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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호/소설/하아무/무너지고, 무너지니, 무너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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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553회 작성일 17-01-04 17:19

본문

소설

하아무






무너지고, 무너지니, 무너져서





1…
협의이혼 서류 보냄.
나머지 작성해서 이달 중에 제출했으면 함.
소송까지 하지 않고 원만하게 이혼했으면 함.

나, 너, 당신 따위의 인칭대명사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것은 모르는 사람을 가리키는 미지칭未知稱이나 무턱대고 아무나 가리키는 부정칭不定稱보다 더 건조하게 서걱거렸다.
다른 한 장의 파란색 포스트잇에는 ‘가족관계증명서, 혼인관계증명서, 주민등록등본 각 1통씩 필요함. 신분증, 도장 가지고 같이 법원에 제출해야 함.’이라고 적혀 있었다. 클립에 같이 끼워진 이혼 서류에는 이미 처의 이름이 적혀 있고 붉은 도장이 찍혀 있었다. 혼인과 가족관계를 끝장내기 위해 그걸 증명하는 서류를 발급받고 내보여야 한다니.
나는 서류를 책꽂이 위에 던졌다.



2…
“아니, 뭐 안 가져간 거 있어요?”
경비원의 말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무언가 어긋나 빠져나간 것 같은 황망함에 걸음을 서둘렀다. 하지만 엘리베이터는 그를 남겨두고 올라가고 있는 중이었다.
집은 거의 정확히 4분의 3 정도 비어 있었다. 아내와 아들 딸의 짐이 빠져나간 것이었다. 많지 않은 내 짐을 비롯해서 장롱과 소파, 냉장고, 식탁 따위가 남아 있지만 그렇다고 4분의 1 이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당연한 일이지만 아내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들도 기숙사에서 생활하니 당분간 볼 수 없을 터였다.
“내가 나가겠다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 돈이나 빨리 만들어 보내줘.”
아내는 제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일 년여 전부터 이혼하자고 졸라댔다. 몇 달 전부터는 더 이상 내 얼굴을 보는 게 힘드니 나가서 살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언니한테 빌려서 전셋집을 구했으니 대출을 받든 집을 팔든 돈을 보내달라는 거였다. 아내도 아파트를 담보로 대출을 더 이상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어쨌든 그렇게 집을 나간 게 반년 전이었다.
“야, 오래 살면 욕이 많은 법이야. 니네 이십 년 살았으면 많이 산 거야.”
최 부장이 술을 권하며 이기죽거렸다. 삼 년여 전쯤 오랜 기러기 생활 끝에 ‘돌싱’이 된 그에게는 원룸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오래 앉아 있으면 새도 살을 맞는다는 속담 몰라?”
그에 따르면, 십여 년 이상이면 이러저런 치욕스러운 일을 충분히 당할 만큼의 시간이었다. 이어 현대 결혼제도는 불합리하기 짝이 없다느니, 국가가 법으로 국민을 억누르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느니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나는 그 말이 선뜻 다가오지 않아 술잔을 거푸 비워냈다. 나와 아내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딸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정 부장에게 얘기해준 적 없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내가 겪은 불행 때문에 동정을 받거나 오해를 사지 않고 싶었으므로 정 부장은 불론 회사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3…
가을바람이 제법 쌀랑하게 느껴질 무렵이었다.
원앙 한 쌍이 수놓인 누비이불이 나왔다. 두터운 이불이라고는 그것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것을 펴놓고 한동안 멀거니 앉아 바라보았다.
곧바로 나가 침낭을 사서 누에고치처럼 들어가 잠을 청했다. 화학약품 냄새가 코를 찔러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다시 소주를 사러 나가야 했다.



