 나왔던 병 311기, 다른 대원들보다 익히 알고 있던 처저였다.
“김00!”
“옛! 병장 김00!”
“너 그 아가씨 어떻게 했어”
“무슨 아가씨 말입니까?”
“ 야 임마! 너 아까 1분대하고 통화할 때 복초로 선다는 그 아가씨 말야”
“그런 일 없습니다”
“이 자식이!”
“아니 왜 이러십니까?” 하면서 엉겨 붙는다. 이제 얼마 되지 않아 제대하는 제대 말년병장인데 호락호락하지 않겠다는 시위였다.
뻔뻔하게 시치미를 떼고, 하극상까지. 남준은 극도로 화가 치밀었다. 주먹으로 한 방 내지르니 울퉁불퉁한 자갈 바닥에 그대로 나가떨어진다. 남준이 개구쟁이로 성장하면서 싸움질을 많이 해봤지만 처음 느끼는 섬찟한 순간 이었다. 숨이 끊어진 것이다. 경험 많은 어른들 말이 사람에게 드물게 한번 씩 살이 뜬다 하였다. 그 살을 맞으면 상대방이 죽을 수도 있다했다. 바로 급살을 맞아 죽는 다는 말이 바로 그 말이었다.
남준은 그대로 서있고, 나머지 대원들은 우왕좌왕하고. 마을 청년 김삼용이 경험이 많아서 인지 침착했다. 먼저 물을 떠오라 이르고, 입에 숨을 불어넣다가 빨아내기를 반복하고, 계속적으로 가슴을 압박하고, 짧은 시간이었겠지만, 숨이 끊어진 상태로는 긴 시간이었다.
일을 저질러 놓고, 지휘관이라는 어설픈 자존심 때문에 소생시키겠다고 덤비지도 못하겠고, 시간이 흐를수록 점 점 절망적이 되어가고, 참으로 만감이 교차했던 순간이었다.
1분은 훨씬 지난 것 같고, 2분이나 되어갈 쯤 이었던가? 느낌으로는 몇 십분이나 흐른 것 같았다. 가느다란 신음소리가 들린다.
드디어 살아난 것이다. 그날 상황은 어처구니없이 전개되어 버렸다. 일을 엉뚱하게 벌려놓고 보니까, 크게 나무라야 할 김삼용이이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돌아서서 가는데 도저히 그대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삼포 언덕 넘어까지 후레쉬를 비추고 가다가, 그 쯤에서 다시 불을 끄고 다시 이제는 잠입을 시도하였다. 시간을 길게 잡고 초소로 접근을 시도하였다. 소나무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이동하면서 가까이 다가가니 다시 개가 짖고, 근무자가 “누구냐!” 하면서 돌을 던져도 움직이지 않고 있으니, 다시 잠잠해진다. 한참 후 더 가까이 잠입을 하여 아주 작은 소나무 관목에 몸을 숨기고 숨을 고르고 이제 다시 내무실을 급습할 시간을 기다리는 중 이었다. 그때 내무실 문이 열리더니 빨간 추리닝을 입은 대원하나가 소변을 보러 나오는지 남준 앞으로 오는데 더 이상 몸을 숨길수가 없어서. “어험”하고 인기척을 하면서 나섰다. “어머!”하고 놀라는 목소리가 여자 목소리가 아닌가?
제대로 걸렸다. 대원들 보는 앞에서 포승줄을 꽁꽁 묶어가지고, 간첩뒷다리 같은 여자라고 호통을 치면서 내일 바로 보안대로 넘기겠다”고 위협을 주면서 소대 본부로 끌고 왔다.
밤새 초병더러 엄히 감시하라 고생을 시키고 다음날 좋게 타일러서 보냈다.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병영으로 들어오지 말고 밖에서 만나라고.
김해병은 한 달 후 쯤 탈 없이 제대했고, 3분대장은 바로 교체하여 가덕도 중대로 내 보냈다.
소대본부를 이전하여 태풍과 같은 시간이 지나가고 그러 저래 적응이 되어가고, 소대에 필요한 시설은 부대본부에서 지원이 되지 않으면 자체에서 만들어 쓰고, 우물은 소대본부 들어오기 전 마을의 마지막 민가, 조선소에서 쓰고 있던 마을 공동우물을 같이 쓰고, 소형목선을 만들던 조선소와는 한 집안 같이 잘 지냈다. 조선소 사장은 제주도가 고향이라던 목수 일은 하는 사람이었는데 마음이 퍽 착하였다. 그 집 안방전화를 부대전화같이 쓰곤 했다.
