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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호/수필/오민석/자본의 뒤안길, 낙원동 블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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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752회 작성일 17-01-04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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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오민석 (문학평론가)




자본의 뒤안길, 낙원동 블루스



I.
   도시 공간은 보행자들의 ‘걸음’으로 의미를 축적한다. 행인들은 수많은 개별자들로서 다양한 입장과 취향과 이해관계의 액센트를 공간에 기록한다. 공간은 행인들이 보행을 그치지 않는 한 (아직) 완결되지 않은 텍스트이고, 영원히 완성되지 않는 텍스트이다. 행인들은 앞에 쓰여진 기록 위에 자신들의 강세accent를 더하고, 때로 더 이상 그 길 위에 머물지 않음으로써 부재의 공간을 만든다. 그 부재의 공간으로 다른 행인들이 들어오고, 개별자들 사이에 의도하지 않는 의미들이 포개진다. 때로 인접한 취향들이 동일한 공간에서 반복되고 축적됨으로써 공간은 다른 공간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코드code를 갖게 된다. 이 코드가 공간을 문화 텍스트로 읽게 만든다. 그리하여 공간은 다양성을 포함한 유사성의 반복된 메시지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완성되지 않는 ‘의미화 과정signification’이다.
   공간은 다양한 보행자들을 자신의 관습, 역사 아래로 포섭한다. 보행자들은 공간에 동화되거나 공간의 코드를 향유하며 때로 그것을 거부한다. 공간의 코드를 거부한 보행자는 그 공간 안으로 다시 들어가기를 꺼려하지만, 다른 공간의 다른 코드에 합류하면서 자신이 거부한 공간의 코드에 흠집을 낸다. 공간과 보행자 사이의 이 복잡하고도 긴장된 대화가 공간과 보행자들을 동시에 분절articulation시킨다. 그들은 서로 맞대면하면서 동화되고 이화異化된다.
공간은 또한 지도地圖적 상상력에 의한 전유專有를 거부한다. 지도는 행인들이 그 통로를 위반하는 순간, 무용지물이 된다. 보행자들은 정해진 루트를 따르지 않을 권리가 있고, 가던 길을 다시 돌아오거나 동일한 길도 다양한 방식으로 경험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뜻대로 속도를 조정(점유 시간의 다양한 배분)함으로써, 지도상 거리의 균질한 밀도를 파괴한다. 그들이 되돌아서는 지점은 지도에도 없는 막힌 길로 탄생된다. 그들은 횡단보도를 횡단하지 않거나, 지름길을 거부하고 가던 길을 반복해 걸음으로써 지도상의 길이를 확장하기도 한다. 이렇게 하여 보행자들은 이미 존재하는 길 위에 새로운 길을 쓰는 자들이다.


II.
   낙원동은 수도 서울의 한 복판에 있다. 원래 있던 동네 중의 하나인 원동園洞에 ‘낙원樂園’으로 지칭되던 탑골공원의 별칭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이름이다. 천만 명 이상의 인구를 가진 대도시 (혹은 국제도시) 서울의 심장부에 있는 낙원동은, 그러나 서울이라기보다는 서울의 그림자, 흐린 그림자다. 종로나 광화문, 명동 혹은 서소문 일대가 보여주는 거대도시의 위풍을 낙원동에선 찾아보기 힘들다. 자본과 소비와 권력의 투기장 같은 금융가도, 고급호텔도, 화려한 쇼 윈도우도, 고층 빌딩도, 거대한 관공서도 낙원동에선 찾아보기 힘들다. 낙원동은 60~70년대 서울의 과거를 흑백 필름처럼 고스란히 붙들고 있는가 하면, 거대 소비의 뒤안길로 밀려난 욕망들이 싼 값에 소비되는 곳이다. 이곳에선 3·1 만세운동의 발원지인 탑골공원과 오갈 데 없는 가난한 노인들의 쓸쓸한 술추렴과 성소수자들의 “프라이드” 행진이 공존한다.
낙원동엔 고층 건물이 없기 때문에 새의 눈으로 공간 전체를 조망panopticism할 수가 없다. 기껏해야 낙원상가 옥상이나 낙원아파트가 있지만 그것은 남쪽의 종로나 명동을 향해 있다. 한 눈으로 포획되지 않는 낙원동은 다양한 보행자들에 의해 다양한 서사들이 은밀하게 기록되는 공간이다.