4…
“저 새는 죽을 때까지 절대 떨어지는 일 없이 사는, 사이좋은 새라고들 하지요. 저 두 사람처럼…….”
생물교사인 윤 선배는 히죽거리며 말했다. 이내 사람들의 이목이 우리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아이들만 여전히 망원경으로 원앙을 쫓고 있었다.
환경단체 생태탐방에 참여한 사람들은 거의 다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윤 선배는 저수지에 무리지어 있는 원앙을 설명하다 우리 부부를 턱짓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동의한다는 듯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몇몇은 “맞아”, “그러네” 맞장구를 쳤고, 누군가 “아후, 저 환상적인 바퀴벌레 한 쌍” 하자 여기저기서 쿡쿡 웃음이 새어나왔다.
“천연기념물 327호로 지정될 만큼 이제는 보기 쉽지 않게 된 새입니다. 금슬 좋은 잉꼬부부의 상징이지요. 이런 속설도 있습니다. 원앙 한 쌍 가운데 하나가 먼저 죽으면 짝을 잊지 못해 남은 한 마리도 끝내 죽고 만다는……. 그런데 사실은 말입니다.”
윤 선배는 장난기를 주렁주렁 매단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금슬이 좋기는 개뿔, 실제로 원앙은 바람둥이 새라 이겁니다. 여러 번 얘기했듯이 새들은 수컷이 대개 더 화려하고 예쁩니다. 암컷을 유혹해야 하기 때문인데, 원앙도 수컷이 화려하지요. 워낙 외모가 차이가 나서 옛날에는 수컷을 원(鴛), 암컷을 앙(鴦)이라 불렀답니다. 다른 새인 줄 알았던 것이지요. 나중에 같은 새인 줄 알고 난 뒤 원과 앙을 붙여 부르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조류학자들이 살펴보니, 이놈들은 해마다 짝을 바꾸더라는 것이지요. 일 년에 한 번씩 이혼하고 새 파트너를 구해 새살림을 차리더라는…….”
뒤쪽에 있던 누군가가 맞받았다.
“금슬이 좋다고 해도 잘 살펴봐야겠네요. 뒤로 무슨 호박씨를 까고 있을지 모르니까…….”
다시 쿡쿡 웃음이 새어나왔다.
“아무리 농담이라도 어쩜 그렇게 말할 수 있어요.”
아내의 여고동창 오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일행들은 이미 원앙을 관찰하기 위해 걸음을 옮기거나 망원경을 눈에 갖다대고 있었다.
우리는 마주보며 웃어넘기고 말았다.



5…
이틀 뒤, 초등학교 2학년 딸이 사라졌다.
“분명히 제 시간에 아파트 입구에 내려주었습니다.”
칠순이 다 된 피아노학원 차량 기사는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원장의 친정아버지라고 했다. 같이 내린 옆 동 3학년 아이도 비슷하게 말했다. 학원 차에서 내리자마자 제 집을 향해 뛰느라 딸이 들어가는 것까지 보지는 못했지만 같이 내린 것만은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경비원도 순찰중이었던 것 같고 목격자가 전혀 없어서…….”
6월이었고 어둠이 내리기 직전이라 오가는 사람도 많았을 시각이었지만 경찰은 목격자를 찾지 못하였다. 오래된 아파트라 씨씨티비 화질은 남녀 구분조차 되지 않을 정도였고, 동 입구에는 그마저도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집에 피아노 가방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집에 들어왔던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 이후 아이의 행방에 대해 아는 사람은 없었다. 6학년이던 아들은 동생이 사라지는 동안 학원을 돌며 의미를 알 수 없는 영어와 숫자 사이를 헤매고 있었다.
실종신고 이틀 후, 경찰은 딸을 ‘장기실종 아동’으로 분류했다.



6…
우리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생태탐방 가서 찍은 사진-하나 같이 활짝 웃는 사진들이었다- 중에서 가장 선명하고 예쁘게 나온 사진-원앙을 관찰하던 저수지를 배경으로 찍은 것이었다-으로 전단지를 만들어 뿌리고 곳곳에 붙였다. 딸의 학교와 친구 집을 수소문해 찾아갔다. 공원이나 터미널, 기차역 등을 이 잡듯이 뒤졌다. 신문사와 방송국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실종전문기관과 실종아동 가족 모임을 찾아다녔다. 그런 기관이나 모임이 있는 줄 처음 알게 된 곳이 대부분이었다. 밤마다 혹시 우리가 놓친 징후나 단서가 없는지 복기에 복기를 거듭했다.
아내는 운영하고 있던 논술학원 문을 닫았다. 나 역시 얼마 후 직장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연차나 휴가를 당겨쓰는 것으로는 그 많은 곳을 찾아다닐 수 없었다. 수만, 수십만 장 찍은 전단지를 사람들 손에 모두 쥐어주어야만 했다. 달리 아이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한 번 숨어버린 아이는 다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못찾겠다 꾀꼬리, 이제 그만하고 집에 가자. 떨지 말고 제발 그만 나오너라. 우리 너무 무서워. 제발…….
우리는 어두워지는 길에서 목놓아 울고 말았다.



7…
아내의 소형차를 피하던 강아지가 다른 차에 치여 죽었다.
낡은 내 차에 치인 고양이는 단 하룻밤 사이에 뱉어놓은 껌딱지처럼 변해갔다.
우리는 그게 무슨 불길한 징조나 예언인 것만 같아 몸을 떨며 개와 고양이를 추모하고 명복을 빌었다.