가끔 그 집에서 “O 해병 전화 받아!” 하고 왜치면 달려가서 바로 가서 전화를 받았고, 배를 진수할 때는 거창하게 굿도 하고, 입수할 때는 인력이 많이 필요하였는데 그 때는 인력지원도 해주고 좋은 이웃으로 지냈다.
그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니 대원들이 밖에서 활동시간이 많아져 휴게소를 만들어야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선임하사가 본부에 가서 함석 몇십장과 서까래 할 각목 몇 개를 구해오니 기둥은 인근 남산에 가서 벌목해다가 순수 우리기술로 휴게소를 지었다. 큰 식탁하나 집어넣고, 야전에서 급조하여 만들었지만 보기에 괜찮았다. 그 쪽 공간에 바람불 때 은 잎 팔락이는 은수원사시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어 그늘이 좋았고, 만조에는 맑은 바닷물이 발아래 2미터까지 차올라 저절로 풍류가 생겼다.
무엇이라고 멋진 이름을 지어 주어야 하겠는데 천학비재한 남준의 능력으로 쉬이 떠오르지 않는다. 푸를 靑 물결 波 청파정은 너무 쉽고 음운 상으로도 썩 어울리지 않는 것 같고, 푸를 청에 물결 濤 하니 중학교 때 다니던 태권도장 청도관과 같고, 고민하며 옥편을 뒤적거리다가 푸를 碧자를 찾아냈다. 碧波亭 괜찮았다. 벽파정이라 亭號를 정하고 못생긴 글씨로 써서 현판식 까지 했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벽파라는 이름은 그가 처음 만들어 썼던 것은 아니었다.
명량대첩을 치렀던 진도 근방에 벽파진이라는 나루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고갯마루에 소대본부가 있을 때 였다. 어느 날 오후 였을 것이다. 사복을 입은 사람이 아기를 데리고 초소로 올라온다. 용모룰 보니 신분이 군인인 것 같았다. 자기 소개를 웅동 검문소 오장 헌병중사라 하고, 웅천서중에 자기 처갓집이 있는 데 농번기라서 일손이 딸려서 도움을 청하러 왔다며 대민지원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협조를 요청한다. 그 동안 알음알음으로 초소 가까운 인가에 일손을 도와주는 것을 보았고, 대원들이 대민지원을 꺼려하는 것 같지는 않은 것 같았다. 맛있는 음식과 술도 대접받았고, 소액이지만 용돈도 받아 쓰는 것 같았고, 김치 같은 부식을 챙겨 주는 집도 있었다. 그러마고 허락을 하고 선임하사와 상의하여 필요한 인원과 날자를 약속하고 그 사람은 돌아갔다. 아마 일요일 이었을 게다.. 대원들 먼저 보내고, 자전거를 타고 웅천마을로 내려갔다. 웅천 동사무소 소재지는 자연부락이 여러 개 합쳐서 이루어진 것으로 지금 기억으로 남문동과 서중동 밖에 기억이 나지 않는데, 삼거리 남문동 가게에 들러 대원들 일하는 집에 전화를 걸어 위치를 확인하니 그 집 처자가 전화를 받는다. 초소 소대장이라고 하며 우리 대원들 일 잘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왔다하니, 어른들은 다 일하는데 나 가셨고 위치를 설명하기가 힘드니 자기가 안내를 하겠다고 하며, 웅천중학교에서 좌회전 하여 오면 교회가 있는 데 교회 앞에서 만나자고 한다. 이른대로 교회앞으로 가니 아름다운 처녀가 수줍은 듯 서 있었다. 첫눈에 반했다는 표현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훗날, 이때의 심정을 남준은 그 여인에게 이렇게 묘사하곤 했다. “ 처음 보는 순간 이 여인이 앞으로 내 운명을 좌우할 것이라는 강한 암시를 받았다.” 어떻게든 마음을 사로잡아 보려고 하는 마음에서 였겠지만, 그렇게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어차피 모든 꿈은 다 개꿈이었고 남준이 살아오면서 육감은 한 번도 맞은 적이 없었으니......
이제 막 솜털 벗어내고 단내 스며가는 과일처럼 성숙해 가는 스물한 살의 여인, 표정은 은은하고 자태는 가늘지만 풍성하였다. 반듯한 이마에 골이 잘 진 이목구비, 여인의 아름다움은 즐거움이라 했지!
