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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호/계간평/백인덕/서정抒情의 근원根源과 심후深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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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평
백인덕 (시인·본지 주간)
서정抒情의 근원根源과 심후深厚
― 지난호 다시 읽기
1.
시적 순간을 빚어내는 모든 계기를 극단적으로 추상화해 보면, 내적 자극이 강하냐 아니면 외적 자극이 강하냐의 문제로 분류될 수 있다. 물론 외부의 작은 사건이 내면의 갈등을 건드려 말 그대로 폭발, 폭주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마저도 극단적인 추상화가 가능하다. 문제는 내계內界가 더 폭발 일보 직전인가, 외계外界의 자극들이 더 강렬한가, 이다. 물론 이것은 융의 정신구조 모형을 따른다. 인간의 사태와 사건이란 지극히 다양하기에 가끔은 무모한 분류가 필요하다.
표현론을 옹호하는 기반적 근거는 시란 결국 서정의 표출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반론을 제기하기에는 쉽지 않다. 살아있다는 것은 느낀다는 것이고, 느낌은 인식 이전에 반응을 요구하고, 그 반응은 우리의 뇌에 언어 이전의 경험을 축적한다. 문제는 언어가 개입하고, 표현하기 위해서,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소통 가능한 표현을 위해 우리는 우리의 언어 체계와 그 표상을 알아야만 한다.
이것은 새로운 시각은 요구한다. 내가 느낀 ‘무엇’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이 문제라는 생각이다. 더불어 그 방식은 언어 체계의 우월성이나 그 체계의 위력에 있지 않고, 사용자의 새로운 시각과 노력에 달렸음을 암시한다.
사족이 길었지만, 시를 형성하는 근원적 사건과 정서로 ‘어머니’를 빼놓을 수 없다. 사건이란 그 누구도 태어나지 않았다면 이 시간과 공간을 점유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말이고, 정서는 그 사건에 대한 감정적 반응을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나 자신일 뿐이라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그러므로 어머니는 고향보다, 아니 그 무엇보다 더 근원적인 작인作因이고 시의 영원한 제재, 아니 시인들의 영원한 영혼의 본향本鄕이라 해야 할 것이다.
아빠가 돈 벌러 나간 양지 바른 뜰
옹기종기 모여 앉아 쭉쟁이 밤껍질 꼭지에
싸리비 끊어다 끼워 수저 만들고
소루쟁이 풀 뜯어 진흙 물 풀어 김치 반찬
감자꽃 따다 물김치 만들고
조가비 밥그릇 국그릇 모래밥 가득 담아
돌상에 얹어놓고 아빠를 기다린다
―김을순, 「엄마놀이」 전문
시인의 기억은 아주 오래전으로 되돌아가 있다. ‘엄마/아빠’라는 어휘 자체가 유아어이므로 이 작품의 모티브가 유년의 한 때라는 것은 자명해진다. 그런데 시인은 직접적으로 엄마/아빠에 대한 기억을 회고하고 있지 않다. 그저, 어쩌면 자신이 되풀이 했을 ‘놀이’의 한 장면을 사실적으로 회상한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회상recall은 ‘현재적 필요’에 대한 응답이다. ‘엄마’가 그리운 것이 아니라 ‘엄마놀이’ 하던 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바람은 해석의 다양성을 낳는다. 뒤집어 말하면, 시적 형상화라는 측면에서 표현의 적확성을 획득하지 못했다는 말도 된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김을순 시인의 정서적 바람이 근원에 닿아 있다는 점이다. 오늘이 완벽한 사람은 시를 쓰지 않는다. 표현하지 않아도 이미지가 넘치는 사람들은 시를 쓰지 않는다. 내 결핍은 나를 구성하고, 개성적이게 하는 또 하나의 이유일 뿐이다.