8…
“회식이 그렇게 중요해? 당신이 조금만 일찍 집에 들어갔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잖아…….”
아내가 날카로운 발톱으로 내 뺨을 할퀴었다. 피가 흘렀다. 내 차에 치어 죽은 고양이의 복수처럼.
“무슨 소리야. 당신이 학원 따위 시작하지 않고 집에 있었으면 됐을 거 아니야.”
나도 지지 않고 아내의 팔을 물어뜯었다. 살점이 묻어 나왔다. 아내의 차를 피하다 죽은 강아지처럼.
“대출금이며 애들 학원비는 누가 다 대고. 당신 월급으론 어림도 없다고, 당신도 동의해서 시작한 거였잖아.”
“그렇게 밤늦게까지 일할 필욘 없었잖아. 아이가 혼자 집에 있는 걸 무서워한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야.”
상대의 피와 살을 탐닉하듯 할퀴고 물어뜯기를 반복했다. 사디즘에 빠진 것처럼 서로를 학대하고 마조히즘에 빠진 것처럼 아픔을 달게 받았다. 상처를 내고 이내 연민에 빠져 부둥켜안고 서럽게 울던 우리는 강도를 더해 점점 더 깊게 더 오래 생채기를 물어뜯기를 지속하면서 마침내 얄팍한 연민의 감정을 이겨내고 더 이상 부둥켜안거나 눈물을 흘리지 않고 미워하며 증오하는 방법을 배워나갔다. 개와 고양이처럼.
가학과 피학의 쾌감은 아이에 대한 미안함을 일시적으로나마 잊게 해주었다.



9…
“아빠, 집에 언제 와요? 나 무서워.”
이미 밖은 어둑해져 있었다. 서둘러 출발을 했지만 조금 늦었다. 기획취재 건으로 지리산 오지마을을 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딸아이를 대충 달래고 서둘러 차를 몰았다. 하지만 십여 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휴대전화가 울었다. 아이는 전화기 속에 웅크리고 앉아 울먹였다.
“아빠, 무서워 죽겠어. 금방 뭐가 나타날 것 같아.”
아내는 아직 일을 하고 있을 시간이고, 아들도 수학학원까지 마치고 오면 여덟 시가 지나야 한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근처 후배에게 부탁이라도 했겠지만 이미 늦었다.
“집에 불 다 켜고, 오빠 방에 있는 컴퓨터 켜서 게임하고 있어. 아빠 금방 갈게.”
하지만 오빠 방에 들어가는 것도 무섭단다. 전 같으면 텔레비전이라도 보고 있으라고 했겠지만, 고장이 난 후로 텔레비전을 안 본 지 몇 달 지났다.
조금 있다가 다시 전화가 왔다.
“침대에 이불 덮어쓰고 있어요. 아빠, 그래도 무서워, 빨리 오세요.”
아이가 사라지고 난 후, 텔레비전이라도 고쳐 놓았더라면,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별별 생각을 다 하다보니 그런 거였지만 텔레비전이 있을 때도 아이는 대개 제 방에서 그림을 그리거나 엄마의 화장대를 뒤지고 있었다.
생일 때 사준 저만한 곰 인형을 가리키며 널 지켜줄 거라고 해봤지만 그마저도 신통치 않았다.
“아빠, 무서워. 곰돌이도 무섭대요. 빨리 오세요.”
어두워지기 시작하면, 아빠 나 무서워, 빨리 오세요, 불쑥불쑥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이내 전염되듯 나는 무서움에 아이처럼 이불을 덮어쓰고 몸을 떨어야만 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문 밖에서는 늘 늑대나 여우 까치독사 하이에나 같은 사나운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나는 떨고 있는 아이를 안고 맹수들을 피해 다리 근육이 한껏 부풀었다가 파열될 때까지 뛰고 또 뛰었다. 아이는 품에서 방싯거리고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아빠, 빨리, 더 빨리,를 외쳤다. 아이의 표정 때문에 방심한 탓일까, 어느새 품에 있던 아이는 연기처럼 흩어지고 나에게는 머리카락 한 올 남아있지 않았다. 아이의 꿈을 꾼 날이면 아침부터 술을 찾거나 줄담배를 피우지 않을 수 없었다.