어떻게 말을 꺼내서 대화를 이끌어 갈까 하며 작은 설레임이 일기 시작한다.,
엊그제 다녀갔던 형부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서두로, 느낌이 군인들 접촉하는게 어색하지 않아서 직장을 물어보니 통제부 감찰실에 근무한단다. 마침 몇주 전 감찰실 감사를 받은 적이 있어 그이야기도 나누고 작은 도랑을 넘어서 논두렁을 걸어서 보리베기 한참이었던 논까지 같이 걸었다. 그 때가 절기로는 6월 초나 되었던 가 보다.
그일 후로는 남준은 구실을 만들고, 핑계를 대어 그 여자네 집을 열심히 드나들었다. 그 집에서도 눈치를 챈 것 같았다. 언제부턴가 그 아가씨 나를 보면 얼굴을 붉히기 시작했다.
그 여자네 집은 처음 우리 만났던 교회에서 조금 더 들어가면 서 쪽으로 마을이 끝나는 마지막 집이었다. 터는 넓었고, 철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사랑채가 나오고, 안채는 짜임새가 잘 잡힌 기와집이었다. 3남 5녀의 넷째딸이었고, 식구들 간의 우애가 돋보이는 집이었다.
부모님은, 아버지는 술 좋아하시고, 성실한 농부이셨고, 어머니는 살림 잘 하시고 부군 잘 섬기는, 자식자랑만 했다면 도를 넘는 약간 푼수끼 있는 분이셨는데, 두분 다 착하신 분들 이셨다.
젋었을 때는 누구나 아름다운 연애, 정열적인 연애 한번 해보고 싶었지만 그것이 어디 그렇게 쉬운 일인가? 사랑이라는 것이 어디 일방적으로 되는 것인가? 험상궂게 생긴 군인아저씨, 생면부지의 객지에서 왔다가 제대하면 어디론가 가버릴 사람, 꿈 많은 나이의 시악시에게 선뜻 내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쉬이 움직이지 아니하였다. 지속적으로 공을 들였다. 동생들에게도, 언니들에게도 그러나 속절없이 시간만 흘러 갔다. 노골적으로 면박도 당하고, 시내다방에서 기다리다 바람도 맞고, 그렇게 애만 태우다 그다음 해 봄까지 왔다.
결심을 해야 될 시점이 된 것 같았다. 어느 날 시내에 나가서 퇴근을 기다렸다. 길목에서 기다리다가 마주치자 좀 무리하다 싶을 정도로 거칠게 대했다. 싫다는 것은 억지로 손목을 잡고 끌고 다니니 사정을 한다. 하라는 대로 말 들을테니 손목 좀 놔주라고, 손목을 놔주니 잽싸게 공중전화로 뛰어가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한다. 좀 있으니 시내에 사는 언니가 달려온다.
당혹해 하는 언니에게 남준은 기가 질리도록 과장되게 말했다. “나 동생 미치도록 좋아합니다. 동생 없으면 못 살 것 같습니다. 나 좀 살려주세요.” 라고 좀 엉뚱했을 것이다. 그날 저녁 집에 가서 울고 ,불고 난리가 났던 모양이었다. 며칠 후, 그 집 부모님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드렸다. “ 이 몸 그 동안도 열심히 살아왔고, 앞으로도 열심히 살 것 입니다. 정말로 믿으셔도 됩니다.” 그 일 후로 일이 급속히 진행되었다. 전에 대민지원 요청했던 형부와 그 언니의 도움이 컸다. 그 사람 인상이 무섭다고 하면, “남자가 썽질도 좀 있어야 한다.” 하며 동생을 설득하고, 이제 긴장을 푼 것 같았다. 언제든지 그 집에 가면 한 식구처럼 대해 주었다.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마산 가포에도 가고, 진동리 바닷가에도 가고, 시내 볼일이 있어 나가게 되면 같이 만나 퇴근을 하고, 그러나 웅천행 버스를 타거나, 웅천에 내려서면 그녀는 언제나 세침뜨기였다.
그렇게 두 사람 사이가 무르익어 갈 무렵, 부산에 산다는 오빠 두 분에게 인사를 드리고 마지막 추인을 받았다.
그 해 7월 30일 소대장 인수인계를 하고나서 웅천을 떠나왔고, 7월 31일 경비대전역신고를 하고 그날 저녁을 진해에서 보내고, 8월 1일 진해를 떠나왔다.