블루스· 1
   늙은 보행자들이 무임승차권을 이용해 시내로 나온다. 자신들이 사는 곳에서 이들은 종종 잉여물로 취급된다. 입장료도 없이 들어갈 수 있는 대한민국 최초의 도심 공원에서 이들은 자신들과 유사한 보행자들을 만난다. 공원 안에서 잡담으로 시간을 보내지만, 이들의 담소는 아무 것도 이룩하지 못하므로 비수행적non-performative이다. 이들의 담화는 명령도, 약속도, 확언도 아니므로 ‘행위act’로 이어지지 않는 ‘스피치speech’이다. 거기에는 사건도, 비즈니스도, 계획도 부재하다. 오로지 잉여 시간의 지속적인 소비만이 있을 뿐이다.
   행위 없는 시간이 끝날 즈음이면 노인들은 공원 서쪽에 있는 출구로 나와 공원 북쪽 골목을 향한다. 일부는 직진해 낙원상가와 접해 있는 돼지국밥 골목으로 가거나 아니면 그 골목 모퉁이에서 단돈 이천 원에 우거지 국밥을 먹는다. 공원의 뒤쪽으로 돌아가도 선짓국이나 콩나물국밥, 순두부를 이천 원에 해결할 수 있다. 막걸리나 소주를 곁들여 반주를 해봐야 오천 원 이내이다. 음식점마다 혼자 앉아 식사를 하는 보행자들이 많다. 대한민국의 가난한 노인들이 후기 자본주의의 물가 시스템을 완전히 망가뜨려놓은 곳이 바로 이곳이다. 음식점들 사이로 여기 저기 이발소들이 보인다. 미장원이 아니고 70년대식 이발소들이다. 어느 이발소나 이발은 삼천오백 원, 염색은 오천 원 균일가다. 나도 몇 년간 이 이발소들을 애용한 단골이었다. 인사동에서 친구들을 만나기 전에 나는 이곳에서 이발과 염색을 하곤 했는데, 이발이 끝난 후 만 원짜리 지폐를 내고 잔돈을 받으려면 염치가 없어 그냥 내뺀 적도 있다. 한 여름엔 에어컨을 잘 틀지 않아 대기 중인 손님들이 “란닝구” 바람으로 앉아 있기 일쑤이다. 어느 해 여름 나도 내 순서를 기다리다가 육십 년대 후반 동네 이발소에서 그랬듯이 민소매 “란닝구” 바람으로 앉아있었다. 편했다.
식사를 마친 노인들은 낙원상가에 있는 “실버영화관”에 가서 흘러간 옛 영화의 주인공이 되거나, 그것도 아니면 다시 탑골공원으로 돌아와 행위 없는 스피치로 시간을 죽인다. 그들 사이로 세칭 “박카스 아줌마”들이 은밀하게 돌아다닌다. 여러 번 언론에 보도된 대로 이들은 생계형 성매매자들인데 대부분 나이가 많다. 50대에서 무려 70대에 이르는 이 여성들도 변두리 가난한 동네에서 용돈 몇 푼을 벌기 위해 이곳으로 몰려왔을 것이다. 거래가 성사되면 이들은 공원 뒤쪽의 낡은 여관으로 이동한다. 어떤 보도에 의하면 한 낮의  “대관료”가 오천 원, 몸값도 단돈 오천 원에서 만 원이 경우도 흔하다 한다. 공원의 늙은 보행자들 중 극히 일부가 이런 계약에 가담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발화가 행위로 이어지는 경험을 하면서 희열을 느낄 것이다.
   3·1 운동의 발원지였던 공원에서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의 함성은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늙은 보행자들이 가난의 힘으로 만들어놓은 공원 주변의 비非자본주의적 물가시스템을 다른 보행자들이 즐겨 향유한다. 생각해보라, 식사와 이발과 염색을 단 돈 만원에 해결할 수 있다. 골목 하나면 건너면 인사동이고 종로인데, 그곳에선 이런 호사를 절대 누릴 수 없다.