10…
일 년이 지나지 않아 각방을 쓰기 시작했다.
“당신만 보면 미치겠어. 도무지 견딜 수가 없단 말이야.”
아들이 아내를 닮은 데 비해 딸은 커갈수록 나를 닮아갔다. 성형외과에 돈 많이 갖다바쳐야 되겠다느니, 딸을 위해서 돈 많이 벌어야 되겠다느니 실없는 농담을 던지는 이들이 생겨났지만 그땐 웃어넘겼다. 그때와 달리 이젠 나만 보면 아이가 생각나 미치겠다는 거였다. 내 탓 네 탓 해가며 각치고 후벼 파던 아내는 남편을 거부하고 스스로를 거부했다. 무리해서 아파트를 장만하고 딸이 태어난 후 시작한 학원 때문에 같이 있어주지 못한 시간들을 벌충이라도 하려는 것 같았지만 아내도 나도, 아니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 이미 너무 늦고 말았다는 것을.
학원 전세보증금과 얼마 안 되는 예금, 보험 해약금까지 쓰고 아파트를 담보로 빌린 대출금까지 바닥을 드러내는데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아이가 언제든 찾아올 집이 있어야 하므로 팔거나 이사를 갈 수는 없었다. 아무리 좋은 조건에 요금제를 제시해도 아이가 기억하고 있을 전화번호를 바꾸지 못하였다. 그런저런 이유들 때문에 형제들과 처남 처형이 모아준 돈, 게다가 어머니가 더 이상 힘에 부쳐서 농사 못 짓겠다는 어설픈 변명을 대며 얼마 남지도 않은 논밭뙈기를 팔아치운 돈까지 밑빠진 독에 부은 물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사춘기를 맞은 아들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아들은 우리 시야에서 사라져갔다. 어쩌면 딸이 거친 세상에서 아무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살아갈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애써 외면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런 것을 의식해서인지 아들도 있는 듯 없는 듯 지냈다. 어느 날 아들이 친구와 통화하면서, 나도 흔적 없이 연기처럼 사라지고 싶다,고 말하는 것을 엿듣고도 손을 잡아주거나 울어주지 못하였다. 우리의 손은 차갑게 변해버렸고 눈물샘은 사막의 신기루가 되어버렸다. 우리는 생명을 잃고 말라버린 한 그루 고사목이었다. 여전히 가족으로 보였지만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찰기를 잃어버린 모래알처럼 흩어지고 마는.



11…
나는 택시 운전을 시작하였다. 최소한의 생활은 해야만 했다.
차안에 늘 전단지를 비치하여 두었고, 틈틈이 시간을 내어 터미널이나 기차역, 공원 같은, 사람이 많은 장소에서 전단지를 나누어 주었다. 시외로 나가는 손님이 있으면 은근히 기대가 되기도 했다. 그곳에 딸아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래서 거기서 전단지를 돌리면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기만 하면 문득 아이가 나를 발견하고 앞에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무망하기 이를 데 없는 희망에 몸을 떨기도 하는 것이었다.
아내 역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딸을 찾아 거리를 헤매었다. 경차의 옆과 뒤 차창에 확대한 아이의 사진과 특징이 적힌 포스터를 붙이고 정복자가 영토를 차지해나가듯 지역을 넓혀가며 전단지를 돌렸다. 내미는 전단지에 선뜻 손 내밀지 않는 사람들에게 종이를 쥐어주었다. 제발 받아가 주세요, 그리고 자세히 좀 봐주세요, 내 딸이에요, 코 밑에 조그만 점이 있어요, 보시면 거기 적힌 전화번호로 제발 연락 좀 주세요, 애걸하기도 했다. 식당이나 가게 주인들은 가뜩이나 장사가 안 돼 죽겠는데 무슨 청승이냐고, 노골적으로 투덜거렸다. 사람들은 무심했다. 가게나 상품 판매를 위한 홍보 전단지 보듯 건성으로 보거나 아예 눈길 한번 주지도 않고 길에 버리기도 했다. 연인들은 다른 무엇의 틈입을 허용하지 않았고 자기 한몸 건사하고 살아가기조차 벅찬 사람들은 앞선 사람의 걸음을 쫓아 간격을 줄이는 데만 열중했다. 문득 돌아보면, 누군가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제니스 이안의 노래와 섞여 사람들 발길에 채이고 밟히는 아이가 ‘뜨거운 여름날의 기쁨과 사라져버린 겨울날들’을 뒤로하고 ‘서서히 죽어가’는 것만 같았다.
여러 계절이 가고 여러 해가 지나는 동안 아내는 지칠 줄 모르고 천천히 미쳐가고 있는 듯했다.