전역하여, 한 열흘 쉬었다가, 취직시험공부에 착수를 하였다. 빨리 직장잡고 안정되면 정식으로 청혼을 하겠다는 계획이 마음만 앞서 있었다. 1979년도가 박정희 유신정권 말기 아닌가? 20여년가까이 장기집권해온 독재정권의 말기현상이 뚜렷이 나타날 시점이었다. 학생들의 데모가 잦아 사회적인 분위기 어수선 했고, 신흥재벌 율산, 제세가 부도가 나면서 산업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 여러군데 입사원서를 냈으나, 한 군데에서 연락이 와서 면접을 봤으나 낙방했고, 그때에 실기를 하니, 결국은 그해 대학졸업자와 경쟁하는 수 밖에 없었다. 크게 걱정은 아니했다. 그 동안 꾸준히 내공을 쌓아 왔으므로
서류전형에는 떨어졌으나, 필기 시험 치르는 데는 어렵지 않게 붙었다. 그러나 그 가을에 두 군데를 2차 면접에서 동시에 떨어지고 나니 적지 아니 당황을 하게되었다. 그해 하반기 신입사원모집은 다 마감한 것 같았고.... 진해에 한번 다녀와야 할 것 같았다. 조금만 더 기다려주어야겠다고 내 쪽 사정을 전하고 싶었고, 무엇보다고 그녀가 보고 싶었다. 거의 매일만나다 시피 하고 살다가 3개월이나 얼굴을 못 봤으니, 그리움이 간절하지 않았겠는가?
처음에는 편지도 오고 하더니, 그 즈음엔 연락도 뜸 했고....
진해에 내려 갔더니, 이미 낙방거사가 되어있었다. 후에 여러번 생각을 해봐도 3개월은 너무 짧았다. 남준으로서도 직장이 해결되지 않고서, 언감생심 무슨 말을 꺼낼 생각조차 했겠는가? 잠시 얼굴만 보고자 내려갔던 것이니, 웅천까지 가는 것이 서로 불편할 것 같아서,진해 떠나오는 날 나를 재워주었던 언니 집에 들렀다. 사람들이 아주 냉정해졌다. 이젠 잊으라고, 그냥 가시라고 한다. 동생이 무섭다고 해서 안되겠다고 반복적으로 이야기한다. 그네 들이 처음에는 돕더니 이제는 바리케이드를 치듯이 막아선다.
남준의 생각에 우리사이는 상당히 깊어져 있었는데.......
현실이 그럴진데 어찌하겠는가? 멀리 여기까지 왔으니 얼굴이라도 좀 보고 가게해달라고
풀죽은 목소리로 사정을 했다. 제법 긴 시간을 기다렸다. 그녀가 나타났다. 장날 억지로 끌려온 송아지 처럼. 그렇게 억지스런 상황에서 무슨 말을 제대로 할 수 있었겠는가? 극히 의례적인 몇마디의 말과 부자연스러운 침묵, 그리고 일어섰다. 이미 상당시간 전에부터 가망 없다고 설득이 된 듯도 하고.
돌아오는 차속에서 분함을 견딜 수가 없었다. ‘ 그래! 일년 동안 농사일에 잘 부려먹고 용도폐기 되었다 이거지’ 하는 극단적인 배신감을 떨치지 못했고. 그 때 까지 남준은 자신이 근대가 제법 나가는 놈인 줄 알았는데, 허탈한 자괴감을 어쩔 수 없었다.
집에 와서 며칠 있으니 그 아가씨에게서 편지가 왔다. 서운해 하시며 가시던 모습 가슴 아팠다고, 기다리겠다고, 걱정 마시라고. 내 격앙된 마음이 쉽게 다스려지겠는가? 편지를 잘 보관해 놓았다. 곧이어 쓸데가 있을 것 같아서.
그 해 11월 말 모 건설회사에 2차 면접까지 합격하여 12월 초부터 근무하라는 통지서를 받고 서울로 올라가면서 짐을 정리했다. 그 아가씨의 사진, 편지, 그리고 보름 밤낮을 뜨개질해서 만들어주었던 상의 속옷까지 포장해서 보내면서, 이쪽에서 단교하는 편지를 써넣었다. 마음을 단호하게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인격적인 모독도 서슴치 않았다.
당신은 얼굴만 반지르르하고 속이 차지 않은 골빈 여자라고, 달면 삼키고, 좀 쓰다면 바로 뱉어내는 당신식구들도 싫고, 무엇보다도 고향에 와보니 좋은 규수가 많더라고, 그 동안 내가 쏟은 정성이 아까우니 당신의 주위에 어떤 내 흔적도 남기지 말고 정리해서 보내 달라고.