블루스·2
   지하철 종로3가역 3,4,5,6번 출구가 모여 있는 돈화문로 11길은 해마다 동성애자들의 “퀴어문화축제”가 열리는 곳이다. 지난해 크리스마스를 얼마 앞둔 이 거리에는 “게이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현수막이 동성애 운동단체에 의해 내걸렸다. 6번 출구 가까운 곳에 성적 소수자 운동의 총본산이라 할 수 있는 한 인권단체의 사무실이 있다. 낙원동엔 무지개 간판을 내세워 한눈에 봐도 동성애 바인 술집도 있고,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동성애자들이 주로 모이는 주점들이 여기 저기 흩어져 있다. 동성애자들은 이곳에서 세칭 “크루징(맘에 맞는 상대를 찾는 일)”을 하거나 그들만의 자유로운 ‘낙원’을 즐긴다.
   낙원동은 접근성이 좋은 도심에 있지만, 재개발의 흔적이 거의 없는 외진 공간이다. 그것은 마치 자본의 흐린 그늘 같다. 자본의 품 안에 있지만, 자본의 논리가 제대로 작동이 안 되는 곳, 규범과 권력과 자본에서 밀려난 보행자들의 거리, 그래서 돈이 없거나 성적 취향이 다르더라도 나름의 문화적 ‘연명’이 가능한 공간, 이것이 낙원동이다.
이곳에 자리를 튼 성소수자 인권단체의 웹사이트에 들어가 보면, 낙원동은 오래전부터 동성애 보행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탑골공원의 동쪽 골목에 있었던 파고다극장은 동성애자들을 위한 공간이 여의치 않았을 때, 그들 간의 은밀하고도 노골적인 만남의 장소로 이름을 날렸다. 게이들이 한 때 “P바”라고 불렀던 이곳은 뒤늦게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알게 된 게이들이 두근거리며 걸음을 옮겼던 곳이고, 멋모르고 영화를 보러 들어간 이성애자들을 성적 공포에 몰아넣었던 공간이기도 하다. 이성애자들은 혐오와 공포의 장소로, 동성애자들에겐 설레는 추억의 장소로 기억되는 파고다극장은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그 자리엔 현재 같은 이름의 고시원이 들어서 있다. 게이 보행자들은 사라진 “P바” 대신에 이제는 낙원동 일대에 다양한 동성애 공간들을 생산하며 그들만의 서사를 새로이 만들고 있다. 그 안에도 다양성과 유사성이 또한 공존할 것이다.