12…
그런 사람은 꼭 있기 마련이었다. 그만하면 할 만큼 하지 않았느냐고, 팔 년이면 이제 그만 잊어버릴 때도 되지 않았느냐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느냐고, 그만큼 찾아 헤매었는데도 찾지 못한 걸 보면 살아 있다고 보기 어려운 것 아니냐고, 십 년을 채운다 해도 달라지는 건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느냐고, 아이도 엄마 아빠가 자기를 찾기 위해 제 인생을 포기하는 것을 원치는 않을 거라고 생각지 않느냐고.
너무 지치고 고통스러워 심신이 물먹은 솜처럼 가라앉을 때도 그런 말을 들으면 돌연 ‘전투 의지’가 솟구쳤다. 친구든 선배든, 동기간이든 친지든, 여자든 남자든, 아이든 어른이든, 상관없이 들이받았다. 아이가 부모를 기다리면서 떨고 있는데 그만두기는 뭘 그만두냐고, 살아 있으니까 더 찾으려고 하는 것 아니냐고, 아이를 잊어버리면 내 인생도 없는 것 아니냐고, 아이를 포기하는 순간 내 인생도 포기하는 것 아니냐고, 죽었다는 증거가 없는데 뭘 가지고 그런 막말을 함부로 내뱉느냐고, 침을 튀기며 공박했다. 혼자서든 소원해진 아내와 함께든 공공의 적을 맞닥뜨리기라도 한듯, 그 한마디로 아이의 운명이 판가름 나기라도 하는 듯 공세를 폈다. 그렇게 가깝고 먼 사람들이 하나둘씩 소원해져갔다.
적은 물리쳐도 나타나고 또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마치 인해전술을 펴기라도 하는 것처럼. 밀려드는 적도 많지만 쓰러졌다 다시 일어나 공격하기도 했다. 죽음을 모르는 좀비처럼.
아내와 나는 눈가리개를 한 경주마처럼 변해 있었다. 눈 가장자리에 붙어 시선이 분산되지 않고 앞만 보도록 되어 있어 다른 사람을 생각할 수도 없고 장기실종 아이들에 대한 사회의 무관심과 불완전한 안전망, 미비한 법제도 따위를 돌아보지도 못하고 오로지 아이 찾는 일에만 매달렸던 것이다.



13…
뜻하지 않게 등단이라는 걸 하게 됐다. 소설가가 된 것이었다. 내 의지로 작가라는 문패를 달기 위해 그렇게 된 건 아니었다.
“딸아이 찾는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잖아.”
신문사 다닐 때 함께 일했던 남 선배가 칼럼을 써보라며 덧붙인 말이었다.
열 달 전 서울에서 잃어버린 아이가 경기도의 한 시설에서 보호받고 있다가 디엔에이 검사를 통해 부모의 품으로 돌아갔다는 소식, 이십여 년 전에 실종됐던 아이가 시설과 입양기관을 거쳐 미국으로 입양 간 사실이 밝혀졌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였다.
지푸라기보다는 낫겠다 싶어 응했다. 서너 번 칼럼이 나간 후, 여성잡지에 실릴 수 있게 소개해줄 테니 소설 형식으로 써보라 했다. 소설은 한번도 써본 적이 없어서 힘들겠다고 했더니,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어, 니 글 솜씨는 내가 안다,는 남 선배의 답이 돌아왔다. 딸아이 찾는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잖아,라는 말까지 덧붙여서.
그 해 크리스마스 이브, 고만고만한 신문사 신춘문예에 당선됐다는 전화를 받고 뜨악했다. 이미 소설가로 두어 권의 작품집을 낸 남 선배가 그제서야 내 원고를 여성잡지가 아닌 신춘문예 응모에 보냈다고 말했다. 그 정도 신문사 신춘문예면 당선될 거라 믿었고, 상금도 많지 않지만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것이며 화제성도 있으리라 생각했다는 거였다. 어쨌거나 그렇게 해서 나하고는 전혀 관계없다고 생각했던 작가가 된 것이었다.
남 선배의 말은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그 덕분에 몇 군데 언론에 장기실종 아동의 아버지가 아이의 이야기로 신춘문예에 당선했다는 박스기사가 났고 인터뷰도 했다. 작은 문학잡지 두서너 군데로부터 원고청탁도 받았다. 딸아이 찾는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전단지 돌리는 것보다 나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소설이 뭔지도, 어떻게 써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 소설 아닌 소설을 억지로 써서 보냈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전단지나 소설이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



14…
아내와의 사이가 각방을 쓰기 시작할 때보다 더 나빠졌다.
“딸내미 이야기를 이용해서 작가 되니까 좋아? 작가님 작가님 해주니까 뭐라도 된 기분이 들어? 이런 와중에 그러고 싶니?”
아무리 그게 아니라고 설명해도 소용이 없었다. 아이가 사라진 것이 그 어떤 설명으로도 해명이나 이해가 되지 않게 된 이후, 모든 설명은 아내의 귓등에서 튕겨져 나가는 것 같았다. 다만 아이가 사라질 당시의 정황만이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치면서 끝없이 그녀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처형이 억지로 끌고 가다시피 해서 정신과 상담을 받은 후 우울증 진단과 함께 약을 처방받아 왔다. 하지만 아내는 약을 모두 변기통에 버렸다. 자신은 우울할 권리가 있거니와 결코 행복할 자격은 없다는 거였다.
“근데, 당신은 소설가가 되어서 인터뷰도 하고, 좋겠네.”
나를 보는 아내의 눈빛이 몹시 낯설었다.