그렇게 건설회사에 입사하여 적응해가면 서울 생활을 하고 있는 데 그 다음해 봄, 전주에서 도청에 다니는 매형이 아버지 모시고 서울에 왔다고 전화가 왔다. 그 당시 아버지가 몸이 전부터 불편하다고 하였는데, 전주에 있는 병원에서 X-ray 검진결과 위암으로 진단이 나왔는데 암은 상당히 진행되었다하고, 혹시 모르니 서울유명병원에 다시 검진 받으러 모시고 왔다고, 그날 저녁 서울역 근처 동자동에 있는 이모 집에 계신 아버지를 보러가서 아버지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많이 썼다. 핏기 없었고, 수척해진 모습, 몇 개월 못 사신다는 데, 남준은 스스로를 생각할 때 자식들 중에서 아버지에게 불효막심한 행동을 많이 했던 불효자 아닌가?
그 때 마침 남준이 근무하던 건설회사에서 새로운 해외현장이 많이 생겨 해외파견 근무를 종용하던 때이기도 하였다.
당시만 해도 암에 걸린 당사자에게 암이라는 사실을 극도로 쉬쉬하던 때이라 일체 함구를 하였지만, 당신은 중병에 든 것을 눈치 챈 듯하였다.
회사에서 요르단으로 출국을 하라하여 수속을 밟고 있을 때, 아버지가 출국 전까지 적당한 짝을 찾아 결혼을 하든지 아니면 며느리 될 큰 애기 얼굴이라도 보자하여, 고민을 시작하였다. 집에서 보라 하는 선도 두어 번 보고하였는데, 어디 정이라는 것이 쉽게 정리되고 거두어 지는 것 이였든가? 고민 중 내려가도 되겠느냐고 진해 웅천에 전화를 했더니, 한번 다녀가란다. 어느 토요일 오후 마산행 고속버스를 탔다. 진해를 거쳐서 웅천에 도착하니 저녁 녁 쯤 되었던 것 같다. 그 집에 도착하니 어른들만 계셨었다. 저녁상을 물리고, 그 아가씨 쓰던 아래채를 치워주어 기다리고 있으니, 그 아가씨는 평소보다 늦은 시간에 귀가했다. 다소 나를 의식한 것 같았다. 남준이 머물던 방에 잠시 들러서 몇 마디 주고받았던 기억이 있다.
‘이 중위님 편지에 너무 큰 상처를 받았다고 하면서 헤어지드라고 꼭 그렇게 하셔야만 되었느냐고......’
그 아가씨 안채로 넘어가고 잠을 청할 시간이 되었을 것이다.
얼마나 그리웠을 것인가? 얼마나 사무쳤을 것인가? 뒤척거려지고 잠이 오질 않았다.
그날 밤, 여신 아프로디데의 시세움 이었던가? 열어서는 아니되는 판도라상자의 비밀이었던가? 아니면 질투의 화신 못난 오델로의 비극 이었던가? 뒤척이며 잠시 일어나서 책을 보다가 그녀가 쓰던 노트도 잠시 뒤적여 보다가, 앉은뱅이 책상 안쪽 구석에 치워져 있던 붉은 색의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무슨 상자일까? 호기심에 무심코 열어 봤다. 적지않은 남자들로부터 온 편지였다. 편지를 끄집어낼 때 마다 질투심은 불을 질러갔고, 깊숙한 곳에 편지지에 잘 쌓여진 사진 한 장이 나왔다. 멋진 구도로 길게 찍은 전신사진 이였고. 잘생긴 남자였다. 제복을 입고 있었다. 당시 그 아가씨가 사관학교로 자리를 옮겼었는데 사관생도 제복은 아니었던 것 같고, 별의 별스런 의구심이 다 일었다. 진해를 떠난지가 1년이 다 되어 가는데 그럴 수도 있겠다. 그 동안 내가 그녀를 사귀던 때도 심심치 않게 들렸던 스캔들이 다 헛소문이 아니었단 말인가? 해외근무지에 가면 적어도 2년일 텐데, 얼마나 더한 변화가 있을 것인가? 수심에 차서 날을 세웠다. 남준이 살아오면서 걱정으로 날을 세운 기억이 많지 않은데 그날 꼬박 날을 세웠다. 그 새벽에 답답한 마음에 서쪽으로 난 창을 열었다. 그 쪽으로 작은 동산이 있었는데 큰 소나무가 한그루가 있었다. 그 소나무에 걸려 있던 둥근달, 그 달빛의 파리한 색깔이 마치 내 슬픈 운명을 말해 주는 것 같았다.