양진기 시인은 철저하게 비유라는 시적 수법을 활용하여 자기 근원, 혹은 사람의 원형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햇볕에 탄 피부가 갈라졌다
다산의 유전자가 각인되어 있다
아이들이 있는 한 아무데도 가지 않는다
자식들을 높은 곳에 올리려고 안간힘이다
바람이 전하는 생존의 비법을
온몸으로 아이들에게 읽어주고 있다
밤에도 아이들의 기척에 푸른 귀를 쫑긋,
선잠을 잔다
저 많은 아이들을 어떻게 다 키우나
주렁주렁 매달린 무게에 허리가 휘었다
축 늘어진 젖까지 쪽쪽 빨려 주름이 깊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아이의 붉은 얼굴을
앙상한 손가락으로 쓰다듬는
감나무 엄마
―양진기, 「감나무 엄마」 전문
비유를 사용할 때 이점은 어떤 형태로든 ‘거리’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시인과 시적 대상이 적절한 거리에 놓였을 때, 그 ‘사이’는 단순한 그리움이나 회한 만이 아니라 반성적 성철과 깨달음까지도 가능하게 한다.
인용시의 경우, ‘감나무 엄마’라는 표제의 직접성으로 인해 해석이 제한된다. 그러나 ‘엄마’를 ‘감나무’로 치환했을 때, “아이들이 있는 한 아무데도 가지 않는다”거나 “주렁주렁 매달린 무게에 허리가 휘었다”라는 시적 진술과 묘사를 효과적으로 획득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시적 형상화는 제재에 있지 않고 언어적 수법에 있다.
몇 차례 언급한 바 있지만, 기억의 창고에 쌓여 있는 체험과 내용물이란 무의미하다. 그의 삶이 풍요로웠다고, 다채로웠다고 저 자신은 나발을 불어 댈 순 있지만, 타인이란 자기 귀에 길들여져 있으므로 한낱 지나가는 바람처럼 느낄 것이다.
시 쓰기가 자기만족을 떠나 공감을 향한 여정을 시작하고자 한다면, 최소한 작품 속에서 나는 얼마나 미약한 작인인가를 인정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 자리는 이방인일 수도 있고, 관찰자일 수도 있다.
살점 다 발린 조기는 항상 어머니 몫
가시에 머리만 달린 조기를 밥숟갈에 얹는다.
바다 속을 헤집듯 눈깔을 들여다보며 한 숟갈
조기의 먹잇감들을 꺼내어 먹듯 입을 벌려가며 몇 숟갈
비린내를 먹는지
조기의 생각을 먹는 것인지
대가리 속에 든 것들을 말끔히 말라먹는
어머니는 대단한 미식가다.
─남태식, 「대가리는 맛있다」 부분
납태식 시인은 어쩌면 수 없이 반복되었을지도 모르는 밥상의 풍경을 그리고 있다. 그런데 짐짓 제목은 ‘대가리는 맛있다’이다. 이는 반복되는 행위와 사건 이전의 어떤 행위에 시인이 집중하게 되었다는 의미의 시적 발화다. 사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살점 다 발린 조기는 항상 어머니의 몫”이라는 첫 행에서 화자의 심정적 위치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이것은 기억이 아니라 현재로 소급된 과거의 사건에 대한 시적 반응이다. 어휘는 중요하다. ‘엄마’와 ‘어머니’의 차이는 환경이나 발음 습관 이상의 중요성을 갖는다.
이 작품의 중요성은 여러 곳에서 드러난다. ‘대가리가 맛있다’라는 제목은 우리 문화의 끈질긴 습관에 대한 반어로도 읽히고, 반대로 시인의 세대가 부지불식간에 저지른 과오에 대한 성찰의 의미로도 읽힌다. 시인은 “비린내를 먹는지/조기의 생각을 먹는 것인지”에서 나름의 통찰에 한 발 다가서지만, 그 알맹이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 세대는 결코 조기 대가리를 먹지 않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런 사실에 대한 언급을 부끄러워하기 때문이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어머니는 근원이다. 모태란 언제나 돌아가고 싶은 황금시대이며, 우리는 그 꿈속에서 고향을 떠난다. 고향은 어머니의 제 일차적 상징 계열이다. 산과 들, 강과 나무와 집과 비밀의 장소란 원초적으로 어머니가 없었다면 의미적으로 환기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본향의 의미를 잃어버린 고향을 말할 때, 시인으로서의 그의 소명은 거의 막바지에 이른다. 인간은 유전자와 태어난 지형과 자라난 환경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는 숙명론, 좋게 말하면 자기 운명의 한계에 봉착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시는 자기 엄살을 일정 부분 포함한다.