15…
응급실에 누워 링거를 꽂고 있는 아내는 왼쪽 눈이 찢어진 데다가 여기저기 피멍이 들고 심하게 부어 있었다. 당직의사는 갈비뼈 하나가 부러지고 또 하나는 금이 갔다고 말했다. 안정을 취하고 날이 밝으면 입원을 하라고 했지만 아내는 괜찮다고, 아무렇지 않으니 집에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세 놈이었던 것 같습니다.”
범인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큰 덩치에 우락부락한 경찰이 짧은 상고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아내의 질에서 정액을 채취했다며 금방 범인을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자신했다. 그는 조심성 없는 말투와 턱없이 큰 목소리가 괜한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다. 보이지 않는 범인보다 거칠고 조야한 그의 입을 향해 종주먹을 들이대고 싶을 정도였다.
무례하고 막돼먹은 그의 혀에 의하면, 아내는 낯선 그 도시의 한 시설을 찾아가 원장을 만나고 아이들을 살폈다. 성과 없이 떠나기 아쉬워 사람들 왕래가 많은 곳에서 전단지를 돌렸다. 어두워서야 돌아가기 위해 차를 주차해둔 곳으로 갔는데, 하필이면 인적이 드문 우범지역이었다. 지친 데다가 흠씬 두들겨맞은 아내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는데, 정신을 잃고 방치되어 있다가 순찰을 돌던 방범대원에게 발견되었다.
“큰일 날 뻔했어요. 꽃샘추위 때문에 저체온증으로 위험할 뻔했는데, 그래도 다행히 발견이 돼서…….”
하지만 아내는 전혀 다행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16…
“이혼해.”
아내는 나를 바로 보지도 않고 높낮이 없이 차갑게 내뱉었다. 원앙이 당연하다는 듯, 일 년 넘었잖아, 이제 헤어질 때가 되었어, 하는 것 같았다. 이건 이유를 묻고 따지고 할 일이 아니야, 우리가 원앙의 탈을 쓰고 태어났고 종족이 생겨나기 시작할 때부터 그러기로 정해놓은 일이야, 당신도 너무나 잘 알듯이 말이야,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나는 횡경막 아래에서 솟구치는 용암을 슬픔으로 짓누르며 아내의 요구를 거절했다. 그러면서 그녀의 요구에 들러붙어 있는 좌절과 분노, 감당하기 힘든 역겨움과 모멸감, 고통과 신산에 대해 헤아려 보았다. 아이가 사라진 이후 나의 슬픔은 커질 대로 커져 있었으므로 충분하지는 않더라도 그런 것들을 누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원앙의 탈을 벗어 던져버리면 종족의 굴레로부터 일탈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보기로 했다.
물론 아내는 병원에서와 마찬가지로 거세게 반발했다. 이혼을 해주지 않으면 소송을 걸어서라도 이혼하고 말겠다, 이혼해줄 때까지 전셋집을 구해 나가 살겠다, 이혼해주지 않고 고집을 피우면 극단의 선택을 할 수도 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원만하게 헤어질 수 있게 해달라, 숨겨둔 카드를 꺼내놓듯 장군을 불렀다. 그렇다면 다음은 멍군을 불러야 할 차례이므로 나는 소송을 하려면 파국의 원인을 설명해야 하는데 아이의 실종이나 성폭행을 아내 스스로 얘기하기는 쉽지 않을 거라는 점, 아이가 찾아올 수도 있는 아파트를 나간다거나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도 없을 거라는 점, 또 아내가 원하는 대로 헤어지는 것이 결코 원만한 결과로 이어지는 것이라 보기 어렵다는 것을 들었다.
처형이 거듭 정신과 상담을 강권했지만 아내는 완강하게 도리질만 쳤다.



17…
그로부터 일주일 후 범인 셋이 모두 검거되었다는 전화를 받았고, 집에 돌아와 현관문을 열었을 때 집안의 4분의 3 정도가 비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나를 구성하고 있던 것들이 하나씩 빠져나가고 있었다.