블루스·3
   정확히 저녁 여섯시 무렵이면 낙원동 중심가인 돈화문로에는 포장마차들이 줄줄이 들어선다. 평소에 2차선이던 이 거리의 남쪽 차선은 (지도상으로는 존재하지만) 이렇게 해서 갑자기 사라진다. 인사동이나 종로에서 1차를 마친 술꾼들이 이곳으로 꾸역꾸역 2차를 오는 이유는 이곳에서 먼 과거의 정지된 시간들을 만나기 때문이다. 시청자들이 최근 <응답하라 1988>이라는 드라마에 열광한 것은 ‘좋았던 옛날old good days’에 대한 노스탤지어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는 과거대로 문제가 있는 법이고 ‘좋았던 옛날’은 없다. 19세기 초반에 키츠J. Keats가 중세를 동경했던 것처럼, ‘좋았던 옛날’에 대한 모든 그리움에는 고통의 현재를 잊고 오역誤譯된 과거로부터 위안을 받으려는 정서적 ‘낭만주의’가 깔려 있다. 인사동, 종로, 광화문 같은 현재의 공간에서 낙원동이라는 과거의 공간으로 이동하는 보행자들은 이와 같은 낭만의 소유자들이 많다. 
자본과 물타기를 거부했거나 실패한 이 동네 포장마차들에서는 금연의 법령조차 잘 지켜지지 않는다. 포장마차라는 수상한 공간은 건물이면서 동시에 건물이 아니어서, 그 틈새의 자유를 애연가들이 즐기는 것이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들도 먼 과거(좋았던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담배냄새에 괘념치 않는다. 좁은 포장마차에서 밤이 이슥해지면 술꾼들은 고래고래 흘러간 뽕짝을 부르기도 하고, 더러는 낮은 목소리로 70~80년대의 민중가요를 읊조리기도 한다. 여름엔 길가에 간이 테이블과 의자를 내어놓은 채 술을 마시기도 하는데, 그럴 때마다 실패한 삼류 가수들이 (어떤 경우에는 엘비스 프레슬리 복장에) 통기타를 치며 나타나, 도저히 대박을 터뜨릴 수 없었던 자신들의 음반을 만원씩 팔러 다니기도 하는 곳. 골목엔 B급 포스트모던풍의 천박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러브호텔과 싸구려 여관들이 즐비한 곳, “대실 만원”, “숙박 3만원”의 글자가 분홍빛 하트 무늬에 이글거리는 곳. 이 욕망의 저렴한 배출구 건너편에 연도를 알 수 없이 오래된 한옥들이 다소곳이 숨겨져 있는 곳. 북촌 한옥마을처럼 위풍당당하지 않은, 가난한 ‘생활’의 더께가 덕지덕지 묻어있는 한옥들은 바로 이 포장마차 거리의 반대편 골목들에 낮은 어깨들을 마주한 채 숨어 있다.
   종로 쪽에서 인사동으로 올라가는 젊은 보행자들은 길 건너 탑골공원 담벼락에 줄지어 서 있는 천막 쪽으로 잠시 걸음을 옮기기도 한다. 이곳에서는 사주, 궁합, 타로 점을 봐주는데, 자신들의 불안한 미래를 들여다 본 후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인사동으로 다시 넘어간다. 그들은 아마도 인사동을 지나 북촌까지 가면서 “꼰대”들과는 다른 그들만의 의미를 거리에 새길 것이다.




III.
   지금까지 열거한 세 가지 ‘코드’ 외에도 낙원동을 구성하는 수많은 의미소意味素들이 있다. 낙원악기상가에는 위의 코드들과 무관한 소비자들이 전국에서 몰려온다. 지상의 모든 악기들이 이곳에 있고, 망가진 모든 악기들이 이곳에서 수선 가능하다. 낙원동에는 또한 여기 저기 국악강습소나 관악기 교습소들이 있어서 그 옛날 “딴따라”들이 향유했던 영화榮華의 잔설殘雪을 보여준다. 밤무대 가수들의 무대의상 맞춤집들도 있는데, 전시된 원색의 “반짝이” 의상들은 자본의 흐린 뒤안길인 낙원동의 문장紋章 같다.
임의의 보행자들이 낙원동 골목을 들락거린다. 다른 모든 공간들이 그렇듯이 낙원동은 낙원동이 아닌 다른 공간으로 줄줄이 열려있다. 낙원동 코드가 맞지 않으면, 보행자들은 수도 없이 열려 있는 미로로 빠져나가면 그만인 것이다. 그러나 유사한 의미소의 보유자들이 반복해서 낙원동을 찾아오면서 낙원동 코드가 생겨났다. 이 코드는 여전히 진행형이며 완성이 지연되고 있다. 개별자들은 이 코드를 향유하거나, 느끼지 못하거나, 아니면 그것에 저항한다. 그리하여 이 코드는 다양한 강도强度는 있으되 탈중심화된 관습decentered convention의 세계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부른 낙원동 블루스는 현재의 시간성에 포착된 ‘순간’의 공간 서사이다. 그것은 마치 사진과도 같아서 보행자들의 다양한 각도와 명도와 심리의 채도에 따라 수시로 변한다. 어디에도 ‘낙원’은 없고, 낙원적 상상력, 혹은 낙원학(유토피아학 utopistics, 임마뉴엘 월러스타인)만이 있을 뿐이다. 






**약력:1990년 월간 《한길문학》 으로 등단. 199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문학평론 당선. 시집 『기차는 오늘 밤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운 명륜여인숙』, 연구서 『정치적 비평의 미래를 위하여 』, 번역서 바스코 포파 시집 『절름발이 늑대에게 경의를』 등이 있음. 단국문학상 수상. ‘빈터’ 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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