2.
나는 욕망이라는 말은 가려 쓰려고 노력한다. 욕망desire/demand이란 어휘는 의식 차원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근원basis/substance도 그 사용에 있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표현에의 욕망’이라는 말들이 얼마나 많은 차원들을 모순적으로 그냥, 마구 뒤섞은 것인지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우물을 만났을 때, 우리는 어떤 자세를 취하는가? 나는 잘 모른다. 먼저 물빛을 보고 또한 돌을 던져 깊이를 헤어 볼 것이다. 그러나 텅 빈 우물이 아니라 물이 가득한 아니 샘솟는 어떤 우물이라면 돌을 던지거나 줄을 늘이는 행위는 모두 부질없어질 것이다. 다시 말해 없는 깊이를 재려는 행위는 다 자기 눈앞에 줄금 밖에 읽지 못한다. 깊이가 없는 우물이 있는가, 모든 존재가 그렇다, 시인들은 결국 자기가 빠져 죽을 우물을 탈출 없이 파는 존재들이다.
처서 지나 며칠 산책을 나서는데
풀여치 한 마리
뒤를 따라오며 우네
가을은
저토록 소리 내며 오는 걸까
아직은 더위가 귓밥에 붙었는데
소소한 갓난 숨결에
들리는 대로 귀가 순해지네
손가락 해는 뭇 생각이
도둑풀처럼 달라붙은 발걸음
천기 품은 무현금 따라
풀잎으로 돌아오네
―최서연, 「처서 며칠 지나」 전문
최서연 시인의 이 인용작품은 “들리는 대로 귀가 순해지네”라는 한 행으로 집중하면서 서정시에서 획득하기 어려운 한 시적 명제를 드러낸다. 다만, 앞뒤로 전개되는 이미지가 보다 구조적으로, 배치의 묘를 살렸으면 하는 바람이 든다. 그것은 동시에 낯익은 사물(오브제)의 재배치에 대한 시인의 과감한 선택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시적 형상화라는 측면에서 성공적이라 보인다.
길을 가다, 시는 이따금 옛 친구 부르듯 나를 불러 세운다 돌아보
는 우리는 뜨겁게 아프게 웃는다
―장순금, 「뜨겁게 아프게 웃는다」 부분
일반적으로 시에 대한 시를 ‘메타시’, 좀 더 확장하자면 ‘시작詩作’에 대한 시도 메타시라고 할 수 있다. 가령, 윤동주의 ‘서시’가 ‘시와 시작 태도’에 대한 한국 현대시의 가장 전범典範적인 메타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시에서 메타적 경향을 띄는 시가 고백적으로 흐르는 것은(이것은 옥타비오 파스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정치, 경제, 사회적 압력 만큼이나 이른 바 주류 시단의 이기심 때문이다. 그들은 미디어와 결합하지 못하면 시가 곧 죽을 것처럼, 아니 그 장르가 소멸할 것처럼 부실한 외연만 확대했다.
장순금 시인의 작품은 시의 서정성을 위해, 얼마나 기억이 깊고 또 넓어져야 하는 것을 다시 묻는다. “남루한 내일은 뜨겁게 끌어안고 세월이 가면 우리는 어디쯤 서 있을까”라는 질문, 아니 질문을 투기投企, 그로 인해 존재하는 방식을 잃은 시대, 세대가 시의 하늘을 뒤덮고 있다.
그러나, 숨이 막히는지 목이 마른지 모르는 이 상황에서도 산수유는 피고, 또 누군가는 앳된 사랑을 고백할 것이고, 아주 희미한 누군가는 그들을 노래하리라.
**약력:199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오래된 약』, 『단단함에 대하여』 외. 본지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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