18…
아들이 군대에 가게 되었다. 대학에 가면서 기숙사 생활을 했기 일 년 가야 한두 번 보는 게 고작이기는 했다. 방학 때도 아르바이트를 이유로 거의 집에 오는 일이 드물었는데, 기실 어수선한 집안 분위기를 보면 그럴 만도 하였다. 더하여 학자금 대출과 아르바이트로 등록금과 생활비 대부분을 스스로 감당하는데 지친 아들이 입대하려는 마음은 십분 이해되고도 남았다.
그동안 해주지 못한 것이 적이 미안한 마음에 직접 훈련소에 데려다 주기로 했다. 내가 출근한 뒤에 야반도주하듯 이사를 나가버린 아내도 이번만큼은 함께 가기로 했다. 하지만 아침에 그녀에게서 문자 하나가 왔다. 난 집에 있을래, 그 사이에 우리 딸이 돌아올지도 모르잖아. 다시 한 번 억장이 무너졌다.
그냥 우리끼리 가자,는 말에 아들은 아무 대꾸도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훈련소가 한 시간 남짓한 거리에 있어 이른 점심을 먹고 고속도로에 들어섰는데 십 분여가 지났을까, 차 안에 매캐하게 타는 냄새가 들어찼다. 마침 휴게소가 있어 진입하는데 입구에서 갑자기 시동이 꺼지고 보닛에서 불이 일어났다.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 몇이 소화기로 진화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고, 잠시 후 소방차가 출동해서야 불길을 잡을 수 있었다. 소방관은 이 주일 전에 차량 정비한 사실을 확인하고는, 엔진 주변에 먼지나 오일이 쌓여 전기 스파크가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고 적어 넣은 뒤 철수했다.
부랴부랴 택시를 불러 아들을 태워보내고 거의 절반이 타버린 차는 폐차해야만 했다.
전화기 너머에서 아내는 아들까지 위험에 빠트렸다고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사전에 정비를 해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했어야 하지 않느냐고, 평소 미리 준비해두지 않고 일을 당해고 나서야 허우적대는 꼴은 여전하다며 강하게 질타했다. 내가 하는 해명은 아내의 귓등에서 튕겨져 나와 구구한 변명이 되었다. 곧 아내의 목소리는 맥이 풀리면서 훌쩍이기 시작했다.
“우리 딸이 너무 보고 싶어. 불쌍한 우리 딸, 어디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지, 밥은 먹었는지. 난 엄마 자격도 없어. 딸을 지켜주지 못하면서 몸뚱이만 더럽히고…….”
스스로에게 화살을 돌리는 아내의 비감어린 음성에 나는 더럭 겁이 났다. 아니야, 그건 당신 탓이 아니야, 그런 소리 하지 마. 보지도 않았던, 아내가 베란다 창밖으로 몸을 던지는 장면과 목에 굵은 줄을 거는 장면이 실제로 보았던 장면처럼 영사되었다. 내가 지금 바로 갈게, 조금만 기다려, 알았지?



19…
어머니마저 돌아가시고 말았다. 대전 형님네에 올라가 계시면서 터미널 앞에서 전단지를 돌리고 있었는데 피자 배달 오토바이에 치었다고, 머리에 충격을 받아 헐레벌떡 달려온 형과 마지막 인사도 미처 하지 못하고 가셨다고 했다. 텃밭을 일구는 것 외에는 형과 누나, 동생, 그리고 가까운 친척들 집을 돌면서 사라진 손녀 찾기에 주력했다. 그만하시라고 하면, 아니다, 내가 늙어서 뭐 하겠냐, 아들딸네 다니면서 놀다가 틈틈이 하는 거지,라고 했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라는 것을 왜 모르겠는가.
우리는 어머니 앞에서 통곡하고 울부짖었다. 아내와 나는 죄인이었다. 형제들과 외가 쪽, 친지들 앞에서 얼굴을 들지 못하고 내내 눈물만 찍어낼 수밖에 없었다. 아이가 사라진 후 더 이상 흘릴 눈물이 남아 있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신기한 일이었다. 아내도, 우리 때문에, 나 때문에 어머님이 이렇게 되셨으니 이 일을 어째, 울다가 까무룩 혼절하였다. 한참 뒤 깨어나서 시누한테 한 말이 이랬다.
“형님, 우리 딸 피아노 마치고 올 시간 돼서 얼른 갔다 올게요.”
나는 아내의 어깨를 잡아 흔들면서 소리쳤다.
“왜 이러니, 응? 제발 정신 좀 차려! 우리 딸은 피아노 간 게 아니야!”
아내는 도리어 그게 무슨 정신 나간 소리냐는 듯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다가 어느새 아이가 실종된 것을 알아차린듯 몸부림치며 보고 싶다고, 빨리 돌아오라고 울부짖었다. 장례를 치르는 내내 아내의 행동은 반복되었고 나는 어머니와 아내 사이에서 허둥거렸다.
마침내 어머니는 섭씨 일천 도로 타오르는 화장로 속으로 들어갔다. 할 수만 있다면 어머니대신 내가 그 속으로, 뜨거운 불길을 거친 후 타지 않은 유골들을 모아 분쇄하는 분골기 속으로 슬그머니 들어가고 싶었다. 보통 화장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일백여 분이 소요된다는데 어머니는 오십팔 분여밖에 걸리지 않았다. 한평생 자신을 의탁했던 육신이 재가 되는데 걸리는 시간이 겨우 일백 분 남짓인데 어머니는 그마저도 삼분의 이 정도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내 발밑 돌이 또 하나 빠져나갔다.