다음 날 아침을 먹고, 어른들은 나가시고 동생들하고 있었던 그녀를 불렀다.
내 삶 기약할 수 없다고, 이 못난 사람 잊어버리라고
그 후 남준은 아버지에게 무릎을 꿇고 말씀드렸다.
“마지막까지 불효를 드려 죄송하다고, 아버님 둘 째 며느리는 아버님 알고 계신 어떤 여인도 아닐 것 같다고.”
남준의 아버지는 그 다음해 1월초에 타계하였다.
남준은 그해 7월 요르단현장으로 출국하여 근무하다가, 운명을 보려고 귀국하였으나, 임종을 보지 못하고 재 출국하였고, 출국 1주일 만에 현장에서 비로를 접하였다.
그로부터 이십년 후,
인기인 중심으로 제작되었던 ‘TV 내무반 신고 합니다’라는 병영 홈컴밍 프로그램이 있었다. 남준의 군대 동기 중에서 변호사 출신으로 TV프로그램도 진했하였고, 야당으로 여의도에 입성한 스타 국회의원이 한 사람 있었다. 그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프로였다. 전 동기생들에게 연락이 되었고 진해를 간다기에 동참하였다. 하루 밤낮을 작전사령부 안에서, 함상에서 보내고 동기들과 작별인사를 하고 나오면서, 혹시 하고 그 때 직업군인이었던 형부네 전화번호를 안내에 물으니 쉽게 안내해 준다. 전화를 하니 그분들은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남준을 바로 알아보았고, 반가워 했다. 그 때 중사였던 형부는 원사가 되어있었고, 창원에서 그 부부와 저녁을 먹고 헤어졌다. 형부되는 사람이 고향을 가면서 광양에 있는 남준의 사무실에도 한두 번 들렸는데, 한번이나 처제의 안부를 물으려다 망설였다. 마음에 도 없는 사람, 어떻게 해보려다 않되어 제풀에 나자빠져 버린 자괴감도 있었고, 한 달 후에나 전화번호를 물어 그 여인에게 전화를 했다.
남준의 신원을 밝히니 전화상으로 느낌이지만, 숨이 멈추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오히려 그 쪽에서 할 말이 많은 것 같았다. 한번은 만나고 싶었다. 서울출장 갈 일이 있어, 일찍 일을 보고 나서 전화를 걸어, 강남의 호텔 커피숍에서 만났다. 강남에 살았으며, 남편은 서울소재 유명 사립대학교수였고, 아이들 잘 키워 강남에 있는 외고에 다니고 있었고, 유복한 삶을 살고 있었다. 품위 있는 여사님이 되어 있었다. 서로 살아가는 것, 아이들 크는 이야기, 세월의 무상함도 이야기하고 하다가, 주변머리 없이 옛날이야기 한번 하겠다고 하며, 그날 저녁의 그 상자와 그 사진의 주인공을 물어 보았다. 오래전 일이었지만 그 여인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검붉은 상자와 그 편지들, 그 잘생긴 남자 사진도, 그러면서 남준에게 반문했다. 그 편지들 내용에서 주고받은 흔적을 보았느냐고, 그 사내아이는 자기 중학교 동기였는데 금호공고 다니던 친구 였다고, 여러 사람이 편지를 많이 보냈지만 버릴 수 없어서 한곳에 보관하고 있었다고, 그 시절 본인의 의사와 전혀 관계없는 염문 때문에 많이 괴로움을 당했다고
다음 날 오후, 사무실에 있는 데 서울에서 전화가 왔다.
그 여인 이였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형부에게 전화번호를 물어 전화를 했다고, 언제나 자세를 흩뜨린 적이 없던 그 여인이 작심을 한 듯 했다.
“당신 어제 내려가시고, 집에 가니 남편, 아이들 있어 괜히 눈치도 보이고 해서 어쩌지 못하고 오늘 남편 출근시키고, 아이들 학교 보내고 나서야 내 감정을 풀었습니다. 그 옛날이 하도 기가 막히고 억울해서 오전 내내 울었습니다. 당신이 어찌 그렇게 바보스러울 수 있었습니까? 처음에는 싫다는 사람 어르기도 잘하고, 욱박지르기도 잘하더니 그날은 어찌 내 말 한마디도 듣지 않고 그렇게 갔습니까?”
“....... ........ .......”
“그래 당신 나를 그렇게 내치고 가더니 당신은 행복했습니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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