20…
아내가 사기를 당했다. 전세금이라고 어렵사리 구한 돈이 전부 사라져 버렸다.
“아니, 사기꾼을 어디서 만나 어떻게 당했는지, 인상착의가 어떤지 아무것도 모르겠다고 하면 어쩝니까. 맨바닥에 헤딩하라는 것도 유분수지…….”
턱이 유난히 날렵한 경찰은 대놓고 투덜거렸다. 하지만 정말 아내는 거의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기억하고 있지만 너무 많은 사람들이어서 어떤 인상착의는 이웃집 사람이기도 하고 심지어 가까운 친지나 나와 똑닮은 사람도 있었다. 무간지옥과도 같은 절망과 고통과 슬픔이 바닥을 모를 만큼 깊어진 우울증과 더해져 모든 인상착의가 뒤섞여버린 듯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길에서 전단지를 돌리는 아내에게 아이를 찾아주겠다면서 접근했다. 딸만 찾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다며 매달리고 애원하는 아내에게 그들은 용의주도하게 돈을 빼냈다. 단서가 될 만한 것은 남아 있지 않았고 절박함 때문에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는 아내는 너무나도 쉬운 상대였다. 심지어 대부업체에서 대출을 받게 해서 빼내가기도 했다.
“이런 말 하기 그렇지만 큰 기대 안 하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턱을 만지작거리며 경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니까 빨리 이혼했으면 좋았잖아. 그까짓 것, 지금이라도 안 늦었어. 빨리 도장 찍어서…….”
아내는 시르죽은 웃음을 흘렸다.



21…
한 번 빠져나가기 시작하자 새끼줄에 엮인 굴비처럼, 손안의 모래처럼, 밑빠진 독의 물처럼 줄줄 새어나갔다. 그럴수록 내 속은 비어갔고 걸을 때마다 빈 독 소리가 뱃구레에서 흘러나왔다. 그것은 윗돌은 괴지도 않고 아랫돌만 빼가는 것 같은, 파괴공학으로 단 몇 초 만에 건물을 해체하는, 세계무역센터가 속절없이 주저앉는 것과 같은 소리였다.
아직 도장을 찍지 않았고 법원에 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아마도 이대로라면 아내와 나는 더 무너지고 파괴될 것이다. 더 이상 무너지고 파괴될 것이 없으면 딸처럼 문득 이 세상에서 사라질 지도 모른다. 그것도 나쁘지 않다. 무너지고 파괴될 것이 남아 있다는 건 어쩌면 딸을 다시 만날 수도 있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형태야 어찌 되었든 우리의 기억은 같으니까.
막상 무너지고 보니 자빠지고 깨어진 잔해들도 그 나름대로 그 속에 질서가 있고 체계가 있음이 눈에 들어왔다. 폐허 속에서 피는 꽃이 있듯이 그 속에서도 살아가고 성장하며 또한 소멸하는 일련의 과정이 있다. 무너지고 무너져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 줄 알았는데 일그러졌으나마 온기는 사라지지 않은 세계, 딸도 우리보다 앞서 발견하고 살아가고 있으리라 생각하자 또다른 빛 하나가 나에게 다가왔다.
오늘도 아내와 나는 딸의 사진이 붙은 광고판과 전단지를 들고 집을 나선다.







**약력:2007년 〈전남일보〉 신춘문예. 2008년 MBC창작동화대상. 작품집 『마우스브리더』,

『황새』. 장편소설 『어질더질』 등. 현재 (사)한국작가회의경남지회장. 경남소설가협회장. 평사리문학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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